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15. 그물코를 너무 촘촘하게 만들면
4부 15. 그물코를 너무 촘촘하게 만들면
가프 마법 연구소의 마법사들은 클라크의 의견이 옳다 여겼다.
오카수스 대륙의 마법 연구소들 - 정확히 말하자면 필센 제국의 여러 마법 연구소들이 마나석 연구와 선점을 위해 아우로라 대륙으로 진출할 때 가프 연구소 역시 관심을 보이고 그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가프 연구소는 이미 오카수스 대륙 변경의 괴수 부산물을 상당 부분 확보하고 있었다.
필센 제국 8개 변경 구역 가운데 가장 많은 부산물을 생산하는 변경 8구역과 그에 필적하는 생산량을 보이는 아라드 변경에서 괴수 부산물을 독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마나 연료, 윤활유, 각종 부산물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초반에는 마나석 확보에 사활을 거는 정도는 아니었고, 마나석이 세상에 미칠 파장을 확인하고 마나석의 매장량이 기존의 마나 연료 판도를 바꿀 정도로 많을 경우에 연구소의 역량을 집중한다는, 다소 소극적인 태도로 마나석 문제에 접근했다.
그런데 마나석이 대량으로 매장돼 있는 광산이 최초로 발견된 이후 식민지 총독들이 경쟁적으로 마나석 광산 개발에 뛰어들고 필센 제국의 마법 연구소들뿐 아니라 필센 치하에서 생존을 모색하는 아우로라 대륙의 마법사들이 가세하여 마나석 광산들이 속속 발견되어 갔다.
가프 마법 연구소는 그제야 마나석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도 마나 연료 분야 1위라는 자부심이 존재하여 말로는 아우로라 대륙의 마나석 연구에 대해 굳이 적극적으로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나석 광산을 많이 개발해 마나석을 대량으로 확보해 놓으면 마나석으로 연료를 추출하든 다른 용도로 사용하든 가프의 기술력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현재 아우로라 대륙의 마나석 연구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외부자인 클라크의 말을 듣고 경각심을 갖게 된 그들은 아펜도르의 마법사에게 진지하게 협조를 구했다.
“이번 일을 도와준다면 가프 연구소의 마법사로 받아 주겠습니다.”
“······!”
갱도 깊숙한 곳에서 마나 등으로 벽면을 살피며 지질을 연구하던 아펜도르의 마법사는 얼른 믿지 못했다.
마법 연구소들은 폐쇄성이 강해 외부인을 쉽게 받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프의 마법사들은 오카수스 대륙인, 자신은 아우로라 대륙 사람이었다.
필요에 따라 이용할 수는 있지만, 한 울타리 안으로 받아 준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가프는 지난 20여 년 동안 크게 성장한 연구소입니다. 많은 마법사들이 새로 들어왔지요. 원한다면 기꺼이 받아 주겠습니다.”
말 한마디로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필센 제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마법 연구소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불안정한 삶의 기반이 튼튼한 반석으로 바뀐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이미 해체되어 동료들이 뿔뿔이 흩어진 아펜도르 마법 연구소 출신 마법사는 속아 보기로 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그렇게 그는 클라크, 투릭, 가프 연구소의 마법사 크루소와 아발롱의 조사 여행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순다르.
해체된 아펜도르 마법 연구소 출신의 겁 많은 초로의 마법사였다.
***
옛 페르보 제국 땅은 무척 넓어서 이동에 많은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지역 간 편차가 심해 발전이 잘된 지역은 철도와 포장도로가 깔려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지역은 비만 내리면 길이 진창으로 변해 자동차나 마차를 타고 가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조사 대상을 선정하는 기준을 마련했다 해도 무작정 찾아가기는 어려웠다.
마나석 광산은 대부분 오지에 자리했기에 한번 들어가면 여러 날을 허비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뽑은 조사 대상지 또는 조사 대상자를 더욱 좁힐 필요가 있어요.”
클라크가 투릭과 둘만 있는 자리에서 말했다.
“어떻게 말입니까?”
“백작님께서 제게 이걸 주셨습니다.”
클라크가 꺼낸 것은 경찰들이 가지고 있는 신분 패와 비슷한 크기의 물건이었는데, 모양이 경찰 패와 달랐다.
필센 제국의 황실을 상징하는 사자 모양이 금빛으로 양각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척 고급스럽고 정교한 사자 패였다.
“이게 뭡니까?”
“황제 폐하의 특명을 수행하는 관리가 필센 정부의 공권력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패라고 하더군요.”
“오! 그렇습니까?”
“저도 처음 보는 거라서 과연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는데, 이왕 가지고 있는 거라면 써 보는 게 좋겠죠?”
“그럼요! 잘만 사용하면 대상을 확 좁힐 수 있겠어요.”
두 사람은 필센 정부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필센 제국은 옛 페르보 제국 땅을 여러 식민지로 쪼개어 총독들에게 나눠 주었지만, 군사나 교통의 요지는 직할령으로 두어 대군을 주둔시켜 두었다.
인근 식민지들에서 페르보 인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기타 소요가 발생한다면 이 사태가 다른 지역으로 번지지 못하게 막고 서둘러 진압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한 이 직할령 주둔군 사령관은 점령지의 옛 지배층이나 백성들이 봉기를 일으키지 않는지, 인근 식민지들이 제국의 통치 방침을 잘 따르고 있는지 감시하는 일도 수행하고 있었다.
클라크는 페르보 땅에 있는 일곱 개의 직할령 가운데 가장 가까이 있는 로그라드 시로 향했다.
이곳의 사령관은 기터 자작인데 동방군의 대표적인 에이스 파일럿인 그는 바르나 대첩에서 큰 공을 세우고 이후 페르보 점령 과정에서 많은 공을 쌓아 군단장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남작에서 자작으로 승작하였다.
그 역시 식민지를 다스리는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적지 않은 공신들이 그러한 것처럼 자신의 식민지는 대리인에게 다스리게 하고 여전히 필센군의 중요 직책을 맡아 직할령의 사령관으로 있었던 것이다.
동방군의 유명한 에이스 파일럿으로서 강력한 레오파드 슈퍼 파워를 타고 아우로라 대륙을 질주하며 적 멕 나이트를 수없이 격파하던 전장의 영웅도 세월을 피해 갈 수는 없어 어느새 노년에 접어들었다.
그는 황금 사자 패를 가져온 이가 있다는 부관의 보고를 받고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전단장으로 승진한 뒤에야 정식으로 황금 사자 패의 존재와 이를 접했을 때의 행동 요령에 대해 교육을 받았고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던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으나 이후 단 한 차례도 접한 적이 없어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그 의미를 이해한 기터 자작이 과거 교육 받은 내용을 떠올리고 부관에게 엄숙하게 명령했다.
“조용히 모셔라! 황금 사자 패는 존재 자체가 비밀이니 실수로라도 입 밖에 꺼내서는 안 된다.”
“예, 사령관님!”
부관이 밖으로 나간 뒤 클라크와 투릭을 안내해 들어왔다. 그러고는 재빨리 다시 밖으로 나갔다.
기터 자작은 과거 바르나 대첩 당시 루산과 함께 도우나 강 도하 작전을 수행했고, 이후 굴다크 공작과의 대회전에서 함께 돌진했던 전력이 있었다.
루산의 놀라운 실력에 감탄하여 깊게 사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는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전투에서 사망했다는 핑계를 오스카에게 대개 하고 전장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기터 자작은 그 뛰어난 실력의 파일럿 이름도 모른 채 강렬하고 짧았던 기억을 가슴 속에 묻어 둘 수밖에 없었다.
기터 자작과 클라크는 루산 보름스와 인연이 있었으나 서로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
“황금 사자 패를 볼 수 있겠소?”
전쟁 영웅이 그 옛날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 보내며 말했다. 그러자 클라크가 평온한 표정으로 패를 내밀었다.
‘진품은 이렇게 생겼군!’
어차피 황궁으로 가서 이것이 진품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패를 보고 진품이려니 생각할 뿐이었다.
패의 진위 여부, 정확히 말하면 이 패를 가져온 사람이 황제의 밀명을 수행하는지 여부는 이 패를 가져온 사람의 말을 듣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는 황금 사자 패를 클라크에게 돌려주며 물었다.
“그래, 무슨 일로 오셨소?”
클라크가 패를 품에 조심스럽게 넣고 대답했다.
“로그라드 주둔군이 파악하고 있는 인근 식민지 마나석 광산 현황을 알고 싶습니다.”
투릭 오제로와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 적지 않지만, 이들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필센 제국의 공권력이 파악하고 있는 내용을 검토하려는 것이었다.
“음······!”
기터 자작은 마나석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황제의 사자가 무거운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연히 직할령 주둔군 사령관은 인근 식민지들의 현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첩첩산중에서 몰래 이루어지는 일이면 몰라도.
“그거면 되겠소?”
“총독들의 근황 정보도 알고 싶습니다. 갑자기 돈 씀씀이가 헤퍼졌다든가, 어떤 인사와 접촉했다든가 하는 것들 있지 않습니까?”
“중요한 내용은 정기적으로 보고를 올리고 있소만······.”
“그러실 테지만, 저는 현지에서 협조를 받으라고 들어서요.”
“······.”
“아무래도 시간 차이도 있고, 동일한 사안을 보고도 평가가 다를 수 있으니까요.”
“···알았소.”
“그리고 인근 식민지들에 드나드는 마법사들, 사업가들, 아우로라의 귀족들 정보도 알았으면 합니다. 총독이 그들과 접촉한 내용이면 더 좋고요.”
“마나석 광산 개발과 관련된 모든 내용을 파악하고자 한다는 말 아니오?”
“그런 셈이죠. 그런데 마나석 광산 개발뿐 아니라 유통과 가공까지 포함된 정보면 좋겠습니다.”
기터 자작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가 신중하게 말했다.
“그물코를 너무 촘촘하게 만들면 걸려들지 않을 물고기가 없소.”
“······?”
“아우로라 대륙의 사정에 대해 어느 정도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마나석 열풍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총독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오. 깊게 관여하든 옅게 관여하든, 주도적으로 추진하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대리인이 사업을 벌이든, 거의 모든 총독들이 이 문제와 연관돼 있을 것이오. 아마 황궁에서도 알고 있을 터인데······.”
클라크는 묵묵히 기터 자작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을 그저 비위 사건 다루듯 하면 충신들을 하루아침에 파렴치범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오. 그러면 안 되지 않겠소?”
클라크는 기터 자작이 이 직할령의 사령관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식민지를 받은 공신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그가 자신의 부정을 가리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전쟁 영웅의 말과 표정에는 무척 진지한 나라 걱정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클라크는 이번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시간이 갈수록 알고 있었지만, 기터 자작의 말을 들으니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될 것 같다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걱정 마십시오, 사령관님. 충신을 파렴치범으로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요.”
“음!”
“제가 이곳에서 세세한 정보를 요구하는 이유는 그물코를 작게 만들려는 게 아니라 적절히 키우기 위해서입니다.
그 말이 설득력이 있었는지 몰라도 기터 자작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기터 자작이 정보 참모를 불러 클라크에게 붙여 주었다.
여러 시간 내용을 브리핑 받고 관련 자료를 읽어 본 클라크는 사령부에서 나와 기다리고 있던 마법사들과 합류했다.
“마나석에서 마나 연료를 추출하지 않고 마나석을 가공해 곧바로 균질한 연료를 공급할 수 있게 만드는 가공 공장이 정말로 있었군요.”
“그게 정말입니까?”
가프 연구소의 마법사들이 깜짝 놀랐다.
“네. 페르보 땅은 아니고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니코폴 왕국에 공장이 있는 모양입니다. 이 근방의 마나석은 거의 다 그곳으로 유통된다고 하네요. 순다르 님의 동료들 몇 명도 그 나라에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순다르 님이 소개해 주시면 내부 사정을 파악하기가 수월하겠군요.”
“···해 보겠습니다.”
“가시죠.”
그들은 옛 아우로라 연합의 일원이었지만 필센 제국에 빨리 항복하여 나라의 이름을 유지하고 있는 니코폴 왕국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자동차 두 대를 나눠 타고 갔으나 국경을 넘어가는 길이 험해 말을 빌려 타고 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