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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FC 변경 군단의 기사-404화 (404/450)

4부 22. 묘한 균형추

4부 22. 묘한 균형추

끼우우웅-!

003이 기동을 마치고 완전히 멈추었다.

잠시 후 가슴 덮개가 올라가고 두꺼운 조종실 문이 열리더니 땀에 흠뻑 젖어 있는 레오나가 발판 사다리를 잡고 디디며 아래로 내려왔다.

해는 서쪽으로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고, 이미 다른 파일럿들은 모두 도착해 있었다.

시에나가 시험단 파일럿들을 둘러보고 말했다.

“오늘도 순번에 따라 번을 선다. 당직 파일럿은 멕 나이트에서 대기한 채로 쉬어.”

“알겠습니다.”

“나머지는 저녁 준비.”

“예.”

변경의 파일럿들은 여러 날 원정 사냥을 나가고는 했다.

그중에서도 가프 마법 연구소 시험단 파일럿들은 비밀 무기를 시험하고 특정 괴수의 부산물을 구해 오기 위해 원시의 땅 깊숙이 들어가는 일이 더욱 잦았다.

그래서 역할을 분담해 야영 준비와 식사 준비를 하는 파일럿들의 움직임이 매우 자연스럽고 매끄러웠다.

변경 8구역에서는 은근히 공주 대접을 받아 온 시에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가장 경력이 적은 시험단 파일럿의 지시에 따라 물을 길어 오고 땔감을 주워 오고 간간이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에 달려가 일을 도왔다.

아직은 덩치가 작고 체력이 약해 하루 종일 003을 움직이느라 녹초가 돼 있었지만, 그래도 진짜 파일럿들과 함께하는 이 순간이 좋았기에 열심히 했다.

식사를 마치고 당직 근무 순번이 된 파일럿들이 멕 워커로 들어가 휴식을 취하는 사이, 나머지 시험단 파일럿들과 설계 팀 엔지니어들은 식사 뒷정리를 하고 각자 시간을 보냈다.

“레오나, 씻으러 가자.”

“네, 단장님.”

시에나의 말에 레오나는 부리나케 갈아입을 옷과 수건을 챙겨 야영 캠프를 떠났다.

하늘에 별이 반짝이고는 있었지만, 날이 저문 대지는 깜깜했다.

두 사람은 별빛에 의지해 나무와 풀숲을 지나 깨끗한 물이 흐르는 가까운 시내로 갔다.

바람에 나뭇가지들이 쏴쏴 서로 문지르는 소리,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진 잎들을 밟고 지나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갈대가 스스스 흔들리는 소리에 레오나는 시에나 뒤에 바싹 붙었다.

이윽고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레오나는 부끄러움에 잠시 머뭇거렸으나 시에나가 벗자 얼른 따라서 옷을 벗고 시내로 들어갔다.

이미 땀이 식어 물이 꽤 차갑게 느껴졌다.

그러나 하루 종일 땀에 찌들어 있다가 시원한 물에 몸을 담그니 무척이나 상쾌했다.

레오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가운 물에 깨끗이 씻고 밖으로 나와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어느새 밖으로 나와 있던 시에나가 레오나의 뒤로 돌아가 수건으로 머리를 말려 주었다.

레오나는 아주 오래전, 엄마가 머리를 말려줄 때의 기억이 떠올라 가슴이 따스해졌다.

두 사람은 옷을 입고 잠시 바위에 걸터앉아 살짝 덜 마른 머리카락을 바람에 말리며 별을 쳐다보고 쉬었다.

레오나가 문득 입을 열었다.

“단장님, 애들 보고 싶지 않으세요?”

“응?”

“집 떠난 지 오래됐잖아요.”

시에나가 말했다.

“그래도 에밀리가 있으니까. 나보다 애들을 더 잘 볼걸.”

시에나의 두 아이도 에밀리가 돌봐 주었다.

“그리고 그 양반이 애들하고 놀아 주는 솜씨는 마스터급이야.”

시에나가 웃으며 말했다.

그 양반이란 변경 8군단 4전단장 바이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 엄마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니?”

시에나가 레오나를 따뜻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에요, 그런 거!”

레오나가 극구 부인했다.

“전 엄마랑 따로 산 지 오래됐잖아요. 단장님 애들은 아직 어리고······.”

어리다고 해도 레오나와 몇 살 차이 나지 않았다.

시에나가 피식 웃더니 이내 진지하게 말했다.

“세상에는 묘한 균형추가 있어.”

“균형추요?”

“응, 균형추.”

시에나가 양팔을 옆으로 곧게 펴고 저울처럼 좌우로 기우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에 레오나가 피식 웃었다.

시에나가 말했다.

“많이 가진 사람은 덜 가지게 되는 부분이 반드시 있는 거야. 능력이 많아서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높은 자리로 올라가거나 많은 사업을 벌이는 사람은 자연히 바빠져서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이 적을 수밖에 없어. 백작님이나 회장님이 그런 경우지. 두 분에 비할 수는 없지만, 나 또한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고.”

여전히 대부분의 여자들은 신분과 무관하게 집에서 가사와 육아를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전쟁이 벌어진 이후 많은 남자들이 징집되어 부족해진 일자리를 여자들이 채우면서 여자들의 사회 참여가 늘어났지만, 단순 노무직을 벗어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시에나는, 바덴과는 비록 분야가 다르지만, 매우 특별한 능력을 인정받아 높은 자리에 오른 여성인 것이다.

변경 8군단의 공식적인 전단장은 아니지만, 실력 면에서 그녀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으며 대우 또한 전단장급 대우를 받고 있었고, 전투가 벌어질 때 루산이 가장 의지하는 전우였다.

게다가 재산도 어마어마했다.

변경 파일럿 자체가 급료 수준이 일반 노동자와는 차원이 다른 데다 변경 8구역의 성장과 함께 크게 성장해 변경 밖으로까지 화물 운송 사업을 크게 확장한 <시바렌 운송>의 대주주이며 차 무역으로 엄청나게 규모가 커진 <시에나 무역 상사>의 지분을 절반이나 가지고 있었다.

사실상 보름스 백작 가문의 중요한 구성원인 것이다.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이 적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어. 그래서 불행한 경우도 있지.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없는데 지위와 재산이 무슨 소용일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지. 그런데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어.”

“왜요?”

“왜긴, 자랑스럽잖아. 넌 아빠가 가장 강한 멕 나이트 파일럿이고, 변경의 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대단한 사람인 게 좋지 않아? 엄마가 고슬라 그룹의 회장님인 게 자랑스럽지 않아? 우리 애들한테 엄마가 주부인 게 좋아 아니면 멕 나이트 파일럿인게 좋아 하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

“당연히··· 멕 나이트 파일럿이죠!”

시에나가 빙긋이 웃었다.

“그거거든! 애들이 보고 싶을 때도 있고, 애들한테 미안할 때도 있고, 이 일을 때려치우고 싶을 때도 있지만, 나는 내 일을 계속해 나갈 거야. 내가 내 일로 성공하고 인정받으면 아이들도 나를 더 자랑스러워하니까.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야.”

세상에는 균형추라는 게 있어서 다 가질 수는 없지만, 그것을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시에나의 이야기는 어딘가 늘 허전하던 레오나의 가슴에 뜨거운 에너지를 채워 주었다.

“체력이 중요해.”

뜬금없지만, 멕 나이트 파일럿에게 가장 중요한 항목은 체력이라는 말이었다.

그 말뜻을 금방 이해한 레오나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

“이제 가자.”

“네, 단장님!”

두 사람은 별빛에 의지해 왔던 길을 천천히 되돌아갔다.

그런데 루산이 야영 캠프로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다른 파일럿들이 근처에 있었지만, 그를 수행했던 찰스와 단 둘이서만 모닥불 옆에서 단출하게 식사를 했는데, 식사를 끝내고 찰스가 뒷정리를 하기 위해 일어나자 루산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레오나는 가슴이 찡했다.

그러나 한창 습득력이 좋을 나이라 레오나는 이 상황을 좀 전에 배운 내용을 곧바로 적용해 이해할 수 있었다.

‘묘한 균형추!’

높은 자리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기에 안타까워할 필요가 없다.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능력 있는 아빠이니 자랑스러워할 일이었다.

레오나는 혹시 모를 아빠의 외로움이나 고독감을 자신이 채워 주기로 했다.

이 자리에 없었다면 모를까 옆에 있을 때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레오나가 모닥불로 다가가며 말했다.

“아빠!”

“왔니? 씻으러 갔다 오는 거야?”

“응.”

레오나가 루산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빠, 일이 잘 안됐어?”

“아니, 잘됐어.”

“근데 표정이 왜 그래?”

“내 표정이 어때서?”

“며칠 만에 예쁜 딸 얼굴을 봐서 자기도 모르게 환한 미소가 떠올랐지만, 그 아래에는 왠지 모를 근심과 피곤함이 깃들어 있는 것 같은걸?”

그 말에 루산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시에나를 쳐다보았다.

조용히 레오나 뒤를 따라 모닥불 가로 다가온 시에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모닥불 옆에 앉았다.

루산이 레오나에게 말했다.

시에나도 함께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루한 총독 대리에게 네세베르 개발권을 받아왔다. 네세베르 지방 전체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된 거지.”

시에나는 잠자코 듣기만 하고 레오나가 말했다.

“우와! 그럼 잘된 거 아니야?”

“너무 쉽게, 별 고민도 없이 준 것이 문제지. 아주 귀찮게 괴롭힐 줄 알았거든.”

“그게 왜 문제야? 귀찮게 안 하고 괴롭히지 않으면 좋은 거 아니야?”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

“나쁜 사람이야?”

“으응? 뭐···, 그런 셈이지.”

“그러면 더 잘된 거네! 우리가 강제로 빼앗은 것도 아니고 우리가 괴수 목장에 성공하면 루한에도 이익인 건 분명하잖아.”

“그렇지.”

“그 사람이 무슨 속셈으로 그랬는지는 별로 안 중요한 것 같은데? 얼른 공사를 시작해 버려. 무르지 못하게.”

“그럴까?”

“아빠는 그 사람한테 속셈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거야 그 사람 속셈이지 이 일하고는 상관없잖아.”

루산은 동의하지 않았지만, 레오나의 말도 일면 타당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토비아스의 속셈이 무엇인지는 지금 궁리한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속셈을 알 때까지 목장 건설 프로젝트를 중단할 것도 아니었다.

일을 진행해 나가면서 토비아스에게 속셈이 따로 있는지 알아보면 되는 것이다.

루산은 레오나와의 대화 내용보다 대화 자체가 더 즐거웠다.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이 기뻤다.

토비아스가 너무 쉽게 네세베르 개발권을 준 것 때문에 찜찜하던 기분이 모닥불 옆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머리를 쥐어짜며 아빠의 고민을 해결해 주려는 딸 덕문에 풀어졌다.

레오나가 아빠의 마음을 알았다면 묘한 균형추가 작동했다고 말했을지도 모르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루산은 곧바로 설계 팀 엔지니어들을 불러 말했다.

“네세베르 개발권을 얻었으니 최대한 빠르고 최대한 놀랍게 괴수 목장 프로젝트를 진행시키도록 하세요. 필요한 물자와 인력은 가까운 바르나에 도움을 요청하는 게 속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겠군요.”

바르나에는 바덴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백작님!”

루산은 네세베르 개발권을 얻어내고 얼마 있지 않아 괴수 목장 프로젝트를 설계 팀에게 맡긴 뒤 시험단 파일럿들 대부분을 데리고 바르나로 떠났다.

율리안 황제가 맡긴 비밀 임무를 본격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네세베르에서 곧바로 북상하여 바르나 접경지대를 넘을 때 바르나 식민지 주둔군 병사들과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다.

갑자기 남쪽에서 멕 나이트들이 다가오니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마나 통신으로 연락을 받은 총독부에서 식민지 회사에 급히 연락을 보내고 바덴이 상황을 정리하여 루산 일행은 금방 무사히 바르나로 넘어갈 수 있었다.

“엄마!”

“레오나!”

감격스러운 모녀의 상봉과 중년이 된 보름스 백작 부부의 중후하고 뜨거운 짧은 키스 뒤에 바덴이 침착한 표정으로 두툼한 편지 한 통을 루산에게 내밀었다.

“클라크 교수가 보내온 거예요.”

“음!”

루산은 벨고트 왕국으로 떠나기 전 그동안의 조사 내용을 적어 보낸 클라크의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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