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19. 경의 충심은 기억될 것이오
4부 19. 경의 충심은 기억될 것이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사령관님. 감사합니다.”
“이제 어디로 가시는 건가요?”
“페르보 동부로 가 볼 생각입니다. 그쪽은 아직 살펴보지 못해서요. 벨고트 왕국이 마나석 관련 산업이 발달했다던데 그곳도 돌아보고 오려고요.”
클라크의 말에 오스카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벨고트 왕국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네?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말씀인가요?”
“그게··· 폴타바의 총독이 벨고트를 공격해 점령했습니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 안 가는 게 나을 것 같군요.”
너무나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클라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폴타바의 총독이 벨고트를 점령했다면 어쨌든 필센 제국이 치안을 유지하고 있다는 뜻일 텐데 금방 들렀다 올 수는 없을까요? 페르보가 노바에서 쉽게 와 볼 수 있는 곳은 아니니까요.”
“현재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전투가 완전히 끝났는지, 피해가 얼마나 되는지, 아직 모릅니다. 그래서 위험하다는 겁니다.”
“······!”
클라크로서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필센 제국의 한 총독이 다른 나라를 공격했는데, 직할령 사령관이 정확한 상황을 모른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스카의 태도를 보니 벨고트 왕국 침공에 대해 아예 모르고 있던 것 같았다.
‘폴타바의 총독이 독단적으로 타국을 침략했다는 것인가? 그게 가능한 건가? 대체 페르보 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그러나 클라크는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이 땅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고 군대 내부의 사정 또한 제대로 모르고 있는 사람이 이 문제를 깊이 파고드는 것은 무례를 넘어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마나석 가공 산업이 발달한 곳에 문제가 생겼다면 더욱 가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령관님, 혹시 상황 파악을 위해 조사단을 보내셨습니까?”
“지금 그 문제를 논의 중입니다.”
“아! 그렇군요. 아직 조사단이 출발하지 않았다면 제가 함께 가는 건 어떨까요?”
“조사단과 함께 말입니까?”
“네. 그러면 제 안전이 문제되지도 않을 테니까요. 결코 군의 조사를 방해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마나석과 관련된 부분만 살펴보고 돌아올 테니까요.”
“음!”
오스카는 곰곰이 생각했다.
클라크가 그 나라로 가겠다면 억지로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이왕 가는 것이라면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가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다.
그리고 폴타바 총독이 벨고트 왕국을 침공한 이유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 클라크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페르보 땅에 주둔하고 있는 군인들은 이미 서로에 대해 끈적끈적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이곳의 사정에 익숙해져 문제를 보고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잠깐 만나 봤을 뿐이지만, 클라크는 겉보기와 달리 매우 날카로웠다.
국외자의 냉정한 시선으로 사태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루산과 바덴의 최측근 인물이라 자신을 곤란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알겠습니다. 조사단과 함께 가시지요. 다만, 교수님이 파악한 내용을 외부에 알리기 전에 반드시 제게 먼저 알려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사령관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클라크는 오스카가 진상 조사를 위해 파견한 티라스 주둔군 소속 군인들과 함께 벨고트 왕국으로 떠났다.
***
루산은 이름 모를 산 정상에 올라 주변 풍경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황량하고 스산했다.
바람이 그의 머리와 옷자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여기가 괴수 목장 예정지란 말이죠?”
루산의 질문에 지금까지 안내해 온 루한 주둔군 지휘관이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루산 일행이 안내된 곳은 네세베르 지방과 옛 루한 왕국 본토의 경계 부분에 있는 황무지였다.
지도로 보면 가늘고 긴 띠처럼 생겼지만, 실제 면적은 굉장히 넓고 길었다.
옛 루한 왕국에 과연 괴수를 키울 만한 지역이 있을까 싶었는데,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버려진 땅이.
대전쟁이 벌어지기 전부터 필센 제국은 전쟁 발발을 상정하고 전쟁 계획을 세웠다.
아우로라 연합에서 가장 강한 세 나라 - 페르보 제국, 루한 왕국, 시바스 왕국이 자유롭게 병력을 활용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결코 승리하기 어렵다.
아우로라 대륙의 인구는 오카수스 대륙보다 훨씬 많았고 비옥한 대지와 풍족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풍요로운 나라들도 많았다.
아우로라 연합의 병력을 모두 합치면 필센 제국의 4배가 넘는다는 분석도 있었다.
따라서 그 대규모 병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 필센 제국으로서는 무척 중요했다.
필센 제국은 가장 강력한 페르보 제국에 필센 제국에서 가장 전투력이 강한 동방군을 붙이고, 루한 왕국에는 젊은 시절 전쟁 영웅으로 이름을 날린 밤베르크 백작을 사령관으로 한 네세베르 공략군을 창설하여 턱밑을 찌르게 했다.
그로 인해 아우로라 연합군은 모든 병력을 오카수스 대륙으로 보내지 못하고 본토 방어에 상당히 많은 병력을 할애해야 했다.
어쨌든 필센 제국 북부에는 페르보 제국의 굴다크 공작이, 필센 제국 남부에는 시바스 왕국의 자라 공작이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짧은 시간에 큰 피해를 입히고 필센 제국을 궁지로 몰아넣는 듯 보였으나 결과적으로 필센 제국의 전략은 성공해 모든 병력을 쏟아붓지 못한 아우오라 연합의 원정군은 필센 제국의 반격에 막혀 철수하고 말았다.
동방군과 네세베르 공략군이 아우로라 대륙에서 페르보 제국과 루한 왕국을 날카롭게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 병력을 투입하지 못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아우로라 연합군의 오판은 필센 제국이 아우로라 대륙에 주둔시킨 동방군만 저지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필센 제국의 동방군이 비록 강력하기는 하지만, 부르사 왕국, 바르나 왕국, 네세베르에 둘러싸여 있었기에 충분히 저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부르사 왕국은 혼란의 땅이라 어느 누구도 섣불리 발을 디딜 수 없고, 바르나 왕국과 네세베르에 주둔해 있는 아우로라 연합군 병력이면 동방군을 충분히 막고 있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필센 제국은 당시 수적 열세에 있었음에도 본토에서 병력을 쥐어짜 새로운 방면군, 바로 네세베르 공략군을 편성해 부르가스로 보냈다.
남방군, 북방군, 지방군, 심지어 수도 군단에서도 병력을 차출해 네세베르 공략군을 만들어 보냄으로써 아우로라 연합이 수비에 치중할 수밖에 없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전략은 성공했다.
밤베르크 공작은 여러 부대에서 차출되어 혼란스러운 부대를 이끌고도 치열한 공격을 펼쳐 부대 이름처럼 기어이 네세베르를 점령해 낸 것이다.
루한 왕국과 인근의 나라들은 네세베르 공략군이 루한 본토로 침공하는 것을 결사적으로 저지하기 위해 국경에 강력한 방어선을 펼쳤다.
양측은 치열한 전투를 펼쳤고 네세베르와 루한 본토의 경계 부분은 수천 대의 멕 나이트들이 4년 이상 싸운 바람에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곳에 있던 집들과 농토, 아우로라 연합군이 만든 도로와 창고, 언덕과 바위들도 짓밟히고 깨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루산이 가프 용병단을 이끌고 루한 왕국 본토로 침투해 휘젓는 바람에 루한 왕국은 할 수 없이 전선의 병력을 불러들이게 되었고, 네세베르 공략군이 마침내 전선을 돌파해 루한 왕국 영토로 진입하고 나서야 이 땅은 멕 나이트들 간의 격렬한 전투 소음이 사라질 수 있었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지금, 이 땅은 나무와 풀이 가득 차 있었다.
사람이 다닐 수 없는 밀림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넓은 지역에서 알아서 목장 부지를 선정하고, 알아서 목장을 짓고, 하면 된다는 것이죠?”
루산이 다시 한번 물었다.
“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지휘관은 시종일관 짧고 딱딱하게 대답했다.
딱딱한 것은 단지 지휘관의 말투만이 아니었다.
안내 목적이라고 보기에는 과하다고 느껴질 만한 병력을 길잡이로 붙여 준 것이다.
멕 나이트 30여 대와 정찰대 1개 대대로 이루어진 기동 전대 병력이 산 아래에서 루한 일행이 타고 온 멕 나이트를 에워싸고 있었다.
밤베르크 공작의 뜻이 이루어져 괴수 목장이 성공한다면 루한 땅에 새로운 마나 연료 생산 기지가 들어설지도 모른다.
루산 일행은 그 일을 해내기 위해 찾아온 은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은인을 멕 나이트 기동 전대를 보내 길을 안내하고 경호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였다.
아무리 루산 일행이 허락 없이 멕 나이트를 가지고 왔다 해도, 이곳이 언제든 적이 기습할 수 있는 전쟁터도 아니고 괴수들이 날뛰는 원시의 땅도 아닌데, 이 정도의 병력을 딸려 보낸 것은 단순한 안내 목적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마치 인적 없는 숲으로 끌고 들어가 매장시키기 위한 병력처럼 보이네요.”
시에나가 눈살을 찌푸리고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루산은 불쾌감을 억누르고 그렇게 시에나를 다독였다.
“티 내지는 말되 경계는 해.”
“네, 대장님!”
루산은 루한 주둔군의 감시 아닌 감시 속에서 괴수 목장을 설치하기에 적당한 땅을 찾아 돌아다녔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예리하게 주시하는 밤베르크 공작의 부하들을 보니 옛 생각이 절로 났다.
***
율리안 황제가 승전을 선언한 뒤 네세베르 공략군 사령관 밤베르크 백작이 노바로 개선했다.
얼마 뒤 그는 공작으로 승작했고, 가장 큰 식민지를 받은 공신이 되었다.
루산 보름스에 대한 나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즈음이었다.
줄곧 변경에서 지내와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황제 옆에 찰싹 붙어 이권을 모두 가져간다, 부부가 안팎으로 다 해 먹는다는 둥, 온갖 해괴한 소문들이 돌았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일 만했다.
율리안이 황제가 될 당시 오베론 공작 일파가 모두 숙청되었고, 율리안이 황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는 자들도 좌천되거나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노바 정계와 관계에서는 율리안을 둘러싼 안 좋은 소문들이 돌았고, 경험 많은 관리들이 떠난 빈자리를 채울 적임자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율리안은 인맥이 두텁지 않았기에 할 수 없이 변경에서 부리던 부하들을 올려 썼고, 이는 노바 관료들을 저항을 더욱 부채질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루산은 율리안의 통치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더욱 애를 쓸 수밖에 없었다.
늘 옆에 붙어 안전을 지키고 율리안에 반감을 가진 인물들을 설득하고 회유했다.
바덴 또한 적임자를 설득하고 물색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필요하면 설득을 위해 자신이 하고 있는 사업의 이권을 넘기는 경우도 있었다.
보름스 백작 부부가 율리안 황제를 옆에 끼고 권력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권을 더 얻었다는 것은 날조된 이야기였다.
오히려 율리안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인재를 끌어들이기 위해 자신의 이권을 나눠 주었으면 주었지 율리안이 황제가 되고 나서 루산과 바덴이 추가로 얻은 이익은 전혀 없었다.
그 전에 이미 고슬라 그룹은 필센 제국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해 있었고, 엄청난 비용을 쏟아부은 아라드 왕국 개발 사업과 굵직굵직한 대형 사업들이 조금씩 결실을 내기 시작하는 시점이라 이익이 급격히 불어나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부정적인 소문에 더 귀를 기울이기 마련이라 보름스 부부에 대한 나쁜 소문은 날로 커져 갔다.
루산은 소문의 진원지가 밤베르크 공작 진영이라는 것을 확인했으나 그와 다투는 것은 결국 율리안을 곤란하게 만들 뿐이라 생각하고 노바를 떠나기로 했다.
“폐하, 노바 생활은 저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8구역으로 돌아갈 생각이니 허락해 주십시오.”
율리안은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결국 허락했다.
떠나기 전에 루산은 밤베르크 공작을 만났다.
“노바로 돌아와 정치에 관여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고슬라 그룹을 내버려 두시길 바랍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나 경의 충심은 기억될 것이오.”
루산은 변경 8구역 통치 대리인으로 임명되어 변경으로 떠났고, 얼마 뒤 밤베르크 공작은 필센 제국 편제에 없던 제국군 총사령관 자리에 올랐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수풀이 무성한 루한과 네세베르의 접경 지역에서 루한 식민지 주둔군의 감시를 받으며 괴수 목장 부지를 찾아 돌아다니다 보니 루산은 옛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