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 그 고민은 그때 가서
375. 그 고민은 그때 가서
루산과 시에나는 밤베르크 백작이 내어 준 숙소에 묵게 되었다.
“대장님, 저것들이 대체 왜 저러죠?”
시에나가 건물 밖을 둘러싸고 있는 병사와 기사들을 훑어보며 이마를 찡그렸다.
무장을 한 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 마치 위험한 포로를 감시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원군으로 온 거 아니에요?”
루산이 찻잔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원군은 원군인데, 사령관 머리에 쥐가 나게 만든 원군이라 그리 반갑지만은 않을 거야.”
“······?”
시에나는 루산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눈을 껌벅였다.
그 모습을 본 루산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세베르 공략군 사령관인 밤베르크 백작은 율리안 님의 외숙이야. 어머니의 오빠지. 가문 자체가 상당히 이름 있는 가문일 뿐 아니라 능력도 대단한 사람이야. 30대의 나이에 수도 군단 사령관에 임명될 정도로 1차 대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니까 어느 정도인지 알겠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능력도 뛰어난, 재수 없는 사람이네요.”
“하하, 그렇지. 그 재능을 아낀 이반 황제가 사돈을 맺으려고 했다지 아마? 율리안 님의 어머니, 그러니까 밤베르크 백작의 여동생을 프리드리히 황제와 결혼시키려 했다고 해. 이미 밤베르크 백작과 프리드리히 황제는 친구 사이였으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그런데 율리안 님의 어머니가 방계 황족인 율리안 님의 아버지를 만나 결혼해 버리고 말았지.”
“흥미진진한 이야기네요. 아줌마들이 들으면 참 좋아하겠어요.”
아직 아줌마가 아닌 시에나도 눈을 빛내며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밤베르크 백작은 30대의 나이에 수도 군단 사령관 자리에 앉을 정도로 재능과 업적이 대단했고 황태자 깊은 친분이 있었으며 황제의 총애를 받던 사람이었는데, 여동생이 방계 황족과 인척이 되는 바람에 은퇴를 할 수밖에 없었어. 그 마음이 어땠을까? 세상에 대한 포부를 더 펴 보지도 못하고 젊은 나이에 은퇴를 한 천재의 마음 말이야. 최연소 필센 제국군 총사령관, 아니면 최연소 제국 재상이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여동생이 미웠겠네요.”
“글쎄, 그거야 모르겠지만 썩 좋지는 않았겠지. 어쨌든 그렇게 지내다 2차 대전쟁이 발발하면서 프리드리히 황제가 그를 네세베르 공략군 사령관으로 발탁했어. 2, 30년 만에 다시 세상에 나온 거야. 그리고 아우로라 연합의 대군이 결집해 있는 네세베르를 여러 방면군에서 차출된 혼종 부대를 이끌고 기어이 점령했지. 북방군 같은 대역전극을 벌인 것도 아니고 동방군처럼 웅장한 진격전을 펼친 것도 아니고 남방군처럼 화려하게 적을 쳐부순 것도 아니지만, 네세베르 공략군이 여기서 아우로라 연합군 대군을 묶어 두고 기어이 격파한 덕에 다른 방면군에 가해지는 압력이 크게 줄어든 거야. 친구인 프리드리히 황제의 기대에 충분히 부흥한 것이지.”
“아! 그렇군요.”
“프리드리히 황제는 황태자에게 전선 경험을 쌓게 하려고 다른 방면군이 아닌 네세베르 공략군에 보냈어. 그만큼 밤베르크 백작을 믿고 있었던 거야.”
루산의 이야기가 길어졌다.
지금은 갇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어차피 할 일도 없었다.
그리고 시에나는 지금까지 함께해 왔고 이번 일도 어차피 알게 될 일이어서 자세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굳이 네세베르까지 밤베르크 백작을 찾아온 이유는 필센 제국군을 구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야. 나는 그에게 제안을 했지. 율리안 님을 황제로 만들 생각이니 황태자를 노바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라고.”
“······!”
시에나가 깜짝 놀라 눈이 커다래졌다.
“왜 네세베르 공략군 병사와 기사들이 중무장을 한 채 우리를 감싸고 있는지 알겠지?”
루산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시에나는 웃음기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루산으로부터 율리안을 황제로 만들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이라 상당히 놀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기겁할 정도로 놀라지는 않았다.
그동안 루산이 한 일을 가장 많이 함께해 온 사람이 바로 바이크와 그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에나는 바이크와 다르게 루산이 바덴과 결혼해 딸 하나를 갖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았다.
남방군을 이끌던 바트 오베론과 프리드리히 황제의 동반 사망 작전도 알고 있었다.
어차피 필센 제국 사람도 아니고 루산에 의해 발탁되어 멕 나이트 파일럿이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었기에 이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애착도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뿌리 내린 변경 8구역이라는 땅과 그곳에서 함께 부대끼며 살아온 사람들에 대한 애착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복수를 넘어서서 황제를 만들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니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멕 나이트 파일럿으로서 어떤 무시무시한 괴수도 무찌르고 어떤 적군도 쓰러뜨리는 루산이 아닌 것 같아 이질감이 살짝 들려고 했다.
계략을 꾸미고 권력 싸움을 하는 루산은 자신이 아는 루산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당장은 거부감이 들기보다 루산이 너무나 큰일, 무척이나 위험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밤베르크 백작이 과연 그렇게 할까요?”
그렇게라는 말이 황태자를 죽이는 일인지 율리안을 황제로 옹립하는 일인지 분명하지 않았지만, 어느 쪽이든 루산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황태자가 없어져도 노바에는 다른 황자가 있고, 계승 순위도 율리안 님이 아주 가까운 편은 아니지 않아요? 게다가 밤베르크 백작은 황제와 친구 사이였다면서요? 조카를 황제에 앉히려고 친구 아들을 죽이는 일에 협조할까요?”
루산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나도 모르지.”
루산의 무책임한 답변에 시에나가 발끈했다.
“대장님이 모르시면 어떡해요? 잘못하면 여기서 죽을 수도 있는데.”
“내가 밤베르크 백작 본인이 아닌데 어떻게 알겠어? 다만 추측해 볼 뿐이야.”
“······?”
“황제와 친구였기 때문에 마음에 짐은 있겠지만, 황제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야. 현실적인 사람이라면 죽은 자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것보다 살아 있는 조카를 황제로 올리는 일 쪽으로 마음이 기울 거야. 물론 황제가 죽었다 하여 갑자기 자기 조카를 황제로 만들겠다는 생각이 바로 떠오르지는 않겠지. 누군가가 그 생각을 심어 주고, 가능하겠다는 판단이 들면, 시도해 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지.”
시에나는 루산의 말을 집중해 들었다.
자신의 생사와도 직결된 이야기라 집중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상황과 자신의 능력에 대한 점검도 해 볼 거야. 필센 본토에는 병력이 별로 없어. 동방군, 북방군, 네세베르 공략군 모두 아우로라 대륙으로 건너온 상태. 이때 네세베르 공략군이 주변의 루한 왕국군이나 시바스 왕국군을 물리친다면 아우로라 대륙 깊숙이 들어간 동방군이나 북방군보다 노바로 빠르게 귀환할 수가 있지.”
네세베르는 부르사와 인접한 지역이고 비교적 해안과 가까웠다.
“본토로 돌아간 뒤에도 자신의 능력 - 가문의 힘, 인맥, 군사력 면에서 우위에 있기 때문에 노바 정국을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능력 있는 사람은 원래 자신감이 넘치는 법이거든. 젊은 날 뜻을 펴지 못한 억울함도 풀고 말이야.”
루산이 밤베르크 백작을 염두에 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세상의 주목을 받던 천재가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행동할까?
“게다가 율리안 님은 엄연한 황족이야. 황태자, 노바에 있는 막심 황자 다음에는 촌수와 별로 상관이 없어. 인망, 능력, 정치력 같은 것이 중요하지.”
젊은 조카, 그것도 변경 통치자라는 한미한 자리에 있던 조카이니 밤베르크 백작은 자신이 도울 일이 많다고 느낄 것이다.
“어차피 오베론 공작이 이미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거사를 치르는 데 대한 부담감이나 거부감은 조금 줄어들었을 테고, 오베론 공작과 달리 자신이 황제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황족인 조카를 받드는 것이라 성공 가능성도 높다고 생각할 거야.”
현재의 황가는 인기가 높았다.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일은 거부감이 클 테지만, 율리안은 황제와 성이 똑같다.
“네 말처럼 많은 것들이 마음에 걸리겠지만, 밤베르크 백작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네세베르 공략군이야. 루한 왕국과 시바스 왕국 그리고 그 주변 나라들의 군대를 격파할 수만 있다면 그는 기꺼이 자신의 조카를 황제로 만드는 일에 나설 거야.”
시에나는 루산이 이번 일을 즉흥적으로 실행한 것이 아니라 무척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산의 설명을 한참 동안 곱씹어 보던 그녀가 질문을 던졌다.
“동방군 병력이 훨씬 크잖아요. 두렵지는 않을까요? 동방군 사령관도 보통 사람이 아닐 텐데······.”
“황가가 바뀌는 반역이 아니라서 동방군이 개입할 여지는 없을걸. 원래 동방군은 최전선에서 적을 상대해 온, 철저한 야전 부대이고 동방군 사령관 역시 뼛속까지 군인이거든. 설사 딴마음을 품었다 해도 워낙 아우로라 대륙 깊숙이 들어간 데다 점령지 통치에 많은 병력을 할애해야 해서 노바로 진군할 여력은 없어.”
시에나는 필센 제국군의 편제와 역할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루산의 설명을 듣고 이 부분은 넘어갔다.
그런데 그다음 질문은 무척 날카로웠다.
“대장님의 계획이 성공해서 밤베르크 가문이 율리안 님을 황제로 옹립하기 위해 움직였다고 쳐요. 율리안 님은 고작 변경 통치자였잖아요. 변경에서는 제일 높은 사람이지만 제국의 황제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으니까. 주변에 사람이라고는 변경 본부의 부장들이나 변경 파일럿들이 고작이니 황제가 되면 밤베르크 백작이 자기 사람들로 황제 주변을 채우게 되지 않겠어요? 그러면 대장님은 어떻게 되는 거죠?”
“응?”
“아니 아이디어를 내고 힘을 쓴 건 대장님인데 밤베르크 백작이 홀라당 털어 가는 거 아니냐고요? 남 좋은 일만 시키고 쫓겨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시에나 말은 표현이 다소 투박했지만, 루산은 그 뜻을 정확히 이해했다.
그 역시 이 점에 대해 생각해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산 또한 자신이 누구에게도 뒤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망한 가문을 다시 일으키고 일을 지금까지 끌고 왔다.
그리고 지금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내부 다툼을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율리안을 황제로 옹립할 때까지 넘어야 할 산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고민은 그때 가서 하자.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모르는 일로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는 없지. 밤베르크 백작이 우리를 죽이려 할지도 모르니 지금은 쉴 수 있을 때 푹 쉬고 여기서 벗어날 방법을 고민하는 것으로 충분해.”
“어휴-!”
시에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루산과 함께해 온 시간이 이제 6년이 훌쩍 넘었다.
루산과 함께하는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 덕에 심심하지는 않았다.
시에나는 정말로 포위 병력을 뚫고 자신들이 타고 온 레오파드에 올라타 탈출할 방법을 고민했다.
루산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도 자신은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창밖으로 보이는 네세베르 공략군 감시병들과 기사들의 수와 무장을 확인하고, 레오파드가 있는 주기장까지의 이동 거리와 경로를 떠올려 보았다.
***
근위대가 남방군과 함께 부르가스 방면에서 다가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밤베르크 백작이 루산을 자신의 집무실로 데려오도록 했다.
이번에는 참모들뿐 아니라 경호 기사들까지 모두 물렸다.
밤베르크 백작이 잠을 잘 못자 초췌한 표정으로 말했다.
“근위대가 온다. 북서쪽 포위망은 아직 완성이 덜 된 상태라 아우로라 연합군 병력이 많지 않아. 충분히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그렇습니까?”
밤베르크 백작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대가 전에 말한 대로 능력이 있는 사람인지 확인해 봐야겠다. 말만 번지르르한 자에게 놀아날 수는 없지 않겠나?”
루산은 밤베르크 백작을 이해했다.
거사를 함께하자고 권유한 사람이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지 확인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무능하고 사려 깊지 못한 자가 아니겠는가.
밤베르크 백작이 그런 사람이었으면 실망했을 것이다.
“어떻게 확인하시겠습니까?”
“브르노에 있는 멕 나이트 생산 단지를 파괴하라.”
브르노.
루한 왕국의 중요한 공업 단지가 있는 도시로 루한 왕국뿐 아니라 인근 나라들에까지 멕 나이트를 공급하고 있는 중요 거점이었다.
문제는 루한 왕국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산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죠.”
성공하면 계획에 함께하겠느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밤베르크 백작도 굳이 조건을 걸거나 약속의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루산은 시에나와 함께 레오파드를 타고 네세베르 공략군 사령부를 떠났다.
전투 거미 1호의 통신이 들려왔다.
[···대장님! 들리십니까?]
[들립니다.]
[걱정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하고······.]
[다행히 해결됐습니다.]
[대장님, 아라드 왕국에서 레오파드 부대가 도착했습니다.]
[잘됐군요.]
[그런데 우리가 상륙했던 지점에 루한 왕국군 기동 부대가 출동해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합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가죠.]
[예!]
레오파드 두 대와 전투 거미 1호가 산에서 길을 찾으며 루한 왕국으로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