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38. 철로 보수 공사가 시작되었거든요
4부 38. 철로 보수 공사가 시작되었거든요
바덴은 일찍 눈을 떴다.
아직 해가 뜨려면 한참 남은 한겨울의 새벽이라 눈을 떠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다시 잠을 청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안일을 하는 하녀들도 깨지 않아 거실은 깜깜하고 썰렁했다.
루산이 페르보 땅으로 들어간 뒤로 바덴은 깊은 잠에 들지 못했다.
황제의 명령이라지만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 동방군 출신 총독들이 쉬이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았다.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전쟁을 의미한다.
남편을 전쟁터로 보내고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것이다.
루트 오베론이 아라드 왕국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온 뒤로는 불면증이 더욱 심해졌다.
가프 용병단의 멕 나이트 400여 대가 이미 서쪽으로 들어갔고, 페르보 땅의 총독들이 거느리고 있는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루산이 대승을 거두었다지만, 페르보의 식민지 총독들이 입은 피해는 전체 병력에 비하면 미미했다.
총독들은 첫 싸움에서 패한 뒤에도 굴복하지 않고 병력을 이끌고 노바오로 집결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루산이 결코 유리하지 않았다.
병력 규모 면에서 완전히 열세에 놓이게 되며 전장 자체가 적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직할령 주둔군이 루산에게 협조한다면 다행이겠으나 티라스의 사령관 오스카만이 루산을 돕고 있을 뿐 나머지 직할령 사령관들은 사태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유리한 쪽으로 혹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붙겠다는 뜻이었다.
직할령 사령관들 역시 다른 식민지의 총독으로서 마나석 불법 유통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들은 결국 노바오의 총독 마르켈 라이네 공작 편으로 붙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바덴은 거실과 주방의 마나 등을 켜고 물을 끓인 뒤 익숙하게 차를 탔다.
불이 켜진 것을 보고 문지기가 조간신문을 들고 들어왔다.
바덴은 차를 마시며 신문의 주요 기사를 빠르게 훑었다.
그 사이, 날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졌다.
그런데 그때 바르나 회사에서 당직을 서던 비서가 자동차를 타고 달려왔다.
루트 오베론이 방문한 뒤로 바덴은 페르보 땅은 물론이고 아우로라 전역에 대한 동정 보고를 강화할 것을 지시했고 그 보고를 곧바로 전달받기 위해 당직을 강화했다.
그리고 중요한 일이 발생하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말고 자신에게 보고하라고 단단히 지시를 내렸다.
아직 날이 완전히 밝기 전임에도 당직 비서가 달려온 것은 중요한 일이 발생했다는 뜻이었다.
“사장님! 이른 새벽에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무슨 일이죠?”
“루한 왕국, 아니 루한 식민지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에 총동원령이 내려졌답니다!”
“총동원령이라니, 정확히 무슨 명령이라는 건가요?”
“아우로라 연합 잔당 소탕 훈련을 대대적으로 실시한다는데, 아무래도 이상한 점이 많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지난 이 시점에 갑자기 아우로라 연합 잔당 소탕 훈련을 한다는 것도 그렇고, 병력 동원 규모가 어마어마한 것도 그렇고, 병력을 루한 북동쪽에 집결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이해하기 어려운 점투성이입니다.”
“루한 북동쪽?”
“네, 사장님.”
루한 북동쪽이면 바르나 남서쪽 접경지대였다.
루한 주둔군이 왜 하필 바르나 남서쪽 접경지대에 집결한단 말인가?
그 이유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2차 대전쟁에서 아우로라 연합국들 가운데 가장 치열하고 처절하게 싸운 나라는 페르보 제국이었고, 이 나라가 멸망한 뒤로도 이 나라의 귀족과 기사들이 이웃 나라로 많이 달아나 부흥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르보 땅에서 아우로라 잔당이 소란을 일으키면 루한 주둔군이 바르나를 거쳐 페르보로 들어가 진압하겠다는 뜻이로구나!’
그렇다 해도 루한 주둔군이 굳이 페르보까지 대병력을 거느리고 올 필요는 없었다.
말이 부흥 운동이지 각 식민지 정부가 해결하기 어려운 수준의 소요 사태가 발생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페르보 땅에 주둔해 있는 병력을 모두 합치면 루한 땅에 주둔해 있는 병력보다 훨씬 많았다.
그렇다면 왜 하필 루한 북동쪽, 바르나 접경지대에 병력을 집결했을까?
‘현재 루한을 통치하는 것은 밤베르크 공작의 큰아들인 토비아스. 루한 주둔군은 밤베르크 공작의 병력이다!’
바덴은 털끝이 쭈뼛 섰다.
“지금 바로 가죠.”
“네, 사장님!”
바덴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바르나 회사로 출근하여 자세한 보고를 듣고, 바르나 총독부로 가서 총독 대리와 바르나 주둔군 지휘관에게 요청했다.
“루한 주둔군이 바르나로 넘어올지도 모릅니다. 루한과의 접경지대 감시를 철저히 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알리도록 해야 합니다.”
바덴은 바르나 회사의 사장에 불과하고 식민지 바르나를 통치하는 총독 대리는 따로 있었지만, 사실상 총독이나 다름없었기에 그녀의 요청은 명령이 되어 곧바로 접경지대 병력에 전달되었다.
“그런데 고슬라 사장님, 실제로 루한 군이 우리 땅으로 들어온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루한 땅에 주둔해 있는 병력은 멕 나이트 전단만 열 개가 넘습니다. 반면 우리 바르나에는 멕 나이트 전단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총독 대리의 말에 바덴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충돌하면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만약 루한 군이 바르나로 들어와 동쪽으로 이동하려 한다면 철로를 끊을 겁니다.”
뜬금없는 말에 총독 대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철로를 끊는다고요?”
“네. 루한 군의 이동을 방해하기 위해서라고 말해서는 안 되겠죠. 지반 침하로 안전 문제가 자주 발생하는 철로 구간을 대대적으로 보수한다고 하세요.”
“아!”
“철로 보수 인력을 미리 준비시켜 놓고 명령을 내리자마자 끊도록 하세요. 루한 군이 페르보로 들어가는 것을 최대한 늦춰야 합니다.”
총독 대리도 페르보 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상관인 바르나의 총독 오스카 빈켈과 바르나 회사의 사장 바덴 고슬라의 남편 루산 보름스가 한편이 되어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는 총독들을 진압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요청한 적도 없는 밤베르크 공작의 군대가 갑자기 페르보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결코 오스카와 루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과거 밤베르크 공작이 루산을 공격하여 노바에서 쫓아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총독 대리가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
많은 병력을 이동시킬 때에는 철도를 이용하는 것이 시간을 단축시키는 방법이었다.
철로를 끊으면 걸어서 이동해야 하는데 루한에서 페르보까지 걸어서 이동하려면 시간이 훨씬 많이 걸린다.
만에 하나 밤베르크 공작이 군대를 동원해 루산을 치려 해도 시간을 벌어 주는 것이다.
바덴은 그렇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준비를 마쳤다.
루한 땅 북동쪽에 집결한 밤베르크 공작의 군대가 바르나로 넘어오지 않기를 바라며.
그러나 그녀의 예상은 늘 적중했다.
집결을 마친 루한 군이 대대적으로 바르나로 넘어온 것이다.
***
<···페르보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란 상황의 배후에 아우로라 연합의 잔당들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바, 그들의 뿌리를 완전히 뽑고 필센군 간의 무의미한 충돌을 억제하기 위해 필센 제국군 총사령관이신 밤베르크 공작의 명령에 따라 출동한다. 바르나 총독부는 이에 협조하라.>
루한 주둔군은 제국군 총사령관의 직인까지 찍힌 명령서를 들고 바르나로 들어왔다.
멕 나이트 기동 전단이 무려 12개, 마나포 전단이 5개, 후속으로 보급 부대와 보병 사단이 계속해서 밀려왔다.
접경지대를 지키고 있던 바르나 주둔군 병력은 명령대로 그 사실을 마나 통신망을 이용해 곧바로 총독부에 전했을 뿐 저지하지 않고 길을 비켜 주었다.
어차피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병력이었다.
루한 군을 이끌고 바르나 땅에 발을 들인 토비아스는 접경지대의 작은 도시부터 다른 식민지와는 차원이 다르게 잘 가꿔진 바르나 땅을 흐뭇하게 둘러보았다.
접경지대 소도시를 지나 농촌 마을을 지나게 되었을 때에도 풍경이 다른 식민지와는 달랐다.
2차 대전쟁 기간 중에 가장 철저하게 부서졌다는 바르나의 모습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살짝 눈이 덮인 농촌 마을은 아름다웠고 넉넉해 보였다.
“얼마나 많은 돈을 때려 박았으면 이렇게 감쪽같이 재건할 수 있단 말인가? 바르나 사람들은 전쟁 전보다 더 잘 살게 되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가 보군.”
아름다운 전원 풍경을 지나 부르가스에서 출발한 철도가 통과하는 큰 도시에 도착했을 때는 접경지대 작은 도시와는 또 다른 발전된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높은 빌딩과 시원시원한 거리 구획,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들···, 마치 필센 제국의 모습 같았다.
‘앞으로 이 땅이 내 것이 되는 것인가?’
토비아스는 흡족해 하며 열차 역으로 갔다.
그곳에서 열차들을 징발해 멕 나이트와 병력을 태우고 신속하게 바르나를 통과해 페르보 땅의 노바오까지 갈 생각이었다.
그때까지 그의 얼굴에는 자신감과 뿌듯함이 어린 미소가 떠나지를 않았으나 그 미소는 열차 역에 도착해 벌벌 떠는 역장과 주둔군 지휘관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지워지고 말았다.
“죄, 죄송합니다만, 각하! 열차 운행이 중단되었습니다.”
“뭐라고? 대체 무슨 소린가?”
“도, 도, 동계 철로 보수 공사가 시작되었거든요. 지, 지반 침하가 심한 구간들을 정비하는 공사입니다.”
“공사를 잠시 중단하고 철도를 원래대로 돌려놓으면 될 일 아닌가?”
“그, 그것이··· 공사 구간이 무려 열 곳이 넘습니다. 바르나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어서 지금 원상복구 명령을 내려도 단기간에 열차가 다니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게 대체······!”
토비아스는 계획이 어그러지는 바람에 열이 머리끝까지 뻗쳤지만, 역장이나 소부대 지휘관을 다그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기에 재빨리 생각을 정리하고 명령을 내렸다.
“이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고, 우리 군은 걸어서 이동한다!”
“네?”
“멕 나이트 부대가 언제부터 열차를 타고 편하게 이동했나? 대전쟁 기간에는 모두 걸어서 이동했다. 발바닥이 땀이 나도록 뛰어! 서둘러!”
“알겠습니다!”
루한 군 일부는 열차를 타고 보수 공사가 진행되는 현장까지 직접 가서 확인했고, 나머지 병력은 걸어서 이동을 시작했다.
멕 나이트 1,200여 대, 마나포 500여 문, 그 외에도 수많은 멕 워커와 차량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많은 병사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줄을 이루며 동쪽으로 나아갔다.
다행인 점은 바르나 땅은 철도뿐 아니라 포장도로도 잘 갖춰져 차량과 병사들이 진창에 빠져 고통을 겪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계획이 어그러진 토비아스는 그 점이 별로 고맙게 느껴지지 않았다.
열차로 이동하지 못한다면 시간 차질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루한 군은 잘 닦인 바르나 동서 고속도로를 따라 쉬지 않고 걸었다.
눈이 덮인 아름다운 전원과 발전한 도시를 번갈아가며 통과하던 루한 군 병사들이 손을 호호 불며 중얼거렸다.
“아, 추워! 쓰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