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36. 어차피 다 사라질 테니까
4부 36. 어차피 다 사라질 테니까
페르보의 총독들이 저항 의사 - 를 넘어 힘으로 찍어 누르겠다는 의지 - 를 분명히 하자 루산 또한 지난 10여 년 간 이어진 동방군 출신 총독들의 방종과 불충에 대한 징벌을 반드시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굳혔다.
그는 마르켈 라이네가 페르보 땅의 총독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리고 직할령 사령관들에게도 합류할 것을 종용하는 서한을 발송한 사실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사태를 관망하던 직할령 사령관들이 마르켈의 뜻에 따를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루산은 굳이 결과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저들에게 시간을 더 줄 생각이 없었다.
싸움이 시작되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전투가 벌어진 뒤였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저들의 병력이 더 모이기 전에 격파해야 했다.
“티라스 군이 버티는 사이에 우리는 동쪽에 있는 폴타바 군을 먼저 확실히 정리할 것입니다. 그렇게 배후의 안전을 확보한 다음에 페르보 총독들을 격파할 것입니다.”
루산이 가프 용병단과 티라스 주둔군 지휘관들에게 말했다.
티라스 군 지휘관들도 이번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이라면 몰라도 페르보 총독들이 싸움을 계속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한 순간 이 무력 사태는 승리로 결말을 짓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적극적인 전투 수행은 가프 용병단이 맡겠다는 것이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회의가 끝나고 나오는 길에 루산은 가프 용병단 지휘관들과 나직이 대화를 나누었다.
“속도가 생명입니다.”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칠 때는 기동성을 살려야 한다.
그래야 교전 순간에 병력의 우위를 점할 수 있고 포위를 피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시간을 주면 줄수록 페르보 총독들의 병력은 점점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었다.
“기동전을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체력이 되지 않는 파일럿들은 따로 부대를 편성하세요.”
“알겠습니다.”
레보르크가 대답했다.
루산의 눈길이 어쩌다 슈야 마우메에게 닿자 그가 발끈했다.
“혹시나 내가 나이 들었다고 걱정하는 것이라면, 걱정 마시오. 나를 포함한 부르사 전사들은 해당 사항이 없소이다!”
루산이 미소를 지으며 짧게 대꾸했다.
“반가운 이야기로군요.”
“흥!”
슈야 마우메가 공연히 모욕을 당한 것처럼 코에서 김을 뿜으며 돌아가고, 그다음으로 레보르크가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부대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루산에게 시에나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대장님, 포탄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루산의 얼굴에 감돌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처음부터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가프 마법 연구소에서 마나포 30문과 함께 보낸 포탄은 겨우 500여 발.
마나 진동 화살을 발사하는 마나포에 비해 명중률이 올라갔다지만 멕 나이트 전용 마나포 역시 모든 포탄이 적의 멕 나이트에 명중하는 것이 아니다. 절반 이상은 빗나갔다.
“발포 횟수를 줄이고 확실한 타격이 가능하기 전에는 유효 거리 안이라도 발포하지 마.”
“그러면 마나포 부대 운용 효과가 떨어질 텐데요?”
“남은 전투는 멕 나이트 접전으로 치른다. 마나포로는 약간의 균열과 혼란만 일으키도록 해.”
“알겠습니다.”
시에나가 시험단 파일럿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루산도 걸음을 서둘러 자신의 기체 003에 탑승했다.
포탄을 아끼고 확실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 직접 전투에 나설 생각이었다.
후우웅-!
엔진이 켜지고 003이 움직였다.
걸을 때마다 녹색 세르펜스 가죽으로 뒤덮인 몸체가 요란하게 번들거렸다.
003이 동쪽 방향을 향해 맨 앞에 서자 원형 방패와 마나 진동 도끼를 들고 있는 레오파드 파워 부대가 그 뒤에 자리를 잡았다.
부르사의 전사들이었다.
슈야 마우메처럼 부르사 통일 전쟁에서 패해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들의 아들들이 더 많았다.
부르사의 전사들이 탑승한 레오파드 파워 뒤로 여러 종류의 기체들이 뒤섞여 있는 멕 나이트 부대가 전투 단검을 들고 정렬했다.
아라드의 레인저와 피란민들 가운데 선발된 파일럿들이 탑승하고 있었다.
다양한 기체로 이루어졌음에도 칼 같은 대오가 인상적이었다.
아라드 부대 좌우에는 전통적인 멕 나이트 무기인 마나 진동 대검을 들고 있는 기체들이 자연스럽게 늘어서 있었다.
과거 반란에 가담했던 남방군 출신 기사들로 이루어진 부대였다.
시에나가 이끄는 시험단 멕 나이트들이 기다란 마나포를 장착한 채 오른쪽 언덕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100대가 넘는 멕 나이트들이 마나포 부대를 호위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지휘관들이 기동전을 치르기에 충분한 체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한 파일럿들을 따로 빼 마나포 부대를 보호하도록 한 것이다.
진열을 한번 죽 살펴본 루산이 힘차게 외쳤다.
[가프 용병단, 나를 따르라!]
003이 쏜살처럼 달려 나갔다.
마나 진동 기능을 활성화시키자 대검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 뒤로 슈야 마우메가 이끄는 부르사의 전사들이 붉은 빛으로 물든 전투 도끼를 들고 달려갔다.
전투 단검을 든 아라드 부대와 대검을 든 기사 부대가 그 뒤를 이었다.
폴타바 군과 이를 돕기 위해 빙 돌아 합류한 자모스 군의 멕 나이트들이 바위와 흙을 높이 쌓아 올려 구축한 진지 사이에서 방패를 맞대고 중첩 방어 자세를 취했다.
도저히 뚫릴 것 같지 않은 단단한 방진!
그러나 003은 멈추지 않았고, 슈야 마우메와 부르사의 전사들도 뒤가 없이 내달렸다.
폴타바 군의 방어 진지에 부딪치기 직전, 루산이 외쳤다.
[시에나!]
그러자 두 눈을 부릅뜨고 있던 시에나가 명령을 내렸다.
[쏴라!]
포격 위치를 확보한 시험단 파일럿들이 일제히 발포했다.
쿠쿠쿠쿠쿠쿠쿠쿵!
뒤에서 날아온 포탄이 003과 레오파드 파워 옆을 스치듯 지나 두꺼운 철제 방패를 들고 자세를 낮추고 있는 폴타바 군 멕 나이트에 명중했다.
쾅!
강력한 충격에 육중한 기체가 들썩이고 그 파괴적인 충격파가 파도처럼 전해져 방진 전체가 출렁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003이 적진에 파고들어 마나 진동 대검을 최대한 몸체에 붙인 채 적의 멕 나이트를 쓱쓱 베어 나갔다.
그 뒤로 부르사의 전사들의 무시무시한 도끼를 휘두르며 단단한 방진을 쩍쩍 갈라 나갔다.
얼음판 한쪽에서 거대한 망치를 두드려 시작된 균열이 순식간에 전체로 퍼져 나가듯이 폴타바와 자모스 군은 부서져 갔다.
[후퇴, 후퇴하라!]
블란트가 악을 쓰자 후미에 있던 멕 나이트들부터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방진 선두와 중간까지는 몸을 돌리다 오히려 큰 피해를 입었다.
폴타바 군과 자모스 군 멕 나이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동쪽으로 계속 달아났다.
가프 용병단은 한참 동안 추격하여 그들을 궤멸 직전까지 몰고 가다 멈추었다.
[이 정도면 배후에서 우리를 위협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추격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고른다.]
루산의 명령에 가프 용병단은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러고는 미련 없이 방향을 돌려 서쪽으로 이동했다.
계절은 어느새 겨울.
가프 용병단 멕 나이트들은 전투로 뜨겁게 달아오른 몸이 차갑게 식기 전에 다시 몸을 데울 적이 필요하다는 듯이 싸울 상대를 찾아 달렸다.
체력이 약한 파일럿은 따로 빼라는 루산의 지시는 괜한 엄포가 아니었다.
그들은 폴타바, 자모스 군을 궤멸시킨 데 이어 티라스 군을 포위하고 있던 튀르카, 하르키 군을 격파하고 아프카, 로조, 테르니 군을 차례로 흩어 버렸다.
그렇게 흩어진 식민지 주둔군의 멕 나이트들과 아직 가프 용병단과 충돌하지는 않았지만 두려움에 휩싸인 식민지 주둔군 부대들이 마르켈 라이네가 이끄는 노바오 군 주위로 모이기 시작했다.
시종일관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오스카와 티라스 주둔군 파일럿들은 가프 용병단의 가공할 파괴력에 몸을 떨었다.
멕 나이트 전용 마나포라는 신무기, 도끼를 들고 적진을 유린하는 레오파드 파워 부대의 광폭한 전투력, 그다음에 전투 단검을 들고 차근차근 숨통을 끊는 멕 나이트 부대의 치밀성··· 이러한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하여 나타난 결과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선두에 서서 적진을 쩍쩍 가르는 레오파드 슈퍼 스피드의 놀라운 실력이었다.
‘보름스 백작! 15년 전 바르나에서 활약할 때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렇게나 대단할 줄이야!’
혼자서 적진을 가르고 지나가는 것을 아무도 막지 못했다.
물론 혼자만 있다면 불가능한 일이고 가프 용병단의 여러 장점을 잘 활용했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바로 그 활용 능력을 갖췄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때 루산으로부터 통신이 들어왔다.
[사령관, 노바오 군을 격파하여 이번 사태를 끝냅시다.]
루산의 숨소리는 거칠었다.
거의 쉬지 않고 계속 전투를 치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오스카가 대답했다.
벨고트에서 전투를 치른 것은 가프 용병단이었다. 티라스 군은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아예 움직이지 않고 방관만 한 다른 직할령 주둔군에 비하면 협조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황제의 명령을 수행하는 특별 사자의 눈에는 한참 부족할 수도 있었다.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는 제대로 협조할 필요가 있었다.
[티라스 군, 반란을 일으킨 총독들을 진압하라!]
오스카는 이번에 총독들이 병력을 동원한 행위를 처음으로 반란으로 규정했다.
그 말은 동방군 출신의 티라스 군 지휘관들의 가슴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
[······!]
과거의 인연으로 동방군 출신 총독들에게 우호적인 마음을, 황제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찾아왔다는 변경 출신의 루산 보름스 백작에게 적대적인 마음을 숨기지 않았던 티라스 군 지휘관들은 사령관의 말에 마침내 노선을 확실히 정할 수 있었다.
[부대 전진! 목표는 반란을 일으킨 식민지 총독들이다! 다른 생각은 마라! 우리는 오로지 황제 폐하의 명령을 거역하고 나라를 어지럽힌 죄인을 징벌할 뿐이다!]
티라스 군이 마침내 움직였다.
질서정연하게 몰려오는 티라스 군의 멕 나이트들을 보고 식민지 주둔군 파일럿들은 가슴이 철렁했다.
가프 용병단만 해도 상대하기 버거운데 페르보에서 가장 강력한 전투력을 지녔다는 직할령 티라스 주둔군까지 상대하게 되었으니 도저히 이기지 못할 것 같았다.
사기가 이미 떨어졌다고 판단한 마르켈이 명령했다.
“노바오로 후퇴한다! 그곳에서 병력을 집결할 것이다! 총독들은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는 병력을 모두 노바오로 모이도록 하시오!”
그런 뒤 노바오 군으로 하여금 후퇴하는 식민지 병력을 지키기 위에 후위를 맡게 하였다.
벨고트 왕국의 평원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는 식민지 군 병력을 보고 티라스 군과 가프 용병단은 맹렬히 추격했지만, 가프 용병단은 연이은 전투에 지쳐 있었고 노바오 군이 악착같이 방어에 나서는 바람에 전투를 이어 나가기가 어려웠다.
결국 가프 용병단과 티라스 군은 추격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마르켈 라이네 공작!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말인가! 아까운 자신의 병력으로 나머지 병력을 지켰다. 앞으로도 페르보 땅의 식민지 총독들이 기꺼이 그의 명령을 따르겠구나!’
멀어져 가는 식민지 병력을 바라보며 루산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음 대책이었다.
“일단 폴타바 군을 완전히 정리하여 배후의 위협 요소를 제거하고, 대오를 갖춰 노바오로 간다! 다른 병력이 합류하기 전에 이 싸움을 끝낼 것이다!”
그 전에 필요한 것은 휴식이었다.
가프 용병단 파일럿들은 티라스 군의 호위 속에서 휴식을 취한 뒤 벨고트 왕성이 있는 동쪽으로 이동했다.
***
벨고트 왕국의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 결과는 페르보 땅에 구축된 마나 통신망을 타고 직할령과 식민지로 순식간에 퍼져 나갔으나 가장 먼저 그 소식을 접한 사람은 놀랍게도 페르보 땅의 총독이나 사령관이 아니라 루한 식민지를 다스리고 있는 밤베르크 공작의 아들 토비아스였다.
“처음 보는 마나포, 강력한 멕 나이트 부대······, 그렇다 해도 너무 일방적이지 않은가? 가프 용병단은 별 피해가 없다고? 지난 10년 동안 동방군이 얼마나 무뎌졌단 말인가?”
통신으로 전해진 전투 결과를 기록한 문서를 받아 본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 상관없겠지. 어차피 다 사라질 테니까.”
토비아스는 이 소식을 쾌속선 편으로 본국으로 보내도록 했다.
그런 뒤 루한 주둔군 전체에 명령을 내렸다.
“루한에 주둔하고 있는 모든 병력은 북동쪽에 집결하라! 이 대륙에 남아 있는 아우로라 연합 잔당 소탕 훈련을 실시할 것이다!”
루한에 주둔해 있던 필센 제국군 - 네세베르 공략군이 모태가 된 밤베르크 공작의 군대 - 이 페르보 땅으로 이동하기 위해 옛 루한 왕국 북동쪽에 착착 집결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멕 나이트 전단과 마나포 부대 그리고 보병 사단 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들었다.
파일럿 전투복을 착용하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토비아스가 중얼거렸다.
“제국을 혼란에 빠뜨린 자들을 이번에 깨끗이 정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