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FC 변경 군단의 기사-425화 (425/450)

4부 44. 의심을 사지 않고 물러나야

4부 44. 의심을 사지 않고 물러나야

루한 군은 멕 나이트 부대를 앞세우고 바르나의 수도 라브나 시가지를 위압적으로 행진했다.

대전쟁 기간에 멕 나이트 수천 대가 격돌하여 도시 전체가 완전히 폐허가 되었던 경험이 있는 라브나 사람들에게 갑자기 출현한 멕 나이트 대군은 지난 악몽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라브나 시민들은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아무 일 없이 군대가 빨리 통과하기만을 바랐다.

그들의 바람이 통했는지 루한 군 병력 대부분은 멈추지 않고 라브나를 지나 동쪽으로 계속 이동했으나 멕 나이트가 포함된 병력 일부가 총독부와 식민지 회사를 에워쌌다.

라브나에도 식민지 주둔군이 있었지만, 멕 나이트는 한 대도 없었다.

저항은 불가능했다.

루한 군을 이끌고 온 토비아스가 무장한 호위 기사들을 대동한 채 식민지 회사 건물로 들어섰다.

그는 바르나를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사람이 총독 대리가 아니라 식민지 회사 사장인 바덴 고슬라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루한의 총독 대리이자 제국군 총사령관의 특명을 수행하고 있는 토비아스 밤베르크다. 식민지 회사 사장은 어디 있느냐?”

잠시 후 연락을 받은 바덴이 로비로 내려왔다.

“바르나 회사의 사장 바덴 고슬라입니다. 군대로 총독부와 우리 회사를 에워싸다니, 이게 무슨 일이죠? 루한 군이 아우로라 연합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출정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런데 바르나 총독부와 우리 회사에 아우로라 잔당이 숨어 있나요?”

그녀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지만, 전혀 주눅 들지 않고 토비아스의 무례한 행태를 꼬집었다.

토비아스는 발끈했다.

루한 군은 열차를 타고 갔으면 페르보까지 훨씬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공사를 핑계로 철로를 끊어 루한 군의 이동을 방해한 사람이 바덴일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당장 분풀이를 할 생각은 없었다.

루한 군은 페르보로 가야 하는 것이지 바르나에서 공연히 힘을 뺄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우로라 잔당을 잡기 위해 여기로 온 것이 아니오. 다만 우리가 페르보로 들어갔을 때 아우로라 잔당이 바르나에서 통신과 교통을 교란시키면 곤란하기 때문에 군사 작전이 끝날 때까지 우리 군이 바르나의 교통과 통신을 통제하겠소. 군사와 치안 업무를 담당하게 된다는 말이오. 총독부와 식민지 회사는 통상적인 업무를 해 나가시오.”

마음 같아서는 바르나를 당장 빼앗고 싶었다.

고슬라 그룹과 식민지 바르나는 어차피 최종 목표에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바르나의 총독 오스카 빈켈은 이번에 루산의 요청에 병력을 동원한 유일한 직할령 총독이라 어차피 제거 대상이었고, 고슬라 그룹과 식민지 바르나는 밤베르크 가문의 몫으로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루산을 제거하기도 전에 미리 바르나에서 소동을 일으켜 오스카 빈켈을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동방군 출신임에도 페르보의 총독들을 공격한 루산의 편에 섰지만, 동방군 출신들에게 인망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그가 동방군 쪽으로 돌아선다면 이번 작전은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통상적인 업무 외에 통신과 교통, 군사와 치안 부문은 우리 군이 통제할 것이오.”

“무슨 권한으로 그렇게 한다는 건가요?”

그러자 토비아스가 제국군 총사령관의 직인이 찍혀 있는 문서 하나를 꺼내 바덴에게 내밀었다.

토비아스 밤베르크가 아우로라 대륙에서 작전의 전권을 갖는다는 내용이었다.

바덴은 아버지가 자식에게 준 편의적인 서류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이 많은 병력을 동원했으니 부정할 수가 없었다.

토비아스는 지켜보는 눈들이 많아 바덴을 노골적으로 겁박하지는 못했으나 철도를 이용하지 못하게 방해한 짓을 그냥 넘길 수 없어 바덴 가까이 다가가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남편 걱정에 우리 군의 이동 속도를 늦추려 철로를 끊어 버리다니, 듣던 대로 머리가 좋은 모양이오. 하지만 그래 봐야 얼마나 늦추겠소? 잘하면 한 달 정도는 늦출 테지.”

“······.”

“허튼짓은 안 하는 게 좋을 것이오. 오늘부터 내 부하들이 사장을 경호할 테니까.”

감시를 붙인다는 것이다.

바덴은 가슴이 철렁했다.

토비아스가 루산을 치기 위해 왔다는 속셈을 드러낸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바덴이 토비아스를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10년 전에 실패한 일인데 10년 후라고 성공할까요?”

토비아스가 눈썹을 꿈틀했다.

바덴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작게 말했다.

“밤베르크 가문의 자신감은 대단하군요.”

“뭐?”

“오베론 가문과 밤베르크 가문, 사람들은 둘 중 어느 쪽이 더 강했다고 생각할까요?”

밤베르크 백작 가문도 명문이지만 오베론 가문에 댈 바 아니었다.

오베론 공작 가문은 필센 제국의 영토 8분의 1을 지배했으며 사회 개혁 이후에도 사업 전환에 성공해 공업, 해운업 분야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제국군의 3개 방면군 가운데 하나인 남방군을 직접 거느릴 만큼 군사력도 막강했고 정치적으로도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밤베르크 백작이 공작으로 승작하고 제국군 총사령관에 오르고 율리안이 황제가 됨으로써 상당한 권력을 지니고 있지만, 누구도 밤베르크 가문이 오베론 가문보다 강력했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오베론 가문을 무너뜨린 게 누군지 아시는지?”

“······?”

“어떤 사람들은 율리안 님이 운이 좋게 권력의 공백기를 틈타 황제가 되었다고 말하지만, 사려 깊고 지혜로운 사람들은 알지요.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그 공백기를 만들어서 율리안 님에게 황위를 바쳤다는 것을. 그게 누구일까요?”

토비아스는 대답 없이 바덴을 쏘아보기만 했다.

바덴도 굳이 정답을 말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군대를 돌리세요. 보름스 백작님은 10년 전과 마찬가지로 나라의 평안을 위해 이 정도는 눈감아 드릴 테니까요. 하지만, 이대로 계속 간다면 파국을 맞는 건 보름스가 아닐 겁니다. 오베론 가문과 같은 길을 겪고 싶지 않다면 충고를 새겨들으시길······.”

바덴을 죽을 듯이 노려보던 토비아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로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의아하게 쳐다보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한참을 웃던 그가 바덴에게 말했다.

“배짱은 알아줄 만하군. 여자의 몸으로 어떻게 이만한 사업을 일구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소. 하지만, 허세는 이 정도로 합시다. 어차피 끝난 일이니까. 부디 경솔한 언행으로 자신과 가족이 다치는 일은 없기를 바라오.”

토비아스는 그렇게 당부의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가 데려온 기사들은 떠나지 않고 바덴을 감쌌다.

바덴은 토비아스 앞에서 큰소리를 했지만, 다리에 힘이 빠져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

그러나 무너질 수 없어 이를 악물고 버텼다.

‘루산!’

***

“우리는 북부로 갑니다.”

루산의 말에 가프 용병단 지휘관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그게 뭔 소리요?”

슈야 마우메가 우렁우렁하게 물었다.

“페르보 총독들 먼저 격파하고 나서 다가오는 루한 군 격파하면 되는 것 아니었소? 왜 일껏 잡은 페르보 총독들을 풀어 준 것이오?”

루산이 슈야를 바라보고 말했다.

“그렇게 하려고 했었는데, 생각을 바꿨소.”

“그러니까 대체 왜 그랬냔 말이오?”

“내가 페르보 총독들을 제거하고 루한 군도 쳐부수면 어떻게 되겠소? 필센군, 나아가 필센 제국은 대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오. 필센 제국이 아우로라 대륙을 점령한 지 10년이 넘었다지만 여전히 반감이 큰 상황에서 제국이 혼란에 빠지면 저항 세력들이 들불처럼 일어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백성들은 또다시 전란에 휘말리게 될 것이오.”

“성자 나셨구먼. 그게 무슨 배부른 소린지 모르겠군. 애초에 만백성 걱정을 하고 계셨구먼? 만백성의 황제가 될 생각이었소?”

슈야의 핀잔에 루산은 희미하게 웃었다.

이렇게 거침없이 찌르는 말이 기분이 좋았다.

루산이 웃음기를 지우고 말했다.

“사실 현재 상황이 그리 녹록치 않아요. 밤베르크가 개입하기 전까지만 해도 페르보 총독들을 벌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 일의 배후에 밤베르크가 있다는 걸 안 뒤로는 생각할 게 많아졌어요. 만약 루한 군이 제국군 총사령관의 명령서를 가지고 와서 직할령 병력이나 식민지 주둔군에 동원령을 내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군부에서 아무 권한이 없는 내가 황제 폐하의 비밀 명령을 수행한답시고 처음 보는 패 하나를 내밀고 따르라고 할 때보다 훨씬 영향력이 크지 않겠어요?”

“그야 당연하지.”

“내가 가프 용병단을 동원해 페르보 주둔군 병력을 공격한 것은 사실이니 페르보 땅의 직할령이든 식민지든 나를 곱게 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 총사령관의 명령으로 나를 포위하라고 하면 기꺼이 나설 테지요. 그러면 우리 군은 갈 데가 없소. 마나포의 포탄은 점점 줄어들고, 전투 거미는 이미 노출되었기 때문에 가프 용병단의 힘은 줄어드는데 적은 어마어마하게 불어난단 말입니다. 마나 연료 보급조차 어려워질 것이고, 페르보 땅을 벗어날 수 없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루한 군이 가프 용병단을 잡기 위해 온다고 확실히 밝힌 것은 아니지만 루산은 그것을 기정사실로 두고 말하고 있었다.

듣는 지휘관들도 루산의 말을 금방 알아들었다.

10년 전 밤베르크 공작이 루산을 어떻게 쫓아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이 밤베르크가 나를 잡으려고 꾸민 것이라면 가프 용병단이 이리로 왔을 때부터 우리의 본거지도 공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어요. 바다에서는 해군이 우리의 귀향길을 막겠죠.”

물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하는 이야기였으나 생각할수록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동방군 출신 총독들도 루한 군의 출동에 의구심을 품고 있으니 그들이 뭉쳐 루한 군에 대처하도록 총독들을 풀어 준 것이오.”

페르보에 주둔한 병력이 아무리 많아도 수뇌부가 없으면 결국 제국군 총사령관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페르보에 주둔한 모든 병력이 밤베르크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이다.

반면 마르켈 라이네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 한 동방군 출신 총독들은 제국군 총사령관의 명령서를 받아도 쉽사리 고개를 숙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황제의 명도 거부한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루한 군과 페르보 군이 대치하는 사이에 우리는 필센으로 돌아갈 것이오.”

“돌아가서 어쩌려고?”

“일단은 본거지가 멀쩡한지 확인해 봐야겠지.”

공격을 받았으면 밤베르크 가문을 지우는 데 총력을 다한다.

본거지가 공격받지 않았더라도 루한 땅에 괴수 목장을 설치하는 프로젝트와 율리안 황제의 밀명, 그리고 루한 군의 출동 배후에 누구의 의지가 작동했는지 정확히 파악할 것이다.

그리하여 원인을 확실히 제거할 것이다.

그러나 루산은 굳이 이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슈야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중간한 양보는 미덕이 아니오. 권력은 더욱 그렇지. 그런 면에서······.”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므라드가 대장보다는 더 현명한 것 같군.”

수많은 부족들로 나눠져 있던 부르사를 통일시킨 므라드 암쿠 음파시.

바로 슈야를 비롯한 부르사 출신 전사들을 전쟁 포로로 만들어 지금의 가프 용병단의 일원이 되게 한 간웅.

루산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대로 몸을 빼는 것도 쉽지 않은 것 아니오?”

슈야의 말이 맞았다.

루한 군이 나타나자마자 가프 용병단이 갑자기 물러나면 본토로 돌아가려는 것이라고 생각해 귀국 길을 더욱 어렵게 만들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의심을 사지 않고 물러나야 하죠.”

루산이 지휘관들에게 구체적인 작전 계획을 설명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