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 용서하자는 말이 아니다
380. 용서하자는 말이 아니다
가프 용병단은 루니 백작이 이끄는 기동 군단을 격파한 뒤 목적지인 브르노까지 빠르게 나아갔다.
중간중간 루한 왕국의 영주들이 숨겨둔 멕 나이트를 꺼내 저항하기도 했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 구형 멕 나이트들은 현재 멕 나이트 없는 가프 용병단 파일럿들의 새로운 기체가 되거나 고철이 될 뿐이었다.
마침내 루한 왕국이 자랑하는 최대 공업 단지가 있는 브르노에 도착했을 때 가프 용병단을 막을 병력이 없었다.
원래 브르노 경비대에 멕 나이트 10여 대가 있었지만, 공연히 아까운 기체를 잃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물러난 것이다.
전선을 지키고 있던 부대들이 소탕을 위해 달려오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은 상황.
가프 용병단이 공업 단지를 짓밟을 시간은 충분했다.
미켈이 물었다.
[시작할까요?]
그러나 루산은 허락하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네? 하지만, 밤베르크 백작이 요구한 것은······.]
브르노에 있는 멕 나이트 생산 단지를 파괴하라는 것이었다.
[그야 이 전쟁이 더 오래갈 것이라고 생각해 루한 왕국과 인근 아우로라 연합국들의 전쟁 수행 능력을 떨어뜨리려고 생산 시설을 부수라고 한 거죠. 우리 실력도 확인할 겸······. 우리 쪽 군대가 금방 승리를 거두어 이 생산 시설을 필센 제국이 사용할 수 있다면 부술 필요가 없지 않겠어요?]
[그야··· 그렇지요.]
[우리를 잡으려고 전선에서 달려오는 기동 부대 한두 개만 제압하면 루한 왕국은 버티기 어려울 겁니다.]
시바스 왕국이나 다른 아우로라 연합국 군대는 루한 왕국이 이렇게 갑자기 전선을 포기하고 물러나는 상황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루한 왕국이 작은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연합국 군대가 대처하는 데 시간이 걸릴 테고 그때 밤베르크 백작이 루한을 무너뜨리면 네세베르 방면군은 아우로라 대륙 남쪽을 평정할 거예요. 그러니 굳이 공단을 파괴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알겠습니다, 대장님!]
루산의 결정으로 루한 왕국뿐 아니라 아우로라 대륙 남서부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공업 단지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어쨌든 가프 용병단은 전선을 굳건히 지키고 있던 루한 왕국군이 전선을 포기하고 물러나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더욱 확실하게 이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네세베르 공략군이 루한 군 주력 부대를 쉽게 무너뜨릴 수 있도록 괴롭혀 줄 필요가 있었다.
[아우로라 대륙에서 상당히 큰 멕 나이트 생산 단지라고 하니 완성된 기체들도 있을 테고, 수리 공장에 들어온 기체들도 있겠죠? 그것들을 찾아서 기체가 없는 파일럿들에게 배정하세요.]
[알겠습니다!]
가프 용병단은 브르노에서 40여 대의 멕 나이트를 추가로 획득했다.
좀 더 기다리면 수리 중인 기체를 더 획득할 수 있겠지만, 몇 대 더 획득할 기회를 포기하고 다시 북서쪽으로 이동해 다가오는 루한 왕국 주력 부대를 괴롭히기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로 했다.
그러나 루산은 빠지기로 했다.
굳이 자신이 여기에 남아 있지 않아도 루한 왕국군이 전선을 포기하고 물러나게 만든 것으로 네세베르 공략군이 승리하리라 본 것이다.
후방 교란 작전도 미켈이 충분히 잘 수행하리라 생각했다.
그는 미켈에게 당부했다.
“우리 역할은 루한 군을 괴롭히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굳이 피해를 볼 필요가 없어요. 다수의 적은 피하고 소수의 적은 섬멸하면서 가능하다면 멕 나이트를 많이 노획하세요.”
“그렇게 하지요.”
루산은 이 땅에 온 목적 또한 잊지 않았다.
“밤베르크 백작이 약속을 지키리라 생각하지만, 앞일은 모르는 것이죠. 만약 황태자 처리에 실패한다면 그 일을 맡아 줘요.”
미켈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루산은 시에나와 함께 떠났다.
전투 거미 1호가 그들이 상륙했던 작은 어촌 마을로 데려다 주었다.
그곳에서 기다리자 아라드 왕국 룬드 항을 출발한 또 다른 가프 용병단 파일럿들이 새로운 레오파드를 타고 도착했다.
전투 거미 1호가 새로 도착한 병력을 이끌고 떠나고, 루산은 그들을 태워다 준 수송선을 타고 아라드 왕국으로 떠났다.
뱃머리에서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고 있는 루산에게 시에나가 물었다.
“결과를 안 보고 돌아가도 되는 거예요?”
“물론 확실하게 보고 가는 게 마음이 편하긴 하지.”
“그런데요?”
“이번에 처리하지 못 해도 다음 기회는 있어.”
루산은 황태자가 무사히 귀국해 다음 황제가 되는 것, 또는 황태자가 제거되고 막심 황자가 황위에 오르는 것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럴 경우에는 변경으로 돌아가 굳게 지키고 율리안의 인지도를 점점 높이며 다른 기회를 엿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율리안 님은 한 분뿐이지. 그분 옆을 오랫동안 비우기가 어렵단 말이야.”
자신의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율리안의 존재.
다른 계획들이 모두 실패하더라도 율리안은 무사해야 했다.
그런데 현재 노바에는 율리안을 지켜줄 사람, 율리안과 함께 앞일을 의논할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막심이 율리안을 전혀 견제하지 않고 오히려 의지하고 있다고는 해도 사람 마음이 언제 바뀔지 모른다.
율리안의 인기와 인지도를 높이는 작업을 조심스럽게 수행하고 있다지만, 어느 날 갑자기 막심이 율리안에 대한 기사를 읽고 기분이 상해 마음이 홱 돌아설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서둘러 돌아가려는 것이었다.
“혼자서 다 하려고 하시니까 이렇게 바쁜 게 아니겠어요?”
시에나의 말에 정곡을 찔린 루산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긴 해. 그런데 이걸 누구랑 함께 상의하겠어?”
율리안을 황제로 앉히겠다는 것은 말하자면 반란 계획이었다.
섣불리 발설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필센 제국에서 제법 힘이 있는 귀족이나 장군들과 평소 교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율리안이 적극적으로 황위를 꿈꾸는 것도 아니어서 더더욱 혼자 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라도 밤베르크 백작이 함께 나서 준다면 조금은 내가 할 일이 줄어들겠지.”
시에나는 밤베르크 백작이 본격적으로 율리안 옆에 붙으면 루산이 신경 쓸 일이 더욱 늘어나리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루산도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밤베르크 백작이 합류하면 율리안을 황제로 만든다는 어려운 과제를 나눠서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노바에 별일은 없겠죠?”
“···없어야겠지.”
그러나 엄청난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동부 공업 지구를 둘러싸고 군데군데 성채가 높이 솟아 있었다.
혁명군과 마찬가지로 수도 군단에서도 마나 진동 화살을 막기 위해 지은 방어벽이었다.
그런데 그 방어벽 뒤로 엄청나게 많은 멕 나이트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동부 공업 지구를 완전히 에워쌀 만큼이나 많은, 노바 시 안에서 전에 경험하지 못한 수였다.
바로 변경에서 올라온 멕 나이트들이었다.
낡고 오래된 변경의 기체들이지만, 1천 대가 넘는 멕 나이트는 그야말로 위압적이어서 동부 공업 지구 안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혁명군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저게 다 들어오면 우리는······.”
“시끄러! 약한 소리 하지 마! 죽을 때까지 싸우다 가는 거야!”
“그렇지만······.”
“우리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거야! 밖에 있는 동지들이 우리의 뜻을 더 크게 이어 줄 테니까!”
혁명에 가담한 노동자와 학생들은 그렇게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
한편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는 진압군 쪽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이렇게 노바 시내에서 멕 나이트 대군을 동원해 진압하면 민심이 크게 이반될지도 모릅니다! 그렇잖아도 지금 노바 백성들의 무장 봉기 세력에 대한 시선이 달라졌어요. 동정하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단 말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율리안이 수도 군단 지휘부를 향해 강하게 호소했다.
“저들을 용서하라는 게 아니잖아요. 이대로 포위만 하고 계속해서 투항을 권고하세요. 그렇게만 해도 결국 저들은 항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육지에서도 강에서도 우리 군과 경찰에 둘러싸여 있지 않습니까? 굳이 많은 멕 나이트로 진압하지 않아도 먹을 것이 없어 곧 끝이 나게 돼 있습니다.”
율리안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다.
이 자리에 있는 군인들을 대표해 수도 군단 사령관 그라이츠 자작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만하시죠. 먼저 무기를 탈취해 황궁을 공격하고 우리 군을 공격한 건 바로 저놈들입니다. 반란군에게 관용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미 군무부와 내각 회의에서 결정되고 막심 전하께서 재가를 내리신 사안입니다.”
그러나 율리안은 최악의 사태는 막고 싶었기에 설득을 포기하지 않았다.
“변경 파일럿들에게 동원령을 내린 까닭은 아우로라 연합군 혹은 반란을 일으킨 남방군이 노바를 공격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이지 이런 일에 동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게 바람직하다고 보십니까? 정말 좋지 못한 선례를 남기게 될 거예요!”
“으음······.”
“막심 전하께 가서 다시 한번 탄원해 볼 테니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라이츠 자작은 오베론 공작의 반란 사건을 저지한 율리안의 공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마지못해 승낙하고 말았다.
율리안은 자동차를 타고 황궁으로 달렸다.
그러나 막심은 율리안을 만나 주지 않았다.
마나포 공장을 습격해 마나포로 무장한 채 황궁을 공격해 온 폭도들을 하루 빨리 제압하고 싶었던 그로서는 율리안의 말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민심이 이반된다느니 멕 나이트로 백성들을 짓밟으면 안 된다느니 하는 말은, 그때 황궁에서 저 폭도들에게 짓밟힐 뻔했던 황자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도무지 열리지 않는 막심의 집무실 앞으로 황궁의 비서가 나와 막심의 말을 대신 전했다.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역도에게 온정을 베풀자는 말은 역도나 할 말이라고 하십니다.”
“온정을 베풀자는 게 아니오!”
비서가 딱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율리안 님, 우리나라는 지금 무척이나 어려운 일들을 겪고 있습니다. 큰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반란이 일어나고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셨어요. 그 틈을 노리고 무장 봉기를 일으킨 폭도들이예요.”
“누가 모릅니까? 용서하자는 말이 아니라니까요. 그럼에도 변경에서 괴수 사냥이나 하던 변경의 멕 나이트를 대거 동원해 동부 공업 지구에 몰려 있는 폭도들을 짓밟는다면 노바 백성들이 보기에는 과한 진압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겁니다. 어차피 이대로 포위만 해도 끝나는 일인데, 굳이 백성들을 불안에 빠뜨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경의 말대로 우리나라는 크나큰 위기를 겪고 있고 그로 인해 백성들 또한 엄청난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데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에요.”
“······.”
“모두 막심 전하를 위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백성들의 불안감도 불안감이지만, 변경 파일럿들이 노바에서 활개 칠 길을 열어 주면 안 됩니다.”
변경을 통치하는 자는 모두 황족이다.
필센 제국에서 변경 군단을 거느리고 있는 황족이 최소 8명이나 존재하는 셈인 것이다.
율리안은, 자신은 제외하더라도, 나머지 변경 구역을 통치하는 7명의 황족들과 그들이 거느리고 있는 변경 군단이, 필센 제국군 대부분이 아우로라 대륙으로 건너가고 없는 본토에서 날뛰는 상황 자체를 경계해야 한다고 충고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말이 막심의 불안감과 불쾌감을 더욱 부추기는 말이라는 것을 그 순간에는 깨닫지 못했다.
율리안의 말을 전해 들은 막심이 버럭 화를 냈다.
“변경 파일럿이 활개 친다고? 내가 겁을 먹기를 바라는 것이냐? 대체 왜 저렇게 나대는 것이냐? 다시는 이 일과 관련해 만나는 일이 없을 것이야. 썩 물러가라 이르라!”
결국 율리안은 쫓겨나듯 황궁을 나오고 말았다.
할 수 없이 그는 다시 동부 공업 지구로 자동차를 몰았다.
그때 노바로 돌아와 바덴을 만나서 현 상황을 들은 루산이 율리안을 만나기 위해 동부 공업 지구 상황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자동차에서 내리는 율리안을 발견했다.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한 율리안은 루산을 발견하고 힘없이 그를 불렀다.
“부장님······.”
루산은 그와 다르게 어두운 밤에 길을 찾은 사람처럼 야심에 찬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율리안 님!”
루산의 뒤에는 바덴이 동원한 신문 기자들과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클라크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