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6. 혁명의 불꽃이다
376. 혁명의 불꽃이다
루한 왕국 기동 부대는 멕 나이트 30여 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어촌 마을이 대규모 멕 나이트 부대가 상륙하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라서 적의 멕 나이트가 상륙했다는 보고를 듣고 조사 차원에서 나온 기동 전대 병력이었다.
그런데 마침 그때 아라드 왕국 룬드 항을 출발한 가프 용병단 병력이 도착해 상륙을 시도하고 있었으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어촌 밖으로 나가는 길을 막은 뒤 본대에 원군을 요청했다.
바트 오베론과 황제를 처치한 뒤 부르사 왕국으로 돌아가 멕 나이트를 반납하고 아라드 왕국으로 복귀하다 항구에서 루산의 명령을 접하고 곧바로 이곳으로 온 미켈 슐츠 일행은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항만 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는 곳이 아니라서 다시 수송선에 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이 어촌 마을에서 적과 싸울 수도 없었다.
멕 나이트 수가 부족한 상황에서 한 대라도 손상을 입지 않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미켈 슐츠가 고심하고 있을 때 전투 거미 2호에서 통신을 보내왔다.
[대장님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오! 그래? 이곳 상황은 알고 계신가? 뭐라고 하시던가?]
[앞뒤에서 포위해서 무력화시키겠답니다.]
미켈은 루산의 계획을 금방 알아챘다.
어촌 마을로 들어오는 길목을 적이 차단했을 때는 이쪽 레오파드 50대가 고립된 상황이었지만, 루산이 적의 뒤에서 나타나면 이번에는 적이 양쪽에서 포위되는 형국이 된 것이다.
루산 쪽의 멕 나이트는 두 대뿐이라 제대로 된 포위망이 완성되었다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으나 루산과 시에나의 실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멕 나이트 또한 레오파드 슈퍼 계열로 무척 강력했다.
게다가 필요하면 마나포를 발사할 수 있는 전투 거미 1호와 2호가 산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눈 역할을 해 주었기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알았다. 우리는 적과 싸워 주지 않고 방패 벽을 쌓고 대치만 하겠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레오파드 50대는 튼튼하게 밀집하여 적이 막고 있는 길목으로 나아갔다.
긴장한 루한 왕국 멕 나이트들이 방패 방진을 형성한 채 맞섰으나 미켈은 싸워 주지 않고 힘만 뺐다.
잠시 후 적진이 어지러워졌다.
루산이 시에나와 함께 뒤에서 나타난 것이다.
[오셨군요!]
[슐츠 경, 잘 왔어요! 상황에 따라 알아서 대처하세요!]
루산이 반갑게 말하며 003으로 적의 뒤를 과감하게 찔렀다.
미켈 슐츠에게 세세한 지시를 할 필요는 없었다.
루한 군의 반응을 보고 최선의 명령을 내릴 테니까.
003과 002는 루한 군의 배후를 찔렀다 빠지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루한 군 멕 나이트는 팔이 잘리거나 다리를 찔렸고, 화가 난 루한 군 파일럿들이 공격하려 하자 뒤로 빠져 버렸다.
레오파드의 속도를 아우로라 연합의 멕 나이트는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멀리 쫓아가자니 정면이 뚫릴 것이 걱정되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전멸할 것만 같았다.
[정면 방비를 튼튼히 한 채 뒤로 물러난다!]
결국 전대장은 후퇴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 속도는 빠를 수가 없었다.
미켈이 레오파드 50대를 밀착시켜 맞대듯이 따라왔기 때문이다.
후퇴 속도를 높인다면 그렇잖아도 멕 나이트가 더 많은 적에 의해 짓밟힐 것 같았다.
그렇게 루한 군 기동 전대가 천천히 물러날 때 루산과 시에나가 계속해서 괴롭혔다.
멕 나이트 피해가 누적되자 루한 군 기동 전대장은 견딜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전멸을 각오하고 적진에 몸을 던지려 하던 그때, 루산이 외부 통신기로 말했다.
- 항복하면 살려 주겠다.
루한 군 기동 전대장이 코웃음을 쳤다.
- 필센 놈들 말 따위를 믿을 것 같으냐! 비겁하게 치고 빠지기나 하지 말고 덤벼라!
- 내가 이기면 너희를 살려 줘도 되겠나?
-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루산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루한 군 파일럿만이 아니었다.
가프 용병단 파일럿들도 이해할 수 없었다.
[놈들을 왜 살려 보낸다는 겁니까?]
루산과 함께 여러 작전을 함께해 왔던 시에나가 그의 의도를 짐작하고 대신 대답해 주었다.
[우리는 파일럿은 많은데 멕이 부족해요. 이번 작전은 멕이 많이 필요하거든요.]
[아!]
그때 루산이 다시 말했다.
- 너와 내가 일대일로 싸우기로 하자. 내가 이기면 모두 항복하고 멕에서 내려 도망쳐라.
포로로 삼지도 않겠다는 말에 루한 군 파일럿들은 깜짝 놀랐다.
- 흥! 맨몸인 우리를 밟아 죽이겠다는 거냐?
- 못 믿겠으면 멕 나이트 한 대는 보내 주겠다. 파일럿들을 어깨에 얹든 손바닥에 올리든 데리고 달아나라.
그렇게까지 말하자 더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이대로는 전멸을 당할 상황, 대장이라도 죽이고 죽을 생각으로 루한 군 전대장이 나섰다.
루한에서 생산한 헤비 스틸이 육중한 몸집으로 돌격해 왔다.
넓고 단단한 방패를 앞세워 충돌해 오기 직전, 003이 간발의 차이로 왼쪽으로 움직여 공격을 피한 뒤 마나 진동 대검으로 루한 군 전대장이 타고 있는 헤비 스틸의 오른쪽 손목을 베어 버렸다.
쓰릉!
마나 진동 대검을 쥔 강철 팔이 바닥에 쿵 떨어졌다.
번개 같은 솜씨에 더 덤빌 엄두도 나지 않았다.
- 가라!
정적이 흘렀다.
- 마음 바뀌기 전에!
003이 마나 진동 대검을 빛으로 물들이며 높이 치켜들자 전대장이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 멕 나이트에서 이탈해!
살아남은 루한 군 기동 전대 파일럿들이 멕 나이트에서 내려 시동 열쇠를 바닥에 건네고 달아났다.
살려 준다는 말이 여전히 믿어지지 않아 죽어라 달렸다.
루산은 쫓지 않고 가프 용병단원들에게 말했다.
- 시간이 없으니 가면서 얘기합시다. 슐츠 경, 획득한 멕에 파일럿들 태우고 멕이 없는 파일럿들은 어깨에 싣고 이동합시다.
- 알겠습니다, 대장님!
미켈 슐츠가 실력 순으로 멕 나이트를 배정했다.
가프 용병단의 멕 나이트가 52대에서 65대로 늘어났다.
루산은 다음에 도착할 가프 용병단 병력에 목적지와 임무를 알려 주도록 하기 위해 일부 파일럿을 남겨 두고 나머지 병력을 모두 이끌고 내륙으로 떠났다.
멕 나이트마다 멕 나이트 없는 파일럿들이 어깨에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
겨울의 노바는 무척 쌀쌀했다.
그것도 새벽의 공기는 코끝을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사라는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아무리 머릿속으로 계속 연습을 하고 끊임없이 각오를 다졌다고 해도 직접 실행하려니 가슴이 쿵쾅거려 추위를 느낄 새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여성 동지들과 함께 두툼한 외투의 깃을 꽁꽁 싸맨 채 커다란 공장의 담벼락 옆을 지나갔다.
마나포를 제작하는 리모주 마법 연구소의 생산 공장이었다.
2차 대전쟁 초기에는 이 공장의 경비가 그리 삼엄하지 않았다. 명중률이 낮고 가격이 매우 높은 마나포는 그리 인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트 오베론이 지휘하는 남방군 1군단이 이동식 마나포 부대로 아라드 왕국에서 아우로라 연합군을 크게 격파하면서 마나포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 후 북부 전선에서 굴다크 공작이 마나포 부대를 운용하여 필센 제국의 북방군을 격파하자 필센 정부는 마나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대량으로 마나포를 공급하도록 명령을 내리면서 한동안 명맥만 유지하던 리모주 마법 연구소의 마나포 생산 공장이 활기차게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수도 군단 병력이 멕 나이트까지 동원해 이 공장을 경비했다.
그러다 황궁 점거 사건이 터지고, 오베론 공작의 반란을 진압하고, 황제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고, 근위대를 동방으로 보내기로 하면서 멕 나이트가 부족해진 필센 정부는 당장 사용하지 않고 있는 멕 나이트를 싹싹 긁어모아 근위대를 무장시켰다.
그래서 현재 이 공장은 멕 나이트 없이 병사들만 경비를 서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의 검거 작전에서 벗어난 행동하는 청년 그룹의 학생들은 제철 노조, 하역 노조 등 강성 투쟁 그룹 동지들과 함께 리모주 마법 연구소의 마나포 생산 공장을 점거해 마나포로 무장하고 혁명을 일으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오베론 공작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정보를 입수할 때만 해도 황제와 오베론 공작 사이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들어 주어 노동자와 백성들의 권리 확대를 얻어내자는 주장이 힘을 얻기도 했으나 황제가 사망하고 반란을 일으킨 남방군도 오베론 공작의 아들과 함께 박살이 났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투쟁 그룹의 목소리가 더욱 강경하게 변했다.
“황제도 죽고 오베론 공작 세력도 무너졌다. 아우로라 대륙으로 건너간 군대는 돌아오기 어렵다. 근위대는 사라졌고 수도 군단 또한 많은 병력을 아우로라 대륙으로 파견한 바람에 남아 있는 병력이 얼마 되지 않는다. 이제 황제와 귀족들이 전횡을 일삼는 통치 체제를 무너뜨리고 노동자와 백성들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 때가 된 것이다!”
필센 제국 안팎으로 혁명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이었다.
얼만 남지 않았다 해도 수도 군단의 멕 나이트가 100대 이상 있었지만 노바 곳곳에 흩어져 있었고, 노동자와 백성들이 단결하기만 하면 마나포를 든 멕 워커로 충분히 처리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황태자가 돌아와 비어 있는 황좌를 채우기 전에 혁명을 성공시켜야 한다!”
동부 공업 지구 사태 이후 검문과 단속, 수색과 검거, 고문과 처벌의 두려움 속에서 보낸 지난 3년의 시간은 투쟁에 뛰어든 노동자와 학생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더욱 강화시켜 주는 연단의 시간이었다.
그동안 열심히 모은 동지들을 조직화하고 계획을 수립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거사 당일이 된 것이다.
멕 나이트를 가져간 대신 수도 군단은 멕 워커를 수도 군단 멕 나이트와 똑같은 색으로 도색하여 경비에 투입했다.
멕 워커라지만 파일럿이 전투 훈련을 받은 수도 군단의 파일럿이었고 마나 진동 무기를 들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가 탑승한 멕 워커가 상대하기는 어려웠다.
무장 멕 워커는 두 대.
주로 공장 정문을 지키고 있으면서 가끔 한 대가 공장을 빙 돌지만, 새벽 이 시간에는 늘 공장 정문 안쪽에 서 있다는 것을 여러 날 관찰을 통해 알고 있었다.
사라는 다른 여성 동지들과 함께 마나포 공장 정문 앞을 지나갔다.
멕 워커 앞 화톳불 옆에서 꾸벅꾸벅 졸던 수도 군단 경비병들이 철창으로 된 정문 안에서 발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일어났지만, 지나가는 여자들을 보고 안도했다.
늘 이 시간에 지나가던, 다른 공장에 출근하는 여공들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 사라가 외투를 벗어던지며 소리쳤다.
“지금이야!”
그 소리를 신호로 다른 여성 동지들도 몸을 감싼 외투를 젖혔다.
두 손에 심지가 달린 유리병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병 안에는 어떤 액체가 출렁출렁했다.
화염병 대신 성냥을 들고 있던 여자가 재빨리 성냥을 켜 심지에 불을 붙였다.
사라는 심지에 붙이 붙은 화염병을 잠시 빙빙 돌렸다.
경악한 병사들이 소리를 지르고, 파일럿으로 보이는 군인 두 명이 정문 경비소에서 자다가 튀어나오는 모습이 무척 느리게 보였다.
‘혁명의 불꽃이다! 비켜라, 병사들아! 너희는 우리의 적이 아니야! 하지만, 방해한다면 어쩔 수 없이 적과 함께 불타리라!’
사라가 힘차게 화염병을 던졌다.
이어서 다른 여성 동지들도 화염병을 던졌다.
빙빙 돌며 날아가는 화염병이 쇠창살로 된 정문 안에 떨어지며 깨졌다.
불이 확 퍼지고, 수도 군단의 군용 멕 워커가 불길에 휩싸였다.
철로 된 멕 워커가 당장 타오르거나 녹을 리 없지만, 불길 때문에 파일럿들이 올라타지 못했다.
“저것들 잡아!”
경비병들이 정문을 여는 데 시간이 걸리자 작은 문을 열고 달려 나오고, 사라와 여성 동지들은 왔던 길로 달아났다.
그러나 병사들의 달리기가 여자들보다 더 빨랐다.
곧 잡히기 직전, 모퉁이에서 쿵쿵 소리가 들렸다.
숨어 있던 혁명 동지들의 멕 워커가 솟아오른 불길을 보고 움직인 것이다.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 달아나고, 멕 워커 역시 사라와 여성 동지들을 지나 달려갔다.
병사들이 불길을 잡아 수도 군단 멕 워커가 움직이기 전에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노동자들이 탑승한 멕 워커들은 리모주 마법 연구소의 마나포 생산 공장 정문을 과격하게 밀고 들어갔다.
쇠창살이 뜯어지고 넘어지고, 멕 워커 발에 차인 화톳불이 확 퍼졌다.
1월의 마지막 날 새벽, 혁명 그룹 학생과 노동자들이 마나포 공장을 습격해 무장했다.
멕 워커를 이용해 마나포를 발사하는 남방군 전술에서 배운 것이었다.
노바가 발칵 뒤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