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28. 사람의 마음은 애매한 겁니다
4부 28. 사람의 마음은 애매한 겁니다
“저 부대는 대체 무엇이오?”
블란트가 오스카에게 강하게 따져 물었다.
선두에 선 기체는 분명 레오파드 스피드인데 필센 제국군의 공식 색상이나 표식이 보이고 있지 않았다.
수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소속도 표시하지 않은 멕 나이트 부대를 동원해 자신을 공격하려 한다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블란트는 오스카의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부하에게 명령을 내렸다.
“접근을 막아라! 거부하면 부숴 버려!”
“네, 각하!”
블란트의 부하가 급히 달려 나갔다.
오스카가 서둘러 말했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이오.”
“뭐라?”
“멕 나이트를 움직여 맞서지 말라는 말이오.”
“무슨 뜻이오?”
“조금 전에 뭐라고 했소? 제국 정부에서 정식으로 조사하고 결정을 내리면 그에 따르겠다고 하지 않았소?”
“그게 어쨌단 말이오?”
“황제 폐하께서 파견한 대리인이오.”
“······!”
“······!”
블란트뿐 아니라 그의 뒤에 서 있던 다른 식민지 관계자들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였다.
“그, 그게··· 정말이오?”
블란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폴타바 군을 이끌고 벨고트 왕국을 기습 공격해 점령한 일이 바다 건너 본국에 보고가 되고 본국의 황제가 조사할 부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그 부대가 바다를 건너 이곳에 도착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지금 나타나는 것은 시간상으로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아 머리가 마비되는 것 같았다.
그 사이, 블란트의 명령을 받은 폴타바 군의 멕 나이트 1개 전대가 북쪽에서 다가오는 정체불명의 멕 나이트들을 저지하기 위해 전투태세를 갖추고 위협적으로 달려갔다.
- 멈추어라! 멈추고 정체를 밝혀라!
그러자 시에나와 시험단 파일럿들이 앞으로 나서서 003을 호위하는 대형을 취했다.
003에 탑승한 루산은 시험단 멕 나이트들 사이를 천천히 걸어 나와 외부 확성기로 말했다.
- 나는 대필센 제국의 황제 폐하이신 율리안 볼프스 마이센 님의 명령을 받들어 이곳에 온 루산 보름스 백작이다. 폴타바 주둔군 장병들과 이 자리에 모여 있는 필센 제국 식민지 관계자들에게 고한다!
외부 확성기로 증폭된 루산의 목소리가 양 진영의 모든 사람들에게 들릴 정도로 벨고트의 넓은 평원을 쩌렁쩌렁 울렸다.
- 그동안 아우로라 대륙의 여러 식민지들에서 정부의 방침을 어기고 권한을 남용하는 일이 빈번이 일어나고 있었으나 황제 폐하께서는 피폐해진 식민지를 재건하는 막중한 임무를 짊어지고 있는 총독들의 어려움을 헤아리시어 가벼운 부정은 못 본 척 넘어가셨다. 그러나 총독들은 이러한 폐하의 자비와 배려도 모른 채 더욱 간이 커져 정부 방침을 무시하고 자기 주머니 채우기에 열을 올렸다. 결국 너그러우신 폐하께서도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루산의 굵은 목소리가 오스카, 블란트, 다른 식민지의 총독과 대리인들, 필센 제국군 파일럿들, 그리고 귀순 파일럿들의 고막을 몽둥이처럼 두드렸다.
- 당장 모두 체포하여 본국으로 압송해 가는 것이 마땅하나 마지막 기회를 주려 한다.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
- 총독들은 그동안 저지른 비위를 스스로 고하고, 황제 폐하께 용서를 구하라! 정부에 알리지 않고 몰래 채굴하고 있는 마나석 광산을 모두 보고하라! 그리고 폴타바의 총독 블란트 베른카슈는 벨고트를 직할령 티라스의 사령관 오스카 빈켈에게 넘기고 폴타바로 돌아가 처분을 기다려라!
블란트를 비롯한 식민지 관계자들의 가슴이 철렁했다.
- 벨고트의 안정적인 인수인계와 마나석 관련 현황 파악에는 시간이 걸릴 테니 두 달의 시간을 주겠다. 그때까지 숨겨둔 마나석 광산을 나에게 보고하고, 벨고트 왕국을 직할령에 인계하고, 나머지 잘못을 고하라! 그것이 그동안 저지른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스산한 바람이 대지를 스치고 지나갔다.
- 황제 폐하께서는 내게 황금 사자 패를 하사하셨다! 나는 아우로라 땅에 주둔하고 있는 필센의 모든 군대를 동원할 권한이 있다는 걸 명심하라!
루산은 003의 가슴 덮개를 열고 밖으로 나와 멕 나이트 손바닥 위에 서서 황금 사자 패를 들어 보였다.
거리가 먼 곳에서는 그 물건이 무엇인지 보일 리 없지만, 지켜보는 사람들은 그것이 황금 사자 패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블란트와 식민지 관계자들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블란트가 고개를 쳐들고 소리쳤다.
“루산! 아니, 보름스 백작! 변경에 있어야 할 그대가 이곳에 있다니, 어찌 된 일인가? 고작 변경 구역 하나를 관리하던 자네가 대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 필센 제국의 승리에 이바지한 공신들에게 그런 명령을 내릴 자격이 있단 말인가? 갑자기 황제 폐하의 전권 대리인이라는 말을 믿으라는 것인가? 황금 사자 패가 아닌 옥새가 찍혀 있는 정식 명령서를 보여 준다면 믿겠다!”
루산이 변경에서 왔다는 것을 언급하여 그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신분의 진위를 의심하게 만들려는 술책이었다.
사실 술책이라기보다 그 자신이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루산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엄숙히 말했다.
“블란트, 믿고 말고는 그대 마음이지만, 그 결과 또한 그대가 책임져야 할 것이오.”
블란트가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나 루산은 블란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다행히 넓은 페르보 땅을 돌아다니는 수고를 덜었군. 명심하시오. 주어진 시간은 두 달뿐이라는 것을!”
루산은 아래에서 들려오는 질문들을 무시하고 몸을 돌려 조종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곧바로 003의 가슴 덮개가 내려왔다.
철컹!
003은 오스카의 병력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레오나를 비롯한 시험단 파일럿들의 멕 나이트가 그 뒤를 따랐다.
오스카 역시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가 루산이 탑승한 003으로 다가갔다.
마침 루산이 003에서 내리고 있었다.
오스카가 따지듯이 물었다.
“백작님, 저쪽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지금이 폴타바의 총독을 붙잡고 사태를 해결할 적기가 아닙니까? 왜 시간을 준단 말입니까? 폴타바의 총독은 무단으로 병력을 이끌고 다른 나라를 공격한 사람인데, 시간을 주면 순순히 항복을 하겠습니까? 싸움 준비를 하겠지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백작님이 황제 폐하의 명령을 받들어 이곳에 왔다는 것을 알렸으니 폴타바 군 파일럿들도 함부로 저항하지 못할 겁니다. 지금 바로 체포하죠! 안 그러면 사태가 더욱 복잡해질 겁니다.”
루산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오스카의 마음은 타들어 갔다.
“페르보 땅에서 식민지를 다스리고 있는 총독들이 마나석 현황을 순순히 보고하겠습니까? 그동안 마나석을 몰래 빼돌린 걸 자기 손으로 직접 황제 폐하께 보고할 수 있겠습니까? 시간을 주면 자기들끼리 연락을 주고받으며 똘똘 뭉치게 될 겁니다. 폴타바 편에 서게 될 거예요!”
‘대규모 내전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오스카는 차마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말이 씨가 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왜 이렇게 일을 어렵게 풀어 가십니까?”
루산도 원래 이렇게 풀 생각이 없었다.
페르보 땅의 식민지들을 돌며 총독들의 부정을 알아내고 조용히 한 명씩 처리해 나가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정이 워낙 커서 강하게 저항할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에는 인근 직할령 병력을 동원해 진압하면서 하나씩 해결해 나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클라크의 조사 결과 페르보 땅의 마나석 문제는 결국 하나로 엮여 있었다.
한 사람씩 따로따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모든 식민지를 들쑤시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럴 바에는 아예 대놓고 황제의 이름을 앞세워 공개적으로 문제 삼는 것이 시간과 노력을 아끼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루산이 오스카에게 말했다.
“일단 총독들에게도 기회를 줘야죠.”
“기회를 준다고요?”
루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총독들이 마나석을 빼돌린 잘못을 저질러 왔다 해도 그 사실을 알면서 내버려둔 황제 폐하와 정부에도 잘못이 있습니다. 아무런 경고 없이 벌을 주는 건 가혹한 측면이 있다는 말입니다. 더구나 마나석 광산을 몰래 개발한 이유가 주둔군 유지비 문제에서 비롯되었다면서요? 이 부분은 확실히 정부의 잘못이 크다고 할 수 있죠.”
그동안 정부가 무려 10년 동안이나 문제를 개선하고 총독들의 잘못을 계도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다가 갑자기 총독들을 때려잡는 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은 가혹하다는 것이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느슨한 생각이 아닙니까? 총독들은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있어요. 그동안 자신이 유지비를 감당해 왔기 때문에 주둔군을 자신의 사병으로 생각하고 있단 말입니다. 게다가 10년이나 마나석을 빼돌려 왔는데 황제 폐하께서 자신을 용서할 것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앞에서는 용서한다고 하지만 결국 그동안 자기가 저지른 행동을 알게 되었으니 그에 대한 벌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니 순순히 그동안의 잘못을 고할 리가 없지요. 무단으로 이웃 나라를 친 폴타바 총독이야 말할 것도 없고 말입니다.”
무려 10년.
한 지역의 왕으로 군림하던 식민지 총독들이 순순히 그 지위를 내려놓고 황제 앞에 자신의 죄상을 낱낱이 고한 채 엎드려 죄를 청할 리가 없다!
전쟁 기간을 포함하면 이 땅에서 15년을 지내온 오스카는 총독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려하는 것이다.
루산은 동쪽 진영에서 한데 모여 무언가를 열심히 의논하는 블란트와 식민지 관계자들을 바라보다 말했다.
“빈켈 경.”
“예.”
“사람의 마음은 애매한 겁니다.”
“예?”
“아침 마음이 다르고 저녁 마음이 달라요. 배가 고플 때 마음이 다르고 부를 때 마음이 다른 법입니다.”
오스카는 루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루산의 말이 이어졌다.
“10년 동안 황제를 욕하고 제국의 방침을 비판하고, 한 지역의 지배자로서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고, 황제도 별것 아니니 자기도 언제라도 황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막상 대노한 황제를 생각하면 두려움에 잠이 안 올 수 있는 겁니다. 열 받아 확 군사를 일으켜 버릴까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죄를 고하고 용서를 빌까 하는 생각도 든다는 겁니다. 이게 사람이에요.”
“음······.”
“마음속으로야 어떤 생각을 하든 무슨 죄가 되겠어요? 전우끼리, 친구끼리 상관을 욕하고 황제를 욕해도 무슨 일이 있겠어요? 그러다 상을 받고 직위가 오르면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하고 없던 충성심도 생기죠. 다들 그렇게 사는 거 아닙니까? 확고부동한 단 하나의 생각만 가지고 살지는 않는단 말입니다.”
다름 아닌 자신이 그러했다.
오베론 공작을 상대로 복수를 하겠다는 각오를 다지면서도 막막함에 다 잊고 조용히 현재 가진 것을 누리며 살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밤베르크 공작이 자신을 견제할 때에도 화난 마음에 들이받을까 생각하다가도 자기만 참으면 율리안의 근심이 줄어들고 노바가 평안해 지니 참고 물러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변경에서 조용히 지내다가도 이따금씩 화가 불쑥불쑥 치솟기도 했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자신의 견해를 명확히 밝혀야 할 순간이 옵니다. 애매함이 선명함으로 바뀌는 것이죠. 누군가는 반기를 들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엎드려 빌겠죠. 그 전까지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는 고려할 필요가 없어요. 이것으로 확실히 피아가 정해지는 겁니다. 기한을 주지 않고 조용히 한 사람씩 해결하려다가는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을, 두 달 안에 입장을 분명히 밝히라고 하면 두 달 만에 처리할 대상을 확실히 할 수 있어요. 이게 낫지 않겠어요?”
오스카는 그제야 루산의 뜻을 이해했다.
조용히 청소하지 않고 그야말로 대청소를 하겠다는 것이다.
10년 묵은 식민 통치의 문제를.
엎드려 빌면 과거를 묻을 것이요 저항하면 쓸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식이 통하려면 중요한 전제가 있었다.
과연 저항하는 세력들을 쓸어버릴 병력이 충분한가?
직할령의 사령관이나 지휘관들도 대부분 동방군 전우들이었다.
저쪽 편을 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노골적으로 편을 들지는 않겠지만, 이쪽의 기밀이 새거나 임무에 소극적일 수 있는 것이다.
“백작님, 오랜 전우들입니다.”
그의 짧은 말에 깊은 고심이 드러났다.
그러자 루산이 미소를 지으며 오스카를 안심시켰다.
“전우애가 강할지 황제의 명령이 더 강할지는 두고 봐야지요.”
오스카가 고개를 끄덕였으나 이 정도 말로는 안심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래서 루산은 덧붙였다.
“전우가 아닌 병력을 불렀습니다.”
“예?”
“산악 특임 기동 전단 병력이 올 겁니다.”
“그게 무슨······?”
루산은 가프 마법 연구소에 무기를 보내 줄 것을 요청하면서 아라드 변경에 동원령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오스카에게 이 사실을 알려 줄 생각은 없었다.
그는 중요한 동지였으나 그 역시 동방군 출신인 데다 그가 거느리고 있는 부하들 대부분이 동방군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루산은 페르보 땅의 총독들이 황제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엎드림으로써 용서를 받고 평화적으로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랐지만, 저항하는 쪽을 선택한다 해도 빠르게 쓸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아가 분명해야 했다.
이 문제를 오래 끄는 것은 필센 제국에도 자기 자신에도 별로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루산이 벨고트의 한 평원에서 포고한 내용으로 인해 페르보 땅은 물론 아우로라 대륙 전체가 들끓었다.
총독들의 회동 횟수가 늘고 저항 세력의 만남이 잦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라이네 공작이 루산을 만나기 위해 직접 벨고트의 평원으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