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12. 일절 판매하지 않습니다
4부 12. 일절 판매하지 않습니다
투릭 오제로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가며 차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던 클라크가 감회에 젖어 말했다.
“정말 많이 달라졌군요.”
“이 땅에 오신 적이 있습니까?”
“예. 벌써 14년 전인가? 고슬라 회장님과 함께 온 적이 있습니다.”
클라크는 예전에 바르나에 와 본 적이 있었다.
대전쟁이 완전히 끝나기도 전에 이미 바르나 왕국 땅에 식민지 회사를 설립하기로 결정돼 있었던 바덴을 수행했던 것이다.
당시의 상무대신이자 지금의 재상인 벤야민으로부터 동방군 보급을 담당하는 회사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은 바덴은 아라드 왕국 재건 사업에 필요한 물자를 대기 위해 만든 상사 회사를 확대 개편해 동방 물산을 설립하고 70만 대군에 필요한 물자를 성공적으로 조달함으로써 식민지 회사를 운영하고 싶은 지역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 그때 바르나 왕국을 골랐다.
그 당시의 바르나 왕국은 완전히 폐허였다.
온전한 집과 건물, 온전한 농토, 온전한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가 없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온전한 것이 없었다.
그러던 곳이 동서를 빠르게 잇는 철도와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포장도로가 놓이고, 그 옆으로 잎이 무성한 가로수가 가지런히 서 있고, 반듯반듯한 건물들이 들어찬 도시와 곡식이 자라는 광활한 농토로 변해 있는 것을 보니 인간의 힘에 대한 경이로움이 솟구쳤다.
파괴하는 힘도 놀랍지만, 다시 지어 올리는 힘도 감탄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의 수가 많다고 해서 이런 결과가 나오지는 않는다.
아무나 이런 일을 할 수는 없다.
피폐해진 바르나 땅의 백성들 백만 명, 천만 명을 모아 봐야 이런 성과는 나타나지 않는다.
선명한 청사진과 강력한 추진력, 막대한 자본을 가진 사람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바덴 고슬라였다.
바덴은 공식적으로 식민지 회사 운영 허가를 받기 4년 전부터 바르나에 기초 공사를 시작했다.
페르보 제국으로 진군하여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동방군 병력에 물자를 대기 위해 이미 공병대가 신작로를 닦아 놓았는데, 그 군용 보급로 옆에 자동차가 빠르게 다닐 수 있는 포장도로를 건설한 것이다.
동방군이 전리품으로 획득하였으나 이미 충분히 보유하고 있어서 쓸 데가 없던 아우로라 연합의 멕 워커를 싸게 대량으로 구입하고, 노바에서 도로 건설 장비를 들여오고, 일거리가 없는 바르나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대거 고용하여 튼튼하고 넓은 도로를 건설했다.
부르가스와 페르보 제국을 잇는 바르나 동서 고속도로는 대전쟁 종식 4년 전에 바덴이 건설을 시작한 최초의 고속도로였다.
이후에도 바덴은 동방군이 획득한 멕 워커를 전량 구입하고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막 출시한 신형 멕 워커를 대거 투입해 도로를 깔고, 철도를 놓고, 집을 짓고, 농지를 복원했다.
바덴이 건설한 도로와 철도로 대형 화물 자동차들이 산더미 같은 보급품을 부르가스에서 페르보로 줄기차게 실어 나른 덕분에 동방군은 아우로라 연합군의 강력한 반격에 직면하고서도 버텨 낼 수 있었고 결국 대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는 평가가 군부에서 나오기도 했다.
대전쟁 이후에는 그 도로와 철도를 통해 막대한 양의 물자가 바르나 땅 구석구석으로 전해져 폐허가 된 땅에 건물이 올라가고 단단하게 다져져 있던 농지가 개간되고 목장에 가축이 뛰놀고 나무와 화초가 심어졌다.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바르나는 그렇게 다시 일어선 것이다.
클라크는 크게 달라진 바르나의 풍경과 인간의 힘을 마음에 새기며 옛 페르보 제국 땅으로 넘어갔다.
***
클라크가 바덴을 만나기 위해 바르나에서 잠시 멈춘 사이에 가프 마법 연구소의 마법사인 크루소와 아발롱은 열차를 타고 먼저 페르보 제국으로 들어가 있었다.
가프 마법 연구소가 개발에 참여하고 있는 마나석 광산에 가서 클라크가 알고 싶어 하는 내용을 미리 파악해 놓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클라크가 보름스 백작과 고슬라 회장의 힘으로 다른 마나석 광산을 조사할 때 함께 다니며 마나석 개발 현황과 연구 진행 상황, 그리고 향후 마나석이 미칠 영향에 대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아닙니다.”
“이쪽은 오제로 사장님. 아우로라 대륙 사정에 매우 밝은 분으로 앞으로 우리 연구를 도와주실 분입니다. 고슬라 회장님이 소개해 주신 분이죠.”
그렇지 않아도 마법사들은 비밀 장소에 클라크가 데려온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하고 걱정도 되었는데 고슬라 회장이 소개했다는 말에 안심했다.
“반갑습니다. 투릭 오제로입니다.”
투릭이 먼저 마법사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어서 클라크가 마법사들을 소개했다.
“가프 연구소에서 마나 연료를 연구하시는 크루소 님, 아발롱 님입니다.”
“크루소입니다.”
“아발롱입니다.”
이번에는 크루소가 처음 보는 가프 마법 연구소의 마법사를 클라크에게 소개했다.
“이곳 마나석 광산의 책임자 빌르봉입니다.”
클라크와 투릭이 그에게 인사했다.
그들은 서로 악수를 나눈 뒤 곧바로 광산으로 이동했다.
길이 험해 자동차가 갈 수 없어 말을 탔다.
“이곳 클로프 지역의 마나석 광산은 이제 막 개발을 시작해 규모가 그리 크지 않습니다. 매장량도 예측이 어렵고요. 다만 여기서 나온 마나석의 품질이 상당히 좋아서 괴수 프로토 성체의 생명 구슬에서 볼 수 있는 마나 밀도의 3분의 1수준은 됩니다.”
크루소가 오솔길을 지나며 말했다.
클라크도 이 분야 연구를 상당히 해 왔기에 그 수치가 상당히 높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정도 밀도면 품질이 꽤 좋은 편이군요.”
“맞습니다. 매장량이 얼마나 되는지가 문제인데 지질학적으로 볼 때 대형 광상은 아닌 것 같다고 아펜도르의 마법사가 말하더군요.”
“아펜도르?”
“이 근방에서 꽤 규모가 큰, 아니 예전에는 컸던 마법 연구소 이름입니다. 지금은 뿔뿔이 흩어져 우리 밑에서 몇 사람이 일하고 있지요.”
“아!”
“잘 아시겠지만, 아우로라 대륙의 마법 연구소들은 마나석 탐사와 연구를 오래전부터 해 왔습니다. 본격적으로 광산이 개발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아서 그렇지······.”
“그렇죠.”
“그래서 그들을 고용해 마나석 광산을 찾고 마나석을 연료로 전환하는 기술 연구에 참여시키고 있어요.”
당연한 일이었다.
가프 마법 연구소가 아니더라도 필센 제국 정부, 마나석에 관심을 기울이는 필센 제국의 다른 마법 연구소, 욕심 많은 총독들 역시 아우로라의 마법사들을 고용해 일을 시키고 있을 것이다.
클라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가프 측에서는 이 광산에서 나온 마나석을 어떻게 처리하나요? 마나 연료를 뽑아서 판매합니까? 아니면 마나석 상태로 판매합니까? 판매한다면 어디에 하나요?”
이번에는 현장 책임자 빌르봉이 대답했다.
“우리 연구소는 다른 곳에 일절 판매하지 않습니다.”
“예?”
클라크의 반응에 가프 측 마법사들이 미소를 지었다.
“아시다시피 우리 마법 연구소는 이름 없는 중소 연구소가 아니지 않습니까? 정부 방침을 어기고 비밀리에 마나석 광산 개발에 참여하고 있기는 하지만, 함부로 처분하지는 않아요. 정부에 들킨다 해도 개발하는 것과 처분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죠.”
“그렇긴 하죠.”
“우리는 마나석을 찾아내 연료로 전환하는 연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미 변경에서 마나 연료 재료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당장 마나석을 판매하지 않아도 연구소의 존립에 전혀 문제가 없으니까요.”
“그럼 채굴한 마나석은 어떻게 하나요?”
“전량 보관합니다.”
지금은 마나석이 발견되면 안보상의 이유로 무조건 필센 정부에 귀속되도록 되어 있지만, 언젠가는 민간 개발이 허용되리라 믿고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단순히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경로를 통해 마법 연구소가 마나석 개발에 뛰어드는 것이 합법화되도록 로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보관 창고 규모가 커야 하지 않습니까? 들키기도 쉬울 텐데요?”
“그렇게 큰 창고가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채굴을 많이 하지 않으니까요. 광상이 얼마나 큰지, 광맥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확인하는 정도로 개발하고 있죠.”
나중에 합법화되면 그때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위해 준비하는 정도만 할 뿐 채굴량을 늘리는 작업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말이었다.
“마나석 채굴량이 많지 않으면 총독이 싫어하지 않습니까? 총독으로서는 마나석을 많이 채굴해야 자신의 수중으로 들어오는 금액이 많아질 테니까요.”
“기본적으로 마나석 광산을 개발하는 데 최소 개발 금액을 총독에게 지불하고 나중에 채굴량에 따른 추가 금액을 지불하기로 계약합니다. 본격적인 개발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당장은 많이 채굴하는 것보다 수입이 적겠지만, 총독들은 우리 같은 대형 마법 연구소와 손을 잡는 것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왜 그렇죠?”
“우리 역시 법을 어기고 있기는 하지만, 필센 제국에 위험을 끼치는 일은 하지 않으니까요.”
마나석을 함부로 외부에 유통하지 않고 합법적인 개발권 획득의 길이 열릴 때까지 연구에만 몰두하며 채굴한 물량을 전량 보관함으로써 필센 제국에 대적하려는 적에게 흘러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그러니 총독들로서도 몰래 마나석 광산을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이 들키더라도 어느 정도 이해를 받을 수 있고 큰 문책을 당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당장의 수입은 많지 않더라도 마법 연구소가 본격적으로 마나석 광산 개발을 할 수 있도록 합법화되면 그때부터는 확실한 수입을 올릴 수 있는 데다 적을 이롭게 한다는 혐의를 전혀 받지 않기 때문에 몰래 마나석 광산을 개발하려는 총독들은 이왕이면 필센 제국의 대형 마법 연구소와 손을 잡기를 좋아한다.
“그렇군요!”
경사가 그리 험하지 않은 호젓한 오솔길을 말을 타고 천천히 지나가며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에 클라크는 이번 조사의 대상을 정하는 기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모든 총독들 혹은 페르보 제국 전역을 조사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는 중요한 일이었다.
‘돈이 많이 필요한 총독, 욕심이 많은 총독, 돈 씀씀이가 갑자기 헤퍼진 총독들을 추려야겠어. 필센의 대형 마법 연구소들이 개입한 광산은 제외해도 되겠군. 굳이 제국 정부의 눈 밖에 나는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을 테니까.’
이 정도만 해도 상당히 넓은 지역, 많은 총독들이 대상에서 제외될 것이다.
‘당장 마나석을 판매하지 않으면 버티기 어려운 중소 규모의 마법 연구소, 이미 망해서 마나석 광산 개발 외에는 다른 살길이 없는 아우로라의 마법 연구소나 거기 출신 마법사들, 이들이 개입한 광산을 대상으로 조사해 봐야겠어.’
클라크가 투릭을 쳐다보니 마침 그도 클라크를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솔길을 따라 더 깊숙이 들어가니 필센 제국의 군인들이 경비를 서고 있는 길목이 나타났다.
비밀 광산은 비밀 광산이라 출입 관리가 엄격했던 것이다.
그러나 경비를 서던 병사들은 가프 마법 연구소의 빌르봉을 보고 인사를 하고는 길을 비켜 주었다.
클라크 일행은 무사히 병사들을 지나 마나석 광산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