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6. 무척 복잡한 일이에요
4부 6. 무척 복잡한 일이에요
바르나 왕국은 2차 대전쟁 기간 동안 가장 치열한 전장이었다.
필센 제국의 해외 영토인 부르가스와 아우로라 연합에서 가장 강력한 페르보 제국 사이에 위치하여 필센 제국 최강의 전력이라고 평가받는 동방군과 아우로라 연합군의 주축인 페르보 제국군 간의 전투가 3년 이상 지속된 곳이기 때문이다.
수천 대의 멕 나이트들이 맞붙고 그 이상의 멕 워커들이 이동하면서 마을과 도시가 무너지고 농토는 단단히 다져져 백성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떠돌았다.
수도 라브나는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파괴되었으며 이후 먹고살 것이 전혀 없는 이 나라의 백성들은 점령국인 필센 제국이 제공한 원조 물자를 배급받아 겨우 목숨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식민지 바르나의 총독은 오스카 빈켈.
라브나 함락전과 바르나 최후의 회전에서 큰 공을 세워 동방군 사령관 라이네 공작의 총애를 받은 그는 이후 페르보 진군 이후에도 계속 공을 세워 최단 기간에 전단장에서 군단장으로 승진했다.
그렇다 해도 바르나라는 중요한 나라를 통째로 다스리는 총독으로 임명하기에는 가문, 계급, 복무 기간, 공적 등 여러 면에서 논란이 있었으나 바르나가 워낙 처참하게 파괴되어 이 땅의 총독을 희망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데다 루산이 힘을 쓴 덕에 오스카가 총독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르나를 다스리는 사람은 총독인 오스카가 아니라 ‘바르나 회사’의 사장 바덴 고슬라였다.
오스카 빈켈은 다른 많은 총독들이 그러하듯이 식민지에 대리인을 두고 자신은 아우로라 연합의 주축이었던 페르보 제국 땅을 안정화시키는 임무를 맡고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면서 대리인에게 바르나 회사의 사업에 최대한 협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루산이 자신을 바르나 총독으로 민 이유를 잘 이해하고 그 뜻에 따랐던 것이다.
점령지 백성들을 쥐어짜는 것은 점령지를 제국의 영토로 평화적으로 편입하고 점령지 백성을 필센 제국 백성으로 동화시키는 데 방해가 된다.
바르나는 부르가스, 페르보, 루한, 시바스, 부르사와 닿는 요충지이다.
따라서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로 키운다.
부유해진 이 나라 백성들은 필센 제국의 통치에 순응하게 되고, 식민지 통치 기간이 끝나더라도 고슬라 그룹은 이곳에 투자한 산업 기반을 통해 꾸준히 이윤을 창출한다.
이것은 고슬라 그룹뿐 아니라 총독인 오스카 빈켈에게도 이로운 일이었다.
그가 할 일을 바덴이 대신함으로써 바르나를 개발하는 데 드는 막대한 자금을 직접 조달하기 위해 애를 쓸 필요도 없고, 필요한 정책과 신경이 많이 쓰이는 운영을 직접 하지 않아도 되며, 발전된 바르나에서 많은 이익이 그에게 돌아가고 바르나 발전의 공 또한 그의 공적으로 반영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덴은 아라드 왕국 재건 계획, 변경 농업 회사, 변경 7구역 재건 프로젝트, 부르사 왕국 개발 계획, 동부 공업 지구 재개발 사업 등 그동안 수행해 온 거대 프로젝트 경험과 고슬라 그룹의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바르나 재건 사업에 총력을 기울였다.
인구 조사, 토지 조사, 식량과 생필품 배급부터 도시와 마을 재건 사업, 철도 부설, 도로 확장, 학교 설립, 토지 분배에 이르기까지 사회 기초를 다지는 사업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하면서 지역별로 농업 회사를 세우고 광산을 개발하고 공단을 조성하는 등 사회 구조를 튼튼히 다지는 사업들을 착착 실행에 옮겼다.
바르나는 페르보 제국, 루한 왕국, 시바스 왕국 등과 달리 전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 아니기에 멕 나이트 부대는 기동 전단 하나만 주둔하고 있었으나 사회 기반이 무너진 이 땅의 질서 회복과 재건을 위해 보병 사단 7개와 공병 부대 3개가 주둔해 있었다.
여기에 옛 바르나 병사들을 재건병으로 명명하여 편성한 재건 부대 8개 사단을 동원하여 사업을 진행해 나갔는데, 바덴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새로 출시한 멕 워커 3천 대와 농업 기계 8백 대, 화물 자동차 1천 5백 대를 투입했다.
반달 식품에서 군사용으로 만든 레오파드 간편식과 그 뒤에 만든 레오파드 조리식은 먹을 것이 없는 바르나 백성들에게 친숙한 식사 대용품이 되었고 그 제품들에서 나온 레오파드 마스코트 인형은 바르나 아이들의 유일한 장난감이 되어 주었다.
바덴이 운영하는 바르나 회사는 단지 총독의 통치를 보조하고 백성들을 착취하는 식민지 회사가 아니라 전쟁으로 무너진 사회를 직접 재건하며 경제 기반을 착착 쌓아올리는 방식이라 엄청난 자금이 투입되었지만, 그 덕에 바르나는 필센 제국의 점령지들 가운데 가장 빠르게 질서를 회복하고 안정을 되찾았으며 새로운 통치에 대한 백성들의 순응과 협조 수준 또한 가장 높았다.
그렇게 바덴이 바르나에 머무르며 이 땅의 재건과 산업 구조 구축에 힘을 쓴 지 10년이 지난 어느 날,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클라크가 방문한 것이다.
“어서 오세요, 교수님. 작년에 잠깐 귀국했을 때 보고 처음이죠?”
이미 클라크의 편지를 통해 그의 방문 사실을 알고 있던 바덴이 미소를 지으며 환영해 주었다.
클라크 또한 반갑게 인사했다.
“네. 잘 지내셨죠?”
“늘 일에 치이며 살았죠. 앉으세요.”
바덴이 클라크에게 자리를 권했다.
클라크는 응접 소파 쪽으로 걸어가며 바덴의 집무실을 자연스럽게 한번 둘러보았다.
바덴의 책상 오른쪽 옆에 운동장처럼 넓은 탁자가 있었는데, 그 위에 산과 들과 도시의 모형이 정교하게 펼쳐져 있었다.
이 땅 바르나를 작게 축소해 놓은 모형이었다.
그리고 바덴의 책상 왼쪽 옆에도 상당히 큰 탁자가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는 온갖 자료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직접 활용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느 자료가 무슨 내용을 담은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방대한 양이었다.
“어지럽죠? 정리 정돈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바덴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회장님이 정리 정돈까지 잘하시면 너무 인간미가 없지 않겠어요?”
클라크의 대꾸에 바덴은 다시 한번 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이 응접 소파에 앉고 잠시 후 비서가 시원한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바덴의 권유에 클라크는 찻잔을 들었다.
익숙한 나푸라산(産) 홍차 맛인데 여름의 뜨거운 열기가 깨끗이 가시는 느낌이었다.
“좋은데요?”
“그렇죠? 금년 여름부터 노바에 출시될 신제품이에요. 사실 필센 제국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 동시에 출시하고 싶은데 더운 날 시원함을 유지할 수 있는 나라가 많지 않아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렇군요.”
“사회가 발전하지 않으면 다양한 제품을 누릴 수가 없죠.”
클라크는 바덴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휴일이나 방학이 되면 그녀를 수행하며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사업가는 자신의 이익을 높이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익을 높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이익과 사회 전체의 부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아무리 좋은 상품이라도 사회 전체의 구매력이 높지 않거나 그 상품을 소비하기 위한 기반 구조가 마련돼 있지 않으면 판매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회 구성원 전체의 구매력이 높아지면 사업가가 얻는 이익 또한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바덴은 사회 전체의 부를 증진시키는 총체적인 개발 사업에 관심을 기울여 왔고, 바르나를 그렇게 개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르나는 이 냉차를 즐길 준비가 되었나요?”
클라크의 질문에 바덴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아직 바르나 전체에 판매할 상황은 아니지만, 수도 리브나와 세 개 도시에는 냉장 설비를 갖춘 카페들이 있어요. 노바와 동시에 판매될 거예요.”
클라크는 이 나라에 냉장 설비를 갖춘 카페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백성들이 이런 냉차를 즐길 만한 구매력을 갖추었다는 데 더 놀랐다.
물론 모든 백성들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전쟁으로 철저히 부서졌던 나라가 십여 년 만에 어느 정도 재건에 성공했다는 뜻이기에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의 마음을 들여다본 듯이 바덴이 말했다.
“아직 갈 길이 멀었어요.”
“네. 하지만, 잘 될 겁니다.”
“고마워요.”
바덴이 다시 한번 차를 마시고는 잠시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아이는 잘 있나요?”
클라크의 표정이 일순 어두워졌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회복하고 담담함을 유지한 채 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종이를 꺼내 펼쳐 바덴에게 보여 주었다.
바덴이 조심스럽게 종이를 받아서 보았다.
거기에는 소년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바덴은 가슴이 아팠다.
얼마나 많이 접었다 폈는지 그림의 접은 선이 지워지고 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언제 그린 거죠?”
“최근에 아이 엄마가 그렸다고 하더군요.”
“점점 아빠 얼굴을 닮아가네요. 무척 똑똑해 보여죠.”
“하하, 그런가요.”
“그럼요. 우리 교수님을 닮았으면 얼마나 똑똑하고 현명하겠어요? 저는 아직도 교수님이 가방을 던져 마차를 세우고 제 신발을 가져다주신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답니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지혜로운 소년이었죠.”
바덴이 사업 제안을 하기 위해 루산을 기다리고, 루산이 거절하고 마차를 출발시켜 멀어지던 순간을 말하는 것이다.
그때 만약 클라크가 바덴을 가엽게 여겨 마차를 세우기 위해 가방을 밖으로 던지지 않았다면 루산과 자신의 모습은 지금과 많이 달랐을지 모른다.
클라크 또한 삶의 방향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클라크의 생각은 달랐다.
“백작님이나 회장님 모두 뛰어난 분들이라 제가 아니었어도 세상에 이름을 떨치셨을 겁니다.”
루산 덕에 변경의 보잘것없는 소년이 대학을 갈 수 있었고, 집사가 아닌 교수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바덴이 강력히 지지해 주었다.
그리고 사라가 아기를 낳았을 때 루산이 특별히 신경을 쓰고 보살펴 주었다.
그것은 변경 8구역을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루산이라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자유시는, 대전쟁 기간에 변란을 일으킨 사상범들을 유배시켜 놓은 곳이라 나라에서 특별히 감시하는 중이었다.
바깥세상의 소식은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그곳에서 바깥으로 소식을 전할 방법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일 년에 한 번씩 기자들이 들어가 자유시의 모습을 기록하거나 자유시 주민이 결혼, 출생, 사망 등 중대사를 겪었을 때 오직 친족에게만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밤베르크 공작이나 노바 고위 귀족들의 견제를 늘 의식하며 조용히 지내려는 루산이 위험 부담을 안고 손을 써 준 것이다.
그 덕에 사라가 그린 아들의 그림이 클라크의 손에 들어올 수 있었다.
“저야말로 두 분께 평생 갚을 수 없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클라크의 눈시울이 촉촉해지는 것을 보고 바덴이 위로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교수님과 우리는 가족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언젠가는 아이와 아이 엄마를 꼭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바덴과 클라크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 희망도 없다면 어떻게 살겠는가?
그리고 그 희망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바덴이 클라크 아들의 그림을 돌려주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화제를 전환했다.
“가프 연구소의 마법사들과 함께 오셨죠?”
“네.”
“현재 가프 연구소는 아우로라 대륙의 마나석 광산 일곱 군데와 관련이 되어 있어요.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두 군데 외에도 다섯 군데에서 개발에 관여하고 있죠.”
바덴이 그 사실을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지만, 클라크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고슬라 그룹의 정보력이 필센 제국보다 뛰어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사업적인 부분에서는 더 뛰어난 면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가프 외에도 필센 제국에 있는 많은 마법 연구소들이 마나석 광산에 뛰어든 상태이고, 아우로라 대륙의 마법사들, 사업가들, 권력자들도 얽혀 있죠. 무척 복잡한 일이에요.”
“네.”
“이번 일과 관련해서 투릭 오제로 사장님이 교수님을 도울 겁니다.”
바덴은 비서를 불러 투릭 오제로를 들어오게 했다.
한때 아우로라 연합군의 멕 나이트 파일럿으로 아라드 왕국을 침공했다가 루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던 중년의 기사가 멋진 신사 차림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