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34. 늘 여기가 그리웠다네
4부 34. 늘 여기가 그리웠다네
난전에서의 파괴력은 부르사의 전사들을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과거 므라드가 부르사 통일 전쟁을 벌일 때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무무족의 장군이자 부르사 최강의 전사 슈야 마우메는 멕 나이트 파일럿에서 은퇴할 나이를 훌쩍 넘겼음에도 여전히 직접 레오파드 파워를 타고 전사들의 선두에 서서 폭풍처럼 마나 진동 도끼를 휘둘렀다.
쩡!
쿠앙!
낡은 재생 기체를 타고도 엄청난 파괴력을 선보였던 그와 부르사의 전사들이 레오파드 파워에 탑승하자 그 위력이 무시무시했다.
이미 마나포에 맞아 함몰된 강철 가슴이 강력한 도끼질에 쩍 갈라지고, 깨진 금속 조각들이 피처럼 흩어져 날렸다.
슈야와 부르사의 전사들이 혼란에 빠진 귀순 부대에 돌입해 난도질을 하는 사이, 가프 용병단의 또 다른 멕 나이트 부대가 열을 맞춰 달려와 전투에 가담했다.
두 번째 부대의 멕 나이트들은 사각 방패와 검을 들고 있었는데, 그 검은 마나 진동 대검보다는 짧고 괴수를 해체할 때 사용하는 마나 진동 단검보다는 약간 길었다.
루산이 부르사의 전사들이 근접전에서 강한 것을 보고 가프 마법 연구소에 의뢰하여 제작한 마나 진동 전투 단검이었다.
마나 진동 대검은 어릴 때부터 검술을 익힌 기사 출신 파일럿들이 사용할 때는 위력이 있을지 몰라도 검술이 미숙한 파일럿들이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무기의 길이가 길면 길수록 근접전에서 사용하기에 거추장스러워진다. 기사 출신이 아닌 파일럿은 물론이고 기사 출신들도 적과 가까이 붙었을 때는 단검이 더욱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렇게 만든 전투 단검은 아라드 왕국의 레인저와 피란민들 중에서 선발한 - 루산이 아라드 변경을 개척하면서 새로이 뽑아 키운 파일럿들로 하여금 주 무기로 사용하게 했다.
아무래도 그들은 기사 출신들보다 검술이 약할 수밖에 없었고, 아라드 왕국을 구원하고 피란민들을 구제해 준 루산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다.
어렸을 때부터 기사 수련을 해 왔고 남방군에서 군사 훈련을 제대로 받았던 나이 많은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이 그들을 지휘했고, 그들은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 서두르지 말고 대열 유지해! 조급할 것 없다!
- 방패 세우고, 찔러!
끄그극!
끼이익!
강철 단검이 금속 몸통을 꿰뚫고 들어가는 소름 끼치는 마찰음이 전장을 뒤덮었다.
간간이 실력 좋은 아우로라 연합군 출신 기사가 강하게 저항하기도 했으나 그때는 레보르크를 비롯한 기사 출신 베테랑 파일럿들이 저지했고, 그 틈에 아라드 출신 파일럿들이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재빨리 적 기체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밀착하여 방패로 에워싼 뒤 전투 대검으로 기체의 기관부를 찔러 움직임을 강제로 멈추었다.
변경에서 괴수를 제압할 때 수없이 훈련해 왔기 때문에 첫 실전의 긴장감으로 인한 실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부르사의 전사들, 아라드 출신 파일럿들에 이어 가프 용병단을 구성하고 있는 또 다른 전력은 남방군 출신 파일럿들이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 현역으로 활동하는 파일럿은 과거보다 많이 줄었지만, 그들 가운데 일부는 전투 단검 부대를 지휘했고 나머지는 전투 단검 부대 사이사이에서 날카롭게 전장을 주시하며 강력한 적을 저지하고 처단하는 역할을 했다.
그렇게 가프 용병단은 멕 나이트 전용 마나포에 맞고 혼란에 빠진 귀순 부대를 순식간에 궤멸 수준으로 몰고 갔다.
그 강력한 전투력은 지켜보던 오스카가 깜짝 놀랄 정도였고, 귀순 부대가 정면을 맡는 사이에 측면에서 가프 용병단을 공격하려던 블란트와 폴타바 군 파일럿들을 주춤하게 만들었다.
블란트가 노보라드와 자모스의 지휘관에게 마나 통신기로 긴급히 도움을 요청했다.
- 큰일이다! 선두 부대가 무너졌다! 놈들의 배후를 공격해 달라!
노보라드와 자모스의 지휘관들도 멀리서 들린 거대한 마나포 발사음에 무슨 사달이 생겼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눈에 보이지는 않았기에 그 짧은 사이에 이런 엄청난 사태가 발생했을 줄은 몰랐다.
깜짝 놀란 지휘관들이 대답했다.
- 알았다! 당장 달려가겠다!
식민지 노보라드와 자모스의 군대가 가프 용병단을 향해 맹렬히 달려갔다.
그러나 폴타바 군은 가프 용병단을 향해 움직이지 않았다.
영악한 블란트는 이미 사기가 떨어진 상태로 적과 부딪쳐 자신의 소중한 병력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 멀찍이 떨어져 견제만 하고 거리를 유지한다! 베키오, 물러나라!
폴타바 주둔군 파일럿들은 총독의 명령에 따라 가프 용병단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물러났다.
폴타바 군이 전투에 합류하지 않자 적과 뒤엉킨 상태에서 거의 일방적으로 쓰러져 가던 귀순 부대의 피해는 점점 더 커졌다.
‘블란트, 이놈! 알아서 빠져나오라고!?’
베키오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그러나 일단 살고 봐야 했다.
파일럿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야 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부하들을 지휘해 뒤로 물러나려 애를 썼다.
전투 도끼를 휘두르며 저돌적으로 덤벼드는 부르사의 전사들과 전열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포위망을 완성시켜 나가는 아라드의 전투 단검 부대로 인해 후퇴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베키오가 탑승한 헤비 스틸도 포위망에 걸려 잡힐 뻔했다.
그때 슈토프 백작이 멕 나이트 몇 대를 이끌고 달려와 목숨을 걸고 구했기에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부흥의 깃발을 들어 보지도 못한 채 쓰러질 뻔했다.
베키오는 슈토프 백작의 도움으로 격전의 현장에서 겨우 몸을 뺄 수 있었다.
그때 그의 곁에 있는 멀쩡한 멕 나이트는 겨우 50여 대뿐이었다.
10년 준비가 이토록 허무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이용하다 버릴 생각이기는 했지만, 아예 구하러 오지 않는 블란트의 행태에 피가 거꾸로 솟았다.
- 이놈!
분노의 대상이 갑자기 폴타바 군을 응징한답시고 찾아온 황제의 부하 보름스 백작인지 아니면 자신들을 헌신짝 버리듯 내던져 버린 폴타바의 총독인지 아니면 그동안의 노력을 하루아침에 수포로 만들어 버린 얄궂은 운명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 공자님, 진정하십시오! 다행히 파일럿 피해가 크지는 않습니다.
슈토프 백작이 베키오의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말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가프 용병단은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진 기체를 더는 공격하지 않았다.
대전쟁 때처럼 숙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황제의 명령을 위반한 총독을 응징하기 위해 벌이는 싸움이라 총독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전투에 뛰어들게 된 식민지 주둔군 파일럿들을 일부러 해치려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강력한 마나포 포탄에 가슴 덮개가 파괴되고 조종실이 부서져 파일럿이 찌그러지거나 파편에 관통 당해 사망한 경우는 있었지만, 근접전에서 사망자는 많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이대로라면 모두 포로가 될 처지였다.
- 아직 식민지 총독들의 병력이 훨씬 많습니다. 마나포는 한계가 있으니 잠시 상황을 지켜보시지요.
- ··· 알겠어요.
베키오가 감정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갑작스러운 마나포의 등장에 큰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마나포는 한계가 있었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노보라드와 자모스의 멕 나이트 부대가 가프 용병단 뒤에서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쿵쿵쿵쿵!
쿵쿵쿵쿵!
가프 용병단 주력 병력은 귀순 부대를 공격하느라 동쪽으로 이동해 있었고 남아 있는 병력은 멕 나이트 전용 마나포를 장착한 시험단 기체 30대와 이를 보호하기 위한 가프 용병단 2개 전대 병력뿐이었다.
루산이 시에나에게 명령을 내렸다.
- 마나포는 북서쪽에서 달려오는 놈들을 먼저 격파한다.
- 네, 대장님!
시에나가 대답한 뒤 시험단 파일럿들에게 지시했다.
- 방향 전환! 목표는 북서쪽 기동 전단!
시험단 멕 나이트 30대가 일제히 왼팔에 장착한 포신을 북서쪽 방향으로 돌리고 반동을 줄이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북서쪽에서 달려오던 노보라드 주둔군 멕 나이트 파일럿들은 그 모습을 보고 털끝이 쭈뼛 섰다.
조금 전, 천지를 뒤흔든 굉음을 일으킨 것이 바로 저 마나포라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필센 제국군은 지난 2차 대전쟁에서 마나포의 사용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마나포는 거리가 멀수록 명중률이 형편없이 떨어진다.
그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흔들리지 않는 포대를 사용하여 안정성을 높이는 것과 동시에 마나포를 최소한 전단 단위로 운용하는 것이 마나포 사용 전술의 기본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유효한 공격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고가의 마나 진동 화살만 낭비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마나포는 고작 30문밖에 되지 않았다.
안정성과 명중률이 얼마나 높은지 몰라도 저 숫자로는 의미 있는 피해를 입히기 어려운 것이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포탄 장전 방식과 발포 속도, 파괴력의 크기, 포탄의 제작 비용을 감안하면 빗발처럼 쏘지 않는 한 그리 위협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두려움이라는 감정만 극복하면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것이다.
- 방패, 45도 이상 기울이고 지그재그 뛰어!
멕 나이트 방패 세 장이면 마나 진동 화살을 막을 수 있다.
방패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마나포로 관통해야 하는 철판의 두께가 더 두꺼워진다. 방패 여러 장을 겹쳐 놓은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노보라드 군 멕 나이트 150여 대가 포탄에 방패가 뚫리지 않도록 방패를 크게 기울인 채로 피탄을 피하기 위해 지그재그 뛰었다.
그러나 노보라드 군 지휘관과 파일럿들은 조금 전 멀리서 소리만 들었을 뿐 이번에 가져온 멕 나이트 전용 마나포의 성능과 특징에 대해 알지 못했다.
마나 진동 화살을 포탄으로 바꾸어 장전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인 데다 명중률이 획기적으로 올라갔다는 것을 알 길이 없었다.
단점이 있다면 육안으로 보고 쏴야 하기 때문에 지형의 제약을 받는다는 것과 강력한 발포에 마나 연료 소모가 심하다는 것, 그리고 포탄 제작비와 부피의 문제 때문에 무한히 쏠 수 없다는 것 정도였다.
그 외에도 제작비를 낮추기 위해 마나 진동 기능을 약하게 하여 멕 나이트를 완벽히 뚫기 어렵다는 것도 단점으로 꼽을 수 있지만, 포탄 중량과 속도가 마나 진동 화살보다 높아져 충격량은 더욱 늘어났기 때문에 굳이 단점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마침내 시에나가 발포 명령을 내렸다.
- 쏴라!
쿠쿠쿠쿠쿠쿠쿠쿵!
쿠쿠쿠쿠쿠쿠쿠쿵!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포탄에 맞은 노보라드 군 멕 나이트의 방패가 하늘을 날고 가슴이 움푹 꺼지고 다리가 꺾였다.
- 장전!
시험단 파일럿들은 발포 시에 자신의 몸을 뒤흔든 강력한 진동에 짜릿한 흥분을 느끼면서도 능숙하게 포탄을 재장전했다.
- 쏴!
쿠쿠쿠쿠쿠쿠쿠쿵!
쿠쿠쿠쿠쿠쿠쿠쿵!
선두에서 달려오던 거대한 멕 나이트들이 픽픽 쓰러졌다.
필센 제국군 파일럿들은 동료들이 옆에서 쓰러져도 용감하게 전진했지만, 2차 발포에 이어 3차, 4차 발포까지 빠르게 이어지고 쓰러지는 멕 나이트들이 더욱 늘어나자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저도 모르게 지휘관의 다음 명령을 기다리며 발걸음을 늦추었다.
그때 귀순 부대를 쓸어버린 가프 용병단 주력 부대가 달려와 노보라드 군 멕 나이트를 향해 돌진했고, 시험단 멕 나이트들은 포구를 남서쪽 자모스 군 방향으로 돌렸다.
노보라드의 멕 나이트들이 픽픽 쓰러지는 광경을 목격한 자모스의 멕 나이트들은 계속 나아갈 수가 없었다.
자모스의 멕 나이트들이 주춤하는 것을 본 시에나 역시 발포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때 루산이 통신기로 말했다.
- 시에나, 첫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야 그다음이 수월하다.
- ···알겠습니다, 대장님!
시에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명령했다.
- 쏴라!
쿠쿠쿠쿠쿠쿠쿠쿵!
쿠쿠쿠쿠쿠쿠쿠쿵!
자모스 군 멕 나이트들은 결국 첫 번째 포격을 당하자마자 후퇴를 택했다.
페르보 식민지 총독들의 병력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지만, 아우로라 연합을 상대로 두 차례나 승리를 거둔 대필센 제국군 역사상 최단 시간에 최대 피해를 입은 전투였다.
***
변경 8구역에 손님이 찾아왔다.
“어이쿠, 오랜만이군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자리를 비운 루산 대신 변경 8구역을 다스리고 있던 켐니츠가 반갑게 손님을 맞이했다.
“그저 그렇지, 뭐. 노바 생활이라는 게 보통 머리가 아픈 게 아니야. 늘 여기가 그리웠다네. 고향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루산과 켐니츠의 상관이었던 트리어가 미소를 지으며 켐니츠와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