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40. 황제 폐하는 어떠시오?
4부 40. 황제 폐하는 어떠시오?
이번 겨울 노바에는 유독 눈이 많이 내렸다.
그러나 세계의 수도답게 관리들과 인력, 장비들이 총동원되어 눈을 치운 덕분에 도로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자동차들이 다니고 있었다.
다만 내린 눈을 단숨에 사라지게 하는 마법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차도 가장자리와 인도에는 치운 눈이 높이 쌓여 있었다.
그 때문에 행인들이 눈을 피해 힘겹게 걸음을 옮겨야 했다.
높은 건물의 창가에 서서 그 장면을 내려다보던 밤베르크 공작은 이 일상적인 장면에도 진리가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제국이라는 거대한 존재가 탈 없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동맥이나 다름없는 도로를 깨끗이 유지해야 한다. 그때 어느 정도 희생이 따르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 희생이 지금은 심각한 것처럼 부각될지 모르지만, 시간이 흘러 날이 따뜻해지면 길가에 쌓였던 눈이 어느새 녹아 아무도 그때 겪었던 불편함과 고통을 기억하지 못하듯이 모두 잊게 될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행위에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을 때 비서가 조심스럽게 들어와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모시게.”
잠시 후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 입은 트리어가 들어왔다.
“어서 오시오.”
“눈이 많이 옵니다, 총사령관 각하.”
밤베르크 공작이 응접 소파 쪽으로 걸어가면서 트리어에게도 소파에 앉기를 손으로 권하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오. 일에 지장은 없겠지요?”
트리어가 소파에 앉으며 대답했다.
“8구역이든 아라드 변경이든 눈이 내리는 곳은 아니니까요. 오히려 페르보 쪽이 눈이 많이 올 텐데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밤베르크 공작도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마주 보지 않고 밤베르크 공작이 상석에, 트리어가 그의 오른쪽 첫 번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눈이 온다고 해도 산간 지방이 아니니 멕 나이트 운용에 지장을 주지는 못할 것이오.”
언제든 따뜻한 찻물을 유지하고 있는 제국군 총사령관실의 비서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를 금방 들고 들어와 두 사람 앞에 놓고 나갔다.
“드시오.”
“예, 각하.”
두 사람이 뜨끈뜨끈한 찻잔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변경 쪽은 믿어도 되겠소?”
“걱정 마십시오. 8구역의 멕 나이트가 상당히 많기는 하지만, 변경 파일럿은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것이지 주군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기사가 아닙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처음에는 당황할 것이나 정부의 정식 명령이 하달되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깊이 따르는 몇 사람만 재빨리 추려 내면 8구역은 그것으로 정리되는 것이지요.”
밤베르크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8구역은 트리어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아라드 변경이었다.
그곳의 현황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멕 나이트가 무려 400여 대나 빠져나갔으니 상식적으로 남은 전력이 거의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 맞겠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루산 보름스를 치는 일이라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밤베르크 공작이 루산 보름스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반란 사건이 벌어지면서였다.
프리드리히 황제가 오베론 공작에게 반란을 유도하도록 지시하여 일어난 구 귀족파 잔당의 반란.
루산은 변경 7구역에 잠입해 있다가 노바로 상경하려던 남방군 출신 구 귀족파 기사들을 홀로 저지하는 기염을 토함으로써 2등 무공 훈장을 받았다.
그 당시에도 대단한 전공에 상당히 놀라기는 했으나 훈장을 받는 자리에서 황제가 군을 위해 일할 기회를 준다는데도 거절하고 변경을 선택한 그를 보고 충성심도 명예심도 없는, 별 볼 일 없는 자라는 생각을 하고 잊어 버렸다.
밤베르크 백작이 두 번째로 루산을 만난 것은 네세베르 공략군 사령관으로서 루한 왕국을 공격할 때였다.
밤베르크 백작은 그때를 잊을 수가 없었다.
단 두 대의 멕 나이트로 루한 왕국을 돌파해 자신을 찾아온 루산은, 율리안을 황제로 만들자고 제안하며 당시 네세베르 공략군에서 군 경험을 쌓고 있던 황태자를 제거할 것을 요청했다.
깊은 고민에 빠진 밤베르크 공작 - 그 당시에는 백작 - 은 루산이 과연 율리안을 황제로 만들 능력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루한 왕국 최대 멕 나이트 생산 단지를 파괴하라고 했다.
그 일을 받아들인 루산은 가프 용병단을 이끌고 루한 왕국 내부로 들어가 멕 나이트 생산 단지가 있는 최대 공업 도시 브루노로 진격하며 루한 왕국의 기동 부대를 만날 때마다 죄다 격파하는 놀라운 전과를 기록했다.
브루노를 파괴할 필요도 없었다.
내부를 휘젓고 다니는 루산의 부대에 놀란 루한 군이 그 부대를 잡기 위해 전선의 병력을 뒤로 물렸던 것이다.
네세베르 공략군은 루한 군이 단단히 지키고 있어서 그동안 돌파하지 못한 방어선을 손쉽게 지나 루한 왕국을 점령했고, 그 여세를 몰아 시바스 왕국을 치는 데 성공했으며, 당시 페르보 제국에서 아우로라 연합군의 대반격 작전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동방군을 구원하며 전쟁을 마무리 지었다.
이로써 밤베르크 백작은 대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위대한 장군이 되어 가장 큰 식민지를 받고 공작으로 승작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남들은 최고 전공을 세우고 최고 포상을 받았으며 조카를 황제로 두게 된 그를 축하하거나 질투했지만, 정작 그는 그런 데 별로 개의치 않았다.
루산 보름스에 대한 두려움이 가슴 깊이 새겨져 버렸기 때문이다.
루산이 루한 왕국을 휘젓고 돌아간 뒤에 그의 행적에 대해 알아보니 놀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고 있지만, 아라드 전쟁에서 엄청난 전공을 세워 그 나라에서 영웅 대접을 받고 있었고, 필센 북부 이스타드에서 굴다크 공작이 이끄는 아우로라 대군을 격파하는 데 크게 기여함으로써 필센 제국의 패망을 사실상 막았다.
그뿐 아니라 프리드리히 황제와 오베론 공작의 큰아들 바트가 사망할 때 바로 그곳에 있었다.
증거는 없지만, 밤베르크 공작은 이 두 사람의 죽음에 루산이 개입했으리라 확신했다.
어쨌든 프리드리히 황제를 죽이고, 가장 큰 장애물이 될 만한 오베론 가문을 무너뜨리고, 다음 황제가 될 수 있는 프리드리히의 아들들을 제거하고 율리안을 황제에 앉혔다.
그런 인물을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는 변경에 아무도 정확한 규모를 모르는 병력을 감춰 두고 있었다.
필센 제국군의 규모에 비하면 별것 아니라고 할지 몰라도 사실은 무시무시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필센 제국군의 규모가 크다 해도 그것은 한 사람의 명령을 듣는 군대가 아니라 필센 제국이라는 한 나라의 군대이기에 설사 황제라 해도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지휘 계통을 통해 움직이는 반면 루산 보름스가 이끄는 가프 용병단은 오로지 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런 병력을 규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두려운 일이었다.
가프 용병단을 어떻게든 양지로 끌어내려 해도 쉽지 않은 것이, 아라드 변경은 필센 제국의 영토가 아니기 때문에 강제할 방법이 없었다.
이러한 가프 용병단은 전쟁터에서만 활약한 것이 아니었다.
프리드리히 황제의 동생 빌헬름이 지방군을 포섭해 황위를 주장하며 나설 때, 수도 군단 사령관이 근위대장직을 요구하다 거절당해 율리안을 인질로 잡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감쪽같이 이 사건을 마무리 지은 병력이 있었다.
어떻게 반란군을 무찌르고 율리안을 무사히 구출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사실이 밤베르크 공작을 더욱 두렵게 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더라도 루산 보름스를 제거할 이유가 충분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단지 사병을 거느린 변경의 통치자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슬라 그룹.
식품 산업 1위.
설비 산업 1위.
장난감 산업 1위.
화물 자동차 판매량 압도적 1위.
휴양 여가 산업 압도적 1위.
차 산업 압도적 1위.
농업 기계 산업 압도적 1위.
멕 워커 판매량 1위.
밀가루 생산량 필센 제국의 34퍼센트.
농업 회사 경작 면적 현황: 필센 제국 전체 경작지의 19퍼센트.
장기 대형 프로젝트 진행 현황: 아라드 왕국 재건 프로젝트, 부르사 왕국 개발 프로젝트, 변경 7구혁 재건 프로젝트······.
기발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사업을 시작해, 반란 사건에 연루된 자들의 사업체를 싸게 사들여 규모를 크게 불린 뒤, 전쟁 특수와 과감한 투자, 적극적인 실행 능력으로 단기간에 필센 제국 제1의 기업이 된 고슬라 그룹.
단일 사업 분야에서 압도적인 1위를 기록하고 있는 피닉스 제철도 전체 규모로는 고슬라 그룹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그런 고슬라 그룹이 바로 루산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고슬라 그룹은 피닉스 제철, 아인베크 해운, 가프 마법 연구소와 끈끈하게 엮여 있어 많은 사업을 함께 진행했다.
이들의 영향력이 햇빛이라면 황제의 영향력은 반딧불에 불과할 정도로 재계와 관계뿐 아니라 필센 국민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어마어마했다.
‘이 나라는 누구의 나라인가? 내가 죽고 나면 누가 보름스 백작의 독주를 막을 수 있겠는가!’
밤베르크 백작은 독하게 마음먹고 루산을 제거하려 했다.
그런데 루산이 별 저항도 없이 항복을 선언하듯 변경으로 물러가 버렸다.
이미 루산을 제거하려는 의도를 드러냈기에 다시 공격하기는 어려웠다.
고슬라 그룹을 내버려 두라는 루산의 요구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밤베르크 공작이 보름스 백작을 물리치고 권력을 잡았다고 했지만, 그는 자신이 승리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루산 보름스가 가지고 있는 그 무엇도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죽음이 점점 더 가까워진다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더 늦기 전에 결행해야 했다.
결행하여 확실히 제거해야 했다.
그래야 이 나라가 루산 보름스가 아닌 율리안 황제와 밤베르크 가문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아라드 변경도 걱정 마십시오. 아라드의 국왕이 욕심이 크니 제대로 마무리를 지을 것입니다. 사실 아라드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페르보에서가 중요하죠.”
“맞는 말이오.”
루산 보름스를 제거해야 이 일이 끝이 난다.
“고슬라 그룹 처리를 매끄럽게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고 말입니다. 정부 내에도 고슬라 그룹과 엮여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고슬라 그룹을 강제로 처분하려 하면 필센의 기업들이 크게 반발할 것입니다.”
“한 번은 겪어야 할 충격이기는 하지만, 최대한 매끄럽게 넘어가도록 준비하고 있소. 중요한 것은 보름스 백작이지.”
“그건 그렇지요.”
“시작을 했으면 마무리를 잘 해야지요. 끝까지 신경 써 주시오.”
밤베르크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트리어도 따라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예, 각하.”
트리어가 인사하고 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 밤베르크 공작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황제 폐하는 어떠시오?”
트리어가 몸을 돌려 짧게 대답했다.
“편안하십니다. 평소와 같이······.”
밤베르크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트리어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목례하고 방을 나갔다.
밤베르크 공작은 다시 창가로 걸어갔다.
밖에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고, 눈을 치우는 인부들이 제설차를 동원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덕에 노바의 자동차들은 비록 평소보다는 느리지만 잘 다니고 있었다.
치운 눈이 길가와 인도에 더 높이 쌓여 다니는 행인들을 불편하게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 지금의 불편했던 기억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