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5. 우리 꼭 바다를 보러 가자
4부 5. 우리 꼭 바다를 보러 가자
블란트 베른카슈.
제국 기사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루산 보름스의 1년 선배로 곧바로 근위대에서 근무하다 동방군으로 전출을 신청해 큰 공을 세웠다.
가볍고 빠른 멕 나이트 로쿠스타로 이루어진 기동 전단을 맡아 바르나에서 굴다크 공작을 직접 쓰러뜨린 것이다.
사실 굴다크 공작이 이끄는 연합군을 돌파하고 무너뜨리는 데는 오스카 빈켈이 이끄는 선봉 전단과 레오파드 슈퍼 기체 60여 대를 배정받은 동방군 에이스 파일럿들 - 당시 루산도 이들과 함께했다 - 로 이루어진 특수 부대가 가장 큰 역할을 했으나 굴다크 공작이 타고 있던 블랙 드래곤에 기체에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은 확실히 로쿠스타들이 던진 마나 진동 투창이었다.
블란트는 굴다크 공작을 자신이 쓰러뜨렸으므로 가장 큰 공을 세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 이후 전공 평가와 보상 결과는 자신의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동방군 사령관인 라이네 후작이 공작으로 승작되고 페르보 제국 땅 가운데 가장 큰 땅을 다스리는 총독으로 임명된 것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쨌든 그는 필센 제국군 최고 지휘관으로서 아우로라 연합군을 격파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기 때문이다.
동방군 군단장들 가운데 몇몇이 라이네 후작보다는 작지만 상당히 넓은 땅을 다스리는 총독으로 임명된 것도 수긍했다.
자신보다 동방군에서 복무한 기간이 길었고 많은 병력을 지휘해 많은 전투를 치렀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르나 대첩 당시 자신과 같은 전단장으로 있던 지휘관이 자신보다 훨씬 높은 전공을 올린 것으로 평가를 받고 엄청나게 넓은 땅을 다스리는 총독으로 임명된 것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특히 오스카 빈켈이 바르나 왕국을 통째로 다스리는 총독으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바르나 왕국의 수도 라브나 공략전 당시 오스카가 이끄는 부대가 가장 먼저 도우나 강을 건너고 라브나를 점령하는 데 큰 공을 세운 것은 맞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방군 전체 작전 계획 하에서 이루어진 일이 아닌가!
굴다크 공작이 이끌고 온 대군과 맞붙은 회전에서 오스카의 부대가 가장 큰 압력을 막아냈다 해도 그 역시 전체 작전 계획을 수행한 것에 불과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급박한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판단하여 적의 대장 굴다크 공작을 쓰러뜨린 자신의 공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어쨌든 바르나 대첩 이후 페르보 제국으로 진군한 뒤 격렬하게 저항하는 페르보 제국 잔당과 싸우는 도중에 오스카가 먼저 군단장으로 진급을 했고 그로부터 2년 뒤 자신이 군단장으로 진급을 했지만, 그것은 경량 멕 전단의 한계로 투입될 수 있는 전장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지 자신의 능력이나 공적이 오스카에 비해 처지기 때문이 아니었다.
라이네 후작이 오스카를 편애하여 계속 선봉으로 세우거나 중요한 전장을 맡겨 공을 세울 기회를 많이 주었기 때문이지 결코 오스카의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런데 결과는 오스카는 바르나 식민지 총독.
그나마 자신에게 굴다크 공작령을 통째로 맡겼더라면 그토록 서운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 땅을 다섯 개 지방으로 나누어 그중 하나, 그것도 땅은 넓으나 사람도 별로 없고 지형도 험한 산간 지방 폴타바를 주었으니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폴타바는 중요한 땅이야. 산 너머에 있는 벨고트 왕국은 비록 우리 필센 제국과 화친 조약을 맺기는 했으나 강경파들이 득세하고 있고, 페르보의 귀족들과 파일럿들이 많이 달아난 곳이거든.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될 것이야. 산악 지방이라 일반적인 멕 나이트보다 경량 멕을 운용하는 것이 더 낫고, 자네가 경량 멕 지휘에 일가견이 있으니 믿고 맡기는 것이네.”
공작이 된 라이네 후작의 말은 전혀 블란트를 위로하지 못했다.
그는 라이네 후작이 공연히 이 땅의 중요성을 부각하여 자신을 속인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공이 크다면 더 크고 좋은 땅을 줄 것이지 산간 지방을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어차피 식민지 총독은 명목상의 지위일 뿐이라 총독이 된 군인들 모두가 대리인을 파견해 다스리고 있었다.
필센 제국군 소속 지휘관으로서의 임지와 총독으로 임명된 식민지가 일치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경량 멕 2개 전단과 일반 멕 1개 전단 그리고 공병대와 보병 사단으로 이루어진 군단을 이끌고 자신이 30년 동안 다스리게 될 폴타바로 떠났다.
가도 가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산과 바위뿐, 사람이 농사를 짓고 도시를 이루며 살 만한 들판이라고는 좀처럼 만날 수가 없는 광활한 산악 지대는 그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
어쨌든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니 뽑아 먹을 수 있는 만큼 뽑아 먹고, 여차하면 벨고트 왕국을 쳐서라도 공을 세워 기어이 인정을 받고야 말리라 다짐해 보아도 좀처럼 힘이 나지 않았다.
제국 기사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졸업과 동시에 모두가 선망하는 근위대에서 근무를 하고, 대전쟁 기간에 동방군에 자원하여 굴다크 공작을 쓰러뜨리는 큰 공을 세운 야심 가득한 젊은 군단장은, 페르보 제국 땅 구석의 산간 지방으로 밀려난 데 대한 좌절감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술에 찌들어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복이 굴러들어 왔다.
한 청년이 조용히 찾아와 자신을 굴다크 공작의 막내아들이라고 소개하며 놀라운 이야기를 한 것이다.
“폴타바에 마나석이 납니다.”
“······!”
“2차 대전쟁 발발 전부터 아우로라 연합에서는 마나 연료를 오카수스 대륙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 마나석 광산 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당연히 극비에 부쳤지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으음······.”
“폴타바에 마나석이 발견된 것은 상당히 오래되었으나 매장량이 충분한지, 그것으로 마나 연료를 추출할 수 있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비밀리에 말입니다. 그러는 동안 전쟁이 끝나고 말았지요.”
“이제 와서 그 사실을 내게 알려 주는 이유가 뭐지? 정체를 밝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말이야.”
굴다크 공작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첫째와 둘째는 전쟁터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셋째는 행방이 묘연했다.
굴다크 공작의 아들이면 특별 관리 - 사실상 감금 - 에 들어가게 된다.
“제가 이 일을 알려드리는 이유는 장군께 부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탁?”
“네. 식민지가 된 우리 페르보의 백성들이 얼마나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지 잘 아시시라 생각합니다.”
대다수의 식민지 총독들은 필센 제국이 정한 최소한의 동화 지침을 준수하는 선에서 최대한 백성들을 쥐어짜고 있었다.
폴타바의 총독이 된 블란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우리 굴다크의 백성들을 부디 자애롭게 통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우리 백성들은 언제든 장군을 진심으로 따를 것입니다.”
“흥! 백성들의 고혈을 빨지 말고 마나석이나 먹어라 이건가? 대단한 애민 정신이로군.”
블란트는 당연히 청년의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어차피 마나석 발견은 필센 정부에 보고할 수밖에 없다. 정부에서 파견한 관리가 와서 현장을 통제할 테고 나는 눈곱만 한 부스러기를 얻는 데 그칠 텐데 백성들을 쥐어짜지 말아 달라고?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원하신다면 비밀리에 채굴하여 비밀리에 처분할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게 뭐지?”
“산 너머 벨고트 왕국에 파는 것이죠.”
“······!”
“장군께서 원하신다면 조용히 그 일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굴다크는 오래전부터 벨고트와 왕래해 왔으니까요.”
마나석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필센 정부에 보고하지 않고 몰래 채굴하여 한때 아우로라 연합에 속해 있다가 투항한 인접 국가에 판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블란트는 눈을 치켜뜨고 청년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 그의 가슴에는 필센 제국에 대한 원망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이 청년이 말했다.
“필센 제국에서 이곳 폴타바까지는 무척이나 멉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흐음······.”
“이 땅의 백성은 장군의 백성입니다. 장군께서 아껴 주신다면 장군을 어버이처럼 따를 것입니다. 부디 자애롭게 다스려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블란트는 청년의 말을 모두 믿은 것은 아니지만, 백성을 위하는 그의 태도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 일이 손해인 것도 아니었다.
그의 말마따나 노바에서 멀리 떨어진 이 아우로라 대륙 깊숙한 산간 지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누가 알 것인가?
변경에서 괴수와 어울려 지내던 이름 없는 황족도 황제가 되는 판에 명문가 출신으로 대단한 능력을 지닌 자신이 이 산골 지방의 자애로운 왕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그러다 평판이 퍼지고 힘을 얻으면 폴타바뿐 아니라 굴다크 지방 전체의 지지를 얻을 수도 있고, 더 나아가 페르보 제국 백성들이 따를지도 모른다.
물론 굴다크 공작의 아들이 자신을 섬길 때 가능한 이야기였다.
아우로라 대륙의 백성들이 필센 제국의 총독을 곧바로 지지하지는 않을 테니까.
똑똑한 블란트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
페르보 제국을 얻는다면 아우로라 대륙이라고 장악하지 못하리란 법이 없었다.
오랜만에 즐거운 야심의 날개를 자유로이 펼쳐 나가던 블란트는 현실로 돌아왔다.
‘최소한 마나석 광산의 주인이 되어 막대한 재산을 챙길 수는 있겠지. 궁벽한 산골 백성들을 쥐어짜는 것보다는 그것이 이익일 테니까.’
정부에 보고해야 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이름이 무엇이냐?”
“베키오. 베키오 굴다크입니다.”
“베키오라···, 알았다. 너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감사합니다, 장군.”
블란트는 베키오가 자신이 죽인 굴다크 공작의 아들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베키오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도 분명하지 않았고, 설사 안다고 해도 이런 어린 청년 정도는 충분히 제어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옛 굴다크 공작령 폴타바 지방의 총독이 된 블란트 베른카슈는 굴다크 공작의 막내아들 베키오 굴다크와 손을 잡았다.
***
클라크는 제국 기사 아카데미에 연구년 신청서를 제출했다.
가야 할 곳이 아우로라 대륙이고 얼마나 많은 지역을 돌아다녀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방학 기간 중에 끝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연구년 신청이 받아들여지자 그는 편지 한 통을 써서 부쳤다.
며칠 후 변경 8구역에서 가프 마법 연구소의 마법사 두 명이 찾아왔다.
“반갑습니다, 교수님. 크루소입니다. 이쪽은 아발롱이고요.”
“클라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세 사람은 브레머 항으로 가서 부르가스로 가는 여객선에 올랐다.
그러는 사이 클라크가 보낸 편지는 열차를 타고 변경 8구역으로 달렸다.
변경 8구역에서 가장 깊숙이 자리한 역인 레이크 시티 역에 도착한 뒤에도 편지는 이동을 계속했다.
보급품을 져 나르는 멕 워커에 실려 서쪽으로 계속 움직인 것이다.
멕 워커들의 행렬은 접시꽃 분지 일대에 조성된 괴수 목장들을 지나고도 한참이나 더 원시의 땅 깊숙이 들어갔다.
놀랍게도 나무들이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원시의 숲 속에 사람들이 사는 도시가 있었다.
그곳에 도착한 멕 워커는 보급품과 함께 우편물을 내렸다.
그리고 그곳의 주민들이 우편물의 주인을 찾아 배달해 주었다.
집에서 나와 편지를 받은 한 소년이 소리치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 엄마! 엄마 앞으로 편지 왔어!”
한 여인이, 그 편지를 받았다.
클라크의 글씨를 알아본 여인의 눈에 눈물이 핑 고였다.
그러나 아들 앞에서 차마 눈물을 흘릴 수는 없었다.
“누구야, 엄마?”
“응, 엄마 친구.”
어느덧 30대의 나이가 된 사라가 그렇게 둘러대며 편지를 조심스럽게 개봉했다.
원시의 땅 깊숙이 유배되어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음에도 아이러니하게 자유시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이곳에서 태어난 소년은 엄마의 눈이 붉어진 것을 봤지만 어른스럽게 모른 척해 주었다.
다만 바깥세상에서 온 편지가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뭔데 엄마?”
“응, 엄마 친구가 일이 있어서 바다 건너 다른 대륙으로 간대. 상당히 오래 걸릴 수 있다고 하네.”
“바다? 다른 대륙?”
이 도시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소년은 바다라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엄마도 바다를 건너가 본 적은 없어.”
“그렇구나.”
소년이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사라가 소년의 등짝을 팡 쳤다.
“걱정하지 마. 우리 꼭 바다를 보러 가자.”
“피!”
“정말이야! 꼭 그렇게 될 거라니까.”
“알았다고요!”
“그럼 엄마는 오늘 오후 근무가 있어서 나가 봐야 하니까 혼자서 밥 잘 먹고 있어. 알았지?”
“걱정 말아요. 내가 앤가 뭐.”
어느 틈에 편지를 주머니에 접어 넣은 사라는 소년의 얼굴에 기습적으로 뽀뽀를 하고 집을 나갔다.
소년이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아니, 하지 말라니깐! 애 아니라고!”
“네가 좋은 걸 어떡하니?”
“에잇!”
소년이 볼을 부풀리며 화를 내고 멀어지는 엄마를 쏘아보았다.
“헤르츠, 갔다 올게!”
소년은 그렇지 않아도 힘든 멕 워커 조종을 해야 하는 엄마가 슬픔 속에서 일하지 않도록 얼른 화를 풀고 큰 소리로 인사했다.
“알았어요. 다치지 말고 조심해요!”
소년은 혼자 밥을 먹고 설거지까지 마친 뒤 몇 권 되지 않는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소년의 얼굴은 클라크의 소년 시절 모습과 꼭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