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30. 이건 약속한다
4부 30. 이건 약속한다
“···이 배는 여기서 수리를 못 합니다. 너무 커서 들어갈 수 있는 도크가 없어요. 대체 뭐 하는 뱁니까?”
돌파호의 선장 파셔는 조선소 엔지니어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할 말만 했다.
“완벽하게 고쳐 놓으라는 게 아니오. 기울지 않게 평형만 맞춰 놔요. 수리는 필센에 가서 할 테니까. 설마 이 정도도 못 한단 말이오?”
“그런 거라면 당연히 할 수 있지요!”
나푸라 왕국 조선소 엔지니어가 발끈했다.
멀찍이 떨어져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심심파적으로 듣고 있던 루트의 곁으로 비서가 서둘러 다가왔다.
“사장님!”
루트에 대한 호칭이 ‘사장님’이 된 것은 아주 오래된 일이었다.
루트가 고개를 돌렸다.
항구로 들어온 뒤로 오랜만에 면도를 하고 옷도 새것으로 갈아입어 그는 누가 봐도 뱃사람이 아닌 세련된 신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거친 항해로 고생을 심하게 해 홀쭉해진 볼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까다로운 성격이 더욱 사나워 보였다.
비서가 말했다.
“마침 시에나 무역 상사의 배가 있었습니다. 세 시간 후에 출항한다고 하더군요.”
바덴이 댄 자본으로 시에나 아버지가 세운 무역 회사.
대전쟁 기간에 금수품으로 지정된 나푸라산(産) 차를 들여오기 위해 설립했다.
바덴은 아라드 왕국을 거쳐 우회 수입하는 편법을 써서 차 사업으로 엄청난 돈을 벌었다.
이 과정에서 시에나 무역 상사도 급격히 성장해 차를 운반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필센 제국의 식품과 생필품, 기계류 등을 싣고 아우로라 대륙에 판매하는 대형 무역 해운 상사가 되었다.
루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선소 엔지니어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선장에게 걸어갔다.
“선장, 시에나 무역의 배를 타고 먼저 돌아가겠소.”
“아! 그러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저는 여기서 평형만 맞추고 출발해 브레머 조선소에 배를 넣겠습니다.”
“알았소.”
루트는 일행들과 함께 돌파호를 떠나 시에나 무역 상사의 대형 화물선으로 갔다.
루트가 가지고 있는 신분증은 여러 개가 있었는데, 그중 고슬라 그룹의 중요 인물임을 나타내는 것도 있었다.
고슬라 그룹 계열사의 대표나 임원, 급한 용무로 출장을 가는 직원, 기획 팀 직원들이 가지고 있는 이 신분증은 급한 상황에서 계열사나 협력사의 도움을 수월하게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시에나 무역의 상선의 선장은 루트가 보여준 신분증을 보고 기꺼이 그와 일행들을 태워 주기로 했다.
“이 배는 아라드 왕국의 룬드 항으로 가는데 어디까지 가십니까?”
“중간에 마리노 공화국에서 내려 줄 수 있겠소? 거기서는 배편을 얻기가 쉬울 테니까.”
“그러시죠.”
시에나 무역 상사의 대형 화물선은 나푸라의 차를 가득 싣고 항구를 떠났다.
날씨도 좋고 바다도 잔잔했다.
거친 바다에서 고생고생하던 루트는 오랜만에 평온한 항해를 하여 마음이 풀어졌다.
어차피 마리노 공화국까지는 여러 날이 걸렸기에 그동안 세상 소식을 들을 겸 선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시에나 무역의 선장이 오히려 루트에게 질문을 했다.
“아라드 측에서 자꾸 중간 마진을 높여 달라고 요구해서 고슬라 그룹이 차 사업을 아라드에서 완전히 철수한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습니다. 어떻게 되는 겁니까?”
“오랫동안 아우로라 동부에서 뭐를 좀 하다가 돌아오는 길이라 정확한 내용은 모르는데, 으레 있는 힘겨루기 아니오?”
차 사업은 고슬라 그룹의 중요한 돈줄 가운데 하나였다.
고급스러운 에를랑겐 노블, 역동적이고 활기가 넘치는 에를랑겐 유스라는 두 종류의 카페가 필센 제국 곳곳에 들어서서 만남과 쇼핑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 카페들이 없는 지역은 낙후되고 촌스럽다는 인식이 심어질 정도였다.
대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아우로라 대륙에도 이 카페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그 확산 속도가 매우 빨랐다.
고슬라 그룹은 이 카페들을 단지 차를 파는 장소로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상점 거리를 활성화시키고 도시를 번화하게 만드는 중심으로 생각했다.
이름 없는 예술가들의 작품이, 세련된 기획에 따라 전시되었다.
이 카페들이 들어선 곳에는 쇼핑 거리가 형성되었고, 쇼핑 거리에서는 고슬라 그룹에서 생산하는 많은 물건들이 판매되었으며, 사람들이 북적이자 카페는 더욱 번창했다.
늘어난 사람들은 카페에서만 차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마실 수 있도록 포장된 차를 사 갔다.
한때 막대한 이익을 노리고 차를 밀수한 적이 있었기에 루트는 고슬라 그룹의 차 사업을 특히 관심을 갖고 살펴보았는데 자신이 막연하게 생각한 사업적 이익을 그야말로 극한으로 발전시킨 데 대해 놀랐었다.
단지 차를 파는 상점이 아니라 문화를 선도하고 그룹의 새로운 제품을 홍보하는 장으로 활용함으로써 고슬라 그룹 전체 이익을 끌어올리고 그로 인해 차 사업의 이익 역시 동반으로 상승하는 것이다.
대전쟁이 끝난 후에 차는 금수품으로 지정이 취소되었기 때문에 다른 기업들도 나푸라산(産) 차를 수입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에를랑겐 노블과 에를랑겐 유스의 아성을 깨뜨리지 못했고 오히려 이들의 지위는 더욱 공고해졌다.
고슬라 그룹의 이러한 차 사업은 아라드 왕국의 차 전매청에서 들여오는 차를 판매하는 것인데, 비록 바덴이 이 유통 구조를 설계했지만, 대전쟁이 끝난 시점에서는 굳이 아라드 왕국을 거칠 필요가 없었다.
이익만 생각한다면 아라드 왕국을 끼지 않는 것이 더 높은 이익을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바덴은 여전히 아라드 왕국 차 전매청을 거치는 방식을 고수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째, 아라드 재건 계획이라는 초대형 장기 프로젝트에서 아라드 왕국 스스로 어느 정도 자본을 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바람직하다고 본 것이다.
이익을 독식하지 않고 아라드 왕국과 나눔으로써 연대감을 높이고 아라드 왕국의 주인 정신과 성취감을 고취시키기 위해서였다.
둘째, 아라드 왕국 차 전매청에 투자한 공장 설비를 이전시키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 할 일이 많은 바덴으로서는 여기에만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미 차 가공에 능숙해진 아라드의 숙련된 노동자들을 필센보다 훨씬 저렴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아라드 왕국의 차 전매청은 바덴이 최초로 구상했던 대로 차 사업에서 여전히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해서 차 사업이 이 구조로 진행되자 아라드 왕국이 자기 몫을 더 요구하는 일들이 종종 벌어졌다.
재상인 니트라 공작의 사망 후에 특히 이 목소리가 많아졌다.
그러나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그동안 바덴이 적절히 수용하고 때로는 단호히 거부하면서 거래를 유지해 왔기에 루트는 대단치 않은 사건으로 치부한 것이다.
“아! 오랫동안 떠나 계셨었군요. 이번에는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라드 차 전매청에서 독자적으로 시장 개척에 나선다고 하더군요. 나푸라에서 차를 들여오는 일도 독자적으로 시도하고 말입니다. 15년 동안 고슬라 그룹이 시키는 대로 해 왔는데, 이제 그만하겠답니다.”
“독립이 그렇게 쉽나? 그동안 아무 일도 안 하고 중간 마진을 얻은 것을 모르나?”
새로운 판로를 혼자서 개척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라드 왕국은 차를 소비하기에 충분한 구매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수출을 해야 하는데, 고슬라 그룹이 아니면 소화하지 못할 것이다.
고슬라 그룹이야 당분간 물량 조달에 차질이 생길지 몰라도 얼마 후에 충분히 새로운 차 공장을 세울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사람들이 소비하는 것은 아라드 차 전매청이 생산한 차가 아니라 고슬라 그룹이 만든 문화였다.
아라드 왕국이 크게 오판하고 있는 것이다.
‘아라드의 왕이 니트라 공작 사후에 기어이 크게 사고를 치려는 모양이군.’
루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선장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아라드 재건 프로젝트도 고슬라 그룹을 몰아내고 독자적으로 진행한다고 하더군요.”
“허! 고슬라 그룹이 계획을 수립하고 막대한 자본과 장비, 기술자들을 투입해서 여기까지 끌고 온 건데,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소리로군. 고슬라 그룹에서 다 철수시키면 뭘 가지고 재건을 한단 말이오?”
“어디까지나 소문입니다만 다른 개발 회사들을 직접 유치해서 진행해 나간다고 하더군요. 그 이야기 때문에 아라드 상사가 발칵 뒤집힌 모양입니다.”
아라드 상사는 고슬라 그룹이 아라드 재건 프로젝트를 위해 설립한 종합 회사였다.
여기까지 들은 루트는 이 일이 단지 철없는 아라드의 왕이 사고를 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아라드 왕궁에 다 바보들만 산다고 해도 아라드 변경에 무시무시한 괴수들이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괴수라는 것은 원시의 땅에 사는 거대한 괴 생명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라드 변경에 머물고 있는 멕 나이트 파일럿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루산 보름스의 진정한 힘.
마음먹으면 아라드 왕궁 정도는 삽시간에 쓸어버릴 수 있는 무시무시한 전력.
정확한 규모는 모르더라도 그 존재에 대해서는 모를 수가 없었다.
루산 보름스는 아라드에서는 왕국을 구한 영웅 대접을 받아왔고, 아라드 변경에 있는 루산의 병력이 아라드 땅을 거쳐 출동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라드 차 전매청이 중간 마진을 두고 고슬라 그룹과 힘겨루기를 하는 것은 사업적으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아라드 재건 프로젝트에 엄청난 자본을 쏟아부은 고슬라 그룹을 내쫓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났다.
필센 제국에서 자국 기업이 동맹국에서 이런 취급을 당하는 것을 가만 두고 보지 않는 것은 둘째 문제고, 루산 보름스가 결코 용서하지 않을 텐데 이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무슨 일이 생겼다!’
변고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루트는 선장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그러나 선장은 자기 관심사에 대해서만 알 뿐 필센과 아라드의 정세나 변경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마리노 공화국 출신 선장이 그런 것을 모른다고 하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루트는 필센 본토로 들어가 루산을 만나려던 생각을 버리고 바덴을 먼저 만나 상황을 알아보기로 했다.
시에나 무역 상사의 화물선은 그를 마리노 공화국 항구에 내려 주었다.
“부르가스로 간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루트 일행은 부르가스로 가는 배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갔다.
부르가스에 도착한 뒤에는 열차를 타고 식민지 바르나로 달렸다.
‘내가 없는 사이에 망하게 둘 수는 없지!’
루산 보름스.
보름스 가문을 망하게 한 루트는 자신의 가문을 무너뜨려 복수에 성공한 루산 밑에서 10년 넘게 일했다.
과거 괴한들에게 붙잡혀 어딘가로 짐짝처럼 실려가 루산을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억울할 것은 없다고 보는데? 하지만, 사람은 자기가 당한 걸 더 크게 생각하는 법이니까 복수하고 싶다고 해도 이해한다.”
“······.”
“그런데 너에게 선택지는 없어. 나를 위해 일하거나 죽는 것뿐이지. 내가 너를 놓아주려고 해도 남방군 출신 반란 기사들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아! 전에 만나 봤지? 한 2년 동안 같이 지냈나?”
“······!”
“이건 약속한다. 네 가족, 네 아이들은 건드리지 않겠다.”
선택지가 없었던 루트는 루산을 위해 일했다.
황제가 사망하고, 노바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황태자가 전선에서 행방불명되고, 둘째 황자 막심은 민심이 바닥이었지만, 율리안에게 곧바로 황위가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율리안보다 상속 순위가 위에 있는 황족들이 여전히 많았던 것이다.
대전쟁 전에 발생한 반란 사건으로 유폐되었던 황제의 동생 빌헬름이 황위를 주장하고 나서고, 루산에게 근위대장 자리를 요구하다 거절당한 수도 군단 사령관이 거사를 꾸몄다.
그 외에도 많은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일들은 루산이 무력으로 진압했지만,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황제가 되면 지지를 받지 못하고 권위가 서지 않기 때문이다.
힘으로 황제가 되면, 다른 사람들도 힘으로 그 자리를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하게 되면 전선에 나가 있는 장군들이 딴마음을 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황위에 올라 통치를 안정시켜야 했다.
율리안이 황제가 된 뒤에도 노바 귀족들, 필센의 고위 귀족들은 때로는 적극적으로, 때로는 소극적으로 저항을 계속하며 불만을 표시했다.
변경 출신의 이름 없는 황족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관리들, 경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황제에 대한 기대도 있었지만, 혈통의 정당성이 약한 황제라 무시하고 분위기가 만연했다.
율리안뿐 아니라 루산 역시 귀족 사회, 노바 관료 사회에 인맥이 없었기에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활약한 것이 바로 루트 오베론이었다.
대전쟁이 끝나고 네세베르 공략군 사령관 밤베르크 백작이 노바로 귀환할 때까지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바의 귀족들과 관리들의 약점과 특징을 파악하여 율리안 황제를 반대하는 사람을 쳐내고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끌어와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밤베르크 백작이 공작이 되고 제국군 사령관이 된 뒤, 루산이 그와 권력 다툼을 하지 않고 변경으로 물러나기로 결정했지만, 밤베르크 공작이 루산 보름스를 가만히 내버려 둔 것은 아니었다.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다.
그러나 루트가 노바의 귀족, 관료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해 나감으로써 루산 보름스를 완전히 제거하려는 밤베르크 공작의 시도는 결국 성공하지 못했고, 어느 때부터인가 아예 건드리지 않게 된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졌던 권력 싸움의 최전선에서 가문을 무너뜨린 원수를 위해 고단하게 싸웠던 그 시절의 기억이 생생이 떠올랐다.
약속대로 루산이 가족을 건드리지 않고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지만, 간섭하지 않고 전권을 일임했기에 자신의 모든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사장님, 도착했습니다.”
“음? 음.”
루트는 설핏 잠에 들었다가 깨어났다.
열차는 바르나의 수도 라브나 역에 도착해 있었다.
전쟁으로 완전히 무너졌던 라브나 시는 노바처럼 발전해 있었다.
악몽처럼 무너뜨리는 것도, 꿈결같이 눈부시게 발전시키는 것도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새삼 루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가지.”
“네, 사장님.”
루트 일행은 열차 역 근처에 있는 바르나 회사 건물을 향해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