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FC 변경 군단의 기사-384화 (384/450)

4부 3. 해 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4부 3. 해 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여전히 연구를 열심히 하는구나.”

집으로 들어온 루산이 거실에서 신문을 읽으며 기다리고 있던 클라크를 보고 농담을 했다.

그 옛날 클라크가 노바에서 8구역으로 돌아가는 열차 안에서 가십 위주의 기사를 주로 싣는 신문에 연재된 야릇한 소설에 홀딱 빠져 잠을 안 자고 야한 부분만 찾아 읽고 있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었다.

클라크가 쑥스럽게 웃으며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백작님.”

“오래 기다렸어?”

“아닙니다. 방금 왔어요.”

“옷만 갈아입고 올게.”

“네.”

루산이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려고 방으로 들어갔다.

변경에서부터 그를 호위해 온 건장한 청년이 그제야 클라크에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야, 형.”

클라크도 반갑게 인사했다.

“잘 지냈니, 찰스.”

앳된 청년은 아라드 왕국에서 전란을 피해 필센 제국으로 들어온 피란민 가족들을 변경으로 수용하는 정책으로 인해 어머니, 누나와 함께 변경 8구역에 정착한 찰스였다.

누나 에밀리가 아픈 엄마를 대신해 돈을 벌기 위해 어린 나이에 개척병으로 지원을 했고 루산이 안타까운 마음에 당번병으로 뽑아 숙소 청소 등 가사 일을 맡겼다. 그때 에밀리가 업고 온 동생이 바로 찰스였던 것이다.

클라크가 함께 키우다시피 한 그 꼬마가, 루산의 제안으로 율리안이 설립한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모리츠와 파비안이 가르치는 파일럿 양성 학교를 나와 멕 나이트 파일럿이 되어 루산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에밀리는 잘 지내니?”

“형을 원망하면서 하루하루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있지.”

물론 농담이었다.

이미 결혼하여 애가 셋이었다.

클라크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살짝 미소 짓고 넘어갔다.

사실 얼굴을 자주 볼 기회가 없을 뿐 클라크와 찰스는 편지로 종종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루산에게 온 편지와 손님 방문 사실을 전달하고 일정을 챙기는 것과 같은, 과거 클라크가 해 온 일을 지금은 찰스가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수가 된 뒤에도 여전히 루산을 위한 일을 노바에서 하고 있는 클라크가 찰스와 연락을 주고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루산이 거물이 되었기에 그를 보좌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만 중요한 일, 사적인 일은 변경에서 에밀리와 찰스 남매가 맡고 있었다.

두 사람은, 크기에 비해 사람이 별로 없어 쓸쓸함이 느껴지는 보름스 가문의 저택에서 서로의 근황을 나누며 오랜만에 밝은 이야기꽃을 피웠다.

“아가씨는 어떻게 지내시니?”

“똑같죠, 뭐. 이번에 백작님께서 같이 가자고 하셔도 남아서 훈련하겠다며 거절하셨어요.”

“여전하시구나.”

루산과 바덴의 첫째 아이인 레오나 이야기였다.

레오나는 엄마와 아빠를 닮아 똑똑했지만, 아빠의 특징을 더 강하게 닮아서인지 아니면 자주 보지 못한 아빠에 대한 결핍을 채우고 싶어서인지 몰라도 몸 쓰는 놀이를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남자애들처럼 뛰어다니고 땅을 뒹굴며 칼싸움 놀이를 하고 다녔다.

방에는 레오파드 마스코트 인형이나 멕 나이트와 괴수 시리즈 같은 장난감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다 자기 생각을 갖게 될 무렵에는 아빠처럼 제국 기사 아카데미에 들어가 멕 나이트 파일럿이 되겠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루산과 바덴은 어릴 때 그러고 말겠거니 하고 넘겼다.

그러나 더욱 자라서도 그 뜻을 꺾지 않았다.

문제는, 제국 기사 아카데미가 전에 비해 문턱을 많이 낮추었다고 해도 여자를 받아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루산은 레오나를 변경으로 데려갔다.

변경에는 뛰어난 여성 멕 나이트 파일럿 시에나가 있었고, 모리츠와 파비안이 검술과 멕 나이트 조종술을 가르치는 파일럿 양성 학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와 떨어져 살아도 괜찮으냐는 바덴의 질문에 레오나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엄마랑 훨씬 더 많이 살았잖아. 이제 아빠랑 살면서 균형을 맞춰 볼게.”

그렇게 레오나는 루산과 변경 8구역으로 가서 개척병들과 사람 키보다 높게 자란 원시의 초원을 내달리고 소리 없이 진흙 바닥을 기었다가, 정찰병들과 함께 탐탐을 타고 질주하기도 하고, 파일럿 학교에서 검을 휘두르고 레오파드 트레이너에 올라 조종술을 익히며 괴수와 원시의 땅의 생리를 배워 나갔다.

8구역 사람들은 그런 레오나를 변경의 전투 공주님이라고 불렀다.

“남자로 태어났어야 하는데······.”

찰스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클라크가 나직이 주의를 줬다.

“그런 말, 절대 하지 마라.”

수행원으로서 루산 일가에 대한 이야기를 함부로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형한테나 하는 말이지 평소 어디 가서 입도 벙긋 안 하니까 걱정 말아요. 오죽하면 동료들이 내가 말을 못 하는 사람인 줄 안다니까.”

클라크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자 찰스가 화제를 바꾸었다.

“회장님은 언제 귀국하시죠?”

바덴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직 멀었을걸. 바르나 왕국 토지 개혁이 막바지 단계라 신경 쓰실 일이 많을 거야.”

“그렇군요.”

바덴은 레오나의 동생인 가츠를 데리고 옛 바르나 왕국에 가 있었다.

필센 제국은 정복한 아우로라 연합의 국가들을 일정한 구역으로 나누어 공신들에게 분배하고 각 구역마다 식민지 회사를 설립해 국가의 관리와 자금의 투입을 최소화하면서도 효율적인 경제 지배 체제를 갖추려 했다.

당시 상무대신이었던 벤야민은 이미 거대 규모로 성장해 있던 고슬라 그룹의 회장 바덴에게 식민지 회사 하나를 제안했고, 바덴은 여러 식민지 구역들 가운데 바르나 왕국을 선택했다.

바라나 왕국은 동방군과 페르보 제국이 주축이 된 아우로라 연합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던 나라로 여러 해 동안 격렬한 전투가 일어나 완전히 폐허가 되었기에 식민지 회사를 운영하여 막대한 이익을 기대하던 사업가들이 모두 기피하는 나라였다.

벤야민도 우려했다.

자신을 위해 많은 일을 해 왔으며 앞으로도 든든한 정치적 배경이 되어 주어야 할 고슬라 그룹 - 어디까지나 벤야민의 생각이었다 - 이 모든 것이 무너져 전혀 이익을 볼 것 같지 않은 나라에 진출하여 망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바덴은 벤야민뿐 아니라 고슬라 그룹 안에서도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기어이 바르나 왕국을 선택했다.

그녀는 고슬라 그룹의 사장들과 자작나무 숲 기획 팀 직원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밝혔다.

“우리는 식민지의 자원과 재물을 착취하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방식은 단기적으로 높은 이익을 올릴지 모르겠으나 결국 해당 지역은 말라 버리고 말겠죠. 우리의 목표는 해당 지역을 잘 키우는 것입니다. 경제적 생산성을 높이고 다양한 산물을 생산하고 여러 나라의 물품과 사람이 편리하게 이동하는 곳으로 키우는 것이죠. 바르나 왕국은 부르가스, 페브로 제국, 부르사 왕국, 루한 왕국과 접하고 있는 교통의 요지입니다. 문제는 동방군과 아우로라 연합군 간의 격전이 벌어져 수도는 황폐화되었고 농지와 마을 역시 멕 나이트와 멕 워커들에 짓밟혀 엉망이 되는 바람에 백성들은 유리걸식하고 있기에 들어가서 사업을 벌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방식의 사업을 하기에 더 적합하다고 봅니다. 우리는 이미 아라드 왕국 개발 사업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작업이었죠. 영주들을 비롯한 지배층의 많은 저항이 뒤따랐죠. 바르나 왕국은 다릅니다. 다 무너진 상태라 새로 시작하기 수월합니다. 이미 아라드 왕국과 부르사 왕국 개발 경험이 있기에 바르나에서 우리는 훨씬 빠르게 재건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식민지 회사 운영 기간이 종료되더라도 우리로 인해 전쟁의 상처를 씻고 부유하게 된 바르나 사람들은 우리를 좋아해 줄 것이고, 우리가 건설한 많은 사회 자본은 여전히 우리의 것으로 남아 우리의 이익에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필센 제국의 식민지가 된 바르나 왕국을 황금 알을 낳는 거위로 만들겠다는 그녀의 계획은 혼자서 실현할 수가 없었다.

총독으로 누가 오느냐에 따라 그녀의 계획이 완전히 물거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부분은 루산의 힘을 빌렸다.

루산은 오스카 빈켈 - 오베론 공작에게 복수를 하는 데 도움을 준 군무부 감찰관 출신의 동방군 군단장 - 이 바르나 총독으로 임명될 수 있도록 힘을 써 주었다.

율리안을 황제로 만든 뒤에도 어떤 청탁도 하지 않은 그가 유일하게 부탁한 것이라 율리안 황제는 그 청을 들어주었다.

오스카 빈켈이 비록 바르나 대첩에서 큰 공을 세우고 페르보 전쟁에서 많은 전공을 올리기는 했으나 동방군과 필센 제국군에는 그보다 더 계급이 높고 가문이 출중한 장군들이 많았기에 옛 바르나 왕국을 통째로 다스리는 총독에 임명된 것은, 바르나가 아무리 폐허가 되었다 해도, 다소 무리가 있었다.

오스카 빈켈 본인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이번 건이 루산의 공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루산과 바덴으로부터 바르나 재건 계획을 듣고 기꺼이 협조하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바덴은 바르나에 식민지 회사를 설립하고 지난 10년 동안 경영해 왔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나 간간이 루산을 만나기 위해 귀국하기는 했으나 그곳에서 줄곧 보낸 것이다.

고슬라 그룹의 자금이 막대하게 투입된 바르나는 빈켈 가문의 식민지가 아니라 사실상 바덴의 땅이었다.

루산이 율리안을 황제로 만들었음에도 굳이 그 옆에 붙어 있지 않고 변경에서 조용히 지낸 데에는 밤베르크 공작이나 노바의 고위 귀족들에게 이런 부분을 공격받지 않기 위함도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고들 있어?”

루산이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며 말했다.

“별 이야기 아닙니다, 백작님. 오랜만에 만나서 수다를 나눈 것이죠.”

클라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배고프니까 밥이나 먹자고.”

“예.”

루산의 어머니 보름스 자작 부인이 돌아가신 뒤 쓸쓸하게 저택을 지키고 있던 늙은 하녀가 젊은 하녀 두 명과 함께 식사 준비를 마치고 시중을 들기 위해 대기했다.

그러자 루산이 편히 쉬라고 그들을 들여보냈다.

변경에서 줄곧 살아온 그에게는 오히려 식사 시중을 들어 주는 것이 불편했던 것이다.

루산은 클라크, 찰스와 오랜만에 정찬을 들었다.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 먹었던 음식 맛에 저도 모르게 옛날 생각에 잠깐 빠져들기도 했다.

그러나 할 일이 많았기에 허겁지겁 변경 식으로 식사를 마친 그는 클라크만 서재로 불러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카데미에는 별일 없지?”

루산이 안부를 묻는 듯이 가볍게 이야기를 꺼냈지만, 사실 그리 가벼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클라크가 대답했다.

“코룸 공작 가문에서 입학 문의가 왔습니다.”

“코룸 공작?”

“페르보 제국의 코룸 공작 가문입니다.”

“아! 그 코룸 공작이라면 2차 대전쟁 당시에 아우로라 연합군 총사령관을 지내지 않았나?”

“맞습니다. 페르보뿐 아니라 아우로라 전역에서 알아주는, 꽤 명성이 높은 가문이죠. 공작의 막내 손자를 입학시키려는 모양입니다.”

“음! 완전히 돌아선 모양이군.”

“그렇다고 봐야겠죠.”

필센 제국이 아우로라 연합에 가입한 국가들을 정복했다고 해서 그 나라의 지배층을 모두 갈아 치울 수는 없었다.

살려 두고 협력을 받아 내야 원활하게 통치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협조하지 않는다고 모두 해칠 수도 없었다. 그들의 재산과 권리를 함부로 빼앗거나 박탈할 수도 없었다.

백성들의 감정을 건드려 저항감을 불러일으킬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에는 수고스럽고 비용이 많이 들지만, 회유하고 협박하고 감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그런 유명한 가문의 귀족들이 이렇게 자발적으로 필센 제국의 지배 체제에 순응하겠다고 하면 통치가 수월해진다.

제국 기사 아카데미에 손자를 보낸다는 것은, 말로 대놓고 하지는 않아도 순응하겠다는 뜻.

제국 기사 아카데미 교수로 있는 클라크는 이러한 내용을 빠르게 접할 수 있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별것 아닐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제국의 판도를 파악하고 사업을 유리하게 진행해 나갈 수 있는 중요한 정보가 되기도 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클라크는 집사가 아닌 역사학 교수의 길을 가고 싶다는 자신의 뜻을 선뜻 받아 준 루산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자발적으로 이 일을 시작했고, 루산은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

루산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강화해 나가야 했다.

율리안을 황제로 옹립한 가장 큰 공을 세웠음에도 변경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율리안이 자신을 숙청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것.

그리고 율리안이 아니더라도 밤베르크 공작을 비롯해 노바의 고위 귀족들은 변경의 하찮은 파일럿이 황제에게 큰 의미로 남아 있는 꼴을 결코 방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경각심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몸을 사리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과 담을 쌓고 살 수는 없었다.

몸은 변경에 있지만, 바깥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빠르게 접하고 변화에 대응하고 힘을 길러야 했다.

클라크가 알려주는 내용은 그중 하나였다.

“이 일이 알려지면 페르보에 제법 충격이 일겠군.”

“그렇겠죠.”

루산은 이 일이 미칠 충격과 이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지 생각하다 서둘러 바덴에게 알려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 자리에서 바덴에게 편지를 썼다.

그런 뒤 오늘 황궁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클라크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클라크가 눈썹을 모은 채 집중해서 들었다.

이야기를 마친 루산이 클라크에게 말했다.

“그래서 해 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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