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37. 다시 시작할 겁니다
4부 37. 다시 시작할 겁니다
애초에 클라크가 벨고트 왕국까지 오게 된 계기는 루산의 요청으로 페르보 땅의 식민지 총독들이 저지르고 있는 마나석 관련 비위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루산에게 그동안 조사한 내용을 보고한 것으로 사실상 그의 역할은 끝이 났지만, 클라크는 여전히 벨고트 왕국에 머물러 있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마나석 기술이 어디까지 왔는지 직접 확인하고 이 기술을 가프 마법 연구소가 획득할 수 있게 도우려는 것.
둘째, 율리안과 루산을 돕기 위해 필센 제국에 위협이 되는 아우로라 부흥 운동 세력의 정체를 확인하려는 것.
그런데 첫째와 둘째는 별개가 아니었다.
마나석에서 고급 마나 연료를 추출하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타라스 마법 연구소의 배후에 아우로라 부흥 운동 세력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클라크는 투릭 오제로, 가프 연구소의 마법사 크루소 그리고 해체된 아펜도르 마법 연구소 출신의 순다르와 함께 벨고트 왕성 변두리 공장에서 몰래 생산 시설을 가동하고 있던 타라스 마법 연구소를 알아낸 뒤 과감하게 접촉해 마나석을 공급하는 조건으로 마나석에서 고급 마나 연료를 추출하는 기술을 받기로 약속했다.
말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두 차례나 마나석을 제공했다.
루산이 티라스 주둔군과 함께 벨고트 왕국까지 들어와 폴타바 군과 대치하고 있는 와중에도 가프 연구소가 페르보 땅에서 개발하고 있는 광산에서 마나석을 다른 길로 들여온 것이다.
“마나석 관련 비위를 저지른 총독들을 징벌하겠다고 필센 제국군이 눈을 부라리고 있는 상황에서 마나석을 몰래 들여올 정도라면 매우 유능하고 담이 큰 사업가입니다.”
타라스 마법 연구소 측은 클라크에 대한 믿음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겨우 두 차례 공급받은 데 불과하지만 어쨌든 마나석 공급에 대한 우려를 어느 정도 덜었는데 문제는 어렵게 자리 잡은 이곳이 아예 쓸릴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다.
폴타바 군이 지배하고 있을 때는 그들의 눈을 피해 조심스럽게 공장을 돌려 아우로라 부흥군에 넘겨주면 되지만, 베키오가 이끄는 그 군대가 단 한 번의 전투에서 완전히 쓸리고 말았다.
이어서 폴타바 군도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벨고트 왕성으로 도망쳐 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공장을 계속 가동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아우로라 부흥군도 어떻게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상황이라 타라스 마법 연구소는 더더욱 진로를 결정하지 못해 우왕좌왕했다.
“벨고트에 자리를 잡고 연구해 온 지가 10년이 넘었습니다. 다른 지역으로 옮긴다면 어렵게 마련한 공장과 설비를 다 포기해야 합니다. 마나석은 또 어떻게 공급받겠습니까? 이대로 머물면서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습니다.”
“그건 안 될 말입니다! 공장을 다시 돌리는 어려움만 생각해서 이전을 포기하고 여기 머물다가는 다 잡힐 염려가 있어요! 공장 터와 설비는 다시 마련할 수 있지만, 사람은 다시 구하지 못합니다! 안전한 곳으로 옮겨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마법사들 간에도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다 한 마법사가 의견을 내놓았다.
“우리에게 마나석을 공급해 주는 사업가가 능력이 있고 간이 큰 것 같으니 그에게 한번 물어보도록 합시다.”
“뭘 물어본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옮겨 갈 만한 안전한 곳이 있는지, 우리 공장 설비를 옮겨 줄 수 있는지 물어보자는 겁니다.”
“······!”
“그는 마나석을 공급할 정도로 능력 있는 사업가이고 우리 기술을 탐내고 있어요. 우리가 벨고트에서 모두 잡히거나 뿔뿔이 흩어져 버리면 그 역시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그러니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줄 것입니다.”
“음······!”
“그에게 방법이 없다 해도 이렇게 논쟁만 하느니 물어보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결국 타라스 마법 연구소의 마법사들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클라크에게 만남을 요청하고, 사람과 중요 설비를 포함한 자신들의 이전을 도울 수 있는지 물어본 것이다.
클라크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타라스 마법 연구소가 이 상황을 스스로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도움을 구한 것이니 앞으로 자신의 영향력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혼자 결정할 수 없었다.
“옮겨 갈 만한 곳이 있는지, 안전하게 이전을 도울 수 있는지 검토해 보겠습니다.”
“서둘러 주십시오!”
마법사들의 절박한 눈길을 받으며 그는 자리를 뜬 뒤 벨고트 왕성 서쪽에 진을 치고 있는 루산을 조용히 만나러 갔다.
이야기를 들은 루산이 입을 열었다.
“마법 연구소 설비를 옮겨 갈 수 있도록 도움을 달라?”
“네, 백작님. 여기서 저들을 잡아 봐야 얻는 게 없습니다.”
“그런가?”
루산이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그래, 이전시켜 준다면 어디로 갈 생각이냐?”
“니코폴 왕국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일단 여기서 거리가 멀고 그곳에도 마나석 가공 공단이 있으니 저들이 충분히 마음을 놓을 것입니다.”
니코폴 왕국은 페르보 북쪽에 있었다.
벨고트 왕국이 페르보 동쪽에 있으니 상당히 먼 거리였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왕성 공격을 늦추면 되겠지?”
“그렇습니다, 백작님.”
“아우로라 잔당들도 함께 빠져 나가는 것인가?”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들이 만약 그걸 요구할 경우에 제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어차피 타라스 마법 연구소는 아우로라 잔당의 후원으로 운영해 온 것이 아니냐?”
“그렇지요.”
“만약 함께 탈출시켜 달라고 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도 괜찮겠지.”
클라크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정말이십니까?”
“음. 저항 세력이 뿔뿔이 흩어져 버리면 소탕하기가 쉽지 않아. 하나의 조직으로 엮여 있어야 한꺼번에 뿌리 뽑기가 편하지.”
아직 아우로라 부흥 운동 세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못한 루산은 이번 일을 저 세력을 확실히 장악하고 관리할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했다.
과거 프리드리히 황제가 오베론 공작에게 구 귀족파 잔당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길 것을 지시함으로써 구 귀족파를 완전히 뿌리 뽑은 일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지만,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부흥 운동을 하는 아우로라 잔당은 필센 제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적이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클라크는 벨고트 왕성으로 돌아가 타라스 마법 연구소 고위 마법사들을 다시 만났다.
“방법을 찾았습니다. 니코폴 왕국으로 옮기시죠.”
클라크는 니코폴 왕국 마나석 가공 공단으로 이전할 것을 제안했고 핵심 장비와 마법사들을 안전하게 옮겨 주겠다고 약속했다.
금방이라도 필센군의 공격을 받아 체포될 것을 걱정하던 마법사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고위 마법사 한 명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혹시나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도 옮겨 주실 수 있을까요?”
“누구를 말입니까?”
“······.”
“말씀하시기 곤란하면 안 하셔도 됩니다.”
“그게 아니라······, 하아! 사실 페르보 제국에서 벨고트로 망명한 귀족들이 좀 있습니다. 폴타바 군은 그들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만, 필센 황제가 보낸 특별 사자가 이 나라를 장악하면 그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집니다. 대가는 충분히 치르겠습니다.”
“음······.”
클라크는 고민하는 척했다.
마법사들이 그의 얼굴을 긴장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알겠습니다.”
그제야 마법사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타라스 마법 연구소의 대표 마법사가 베키오를 만나러 갔다.
그는 10년 동안 공들인 아우로라 부흥군이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자 몹시 실의에 빠진 상태였다.
필센 제국 황제가 특별히 파견한 군대가 벨고트 왕성 서쪽에서 밀고 들어오면 어찌해야 할지 결정하지도 못했다.
폴타바의 총독 블란트가 수성 명령을 내리면 남아 있는 50여 대의 멕 나이트로 전투에 나서야 하는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달아나야 하는지, 달아난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허망하고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라스 마법 연구소의 대표 마법사가 니코폴 왕국으로 옮겨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어도 반응이 시큰둥했다.
“···그렇습니까?”
“예, 공자님! 그곳에서 재기하시지요!”
“글쎄······.”
“다시없을 기회입니다!”
“으음······.”
타라스 마법 연구소의 대표 마법사는 크게 실망하고 돌아와 이전 준비를 서둘렀다.
마나석에서 고급 마나 연료를 추출하는 데 필요한 핵심 설비를 뜯어 포장하고, 가지고 있는 중요 서류와 연구 책자를 정리하고 나머지는 불에 태우도록 했다.
아우로라 부흥군 파일럿들은 이전을 준비하는 타라스 마법 연구소와 실의에 빠진 베키오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그런데 완전히 실의에 빠져 의욕이 없는 베키오의 마음을 들깨운 사건이 발생했다.
슈토프 백작이 급히 달려와 외치듯이 말했다.
“공자님! 블란트가 달아났습니다!”
“응? 그게 무슨 말입니까?”
“블란트 그놈이 폴타바 군만 이끌고 남쪽으로 빠져 나갔습니다. 우리에게는 말도 안 하고 말입니다.”
폴타바의 총독 블란트가 귀순 부대를 팽개치고 달아났다.
벨고트 왕성에 남아서는 직할령 티라스 주둔군과 루산 보름스의 가프 용병단을 막지 못하리라 판단해 마르켈 라이네 공작에게 합류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귀순 부대를 데려갈 경우 그 부대의 정체를 들킬 우려가 있었다.
귀순 부대의 규모가 클 때는 거느릴 가치가 있었으나 첫 번째 교전에서 대패하고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는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데려갈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티라스 군과 가프 용병단의 먹이로 던져 주어 시간이나 벌 생각이었다.
블란트의 생각이 짐작되자 베키오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이눔이!”
어차피 서로 이용하려 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지난 10년을 밑에서 복무했음에도 이런 식으로 버려진다는 것은, 그것도 얼마 전 전투에 이어 벌써 두 번이나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절대 용서하지 않으리라!”
“공자님, 놈을 벌하는 것은 나중 문제입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우리만 남아서는 절대 막을 수 없습니다!”
베키오는 입술을 깨물었다.
“맞는 말입니다. 일단 살아남아야겠지요! 살아남아야 복수도 하고 재건도 할 수 있겠지요!”
“그럼요!”
“타라스 마법 연구소에 연락하세요. 함께 가겠다고.”
“하지만 공자님! 그렇게 하려면 멕 나이트를 모두 버리고 몸만 빠져나가야 합니다.”
필센군을 피해 몰래 근거지를 옮기는 일이었다. 멕 나이트를 타고 갈 수는 없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어요. 10년 전에 그랬듯이 다시 시작할 겁니다!”
블란트에 대한 증오심이 무력증에 빠졌던 베키오의 마음에 다시 불을 지폈다.
슈토프 백작은 그 의지의 불꽃이 다시 살아난 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아우로라 부흥군 파일럿들 사이에도 이견이 있었지만, 불행히도 그들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그들은 멕 나이트를 버리고 타라스 마법 연구소에 마나석을 공급하던 사업가 - 클라크가 동원한 화물차에 몸을 실었다.
붐붐 자동차에서 제작하고 바덴이 빌려 준 거대한 화물 차.
수십 대의 붐붐 - 붐붐은 자동차 회사의 이름이면서 화물차의 이름이기도 했다 - 화물차가 타라스 마법 연구소의 중요한 설비, 마법사, 아우로라 부흥군 파일럿과 그 가족을 싣고 처량하게 길을 떠났다.
놀랍게도 그 화물차는 크기가 무척 컸음에도 단 한 차례도 필센군과 마주치지 않았다.
루산이 알고도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타라스의 마법사들과 아우로라 부흥군은 클라크에 대한 믿음이 더욱 깊어졌다.
루산 보름스가 이끄는 군대가 벨고트 왕성을 점령하고 왕국 전체를 장악해 나가는 동안 클라크가 선도하는 붐붐 화물차 수십 대는 벨고트 왕국을 벗어나 거대한 페르보 땅을 가로질러 눈 덮인 니코폴 왕국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