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43. 당신을 버렸소
4부 43. 당신을 버렸소
부르사의 젊은 전사들이 착용한 파워 아머는 소형 멕 나이트나 다름없었다.
두꺼운 강철 갑옷은 창칼이 전혀 통하지 않는 데다 등에 짊어지고 있는 소형 마나 엔진 팩의 도움으로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존재를 맨몸의 인간이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건물 안에는 피 흘리는 시체 몇 구와 신음을 흘리는 부상자 몇 명을 제외하면 사상자는 많지 않았다.
총독을 경호하기 위해 추려 뽑은 충성심 강한 엘리트 기사들도 동료들이 벽에 개구리처럼 처박혔다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축 늘어지는 모습을 몇 번 본 뒤로는 두려움을 아는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약간의 피와 미약한 신음 소리 그리고 벽면 한쪽으로 몰려 있는 항복한 군인들의 불안한 눈빛들.
할 수 없이 제 발로 걸어 나온 총독들과 숨어 있다 질질 끌려 나온 총독들 앞에 파워 아머 한 대가 석재 바닥을 쿵쿵 울리며 걸어왔다.
이윽고 착용자가 헬멧을 벗었다.
마르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름스 백작!”
루산을 처음 보는 총독들이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보름스 백작? 그럼 이 군대가······!”
그들은 이미 건물 밖에서 일어난 소란을 알고 있었다.
거미를 닮은 거대 기계들이 마나포를 쏘아 멕 나이트를 부수고 성을 장악한 사실을.
그리고 총독들 가운데 몇 명은 고위 군인 출신답게 바깥에 있는 대형 거미와 적들이 착용하고 있는 무기의 정체도 알아보았다.
루산 보름스는 멕 나이트가 들고 쏘는 신형 마나포와 마나포를 발사하는 대형 거미 그리고 비용 문제로 제국군에서 채택을 포기한 파워 아머를 운용하는 군대를 거느리고 온 것이다.
“황제는 기어이······.”
마르켈 라이네 공작이 비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를 다 죽이려는 것인가!”
그러자 루산이 그 말을 정정해 주었다.
“기회를 차 버린 것은 당신들이지.”
휘이잉-
깨진 창문으로 찬바람이 황소처럼 들어왔다.
총독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성은 마나포를 쏘는 대형 거미에 둘러싸인 상태, 자신들은 파워 아머를 착용한 특수 병력에 붙잡힌 상태였다.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마르켈이 루산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 우리를 이 자리에서 죽일 셈인가?”
루산이 마르켈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
“생각 중이오.”
예상치 못한 솔직한 대답에 마르켈과 총독들이 당황했다.
이 상황에서는 차라리 죽인다, 살린다가 상식적이지 않은가?
“뭐?”
“무슨 뜻이오?”
루산이 총독들을 차갑게 훑으며 말했다.
“군대를 이끌고 황명에 저항하는 반역자들을 살려 둘 필요가 있겠소?”
“그건······!”
“변명은 필요 없소. 이건 분명한 사실이니까. 황제 폐하의 명령을 어기고 마나석을 빼돌린 데다 용서를 빌고 살 기회를 주었음에도 군대를 동원해 저항했으니까. 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반역자이지. 죽이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게 더 어렵지 않을까?”
총독들은 거듭 몸을 떨었다.
루산에게는 명분과 힘이 있었다.
파워 아머를 착용한 전사들이 도끼 춤을 춘다면 이 안에 있는 사람들 중 어느 누가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루한 군이 다가오고 있단 말이지.”
“아!”
총독들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들 역시 루한 군 - 밤베르크 공작이 이 시점에서 무슨 속셈으로 개입하는 것인지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루한 군의 속셈이 대강은 짐작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니 일단 당신들을 루한 군에 던져 주고 반응을 보는 게 나을 것 같소.”
“뭐라고?”
그러나 루산은 대꾸하지 않고 파워 아머를 착용하고 있는 부르사의 전사들에게 지시했다.
“총독들을 수송 거미에 태워라.”
“예, 대장님!”
부르사의 전사들이 도끼 자루로 총독들의 등을 밀었다.
버틸 수가 없었다.
애꿎게 버텨 봐야 질질 끌려가는 추태를 보일 뿐이라서 총독들은 터덜터덜 밖으로 나갔다.
매서운 바람에 몸이 아렸지만, 그보다 충격적인 것은 성 안의 풍경이었다.
성벽 위에서 전조등을 밝힌 채 성 안을 내려다보고 있는 무시무시한 전투 거미들과 포탄에 맞아 찌그러진 채 널브러져 있는 멕 나이트들.
페르보 땅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식민지 노바오의 총독이 다른 식민지 총독들과 함께 머물고 있는 본진이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총독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뿐 아니라 가족과 가문의 멸망에 대한 공포에 휩싸였다.
그러나 파워 아머를 착용한 전사들은 포로의 감정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거칠게 그들을 밀어 수송 거미 세 대에 나눠 태웠다.
이윽고 작전에 동원된 전투 거미들이 노바오 성 뒤편의 산으로 올라가 산줄기를 타고 왔던 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흔들림이 거의 없는 전투 거미의 이동에 총독들은 자신들이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고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이대로 끌려가면 끝장이다!’
마르켈은 현재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살길을 모색하기 위해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한참 후 그가 입을 열었다.
“보름스 백작.”
루산은 대답하지 않고 마르켈을 향해 고개만 돌렸다.
수송 거미 안은 불빛이 거의 없어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나 서로 쳐다보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마르켈이 말했다.
“오늘에야 알겠소.”
루산이 물었다.
“무얼 말이오?”
“밤베르크 공작이 왜 당신을 쳐내려 했었는지.”
“······.”
“그동안 의아했거든. 제국군의 고위 장군도 아니고 공후의 작위를 가지고 있는 대단한 가문 출신도 아닌, 고작 변경의 기사 따위를 왜 그리 밀어내지 못해 안달인지 말이오.”
“······.”
“변경의 통치자를 황제로 만든 공이 있다 해도 밤베르크 공작은 황제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면서 전쟁 영웅이고 가문도 훌륭하지. 변경의 기사 정도는 품에 안을 정도의 아량은 지녀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눈곱만 한 권력도 나누기 싫어 쳐내려고 마음먹었으면 제대로 했어야지 변경으로 다시 쫓아내고 마는 건 또 뭔가 싶었지.”
바깥에 강한 산바람이 불었지만, 반구형 덮개로 밀폐된 수송 거미 안이라 그의 이야기는 똑똑히 들렸다.
루산은 여전히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이번에 당신이 황제의 특사가 되어 우리를 벌하러 왔다고 할 때에도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었고 밤베르크의 큰아들이 대군을 이끌고 여기로 온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에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는데, 오늘에야 확실히 알겠소.”
“······.”
“당신은 너무 강해. 밤베르크 공작이 겁을 먹을 정도로. 그래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판을 짠 것이로군.”
그동안 마르켈은 계속 생각을 해 봤지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루한에서 대군이 출동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밤베르크 공작이 정적인 보름스 백작과 군부에서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는 동방군 출신들을 서로 싸우게 한 뒤 약해진 두 세력을 모두 쓸어버리고 모든 권력을 독차지하려 한다는 속셈은 추측할 수 있었으나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전투 거미 부대에 노바오 성이 습격당한 뒤에 깨달았다.
루산 보름스는 너무 강하다.
필센 제국의 어느 누가 마나포를 장착하고 산을 넘는 대형 거미 부대와 파워 아머로 무장한 전투 부대를 막을 수 있겠는가.
그제야 10년 전 노바의 권력 투쟁이 벌어진 이유와 그 결과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당신의 힘은 숨기고 있을 때 위력을 발휘하지. 마나포를 쏘는 대형 거미를 수백 대 보유하고 있을 리는 없으니까. 아니 그렇소?”
대형 거미는 몸체가 약해 멕 나이트와 맞붙어 싸울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가격은 멕 나이트의 수십 배나 된다.
마나포를 쏘는 대형 거미가 수백 대가 있다면 정면으로 싸워도 승산이 있겠지만, 그 가격이면 멕 나이트를 수천 대나 보유할 수 있을 정도인데 당연히 그럴 리가 없었다.
이 무기는 많아야 두 자리 숫자일 테고 그 정도 숫자로는 미리 대비하고 있는 군대와 싸울 수 없다.
마르켈의 분석은 루산이 우려했던 것과 일치할 정도로 날카로웠다.
“내가 밤베르크 공작이라면 당신을 당신의 군대와 함께 변경 밖으로 끌어낸 뒤 당신의 근거지를 차지하겠소. 당신은 돌아갈 곳이 없지. 밤베르크 공작은 제국군 총사령관이오. 그가 정식으로 명령을 내리면 누가 당신에게 협조하겠소? 당신은 필센 제국군에 쫓겨 멕 나이트 삼사백 대와 다리가 여러 개 달린 탈것 십여 대를 데리고 페르보 땅을 돌아다니다 결국 쓰러져 죽겠지.”
근거지를 칠 것이라는 말에 루산은 섬뜩함을 느꼈다.
이 또한 루한 군이 출동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도 우려했던 부분이지만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들으니 충격이 더 컸다.
마르켈이 어둠 속에서 묵묵히 듣기만 하는 루산에게 승부수를 던졌다.
“나는 당신에게 잡혀 죽을 판이고, 당신 또한 나 다음으로 죽을 운명이오. 그러니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소?”
침묵으로 일관하던 루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어떻게 말이오?”
“내가 먼저 쓰러지면 당신의 운명은 앞서 말한 것처럼 될 것이오. 페르보의 벌판에서 쓰러져 눈 속에 파묻히겠지. 하나 우리가 손을 잡으면 밤베르크의 군대가 우리를 칠 수가 없소. 당신의 강력한 힘은 많은 병력이 뒷받침될 때 더욱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니까.”
전투 거미는 정면 대결로 적을 부수는 데 적합한 무기가 아니었다.
정면은 멕 나이트와 마나포 부대로 상대하고 전투 거미는 측면이나 배후, 본거지 습격으로 돌리는 것이 유용하다.
동방군이 전투 거미를 보호해 준다면 밤베르크의 군대를 어려움에 빠뜨리고 결국 무찌르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동방군과 손을 잡는다고?’
루산이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
벌을 주러 왔다가 손을 잡는다?
“당신과 손을 잡고 밤베르크 공작의 군대와 싸우는 것은 필센 제국군 총사령관과 싸우는 것일 뿐 아니라 황제 폐하의 명령에 거역하는 일이오.”
“허!”
루산의 말에 마르켈이 실소를 터뜨렸다.
“이보시오, 백작. 사태가 여기까지 왔는데도 모르겠소?”
“······.”
“황제가 당신을 버리지 않고서야 밤베르크 공작이 홀로 이런 엄청난 판을 짤 수가 있겠소?”
“······!”
“적극적으로 주도했든 협박에 굴복했든 아예 눈을 감고 애써 모른 체한 것이든, 황제는 당신을 버렸소. 당신에게 겨우 패 하나를 주고 동방군 출신 총독들을 징벌하라고 할 때부터 이 계획에 가담한 셈이지. 그걸 덥석 받고 숨겨 놓았던 병력을 이끌고 이 먼 곳까지 달려온 당신이 대단할 뿐.”
루산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가능성 하나가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어둠 속이어서 다행이었다.
가슴을 찢을 듯한 분노와 의혹을 남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어서.
***
산줄기를 타고 가던 전투 거미들이 평지로 내려와 식민지 군대가 주둔해 있는 기지 가까이 다가갔다.
멀리 숙영지 불빛이 희미하게 보이는 곳에서 루산은 마르켈을 비롯한 총독들을 풀어 주었다.
다른 수송 거미에 타고 있던 총독들이 마르켈 곁으로 모여들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우리를 루한 군에 넘긴다더니 왜 풀어 주고 가는 것입니까?”
마르켈은 다시 산으로 올라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 전투 거미들을 눈으로 따라가다 대답했다.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고 싶어서겠지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러나 마르켈은 대답하지 않고 주둔군 숙영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죽다 살아난 우리가 추위에 얼어 죽을 수는 없지 않겠소? 서두릅시다.”
마르켈과 총독들은 숙영지 불빛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