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21. 변경의 왕이라는 별명이 아깝다
4부 21. 변경의 왕이라는 별명이 아깝다
“오랜만입니다, 보름스 백작.”
토비아스가 루산을 보고 반갑게 악수를 건네 왔다.
루산은 토비아스가 전혀 반갑지 않았다.
10년 전, 온갖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려 그를 궁지로 몰아넣은 일을 담당한 자가 토비아스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등 뒤에 칼을 숨기고 있을망정 앞에서는 웃음을 지어야 하는 것이 귀족이고 협상의 기본 태도.
루산도 미소를 지으며 손을 맞잡았다.
“잘 지내셨습니까, 총독 대리.”
“하하, 늘 똑같지요. 보고받고 결재하고, 보고받고 결재하고··· 잘 아시지 않습니까.”
토비아스가 앓는 소리를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고는 루산에게 자리를 권했다.
루산은 변경 8구역에서는 볼 수 없는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옛 루한 왕국의 가구들에 슬쩍 눈길을 주고는 푹신한 응접 소파에 앉았다.
토비아스가 자연스럽게 맞은편에 앉아 청원을 들어주는 마음씨 좋은 통치자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괴수 목장 건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던데, 어떤 내용입니까?”
“밤베르크 공작께서 루한의 괴수 목장 건설 건을 부탁하셔서 부지 예정지를 둘러보았습니다만, 이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구체적인 내용을 합의할 필요가 있어서 왔습니다.”
“말씀하시지요.”
“네. 아시겠지만, 우리 변경에서 괴수를 이곳까지 옮기는 일은 보통 어려운 작업이 아닙니다. 많은 멕 나이트와 멕 워커를 동원해야 하고 열차나 배로 수송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설비를 제작해야 합니다. 괴수가 이동할 동선을 고려해 주민을 퇴거시킬 필요도 있고 길을 새로 낼 필요도 있을 겁니다.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고 괴수를 예정지까지 옮긴 뒤에도 낯선 땅에서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세심하게 관리해 주어야 합니다. 식생, 기온, 날씨··· 여러 조건들을 확인하고 필요하면 새로 조성해야겠지요.”
토비아스는 괴수 목장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티를 내지 않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척했다.
“그렇겠지요.”
“마나 연료를 의미 있게 생산할 수 있는 목장을 지으려면 괴수의 수가 최소 500마리는 되어야겠죠. 그때까지 많은 시행착오가 있을 겁니다. 운반 도중에 괴수가 죽거나 이 땅으로 옮겨진 뒤에 죽을 수도 있으니까요. 루한 괴수 목장이 성공적으로 안착할 때까지 얼마나 많은 괴수를 옮겨야 할지 모릅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밤베르크 공작님과 말씀을 나눌 때는 그에 대한 비용 문제나 루한 측의 협조 사항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디까지 책임을 지고 루한 측이 어디까지 책임을 지는지에 대한 것 말입니다. 솔직히 우리가 목장 부지에 괴수를 풀어 놓고 가 버린다면 루한 측에서 관리하실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관리를 못 한다.
“어렵겠죠.”
“그래서 비용 문제, 관리 문제 등 괴수 목장 건설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비용, 권한과 책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거로군요?”
“맞습니다.”
토비아스는 루산 보름스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직접 겪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말씀하시죠.”
“구체적인 논의를 하기 시작하면 무척 복잡합니다. 이 사업은 모든 것이 최초라 비용을 산정하기가 어려우니까요. 괴수 한 마리를 이동시키는 데 드는 비용, 괴수를 관리하는 데 드는 비용, 생육 환경에 대한 조사와 연구에 드는 비용 등 산정하기가 무척 까다롭습니다. 분명한 것은 비용이 무척 많이 든다는 것과 이런 것들을 모두 꼼꼼하게 따진다면 사업 실행이 늦춰지게 된다는 것이죠. 국가의 장래와 루한 땅의 미래에 중요한 사업이 될 텐데비용을 따지느라 뒤로 미뤄져서는 곤란하죠. 그래서······.”
토비아스는 루산의 말보다 표정에 더 집중했다.
“괴수를 이동시키고 목장을 건설하고 괴수의 생육 전반을 관리하는 모든 일을 우리 변경 8구역이 맡겠습니다. 루한은 비용을 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다 책임을 질 테니까요. 루한은 우리가 관리하는 괴수의 부산물을 획득하는 것으로 하죠.”
“음?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군요.”
비용을 모두 대고 필요한 일도 다 하면서 부산물을 루한 식민지에 준다?
얼핏 들어도 보통 어려운 프로젝트가 아닌데 그것을 무상으로 해 준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루산이 설명했다.
“이 괴수 목장 프로젝트는 성패가 확실하지 않습니다. 괴수 목장이 성공하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대가를 받고 괴수를 운반해 준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며 모른 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관리를 돕기도 어렵죠. 성공이 불확실한 일을 얼마를 받고 계속해야 할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니 책임을 묻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공할 경우 루한 측은 괴수 부산물 전부를 얻습니다. 다만 우리가 최선을 다해 관리하고 목장을 성공시킬 유인이 필요하겠죠. 괴수 목장 프로젝트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어떻게든 확보할 필요가 있겠죠. 그 비용을 우리는 괴수 목장 관광 수입으로 보전하겠습니다.”
“괴수 목장 관광 수입이라고요?”
황당한 이야기에 토비아스는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성패 여부가 불분명한 일을 공짜로 해 주고, 그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관광업을 통해 메꾸겠다는 말이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루산은 진지했다.
“그런데 루한 측에서 제시한 부지를 살펴보니 충분하지가 않더군요. 괴수 목장 사업을 성공시키면서 동시에 관광 사업의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자율적으로 목장 규모와 장소를 선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루한과 네세베르의 접경 지역뿐 아니라 네세베르 전역을 자유롭게 개발할 권한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어차피 네세베르 대부분은 여전히 폐허 상태이니까요.”
루산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네세베르 개발권 획득.
네세베르는 원래 루한 왕국의 영토였으나 1차 대전쟁 때 필센 제국이 부르가스를 점령하고 동방군을 주둔시킨 뒤로 필센 제국 동방군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루한 왕국군이 주축이 된 아우로라 연합군 대병력이 주둔하는 특별 군사 지역이 되었다.
그런데 2차 대전쟁이 발발하자 필센 제국은 네세베르 공략군을 새롭게 편성하여 당시 밤베르크 백작으로 하여금 공격하게 하였다.
밤베르크 백작은 치열한 교전 끝에 네세베르를 점령했다.
그 와중에 군사 도시를 지탱하던 민간인들과 농촌 주민들은 모두 본토로 철수했고 이후 계속해서 벌어진 전쟁으로 이 땅의 주민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후에 밤베르크 공작이 옛 루한 땅을 다스리게 되면서 네세베르 지방을 복구할지 여부를 검토했으나 굳이 폐허가 된 지역에 대규모 자금과 인력을 투입하는 것은 자원의 효율적 사용 면에서 적합하지 않다고 보고 훗날로 미루었다.
가장 큰 이유는 필센 제국에서 물자와 인력이 루한 땅으로 들어오는 데 굳이 부르가스-네세베르를 통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필센 제국에서 출발한 배는 바다를 건너 곧바로 루한 왕국의 해안에 닿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대치하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네세베르 지방은 15년 간 방치되었고 전쟁이 종료된 뒤에는 통행량이 더욱 줄어 극히 일부의 주민들만 살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네세베르 지방은 부르가스, 바르나, 루한과 닿아 있는 꽤 넓은 지역이라 이 지역 개발권을 통째로 넘겨주기는 쉽지 않으리라고 루산은 생각했다.
그래서 개발권을 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내용을 준비해 왔다.
그런데 토비아스는 루산의 제안과 요청을 듣고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괴수 목장 관광 사업이라니, 역시 변경의 왕다운 멋진 아이디어입니다.”
변경의 왕이라는 말에 루산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이 말은 10년 전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을 때 시중에 많이 떠돌던 표현이기 때문이었다.
그 정치 공작의 책임자였던 토비아스가 그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루산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 한 말인 것이다.
루산은 얼른 표정을 수습했고, 토비아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우리는 아무 비용도 들이지 않고 괴수의 부산물을 얻을 수 있고, 보름스 백작은 그 과정에서 새로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면 정말 양쪽 모두에 이익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묵혀진 땅을 개발해 수익 사업을 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겠지요. 이미 변경에서 관광 사업으로 큰 성과를 보고 계시니 잘 하시리라 봅니다. 그리고 백작님이 잘 되어야 우리도 많은 마나 연료를 확보할 수 있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시죠.”
루산은 변경의 왕이라는, 과거의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는 말을 들었을 때의 불쾌한 감정을 순간적으로 잊을 정도로 놀랐다.
토비아스가 이렇게 수월하게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말로만 그치지 않고 곧바로 비서를 불러 협약서를 작성해 주었다.
처음 괴수 목장 부지로 설정한 네세베르와 루한 땅의 경계뿐 아니라 네세베르 전역도 루산이 전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내용을 담고 있는 문서였다.
또한 괴수를 이동시킬 때, 괴수 목장 건설에 필요한 인력을 구할 때 루한 식민지 측이 전폭적으로 협조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더 필요한 내용은 없습니까?”
토비아스의 전향적인 태도에 루산은 의아했지만, 필요한 네세베르 개발권을 얻었기에 감사를 표시했다.
“없습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도와주시니 감사합니다.”
“나중에 또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그렇게 하지요.”
루산은 토비아스가 서명한 협약서를 들고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보고 토비아스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부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각하, 보름스 백작에게 네세베르의 포괄적 개발권을 주셔도 괜찮겠습니까? 네세베르는 전에 살던 주민도 많았고 대군이 충분히 주둔할 만큼 넓고 비옥한 땅입니다. 괴수 목장으로 관광업을 한다지만 농사를 짓고 가축만 풀어 길러도 막대한 이익이 날 것입니다.”
“그런 땅이 오랫동안 묵었잖아. 사람도 없고. 만약 그대에게 네세베르를 주면 당장 농토를 개간하고 가축을 풀어 기를 수 있겠나?”
“그건 아닙니다만······.”
“보름스 백작이 그렇게 개발해 주면 우리에게는 좋은 일이지. 개발권을 준 것이지 소유권을 넘긴 것은 아니잖은가.”
“그건 그렇습니다만······.”
“당장 사용할 수도 없는 땅을 두고 너무 인색하게 굴 필요는 없지. 괴수 목장을 크게 해서 성공하면 루한에 돌아오는 마나 연료가 많아지는 것이니까.”
“그러나 만약 괴수 목장 관광 사업이 크게 성공한다면 그 수입의 일부라도 세금 명목으로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변경 구역 관광 사업의 규모가 무척 크다고 들었습니다.”
“과수원에 나무를 심기도 전에 열매를 나눌 생각부터 하면 일이 되겠어? 일하는 쪽도 힘이 빠지지.”
“······.”
“이 정도면 충분해. 지켜보는 게 최선이야.”
“···네, 각하.”
부하도 물러나고 토비아스는 홀로 여유롭게 차를 즐겼다.
“루산 보름스, 이런 일도 직접 하나?”
아무리 봐도 큰 인물은 아니었다.
휘하에 쓸 만한 사람이 있다면 이런 협상을 직접 하러 오지는 않을 것이다.
검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멕 나이트 조종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도, 잘 쳐줘 봐야 이익이나 따지는 사업가에 불과했다.
이번 루한 괴수 목장 프로젝트의 진짜 목적을 알고 있는 토비아스는 루산이 어떤 요구를 하든 다 들어줄 생각이었다.
‘왕이라면 무릇 평범한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큰 꿈, 거대한 계획 같은 것이 있어야 하거늘 겨우 관광 사업을 위한 개발권이라니, 변경의 왕이라는 별명이 아깝다.’
자신이 만든 별명이기는 하지만 토비아스는 루산에 대한 실망감이 밀려왔다.
그와 함께 안도감도 느꼈다.
고작 괴수 목장 건설을 위해 직접 움직이는 충실한 사람, 자기 앞에 무슨 일이 놓여 있는지 모르는 협소한 사람에게 굳이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는 부하를 불렀다.
“라이네 공작 가문의 동태는 어떠한지 확인해 봐.”
그의 부하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