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 변경은 생각보다 나쁜 곳이 아니다
381. 변경은 생각보다 나쁜 곳이 아니다
루산의 이야기를 들은 율리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율리안이 어두운 얼굴로 도착한 것을 확인한 수도 군단 사령관이 진압 명령을 내리기 위해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는 변경 부대들의 지휘관을 불러 모았기 때문이다.
루산이 율리안에게 말했다.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선택하셔야 합니다. 이 나라를 위한다면 진압을 막아야 하고, 막심 전하와 좋은 친척으로 남고자 한다면 외면하시면 됩니다.”
“진압을 막으면······.”
율리안의 말에 루산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율리안 스스로도 그다음에 일어날 일을 모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개 신하가 아닌 황족 율리안이 막심에 맞선다는 것은 곧 황좌로 나아간다는 의지의 표명이나 다름없었다.
본인은 그럴 생각이 없더라도 세상은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율리안이 루산을 원망의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나를 왜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겁니까?”
“그건··· 아마 율리안 님이 충분히 그럴 만한 분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루산의 대답에 율리안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진지하게 다시 물었다.
“폭도들이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그 역시 그들의 선택이죠.”
율리안과 루산, 그리고 신문 기자들이 한데 모여 있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변경 부대 지휘관들이 수도 군단 사령관의 부름에 막사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율리안의 마음이 급해졌다.
마침내 그가 가늘게 떨리는 주먹을 불끈 쥐고는 외치듯이 말했다.
“해 보죠! 그렇게 하세요!”
율리안의 승낙에 루산은 몸이 떨려왔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묵직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통치자님!”
그는 지휘 막사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트리어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트리어도 루산 쪽으로 서둘러 달려왔다.
“어떻게 됐어?”
“율리안 님이, 결심하셨어요.”
트리어가 번개에 맞은 듯 찌릿찌릿한 몸을 애써 가누며 말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거냐?”
“가 보죠.”
“젠장!”
루산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싫어요?”
“그럼 좋겠냐? 오래오래 사는 게 내 꿈이라고!”
“가늘고 긴 것보다는 굵고 긴 게 낫지 않겠어요?”
전에도 루산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트리어가 굳은 표정을 풀기 위해 애써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준비하고 있는 거 아니냐! 굵고 길게 가 보자!”
트리어가 루산과 뜨겁게 눈을 마주쳤다.
동원령을 받고 변경 8구역 병력을 이끌고 온 변경 8군단 제1전단장 트리어.
루산이 제국 기사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곧바로 변경 8구역 델타 기지 파일럿으로 변경 생활을 시작할 때 직속상관인 캡틴으로 있으면서 귀족 물이 남아 있는 루산을 혹독하게 괴롭혔지만, 이후 굉장한 실력과 지독한 생존 의지에 결국 루산을 인정하고 끌어 준 인물.
그가 지휘부 막사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트리어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당당하게 말했다.
“변경 8군단은 변경 8구역 통치자이신 율리안 볼프스 마이센 님의 뜻을 받들어 이번 진압 작전에서 빠지겠소!”
“······!”
“······!”
“뭐라고?”
수도 군단 사령관과 수도 군단의 장군들이 무섭게 쳐다보았지만 그는 주눅 들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변경 군단은 변경에서 괴수를 사냥함으로써 이 나라의 안전을 수호하고 산업 발전에 이바지하는 부대이지 민간인을 짓밟는 부대가 아니오. 설사 무장을 한 민간인이라 해도 그건 경찰과 군대가 알아서 하시오. 그 정도 능력도 없다면 옷을 벗어야지.”
“말이면 다인 줄 아나!”
수도 군단의 장군 하나가 소리를 버럭 지르자 트리어가 그를 쏘아보며 중얼거렸다.
“아니면, 우리에게 그 임무를 넘기고 아예 빠지든가.”
경찰과 군대의 임무를 변경 군단에 넘기라는 말은 무서운 의미를 내포한 이야기였다.
더 충돌했다가는 더 나쁜 일이 벌어질 것 같아 수도 군단의 장군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막사 안이 고요해졌다.
트리어가 수도 군단 지휘부를 지나 변경 군단 지휘관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변경 8군단은 율리안 님의 뜻에 따라 진압 작전에 동참하지 않고 포위만 유지하고 있을 것이오. 그 사이 폭도들을 설득해 이 사태를 끝낼 것이오. 변경의 파일럿들은 자신이 타고 있는 멕 나이트로 노바의 무장 폭도들을 짓밟아 노바 백성들과 필센 국민들에게 대대로 공포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사태의 평화적 해결에 기여해 필센을 수호하는 진정한 영웅으로 기억될 것인지 선택하시오.”
옷자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추운 겨울바람이 막사 지붕을 흔드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릴 정도로 정적이 감돌았다.
그때 한 사람이 말했다.
“변경 7군단은 평화적 해결을 바라오. 8군단과 함께할 것이오.”
작년에 웨이브 사태 때 8구역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던 7구역이 동참을 선언했다.
8개 변경 구역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7구역이 수도 군단의 명령을 거부하고 8구역과 동참하겠다고 하자 다른 변경 군단 지휘관들도 마음이 흔들렸다.
게다가 알게 모르게 8구역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8구역의 급격한 성장, 8구역에서 처음 시작된 농업 기지 사업의 확장, 8구역에 근거를 두고 있는 가프 마법 연구소의 영향력, 그리고 이번에 변경 기동 전투 부대를 이끈 루산의 능력에 대한 증언들.
특히 변경 기동 전투 부대에 선발된 파일럿들은 각 변경 구역에서 뛰어난 실력을 지녔다고 이름이 난 파일럿들이라 8구역 루산 보름스의 존재감이 더 크게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5군단도 8군단과 함께하겠소!”
비어슨이 태어난 변경 5구역의 지휘관이 소리쳤다.
“우리 1군단도 평화적 해결을 바라오!”
“변경 6군단의 멕 나이트는 괴수를 사냥하기 위한 것이오! 사람을 밟을 수는 없지! 그런 일은 군대나 경찰이 하시오!”
“3군단도······!”
“2군단도······!”
모든 변경 군단 지휘관들이 동참하기로 하자 트리어는 온몸이 찌릿찌릿했다.
수도 군단 사령관이 인상을 구기며 으르렁거렸다.
“당신들은 동원령을 받고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오! 항명죄의 벌은 무겁소!”
트리어가 비웃음을 날리며 말했다.
“벌을 줘 보시든가.”
“이!”
수도 군단 사령관은 당장 체포하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겨우 참았다.
변경 군단의 멕 나이트는 1천 대가 넘었고 수도 군단 멕 나이트는 50대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오!”
“말하지 않았소? 율리안 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라고. 책임은 율리안 님이 지시겠지.”
트리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변경 지휘관들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가 이내 잦아들었다.
트리어가 표정을 굳히고 수도 군단 사령관에게 다가가 나직이 말했다.
“율리안 님이 책임을 지실 것이오. 무슨 뜻인지 알겠소?”
그 말을 곱씹어 본 수도 군단 사령관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트리어가 그 모습을 보고 중얼거렸다.
“줄을 잘 서야지. 나처럼.”
그러나 정작 트리어는 몸의 떨림이 진정되지 않았다.
루산의 계획에 따라 여기까지 진행시키고 다른 변경 군단 지휘관들의 동참을 이끌어내기는 했으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이번 진압 작전에 참가하는 것을 유보한다는 뜻이었지 율리안을 황제로 떠받든다는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율리안이 황위를 노린다면 다른 변경 군단 병력은 언제든 수도 군단과 함께 자신들을 진압하는 군대가 될 수도 있었다.
‘루산, 다음은 네 몫이야!’
***
루산은 변경 8군단의 중고 멕 나이트를 타고 동부 공업 지구 서쪽 입구를 향해 나아갔다.
낡은 아이언 워리어 왼쪽 어깨에는 백기를 든 클라크가 견갑 가시를 붙잡고 앉아 있었다.
멕 나이트는 건물 잔해와 철골 구조물로 단단하게 막힌 서쪽 입구 앞에 멈춰 섰다.
끼이익!
양옆 벽 사이에 뚫린 구멍으로 혁명군 멕 워커가 마나포를 내밀었다.
거리가 워낙 가까워 맞으면 관통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정면 벽 위로 한 사람이 올라와 소리쳤다.
“무슨 일로 왔어? 허튼 소리나 하면 구멍이 날 줄 알아!”
클라크가 견갑 가시를 붙들고 멕 나이트 어깨 위에 서서 소리쳤다.
“내 이름은 클라크입니다.”
클라크의 목소리가 방벽에 부딪쳐 메아리쳤다.
“바움 대학 행동하는 청년 그룹의··· 친구입니다!”
친구라고 할지 동지라고 할지 잠시 고민하다 결국 친구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바움 대학 출신인가? 그런데 지금은 정부 쪽에 붙은 모양이네?”
혁명군 사람이 비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나 클라크는 이런 말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내 친구들과 여러분에게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정부군이 동부 공업 지구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높게 올린 방어벽 위로 혁명군 사람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내밀었다.
그중에는 클라크를 아는 바움 대학 출신들도 있었다.
“무슨 할 말?”
“변경 8구역 통치자인 율리안 볼프스 마이센 님께서 여러분에게 살 길을 열어 주고자 하십니다. 항복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살 수 있습니다!”
“개소리하지 마라! 우리를 속이려는 거지?”
“아닙니다! 율리안 님께서 자신의 명예와 목숨을 걸고 제안하신 겁니다. 지금 이곳을 포위하고 있는 멕 나이트들이 진입하는 것을 막고 여러분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시는 거예요. 제발 제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
사위가 고요해졌다.
클라크가 품에서 종이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여러분이 저지른 일은 필센 제국으로서는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나라의 존망이 달린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무장하여 황궁과 군대를 공격한 일은 어려분이 그 어떤 대단한 신념을 가지고 있든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필센 제국의 법령상 중형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벽 위로 올라온 혁명군 사람들뿐 아니라 클라크 뒤에 방벽을 쌓고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는 변경 군단과 수도 군단 병력들도 숨을 멈추고 클라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러분이 이런 일을 벌인 이유를 이해합니다. 전쟁으로 식량과 생필품 가격은 오르는데 임금은 동결되었죠. 그런데 고위 귀족과 사업가들은 전쟁 덕에 막대한 이익을 보고 있습니다. 그걸 참지 못해 들고 일어선 것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여러분의 행동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행동은 아우로라 연합을 이롭게 했고, 우리나라를 위태롭게 했으니까요. 전쟁에서 패하면 우리나라 백성 모두가 아우로라 연합의 노예로 전락하여 고초를 겪게 될 것입니다. 그걸 원하는 겁니까?”
“그래서 제안합니다. 필센 제국의 법령상 여러분은 중죄를 지은 것이고 이는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을 모두 변경으로 유배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다시 바깥세상으로 나오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누가 간다더냐? 목숨 걸고 싸울 것이다!”
“맞아! 누가 그 말에 따를 것 같으냐?”
방벽 위로 올라온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루산이 외부 확성기로 소리쳤다.
- 닥쳐라! 율리안 님은 명예와 목숨을 거셨다. 너희의 목숨은 그렇게 하찮으냐? 너희가 이 제안을 거절하면 1천 대가 넘는 멕 나이트가 들이닥칠 것이다! 끝까지 들어라!
차가운 바람이 동부 공업 지구 방벽 위를 쓸고 지나갔다.
클라크가 다시 소리쳤다.
“여러분을 변경으로 유배 보낼 것이나 여러분이 지내는 땅에서는 완전한 자치를 보장할 것입니다. 서로 상의하여 공동의 의사를 도출하든 대표를 뽑든 간섭하지 않을 것입니다.”
“······!”
“······!”
클라크가 계속하여 말했다.
“혹시나 변경에서 굶어 죽거나 괴수에게 잡아먹히지는 않을지 걱정할 수 있겠지만, 필센 제국 변경법에 따라 필요한 지원을 할 것입니다. 필센 제국에서 변경 개척민이 생필품과 식량이 부족해 죽는 경우는 없으며 괴수에 당해 죽는 경우도 어지간히 규칙을 어기는 경우가 아니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안전과 생활이 보장되고 있는지는 정기적으로 신문 기자들이 방문하여 세상에 알리도록 할 것이며, 전쟁이 끝나고 우리나라가 안정을 되찾는다면 여러분이 바깥세상과 교류할 방안을 찾아볼 것을 약속합니다.”
신문 기자들이 놀란 표정으로 클라크의 이야기를 빠르게 적어 나갔다.
율리안이 제안한 방안 - 실제로는 루산이 바덴과 머리를 맞대고 짜낸 방안 - 은 매우 파격적이었다.
강제 진압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무장 폭도들에게 자비롭게 살아날 기회를 주면서도 바깥세상과 차단하는 것이고, 봉기를 일으킨 저간의 사정을 헤아려 그들이 원하는 정치 체제 속에서 살 수 있도록 자치권을 보장해 준다는 것이니, 백성들이 볼 때는 자비로우면서도 현명한 조치로 보일 만했다.
방벽 위에 올라와 있던 사람들이 클라크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한 젊은 여성이 일어나 소리쳤다.
“클라크!”
클라크는, 못 본 사이에 비쩍 말라 있는 사라를 금방 알아보았다.
“사라!”
사라가 낭랑하게 외쳤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려고 싸운 거야. 좁은 곳에 갇혀 황제와 귀족들이 던져 주는 먹이를 먹으며 우리끼리 소꿉놀이를 하려고 이 싸움을 시작한 게 아니라고. 우리는 패배를 안고 유배되기 위해 싸운 게 아니야. 비록 지금은 패배하더라도 우리가 품은 정의의 씨앗을 이 땅에 남기고 죽을 거야.”
사라의 말이 방벽 위에 올라와 있는 혁명군을 다시 격동시켰다.
루산은 사라의 말을 논박하기 위해 자신이 나서려 했다.
그러나 그때 클라크가 담담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알아.”
“안다고?”
“그럼! 알아. 난 변경 개척촌의 6남매 집 장남으로 태어났거든. 대단한 귀족 가문의 자식이 아니야.”
“······!”
“난 왜 누나와 친구들이 싸우는지 알아. 불의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지. 그런데 무엇을 위해, 어디까지 싸워야 하는지는 누가 정하지? 황제와 귀족들을 다 죽일 때까지 싸울 거야? 아니면 군대와 경찰을 다 죽일 때까지 싸울 거야?”
“비꼬는 거니?”
“아니. 정말 모르겠어서.”
“······.”
“이반 황제는 엄청난 개혁을 했지. 그 덕분에 평민의 권리가 향상되고 재산이 늘었지. 그런데 그 때문에 귀족들은 엄청나게 숙청되었어. 그 귀족들은 억울하지 않을까? 그동안 살아온 대로 살아간 것뿐인데 죽음으로 내몰려야만 했을까? 다른, 좀 더 온건하고 충격이 덜한 방법은 없었을까? 왜냐하면 우리는 처지를 바꾸어서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아는 인간이니까 말이야.”
“······.”
“힘으로, 폭력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면 율리안 님이 굳이 이런 제안을 할 필요가 없지. 누나와 친구들은 힘이 약하니 짓밟혀도 된다는 거니까.”
“······.”
“하지만, 아무리 옳은 의견이라도 충격이 덜한 방법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낫지 않을까?”
“······.”
“지금의 필센 제국은 누나와 친구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해. 현재 필센 제국의 강력함, 부유함, 질서, 문화, 법체계는 황제와 귀족들이 만든 것이야. 그걸 전쟁이라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용해 빼앗으려 한 거야. 그게 옳은 일일까?”
사라가 주먹을 불끈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보여 줘, 누나. 황제와 귀족들이 쌓아 올린 이 나라를 폭력으로 빼앗지 않고도 멋진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일을 해 나가면 필센 제국보다 훨씬 풍요롭고 자유로운 세상이 된다는 것을. 그걸 보여 준다면 율리안 님뿐 아니라 이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누나와 친구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이고 세상이 달라질 거야. 피도 덜 흘리고. 그렇지 않아? 율리안 님은 그럴 기회를 주는 거야.”
클라크가 절절하게 호소했다.
“그 기회를 뿌리치고 여기서 다 죽을 거야?”
클라크의 목소리가 듣는 사람 모두를 먹먹하게 했다.
그때 맨 처음 방벽 위에 나타난 사람이 물었다.
“그 율리안인지 하는 사람을 어떻게 믿지? 황족인 건 알겠는데 정말 약속한 대로 자치권을 보장하고 생필품과 식량을 제공하고··· 그런 걸 어떻게 믿느냔 말이야?”
그러자 루산이 탄 멕 나이트가 방벽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방벽 위에 올라온 사람들이 움찔하여 물러나고, 마나포가 허둥지둥 루산의 멕 나이트를 따라 포구를 돌렸다.
그러나 루산은 멕 나이트로 아무것도 부수지 않고 그저 조종실을 열고 밖으로 나와 방벽 위로 올라가 혁명군 사람들에게 나직이 말했다.
“3년 전, 너희가 이곳에 갇혀 있었을 때 너희를 구한 것이 바로 나다.”
“······!”
노동자들의 구원자라는 신화를 만들어 내고 사라진 의문의 멕 나이트 파일럿!
특히 바움 대학 학생들은 클라크와 함께 온 것을 보고 루산이 3년 전 그 인물임을 확신했다.
“살아라. 살아남으면 언젠가는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 내 경우는 그렇더군. 그리고······.”
루산은 오랫동안 제대로 먹지 못하고 씻지 못해 꾀죄죄한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변경은 생각보다 나쁜 곳이 아니야.”
“······?”
루산은 다시 멕 나이트 조종실로 들어갔다.
그런 뒤 클라크를 태운 채 진압군 진영으로 돌아갔다.
몇 시간 뒤, 혁명군 진영에서 항복을 뜻하는 백기가 높게 올라왔다.
클라크는 숨 죽여 눈물을 흘렸지만, 크게 들썩이는 어깨를 감추지는 못했다.
***
모든 신문에서 동부 공업 지구에서 벌어진 드라마 같은 일들을 연일 크게 보도했다.
율리안의 현명함과 자비로움을 칭송하는 기사와 사진들이 도배를 했다.
바덴의 입김과 새로이 경찰청장이 된 그리마의 방조 그리고 신문 자유에 관한 포고령을 폐지한 막심에 대한 기자들의 반감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물이었다.
추운 겨울을 노바에서 난 탐탐들이 두꺼운 옷을 입고 돌아다니면 백성들이 환호를 보냈다.
변경의 통치자 율리안에 대한 지지를 대신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막심의 불쾌감은 더욱 커졌다.
루산은 잠시 짬을 내어 집에 들렀다.
“빠아?”
루산을 보고 울까 말까 고민하던 레오나가 아빠를 알아보고 말했다.
루산의 얼굴에 함박꽃이 피었다.
“하하! 많이 컸네, 우리 딸!”
옆에서 불안감을 감추고 미소를 짓고 있던 바덴이 물었다.
“식사는요?”
“바로 가 봐야 해요. 알잖아요.”
“그래도······.”
“레오파드 간편식이 있으니 괜찮아요.”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루산의 미소를 보고 바덴도 애써 미소를 지어 주었다.
걱정이 되지만, 그걸 드러낸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녀가 화제를 돌렸다.
“스텐커 씨로부터 루트 오베론의 행방을 찾았다는 연락이 왔어요.”
“아! 그렇군.”
“어떻게 할까요?”
“다치지 않게 잡아오라고 하세요.”
“네?”
“우리 쪽에 사람이 부족하잖아. 할 일도 많은데······.”
“그럼······?”
“오베론 가문이 무너진 것으로 복수는 끝났어요. 이제 우리의 성을 새롭게 지어 나가야지.”
루산이 말했다.
자신 있는 말투에서 야심이 느껴졌지만, 바덴은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능력 있는 남자의 당당함과 야심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비록 옛날에는 돈 한 푼에 쩔쩔매던 사람일지라도.
“알았어요.”
“그럼 가 볼게요.”
“몸조심하세요.”
바덴의 말에 루산은 그녀에게 키스하고 입술을 레오나에게 들이밀었다.
레오나가 아빠의 뺨을 만지다 거친 수염에 화들짝 놀라 입술을 피했다.
그러나 루산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기어이 레오나의 입술에 뽀뽀했다.
“으앙!”
레오나가 엄마에게 팔을 벌리자 바덴이 달래며 안아 주었다.
그 모습을 본 루산이 개구쟁이처럼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그러고는 곧바로 클라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노바 역으로 갔다.
오늘 도착하기로 한 사람과 물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
노바 역에 거대한 물체가 실려 있는 화물차가 들어왔다.
왼팔 팔뚝이 잘렸던 우르사 Ⅱ가 수리를 마치고 올라온 것이다.
그리고 001과 레오파드 라이트닝 한 대가 실려 있었다.
003과 002는 루한 왕국에 남겨 두고 왔기 때문에 익숙한 기체를 불러올린 것이다.
루산의 편지를 받고 이것들을 운반해 온 바이크가 먼저 도착해 있던 시에나와 수다를 떨고 있다가 루산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대장님!”
“좋아 보이는구나.”
“오랜만에 대장님 얼굴을 보니까 기분이 좋아서요.”
“거짓말도 아주 자연스러운데?”
“헤헤헤!”
바이크가 시에나를 쳐다보고 빙충이같이 웃었다.
시에나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지만, 그녀의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서두르자.”
“예!”
“네, 대장님!”
세 사람은 각자의 멕 나이트에 올라탔다.
역사를 나온 멕 나이트 세 대가 높은 빌딩 사이를 성큼성큼 걸어갔다.
[대장님, 부숴야 할 적이 많습니까?]
바이크가 근질근질하다는 듯 말했다.
루산이 웃으며 대답했다.
[많겠지.]
[걱정 마세요. 제가 다 해치울 테니까.]
[그 말을 들으니 더 걱정이 된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변경을 휘어잡던 거대한 우르사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시에나의 001, 왼쪽에는 바이크가 탑승한 레오파드 라이트닝이 세상을 휘어잡기 위해 노바 역 바깥의 대로를 지나 황궁 방면으로 향했다.
그 주위로 멕 나이트 호위와 백성들의 안전을 위해 탐탐 정찰병들이 따라붙었다.
탐탐-!
탐탐-!
어느새 노바 시민들의 반가운 표정에 익숙해진 탐탐들이 자랑스럽게 고개를 들고 가슴을 두드리며 신나게 대로를 질주했다.
끝.
그동안 ‘KFC 변경 군단의 기사’를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본편 연재가 끝이 났습니다.
10월 1일부터 외전 연재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