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18. 짧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4부 18. 짧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동방군 총사령관을 지낸 라이네 공작은 옛 페르보 제국 영토의 3분의 1에 달하는 면적을 식민지로 받았다.
나머지 땅은 당시 동방군 군단장들과 필센 제국 고위 관료들이 공적에 따라 나눠 받았다.
대전쟁 막바지에는 동방군의 규모가 80만에 육박했고 기동 군단의 수가 30개 가까이 되었다.
단순 계산으로 군단장들에게 나눠 줄 식민지가 최소 30개는 필요한 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쟁은 육상의 전투 병력만으로 치르는 것이 아니다.
해군, 수송, 보급품 생산 등 국가의 모든 영역이 저마다의 역할을 충실히 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 병과의 장군들, 다른 부처의 고위 관리들도 포상을 해 주어야 했다.
동방군 군단장 가운데 페르보 제국 땅이 아닌 주변국 땅을 포상으로 받은 사람도 있었으나 이런 점들을 고려하여 페르보 제국 땅에는 45개의 식민지(사실상 30년 기한의 영지)가 새로 생겨났다.
클라크가 펼쳐 놓고 있는 지도는 바로 식민지 경계가 표시된 페르보 전도였다.
중간중간 붉게 표시된 것은 교통과 군사의 요지에 들어선 직할령이었다.
“이걸 보면 직할령 사령관이 마나석 광산이 없다고 파악하고 있는 식민지임에도 마나석을 유통하고 있는 식민지들의 공통점을 확인할 수 있어요.”
“공통점이 뭡니까?”
지도만 봐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던 투릭이 물었다.
그러자 클라크가 식민지 지방 이름 밑에 작게 표시된 총독의 이름을 짚으며 말했다.
“동방군 출신이 총독으로 있는 식민지들이에요. 고위 관료나 해군 출신 또는 다른 방면군 출신 총독들은 유통 물량이 달라요. 아예 거래 물량이 없거나 훨씬 많죠.”
“정말 그렇군요! 라이네 공작이 자기 마나석 광산에서 물량을 빼돌려 마나석 광산이 없는 동방군 출신 총독들에게만 똑같이 나눠 줬다는 말인가요? 대체 왜 그랬을까요?”
클라크도 그 점이 궁금했다.
“혼자서 너무 많은 물량을 빼돌리다 걸리면 문제가 커질까 봐 부하들, 물론 지금은 부하가 아니지만, 부하들에게 처리하라고 시킨 걸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마나석도 안 나는 부하들이 안타까워 나눠 준 것일까요?”
“그랬을지도 모르죠.”
“어느 쪽이든 동방군 출신들끼리 중앙 정부 방침을 어기고 마나석 문제로 밀접하게 엮여 있다는 것은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군요.”
클라크는 지도를 뚫어져라 주시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런저런 추측을 해 보는 것은 근본적인 의문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 일은 필센군, 특히 페르보에 주둔하고 있는 필센군과 총독들 사정에 정통한 사람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어요.”
“섣불리 군대 관계자에게 물어봤다가 황제 쪽이 이 건을 캐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오히려 문제가 더 커지는 게 아닐까요?”
투릭이 우려하자 클라크가 말했다.
“중립적으로 이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줄 사람을 찾아가야죠.”
과연 그 사람이 여전히 중립적일지 알 수 없으나 클라크는 그렇게 믿고 찾아가 보기로 했다.
현재 바덴이 식민지 회사 사장으로 있는 바르나 식민지의 총독이자 페르보 땅에 있는 일곱 개 직할령 가운데 중앙에 위치한 티라스 시의 사령관으로 있는 오스카 빈켈을 만나기로 한 것이다.
***
필센에 대한 적대감이 높은 페르보 땅을 안정시키기 위해 옛 페르보 제국 영토의 중앙에 자리한 티라스 시를 직할령으로 둔 것은 필센 제국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티라스 직할령에는 페르보 땅 어느 곳에서 반란, 봉기 기타 소요 사태가 발생하든 속히 출동하여 빠르게 진압할 수 있도록 다른 직할령보다 훨씬 많은 병력이 주둔해 있었다.
다른 직할령에는 통상 1개 군단이 주둔해 있었는데, 이 도시에는 3개 군단이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평시 방면군 규모였기에 직할령 티라스 시의 사령관을 이제는 편제상 해체되어 직함이 사라진 ‘동방군 사령관’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기동 군단만 3개, 보병 사단과 수송 부대, 정비 부대와 공병 부대 등 다른 지원 부대까지 포함하면 평상시에 5만이 넘는 병력이 주둔하고 있기에 무서울 것이 없는 이 도시에 오랜만에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국경 지방 폴타바의 총독 블란트가 벨고트 왕국을 공격해 점령한 일이 이제 전해져 사태를 파악하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참모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당장 티라스 주둔군이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폴타바와 더 가까운 직할령도 있었고, 결정적으로 다른 나라가 필센 제국의 영토로 쳐들어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저 오랫동안 잠잠했던 이 대륙에 느닷없이 큰 문제를 일으킨 블란트를 욕하고, 그 배경을 추측하고, 정당한 이유 없이 군사를 일으켰을 때 어떻게 소환하고, 소환을 거부할 경우 누구에게 얼마큼의 병력을 보내 체포할 것인지 논의하는 정도였다.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일이라 오스카의 얼굴에 오랜만에 주름이 져 있었다.
그때 부관이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사령관님, 뵙기를 청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왔다는 건가?”
“제국 기사 아카데미에서 역사학을 가르치는 클라크 교수랍니다.”
“역사학 교수?”
지금 상황과 너무나 이질적인 인사라 얼른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바르나 회사의 고슬라 사장의 지인이고 보름스 백작님을 모셨다고······.”
“아!”
오스카는 그제야 클라크가 누구인지 기억이 났다.
대학에 가서 방학 때마다 바덴을 보좌하면서 사업을 배우던 루산의 어린 집사.
‘율리안 황제가 제국 기사 아카데미의 입학식인지 졸업식인지에 가서 크게 반가워했다는 변경 출신의 역사학 교수 말이군! 그런데 무슨 일이지?’
루산, 바덴과 가까운 관계라면 그에게도 중요한 사람이었지만 직접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모시도록 하게.”
“예, 사령관님!”
잠시 후 클라크가 들어오자 오스카가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반갑습니다, 교수님. 말씀은 많이 들었는데 처음 뵙는군요.”
“이렇게 불쑥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사령관님. 지나다 생각이 나 인사나 드릴까 하고 왔는데, 오가는 사람이 많은 걸 보니 바쁘실 때 왔나 봅니다.”
“별말씀을요. 괜찮습니다.”
오스카는 차를 내오게 하고 클라크와 둘이 마주 앉았다.
“이렇게 먼 곳까지 지나다 들르셨다니, 참 활동 범위가 넓으시군요. 노바의 방학은 끝나갈 것 같은데 말입니다.”
오스카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클라크도 미소로 대답했다.
“아카데미에 연구년 신청을 내고 학술 여행을 다니는 길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바르나에도 들렀다가 페르보 땅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백작님이나 회장님이 사령관님 신세를 많이 졌다는 말씀을 평소에 자주 하셔서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 왔습니다.”
“두 분께서 신세라니, 감당하기 어렵군요. 오히려 이쪽이 신세를 많이 졌지요.”
솔직한 말이었다.
잃어버린 가문의 재산을 회복하고, 오베론 가문에 복수한 일.
바르나 왕국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일.
다른 군단장급 총독들과 비교했을 때 훨씬 면적이 넓은 바르나 왕국을 통째로 식민지로 받은 일.
게다가 그 바라나가 다른 식민지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발전하고 성장하고 있는 일.
보름스 백작 부부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필센 제국의 수많은 파일럿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론 바르나 대첩 이후 루산이 돌아간 다음에 페르보 땅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세운 공은 온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이룬 것이지만.
당번병이 차를 내오자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멈추고 차를 음미했다.
“에를랑겐 노블 클래식이군요.”
“고슬라 회장님이 잊지 않고 보내 주셔서 부하들과 나눠 먹고 있습니다. 야전의 군인들이 너무 고급스러운 맛에 익숙해져도 안 되는데 큰일 났습니다.”
클라크는 오스카의 말에 빙긋 미소를 짓고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오스카도 그에 맞춰 찻잔을 내려놓고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했다.
“사실 제가 이번에 연구하려는 주제가 마나석 발견이 우리 사회에 미칠 영향입니다. 변경과 마법 공학 발전의 역사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가 되었고, 그와 관련된 연구를 계속하고 있지요. 그래서 페르보에 온 겁니다.”
“흥미로운 주제군요.”
“제가 조사를 하다 보니 영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더군요. 누구한테 물어볼 사람도 없고, 섣불리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오해를 사기 쉬울 것 같아서요. 그래서 바쁘신 사령관님을 찾아뵐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스카는 살짝 불쾌감을 느꼈다.
보름스 백작의 집사 출신의 평민 교수가 고작 자신의 연구에 도움을 얻고자 바쁜 제국의 사령관을 찾아왔다는 말인가 싶었다.
보름스 백작과 고슬라 회장과의 인연을 이용하는 못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나 일단 들어보기도 했다.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클라크는 페르보 전도를 꺼내 펼쳤다.
그동안 파악한 식민지별 마나석 유통량이 표시된 지도였다.
“제가 주먹구구식으로 조사했기 때문에 수치가 정확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일정한 경향성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자료는 정말로 발로 뛰어 확보한 것이거든요.”
“뭡니까, 이게?”
“식민지별 마나석 유통 현황입니다. 페르보 제국 내에서 정식으로 유통되는 물량 말고, 인접한 나라로 밀수해 판매하는 물량이죠.”
“······!”
오스카의 눈이 찢어질 듯 커다래졌다.
클라크는 그 반응을 확인하고도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라이네 공작 가문이 동방군 출신 총독들과 마나석 유통 문제로 밀접하게 엮여 있는 것 같더군요.”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마나석 광산이 발견되지 않은 식민지도, 동방군 출신 총독이 있는 곳은 마나석을 판매하고 있어요. 이런 곳에서 판매하는 물량이 비슷하더군요. 그 출처는 라이네 공작 가문이 다스리는 식민지로 추정되고요.”
“음······!”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동방군 출신들은 왜 마나석 문제로 유착하고 있는 것이죠? 이게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거라는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요? 제가 모르는 사정이 있을까요?”
오스카는 목이 타 찻잔을 들어 쭉 들이켰다.
고작 개인의 연구를 위해 찾아온 무례한 방문자라는 생각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대체··· 이런 걸 어떻게 파악하신 겁니까?”
“말씀드렸다시피 발로 뛰어 얻은 겁니다. 국경을 오가는 멕 워커 수를 셌거든요.”
“허!”
오스카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실 마나석 유통과 관련하여 정확한 수치는 오스카도 몰랐다.
이런 경향성을 파악하고 있지도 못했다.
그러나 동방군 출신인 데다 줄곧 페르보 땅에 직할령 사령관으로 머물러 있었기에 그는 클라크가 궁금해하는 부분에 대해 답을 줄 수 있었다.
“동방군 출신들의 마나석 유착이라······. 어디까지 학술 연구에 필요한 부분인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공론화되면 큰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스카의 말을 클라크는 묵묵히 경청했다.
“이 문제와 관련해 모든 걸 알고 있지는 않지만, 교수님의 논문으로 우리 제국이 혼란에 빠지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클라크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오스카는 클라크의 다짐 자체보다 그 뒤에 어른거리는 루산과 바덴을 보고 이야기를 해 주기로 했다.
“짧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괜찮습니다.”
오스카가 마른 찻잔에 묻어 있는 한 방울 차로 입술을 축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제국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대전쟁 10년 동안 엄청난 군비를 지출했죠. 2백만이 넘는 대군을 유지하면서 2만 대가 넘는 멕 나이트와 그보다 많은 멕 워커를 전쟁에 계속 투입했으니까요. 국고가 바닥이 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그 역시 동방군 총사령관이었던 라이네 공작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였기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전쟁이 종식되었다고 하지만 병력을 줄일 수는 없었습니다. 아우로라 연합군 잔당이 주변국으로 달아났고, 아우로라 인들의 뿌리 깊은 증오심 때문이라도 일정 수준의 주둔군 규모를 유지해야 했죠.”
클라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군사비는 줄여야 하는데 병력 규모는 줄일 수 없는 상황. 정부는 방면군을 해체합니다. 여러 이유를 들었지만, 중앙군으로 계속 두면 정부에서 계속 지원해야 하는데 정부에 그럴 여력이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직할령 병력을 제외하면 식민지 주둔군으로 소속을 바꾸고, 식민지 주둔군은 각 식민지가 상당 부분 유지비를 대도록 한 겁니다.”
“아!”
“문제는 정부가 식민지 동화 정책을 폈기 때문에 세금을 많이 걷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총독들은 세금도 많이 걷지 못한 채로 군대 유지비를 떠안게 된 거예요.”
어디까지나 군인의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라 클라크는 오스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이 이야기에 따르면 곤란한 상황에 놓인 것 같기는 했다.
“여기까지라면 그래도 견딜 수 있지요.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쟁이 끝난 모든 식민지 총독들이 공통으로 겪는 문제라면 이해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모든 식민지가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루한 왕국은 가장 큰 공업 단지가 그대로 보존된 상태로 전쟁이 끝이 났어요. 루한 왕국을 받은 밤베르크 공작은 주둔군을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었단 말이지요. 반면 페르보 제국 땅은 아우로라 연합군의 대반격 이후 우리 제국군이 총력을 기울여 짓밟아 놓은 바람에 남은 것이 없었어요. 폐허가 됐단 말입니다. 그런데 정부의 군사비 감축 정책은 똑같이 적용이 되었어요.”
루한 왕국을 식민지로 받은 총독은 감당할 수 있었지만, 페르보 땅을 식민지로 받은 총독들은 감당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루한 왕국을 식민지로 받은 총독은 바로 밤베르크 공작. 그분이 루한 왕국을 통째로 받는 바람에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네세베르 공략군 군단장들이 받을 땅이 루한 왕국에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네세베르 공략군 출신들이 받은 식민지가 루한이 아닌 주변 땅이 되고 심지어 페르보 땅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동방군의 군단장들이 가장 수가 많았는데, 받을 땅이 점점 작아지게 된 거예요. 밤베르크 공작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겠지만, 부담이 늘어난 동방군 출신 군단장들로서는 억울한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자신들이 처한 어려움을 똘똘 뭉쳐 이겨내자는 마음이 들지 않겠어요?”
“라이네 공작 가문은···?”
클라크가 물었다.
“그나마 면적이 넓고 마나석 광산이 많이 발견되었기에 마나석 광산이 없는 총독들에게 나눠 준 것이겠지요. 한때 거느리고 있던 부하들이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말입니다.”
동방군 출신 총독들의 마나석 유착 의혹에 대한 오스카의 의견은 이렇게 끝이 났다.
어쨌든 그 역시 동방군 출신이기에 완전히 중립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클라크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어느 정도 해소됐다.
그렇다고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알고 나니 더 복잡한 문제였다는 것을 확인한 것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