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39. 아직 교대 시간이 아닌데
4부 39. 아직 교대 시간이 아닌데
“벨고트 왕가의 후손을 찾아 왕위를 돌려주고, 식민지 총독의 무분별한 군사 행동에 대해 사과할 필요가 있습니다.”
루산의 말에 오스카가 의문을 제기했다.
“이미 이렇게 되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게다가 우리에게는 여기서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습니다. 노바오에 식민지 총독들의 병력이 총집결하기 전에 진압해야 하니까요.”
“사람과 사람 간에도 신의가 중요하듯이 국가와 국가 간에도 믿음과 신뢰가 중요합니다. 이번에 블란트가 벨고트 왕국을 쳐서 점령한 사건으로 인해 아우로라에서 필센 제국에 대한 믿음이 크게 훼손되었어요. 바로잡는 데 들이는 공을 아끼면 안 됩니다.”
벨고트는 대전쟁 말기에 아우로라 연합에서 탈퇴하고 필센 제국의 질서에 따르기로 약속한 나라였다.
벨고트 외에도 그런 나라들이 많이 있었기에 이 나라를 어떻게 처리하는지는 그 나라들의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 필센 제국이 벨고트를 이대로 합병해 버리면 필센을 따르기로 한 여러 나라들이 두려움에 떨면서 아우로라 부흥 세력의 편에 가담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벨고트 왕국은 옛 페르보 제국과 인접하여 아우로라 연합에 속해 있던 인물과 그 가족들이 상당히 많이 살고 있을 뿐 아니라 규모가 큰 마나석 가공 공단이 있습니다. 신중한 관리가 필요해요. 왕위를 돌려주고 치안을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티라스 직할령의 병력이 어느 정도 남아서 도와야겠어요. 내부 사정을 소상히 파악하면서 말입니다.”
노바오에 모일 식민지 군대와 싸우려면 병력을 더 많이 데려가도 부족할 판에 이 나라에 병력을 남기라고 하니 가슴이 답답했지만, 루산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라서 오스카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티라스 주둔군 병력 일부를 남겨 뒷수습을 맡기고 루산과 오스카는 군대를 이끌고 노바오로 떠났다.
벨고트와 가장 가까운 페르보의 직할령 자코보 시를 통과할 때 루산은 자코보 주둔군 사령관을 만나 합류할 것을 종용했다.
“황제 폐하의 명을 수행하는 특별 사자의 요청을 거부하다니, 설마 사령관도 반기를 들겠다는 겁니까?”
“반기를 들다니, 터무니없는 말씀이오!”
“그렇다면 군대를 이끌고 뒤를 따르세요.”
“그건······.”
“못 하겠다는 겁니까? 그게 명을 거역하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솔직히 보름스 백작이 황제 폐하의 명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어요. 비록 황금 사자 패를 소지하고 있다고 해도 필센 제국 정부나 군부에서 직책을 맡고 있는 것도 아닌데 백작의 말만 믿고 군대를 동원해 전우를 공격할 수 있겠소?”
“······.”
“나는 노바오에 합류하지도 않고 백작을 돕지도 않을 것이오. 이미 본국에 사람을 보냈어요. 백작이 수행하는 일이 과연 황제 폐하의 명령에 따른 것인지 정식으로 확인한 뒤에 움직일 것이니 그리 아시오.”
자코보 사령관의 태도는 완강했다.
하는 수 없이 루산은 오스카와 함께 발길을 재촉했다.
루산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믿을 수가 없단 말이지······?’
짧고 간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말은 복잡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자코보의 사령관 본인이 마나석 문제와 연루되어 있는데 황제의 특사가 이 땅에 나타나 매우 놀랐다는 의미일 수 있다.
믿을 수 없다는 말은 황제에게 마나석 비위 사실을 들킨 데 대한 충격의 표현인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황제의 명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증표로 황금 사자 패는 증명력이 약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정상적인 통치 체제 하에서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직위에 있다면 그 자체로 믿음의 증거가 될 수 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생사여탈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고작 패 하나를 내밀며 주장한다면 쉽게 믿을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믿음이란, 사실 매우 약한 마음이라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거나 그 마음이 형성될 수 있는 충분한 시간 혹은 공적인 보증이 필요한 것이다.
그 믿음에 기초해 수행해야 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 결과를 초래한다면 믿음의 증거는 더욱 강력해야 한다.
직할령 주둔군 사령관으로서는 자신의 부하와 옛 동료들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전투 행위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패 하나만으로 따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스카가 자신을 믿고 군대를 동원한 것은 과거의 인연 때문이지 황금 사자 패 하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황제 폐하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황금 사자 패 하나를 들고 이곳까지 온 것은 무척 무모한 일이었구나!’
황금 사자 패를 받을 때만 해도 율리안이 그동안 겪었을 어려움과 감히 황제를 기만하는 총독들에 대한 분노로 이렇게까지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저 불충한 총독들을 벌하여 율리안의 어려움을 덜고 필센 제국의 기강을 바로 세워야겠다는 생각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황금 사자 패로 명령을 수행하는 어려움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이미 식민지 총독들과의 전쟁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페르보의 식민지 총독들이 똘똘 뭉쳐 반기를 들고 직할령 주둔군 사령관들이 협조를 거부해도 모두 해치우면 된다.
‘불충한 무리를 모두 쓸어버리고 필센 제국을 황제 폐하를 중심으로 더욱 튼튼하게 만들 것이다!’
루산은 그렇게 각오를 다지며 군대를 재촉해 노바오로 나아갔다.
아직 보여 주지 않은 힘이 있었기에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노바오에 거의 다다랐을 때 바르나에서 바덴이 급히 보낸 연락을 받았다.
군용 통신망으로 티라스 사령관인 오스카에게 보내는 형식이었지만, 결국 루산에게 보낸 것이었다.
<루한 주둔군, 아우로라 잔당 소탕을 명목으로 페르보로 대거 이동. 멕 나이트 전단 13개, 마나포 부대 다수, 보병 사단 다수 포함. 이동 속도를 늦추기 위해 열차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철로 보수 공사 지시를 내렸음. 주의 요망.>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오스카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나 루산은 주먹을 불끈 쥐었을 뿐 얼른 답변하지 못했다.
밤베르크 공작이 깊숙이 개입한 것은 알겠으나 자신에게 페르보로 가서 비위를 저지르는 총독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율리안 황제였다.
밤베르크 공작의 군사 개입과 율리안의 부탁 사이에 긴밀한 연결 고리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마음속에서 완강히 거부했던 것이다.
그는 이 부분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말했다.
“확실한 것은, 밤베르크 공작과 페르보의 동방군 출신 총독들 사이에는 관련성이 없다는 겁니다. 양쪽이 미리 짰다면 페르보의 총독들이 굳이 우리 군과 전투를 치르지 않았을 테니까요. 밤베르크 공작의 군대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공격했겠죠. 괜히 자기들만 피해를 봤잖습니까.”
“서로 협의가 없었다면?”
“아직은 가정일 뿐이지만······.”
루산이 운을 떼자 오스카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의 입을 쳐다보았다.
루산이 무겁게 말했다.
“나와 동방군 출신 총독들이 싸워 양쪽 다 많은 피해를 입었을 때 한꺼번에 쓸어버리겠다는 뜻이 아니겠어요?”
“음!”
오스카는 루산의 말뜻을 이해했다.
밤베르크 공작은 10년 전에 이미 루산 보름스를 축출하려 한 적이 있었다.
또한 마나석이 나는 페르보 땅을 욕심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밤베르크 공작은 이미 많은 것을 가졌다.
황제의 숙부이며 전쟁 영웅으로 가장 넓은 식민지를 받은 공신이고 제국군을 통솔하는 필센 제국의 이인자였다.
‘그런 그가 나라를 혼란에 빠뜨릴 정도로 많은 병력을 동원해 루산과 동방군 출신 총독들을 제거하려 한단 말인가?’
모두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 그렇다는 겁니다.”
루산의 말에 오스카는 길게 콧숨을 뿜어냈다.
답답한 속이 시원해지지는 않았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떡하면 좋습니까?”
루산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할 일을 마저 해야죠.”
“예?”
“반기를 든 총독들은 응징해야죠.”
“하지만······.”
“다행히 루한 군은 바르나에서 열차를 이용하지 못합니다. 우리로서는 시간을 벌게 된 겁니다. 루한 군이 지체되는 사이에 우리는 피해 없이 총독들을 처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루한 군이 감히 우리를 공격하지 못할 겁니다.”
“그게 되겠습니까?”
마르켈 라이네 공작이 이끄는 동방군 출신 총독들의 병력은 이미 가프 용병단과 티라스 주둔군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
이번에는 마나포도 거리낌 없이 사용할 것이다.
티라스 주둔군은 벨고트 왕국에 병력 일부를 떼어 놓고 왔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피해 없이 총독들의 군대를 무찌른다는 말인가?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이 어려움을 뚫고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오스카는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루산의 말이 옳았다.
“시간 싸움이군요!”
루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프 용병단과 티라스 군은 마르켈 라이네가 다스리는 노바오를 향해 더욱 속도를 높였다.
***
노바로부터 서신을 받은 아라드의 왕은 은밀하게 수도 군단 사령관을 불렀다.
“변경의 병력이 대거 빠져 나갔다. 괴수를 사냥하기 위해 멕 나이트 몇 대만 남겨 놓았겠지. 이 기회에 우리 변경을 되찾는다.”
수도 군단 사령관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보름스 백작이 돌아오면······.”
“걱정하지 마라.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
“노바 놈들이 딴마음을 먹기 전에 서둘러 우리가 장악해야 한다.”
“네!”
“여전히 보름스 백작이나 고슬라 그룹에 우호적인 자들이 많으니 조용히 신속하게 처리하라.”
“알겠습니다, 폐하!”
수도 군단 사령관은 고슬라 그룹의 아라드 재건 프로젝트 시행으로 영지를 빼앗긴 가문의 파일럿들을 특별히 추렸다.
고슬라 그룹과 루산에 대한 미움이 강한 자들이었다.
그들이 탑승한 150여 대의 멕 나이트가 새벽을 틈타 아라드 변경으로 이동했다.
***
새벽녘, 전조등을 켠 화물 열차가 코부스 지방을 지나 변경 7구역으로 진입했다.
열차는 험준한 산과 협곡 가장자리를 굽이굽이 돌아 느릿느릿 나아갔다.
최근에 코부스와 변경 7구역을 잇는 협곡 다리 건설을 위해 많은 물자와 장비가 들어오고 있었기에 이 시간에 열차가 들어오는 것은 그리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코부스 지방과 가장 가까운 통신소에서 근무하는 8구역 대원이 하품을 하며 마나 통신기를 들고 말했다.
“화물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 화물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
[알았다. 전달하겠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피곤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동료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 그 대원은 마나 통신기를 내려놓았다.
철로가 잘 보이는 봉우리와 경사면에 건설된 통신소들이 연달아 통신을 보내면 그 내용은 곧바로 변경 8구역 본부에 도달하게 된다.
10년 전, 통신소가 건설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대원 하나가 잠을 자다 열차 통과를 보고하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
그때 루산은 통신소 근무 대원들뿐 아니라 본부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좀처럼 부하들에게 큰소리를 치지 않는 루산은 변경 8구역의 이인자인 켐니츠마저 공개적으로 나무랐다.
켐니츠가 간부와 통신소 대원들을 얼마나 잡았는지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 뒤로 통신소 근무 대원들은 절대 보고를 빠뜨리지 않았다.
열차가 통과한 뒤로 잠에 빠지려던 첫 번째 통신소 대원은 교대 인원을 기다리며 악착같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때 밖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응? 아직 교대 시간이 아닌데?’
그는 동료가 자신을 생각해 평소보다 빨리 왔나 싶어 반가운 마음에 밖에 대고 소리쳤다.
“짐멜, 벌써 왔어?”
그때 거대한 망치가 통신소 문짝을 두드려 깨뜨렸다.
콰작!
문이 열리자마자 한 무리의 군인들이 무기를 들고 들어와 통신소 대원을 찍어 누르고 입을 막은 뒤 목에 칼을 댔다.
그러고는 상관에게 물었다.
“처리할까요?”
그 서늘한 목소리에 통신소 대원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됐어.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금방 정리될 테니까.”
첫 번째 통신소를 장악한 군인들이 마나 등으로 불빛 신호를 보냈다.
잠시 후 코부스 지방에서 변경 방면으로 멕 나이트를 실은 화물 열차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사실은 변경 8구역 본부로 전해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