372.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372.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율리안이 가프 용병단의 참전을 제안했다.
군무부에서는 일개 용병단이 대단한 역할을 하리라 기대하지 않았지만, 워낙 급박한 상황이라 멕 나이트 한 대라도 더 늘린다는 생각으로 가프 용병단을 네세베르에 투입하자는 제안을 수용했다.
그리고 곧바로 가프 마법 연구소에 가프 용병단 참전 요청서를 보냈다.
그에 맞춰 루산은 변경 8구역으로 떠났다.
이번 가프 용병단 원정에 관해 가라로슈에게 설명하고 부탁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루산은 떠나기 전에 바덴과 레오나를 보기 위해 집으로 갔다.
레오나는 어느새 방에서 기어 다니며 놀고 있었다.
낯선 남자의 등장에 깜짝 놀란 레오나가 재빨리 엄마에게 기어가며 소리를 질렀다.
“마마!”
아직은 옹알이 수준이지만,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 루산은 뿌듯함을 느꼈다.
“오! 아빠, 해 봐!”
루산이 다가가며 말하자 레오나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바덴 뒤로 후다닥 기어가 숨었다.
“마마-!”
바덴이 그런 레오나를 안아 들고 어르며 말했다.
“괜찮아. 아빠야, 아빠.”
“마-?”
“아빠.”
“마-!”
레오나가 엄마 품에 얼굴을 팍 묻었다.
루산은 레오나와 친해지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당장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산은 조심스럽게 레오나의 등을 쓰다듬으며 바덴에게 말했다.
“이번에 8구역으로 돌아갔다가 네세베르로 가게 됐어요.”
“아우로라 대륙의 네세베르 말씀이신가요? 네세베르 공략군의 그 네세베르?”
“맞아요.”
“그렇잖아도 근위대 병력이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루산은 바덴이 정부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상당 부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근위대의 네세베르 구원 작전은 최근에 결정된 비밀 작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군사 작전이라 해도 군인만 가는 것이 아니고 무기, 보급품, 지원 병력 등이 수송선을 마련해 이동하는 것이라 여러 분야의 인력이 동원되기 때문에 완전한 비밀이란 있을 수 없었다.
특히 바덴은 오베론 공작 체포 이후 동방군 보급 물자 공급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 근위대 파견 작전을 알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곳으로 가는 거예요. 가프 용병단을 데리고.”
“근위대가 남방군과 함께 간다는데 굳이······?”
용병단이 간다 한들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겠느냐는 의문이었다.
루산의 실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대규모 전쟁에서 한 사람의 무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루산은 엄마 품에 얼굴을 파묻고 있으면서 가끔 고개를 들어 자신을 쳐다보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면 다시 얼굴을 엄마 가슴에 파묻는 딸을 사랑스럽게 쳐다보고는 말했다.
“내가 가는 이유는 두 가지예요. 첫째는 네세베르를 지켜야 필센 제국이 망하지 않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가프 용병단에 대해 모르지만, 생각보다 훨씬 전력이 강할 거예요.”
사람들이 가프 용병단에 대해 모를 수밖에 없었다.
루산이 마음먹은 대로 파일럿을 동원하기 때문이다.
남방군 출신 반란 파일럿, 죄수 부대에서 복무하다 루산에게 구출된 구귀족파 반란 기사들, 부르사 왕국 포로 전사들, 이스타드 출신의 젊은 파일럿들······.
그 외에도 바이크, 시에나 같은 변경 8구역 파일럿들, 모리츠, 파비안 같은 전직 필센군 출신의 은퇴 파일럿들도 가프 용병단에 포함시킬 수 있었다.
모두 동원한다면 파일럿의 수가 300명이 훌쩍 넘는다.
그러나 지금은 멕 나이트 수가 크게 부족하여 모두 동원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가프 마법 연구소의 레오파드 생산 능력이 크게 향상되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멕 나이트 수를 충분히 늘릴 수 있을 것이다.
가라로슈를 만나러 가는 이유는 가프 용병단에 멕 나이트 충원 속도를 빠르게 올리는 방법을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 이유는······.”
루산은 잠시 이야기를 멈추었다.
그러자 레오나가 궁금한 표정으로 루산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루산이 눈을 맞추자 다시 얼른 고개를 돌렸다.
루산은 미소를 짓다 이내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율리안 님을 확실히 황제로 만들기 위해서죠.”
루산이 네세베르로 가는 것과 율리안을 황제로 만드는 것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는지 바덴은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루산은 이에 대해 더 설명하지 않았고 바덴도 더 묻지 않았다.
레오나가 아직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해도 아기가 듣기에 좋은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을 어른 두 사람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산이 말했다.
“아직까지 율리안 님은 확실히 마음을 정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주위에서 분위기를 조성해 줄 필요가 있어요.”
“대중적인 인지도와 인기가 필요하겠죠.”
“맞아요. 지금도 당신이 잘하고 있겠지만,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해요. 막심 황자에게 당하지 않으면서 세력도 키우고 인기도 얻고. 쉽지 않은 일이죠.”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군부를 당장 휘어잡는 것은 불가능해요.”
프리드리히 황제에게 충성해 온 군부가 그 아들들이 아닌 방계 황족에게 충성을 돌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경찰 먼저 잡을 필요가 있어요. 밤베르크 가문의 힘을 빌려 형사국장 그리마를 노바 경찰청장에 앉혀 볼까 했는데, 밤베르크 가문은 율리안 님과 너무 가까워 오히려 견제를 받을 가능성이 있어요. 당신이 해 볼 수 있겠어요?”
노바 내에서는 군대보다 경찰이 사람과 상황에 대한 장악력이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마가 노바 경찰청장이 된다면 율리안을 옹립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최근에 많은 실적을 올리고 큰 공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그리마는 그야말로 들판에서 피어난 잡초 같은 인물이라서 고위 귀족이나 관료들과 연줄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바덴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떻게든 해 볼게요.”
“그리고 스텐커 씨를 만날 시간은 없을 것 같아서 그런데 루트 오베론을 놓쳤어요. 그의 행방을 찾으라고 전해 줘요.”
“그럴게요. 근데 그가 그리 위협적일 것 같지는 않아요. 공작은 체포된 상태고, 큰아들은 그렇게 되었으니까요. 오베론 지방도 이미 장악된 상태고 그 가문의 재산도 빠르게 처분되고 있고······.”
“황제나 오베론 공작도 자기들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을 거예요.”
바덴은 루산의 말이 얼마나 무서운 뜻을 담고 있는지 깨닫고 흠칫했다.
후환이 될 만한 싹을 모두 제거한다는 말이 아닌가?
그리고 그제야 루산이 율리안을 기어이 옹립하려는 이유도 이해했다.
황제와 오베론 가문은 구귀족파 가문을 짓밟고 루산의 가문에 해를 끼쳤다.
그리고 그 일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들에게 되돌아왔다.
황제와 오베론 공작이 과연 그 하찮은 자들에게 당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겠는가?
그러나 루산은 황제와 오베론 공작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것이다.
율리안 황제라는 튼튼한 성을 세움으로써 자신을 보호할 뿐 아니라 혹시나 찾아내지 못한 잔당의 표적을 율리안으로 돌리려는 게 아닐까?
물론 바덴의 추측이 루산의 마음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루산은 율리안을 앞으로 내세워 대신 표적으로 삼으려는 목적은 없었다.
백성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함께 아파할 줄 아는 율리안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킨 이반, 프리드리히보다 황제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큰 틀에서는 루산의 의중을 이해하고 있었다.
“율리안 님의 존재감을 키우고 루트 오베론을 찾는 일은 반드시 해 낼 테니, 당신은 부디 몸을 조심하세요. 나와 레오나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바덴의 말에 루산은 그녀와 그녀의 품에 안겨 있는 아기를 동시에 껴안았다.
“마-!”
레오나가 엄마 품에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더는 겁에 질려 하지 않았다.
낯선 남자의 따뜻한 손길과 엄마의 친밀한 분위기에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기는 낯선 남자가 떠난 뒤에 슬픔과 걱정이 가득한 엄마의 얼굴을 보고 엄마를 위로하려는 듯 안아 주었다.
“마마!”
바덴이 그런 레오나를 꼭 껴안았다.
***
루산으로부터 황제의 사망과 아우로라 연합군의 대반격 소식을 들은 가라로슈는 무척 놀랐다.
가라로슈는 황제의 사망이 루산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굳이 알 필요도 없었고 묻는다고 솔직히 말해 주지도 않을 것이기에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공문에 눈길을 주다 루산에게 물었다.
“가프 용병단을 네세베르에 투입하고자 한다고요?”
“네.”
“기사님 생각이십니까?”
이 정도는 충분히 물을 수 있었다.
가프 용병단이 비록 루산이 만든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가프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이상 외부에서는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책임을 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맞습니다. 네세베르 공략군이 패한다면 그다음은 동방군이 포위되기 때문이죠. 동방군이 소멸한다면 필센 제국은 위태롭게 됩니다.”
“그야 그렇습니다만, 가프 용병단을 투입한다고 하여 네세베르 전선의 향배를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 역시 가프 용병단의 진정한 규모를 몰랐다.
“쉽지 않겠죠. 하지만, 가프 연구소에서 협조해 주신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어떤 협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가프 용병단에는 현재 멕 나이트 수가 많이 부족합니다. 이 부족한 수를 채워야 하는데 가프 연구소의 생산 능력이 크게 향상됐다 해도 한 달 안에 300대를 생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
당연히 그런 능력은 없었다.
멕 나이트를 한 달에 300대나 생산할 수 있는 마법 연구소는 아마도 아이언 워리어를 생산하는 물랭 마법 연구소 정도일 텐데, 그 연구소 역시 한 공장에서 그만한 수를 만들지는 못한다. 여러 공장에서 생산하는 대수를 합친 것이 그 정도일 것이다.
가라로슈가 놀란 것은 한 달 300대 생산 능력이 있는지가 아니라 가프 용병단에 필요한 멕 나이트가 300대나 되는가 싶어서였다.
루산이 말했다.
“네세베르 전선은 지난 6년 동안 치열한 공방이 오가던 곳으로 가프 용병단이 투입되어도 단기간에 영향을 미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러니 곧바로 300대를 마련할 필요는 없어요. 저는 일단 아라드 왕국에서 레오파드 50여 대를 빌릴 생각입니다. 가프 연구소에서는 우리가 빌린 물량을 아라드 왕국에 최대한 빨리 공급한다는 약속을 해 주세요.”
“음···, 알겠습니다.”
“그리고 수리 공장에 들어와 있는 레오파드들도 수리를 마치는 대로 최대한 아라드 변경으로 빼 주세요. 지금 당장 동방 전선으로 공급할 상황이 안 나올 겁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수리 공장으로 들어와 있는 아우로라 연합의 멕 나이트들도 아라드 변경으로 최대한 빼 주셨으면 합니다.”
아라드 변경에 남아 있던 아우로라 연합의 멕 나이트를 모두 부르사 왕국으로 팔아넘기는 그곳에 멕 나이트 수가 별로 없었다.
아라드 변경의 괴수 부산물 생산량은 가프 연구소의 수입과도 밀접한 관련을 지니기 때문에 가라로슈 역시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정부 요구 물량을 제외하고는 최대한 아라드 변경으로 돌려 보도록 하지요.”
“그리고 전에 말씀드렸던 게 있는데, 마나포를 멕 나이트가 들고 쏘는 방안 말입니다.”
“아. 네.”
“이번에 변경 파일럿들 데리고 부르가스에서 남방군과 싸울 때 상당한 파괴력을 보이더군요. 고가의 마나포와 마나 진동 화살을 1회용으로 쓴다는 것이 큰 낭비이기는 하지만, 멕 나이트 전투 능력이 떨어지는 파일럿도 적의 멕을 쓰러뜨릴 수 있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합니다. 전쟁 방식이 바뀔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가라로슈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루산의 말을 들었다.
“당장 자유자재로 마나포를 쏘는 멕 나이트를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일단 마나포 생산 마법 연구소를 인수하든 마나포를 대량 구입하든 저희 쪽에 넘겨주세요. 전쟁 판도를 확실히 바꿀 수 있습니다.”
전쟁 판도를 바꾼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야기였다.
가라로슈가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진정시킨 뒤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기사님. 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방식으로 싸우는 것은 굉장히 비용이 많이 듭니다. 마나 진동 화살을 1회용으로 쓰는 것은 그렇다 해도 마나포를 1회용으로 쓴다면 그 막대한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상당한 수입을 올리게 되었다 해도 사실 마나 연료로 인한 수입이지 레오파드 판매로 거둔 수입은 실상 얼마 되지 않습니다.”
레오파드 판매 대금을 정부에서 그때그때 현금으로 착착 지급하지는 않는다.
일부는 국채로 지급하고 나머지도 장기 분할로 지급한다.
그럼에도 가프 마법 연구소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 마나 부산물 생산량이 크게 늘고 그로 인한 매출이 급격이 올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루산이 가프 연구소에서 많은 금액을 빌렸다.
이로 인해 가프 연구소는 장래에 회수될 금액은 많았지만 당장 루산이 요구하는 무기를 공급할 만큼 충분한 자금력은 갖추고 있지 않았다.
루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피닉스 제철이 오베론 제철을 인수한 건 아십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조만간 필센 제국의 모든 철강 제품은 피닉스 제철에서 독점 공급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고슬라 그룹이 오베론 공단을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동방군에 공급하는 모든 보급품을 관리하는 동방 물산도 설립했죠. 사실 제가 빌렸던 자금은 이 두 회사에 투자한 것인데 조기 상환이 가능할 것입니다. 필요하면 이 두 회사에서 가프 연구소에 자금을 빌려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가라로슈는 루산과 이 두 회사 사이에 상당한 관계가 있으리라고 짐작하고 있었지만, 루산이 직접 그 막대한 자금을 두 회사에 투자했다고 말하자 깜짝 놀랐다.
장차 필센 제국의 철강 제품을 독점하게 될 피닉스 제철.
휴양 사업, 농업 사업, 식품 사업, 자동차 사업, 완구 사업, 설비 제조 사업, 보급품 공급 사업··· 수많은 계열사를 거느리며 급격히 성장하고 있는 고슬라 그룹.
이 두 회사에 대해 말하는 루산의 태도가 단순한 투자자 느낌이 아니라 의사 결정권을 가진 막후 지배자 같았기 때문이다.
‘거인!’
루산이 가프 연구소에 큰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일개 변경 기사가 아닌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각별하게 대우한 지는 오래되었으나 그가 새삼 무척 커 보였다.
‘이왕 여기까지 함께 왔으니 앞으로도 함께 갈 수밖에!’
가라로슈가 엄숙히 말했다.
“가프 마법 연구소의 명예 마법사인 기사님께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가라로슈 님.”
두 사람이 손을 굳게 맞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