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45. 일단은 따릅시다
4부 45. 일단은 따릅시다
전투가 없어 한가롭게 지내던 겨울의 어느 날, 부르사의 전사들이 오랜만에 돼지를 잡아 함께 나눠 먹기로 하고 근처 민가에서 돼지를 구해 왔다.
상당히 큰 수퇘지였다.
그런데 녀석이 발버둥을 치며 달아나 버렸다.
부르사의 전사들은 돼지를 잡기 위해 달렸지만, 살기 위해 악착같이 눈밭을 달려 도망치는 녀석을 잡기는 쉽지 않았다.
꾸엥 꾸엥 멱따는 소리를 내며 좌충우돌하는 돼지와 뒤를 쫓다 넘어지는 부르사의 젊은 전사들, 가프 용병단 숙영지는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런데 돼지가 가프 용병단 숙영지를 벗어나 티라스 군 숙영지로 들어가 버렸다.
부르사의 전사들이 돼지를 잡기 위해 티라스 군 진영에 난입했다.
처음에는 우스꽝스러운 용병들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던 티라스의 군인들도 자신들의 진영이 엉망이 되자 화를 내며 욕설을 했다.
티라스 군 숙영지를 한참 동안 어지럽히던 돼지는 결국 티라스 병사들에 의해 둘러싸여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부르사의 전사들이 다가와 돼지를 가져가려 하자 티라스의 군인들이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이건 우리 거야.”
“뭔 헛소리야? 우리 쪽에서 도망친 거 못 봤어?”
“봤지. 우리 숙영지를 엉망으로 만들었는데 못 봤을 리가 없지.”
“근데 왜 시비야?”
“우리 휴식을 방해하고 숙영지를 어지럽힌 데 대해 큰 소리로 사과를 먼저 해. 그럼 생각해 보지.”
피가 끓는 부르사의 젊은 전사들이 그 말을 들을 리 없었다.
“도둑놈의 새끼들!”
“뭐?”
결국 싸움이 났고, 수에서 크게 밀린 부르사의 전사들이 필센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흠씬 두들겨 맞았다.
소식을 들은 가프 용병단 숙영지에서 동료들이 달려오고 필센의 군인들도 더 가세했지만, 양쪽 지휘관이 나타나 사태를 정리한 덕에 더 크게 비화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돼지 사건으로 인해 양측의 감정이 상당히 악화되었다.
사실 티라스 주둔군 장병들은 사령관인 오스카 빈켈의 결정을 처음부터 좋아하지 않았다.
루산 보름스의 군대는 평소에 같은 파일럿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변경의 파일럿,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싸우는 용병 파일럿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보름스 백작이 비록 황제의 명령을 수행한다고는 하나 변경에서 온 루산 보름스의 편에 서서 같은 동방군 출신 전우들을 공격하는 일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저급한 용병들이, 막상 싸움이 벌어지자 막강한 위력을 뿜어내는 무기와 필센의 정규군을 능가하는 교전 능력으로 옛 동료인 식민지 주둔군을 박살 내 버렸다.
같은 편이 잘 싸워서 안심이 되는 부분도 조금은 있었으나 그보다 위화감과 경계심이 더욱더 커졌다.
돼지 사건은 이러한 감정들이 억눌려 있다 폭발한 것이었다.
그 사건이 벌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카가 휘하의 지휘관들을 긴급 소집했다.
“보름스 백작이 소지한 황금 사자 패가 가짜라고 한다.”
지휘관들이 깜짝 놀랐다.
“예? 가짜란 말입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라이네 공작께서 노바에 사람을 보내 확인을 요청했더니 황제 폐하께서 보름스 백작에게 특별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한다. 페르보의 총독들을 제거해 마나석을 독점하거나 페르보를 장악하려는 욕심에서 비롯된 일인 것 같다.”
“아!”
“그럼 우리는 이제 어떡합니까? 페르보 총독들에 맞서 싸웠는데······.”
“가프 용병단을 우리 손으로 직접 처리하는 성의는 보여야겠지.”
“음······!”
결국 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티라스 군 지휘관들은 오스카의 명령에 따라 가프 용병단을 급습하기로 했다.
티라스 군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가프 용병단은 큰 피해를 입어 50여 대의 멕 나이트가 파손되었고 200여 대는 파일럿이 탑승하지도 못한 채 빼앗겼다.
나머지 멕 나이트만 겨우 탈출하는, 최악의 피해를 입은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루산과 오스카의 합의 하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인명 피해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가프 용병단은 멕 나이트를 잃은 파일럿들, 보급품을 실은 붐붐 화물차와 멕 워커를 보호하며 북쪽으로 달아났다.
티라스 군은 가프 용병단과 전투를 벌여 승리한 사실을 전리품과 함께 페르보 총독들 진영에 알리고 그쪽에 합류했다.
“페르보와 필센 제국에 닥친 어려움을 함께 해결하고 싶습니다.”
“잘 오셨소, 사령관.”
오스카와 마르켈이 어색하게 손을 맞잡았다.
***
루한 군이 마침내 바르나를 통과해 페르보 땅으로 들어왔다.
토비아스는 맨 먼저 상황 파악을 지시했다.
오래전부터 이 땅에서 활동하고 있는 요원들이 보내온 소식들을 접한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보름스의 군대가 페르보 식민지 총독들의 군대를 크게 격파했다더니 생각보다 페르보 쪽 병력이 상당하지 않은가?”
“그게 벨고트 왕국에서 벌어진 첫 번째 교전에서의 충격이 워낙 커서 동방군 출신 총독들의 피해가 크게 느껴졌나 봅니다.”
벨고트 왕국에서 가프 용병단이 식민지 주둔군 서너 개를 대파했다.
단일 전투로는 엄청난 전과라 할 수 있지만, 페르보에 주둔해 있는 병력이 워낙 많아 전체로 볼 때는 별로 티가 나지 않았다.
“이러면 곤란한데······.”
밤베르크 가문에 최선의 상황은 루산 보름스가 동방군 출신 총독들과 격렬하게 싸워 양쪽 전력이 모두 크게 꺾이는 것이다.
그래야 둘 다 쓸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선이 아닐 경우 차선을 선택하도록 이미 계획되어 있었다.
루산 보름스와 동방군 출신 총독들을 동시에 제거하지 못한다면 둘 중 하나라도 제거하면 된다.
루산 보름스를 제거하면, 장차 밤베르크 가문의 권력을 위협하는 요소를 없애고 변경의 마나 연료와 고슬라 그룹의 경제적 영향력을 획득할 수 있다.
동방군 출신 총독들을 제거하면, 페르보 땅의 마나석에 대한 영향력을 획득할 수 있다.
“동방군 출신 총독들이 라이네 가문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으니 단숨에 쓸어버리는 건 무리겠어.”
제국군 총사령관의 명령장으로 압박하면 직할령 사령관들이 따르기는 하겠지만, 그렇다 해도 그들이 동방군 출신 총독들을 제거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으리라고 보았다.
거부감이 큰 일을 지나치게 밀어붙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동방군 총독들을 제거하는 일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해 나가기로 하고 일단 루산부터 확실히 잡기로 했다.
“병력 절반을 잃고 북쪽으로 달아났다고?”
“네, 각하! 티라스 주둔군 사령관 오스카 빈켈이 가프 용병단을 공격했답니다.”
“지금까지 붙어 있다가 루한 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공격하다니 기이한 일이군. 정치 감각이 좋은 건가?”
티라스 군이 가프 용병단과 싸워 멕 나이트를 무려 250여 대나 획득했다는 보고를 들었기 때문에 오스카가 루산과 짰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빈켈 사령관도 참 비정하구먼. 그래도 별다른 연줄도 없는 그가 큰 식민지를 차지할 수 있도록 힘써 준 사람이 보름스 백작인데 말이야. 고슬라 그룹이 그 땅을 발전시키기 위해 쏟아부은 돈이 얼마냐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든 모양이지요.”
“그래, 맞아. 그게 바로 정치 감각이지. 특출한 점을 보여 주었으니 이번에는 살려 줘야겠지.”
토비아스는 마나 통신으로 페르보에 주둔해 있는 모든 군대에 명령을 내렸다.
<황제 폐하의 특사를 사칭하며 불법적으로 병력을 이끌고 마나석 자원을 독식하려 한 무뢰배가 있다. 그의 이름은 루산 보름스. 이미 적지 않은 총독들이 그로 인해 고초를 겪었을 것이다. 그가 이끄는 병력 대부분은 아우로라 연합군 잔당으로 파악되었다. 아우로라 잔당과 손을 잡고 마나석 자원을 장악해 반역을 꾀한 것이다. 필센 제국군은 즉시 루산 보름스와 그가 이끄는 무장 집단을 체포하라.>
필센 제국군 총사령관 밤베르크 공작 명의로 내린 이 명령은 통신망을 타고 순식간에 페르보의 모든 식민지로 전해졌다.
토비아스는 이에 그치지 않고 열차편으로 제국군 총사령관 직인이 찍혀 있는 명령서를 보냈다.
페르보의 식민지 총독들과 직할령 사령관들은 루한 군이 다가올 때부터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지만, 명령서의 내용이 막연히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강경하고 노골적인 데 깜짝 놀랐다.
“허! 이렇게까지 하다니······.”
“끝장을 볼 모양이지요.”
“우리는 어떡합니까?”
총독들이 마르켈을 쳐다보았다.
“정식 명령서요. 따르지 않을 수 없지 않겠소.”
명령서도 명령서이지만, 멕 나이트 전단 12개, 마나포 전단 5개를 이끌고 왔다.
각각의 총독들이 나눠 지휘하고 있는 페르보의 군대와는 지휘 체계부터가 달랐다.
게다가 직할령 주둔군이 제국군 총사령관의 직인에 눌려 저쪽에 합세하기라도 하면 병력에서도 열세에 놓이게 된다.
“일단은 따릅시다.”
식민지 총독들이 지휘하는 병력이 가프 용병단 추격에 나섰다.
그뿐 아니라 그동안 사태를 관망하고만 있던 직할령의 병력도 루산을 잡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밤베르크가 루산을 잡으려는 속셈을 만천하에 드러내자 페르보 전역에서 무려 30개가 넘는 멕 나이트 전단이 북쪽으로 올라가는 가프 용병단을 포위하기 위해 움직였다.
***
클라크는 베키오와 아우로라 부흥군, 타라스 마법 연구소 사람들을 벨고트 왕국에서 니코폴 왕국으로 무사히 도피시킨 뒤 그들의 정착을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사람이 워낙 많아 거주지를 마련하는 일부터 쉽지 않았는데 타라스 마법 연구소의 대규모 설비를 설치할 공장도 마련해야 했다.
클라크는 가프 마법 연구소의 자금과 투릭 오제로의 실행력, 미리 니코폴 왕국에서 활동하도록 배려해 준 가프 마법 연구소의 마법사 아발롱과 아는 지인이 많은 아우로라 대륙의 마법사 순다르 등을 적극 활용하여 이 어려운 문제를 착착 해결해 나갔다.
집을 마련하고, 생필품을 조달했을 뿐 아니라 마나석 가공 공단에 공장 부지까지 마련해 준 것이다.
타라스 연구소 마법사들과 아우로라 부흥군 기사들은 클라크에 대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베키오가 직접 찾아와 감사 인사를 할 정도였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별말씀을요. 어려울 때 서로 돕고 사는 것이지요.”
이 일로 인해 타라스 연구소와 아우로라 부흥군 사람들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클라크에게 의논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다 보니 클라크는 그들의 속사정과 실체를 자연스럽게 파악하게 되었다.
이들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굴다크 공작의 막내아들이라는 것과 굴다크 공작의 참모장이었던 슈토프 백작이 그를 보좌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냈다.
그는 이러한 사실들을 루산에게 알렸다.
그 후로도 클라크는 니코폴 왕국의 수도에서 아우로라 부흥군의 정착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던 어느 날, 페르보에서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니코폴 왕국이 비록 궁벽한 곳에 있는 작은 나라에 불과했지만, 페르보에서 마나석이 들어오기 때문에 그곳의 소식이 민감했던 것이다.
<변경의 왕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루산 보름스 백작이 아우로라 연합의 잔당과 손을 잡고 페르보의 마나석을 장악하려다 밤베르크 공작이 파견한 루한 군과 페르보에 주둔해 있던 필센 군에 쫓겨 북쪽으로 오고 있다! 멕 나이트 수천 대가 그를 잡기 위해 몰려오고 있다!>
“우리가 언제 보름스 백작과 손을 잡았다는 말인가? 우리가 아닌 다른 부흥 세력인가?”
베키오를 비롯한 아우로라 부흥군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필센 제국의 대군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에 잔뜩 긴장했다.
클라크 일행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교수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투릭 오제로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클라크는 루산이 걱정되기는 했으나 놀라지는 않았다.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머릿속으로 금방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밤베르크 공작이 백작님을 해치려고 꾸민 짓인 것 같습니다.”
“그럴 수가!”
“걱정하지 마세요. 백작님은 쉽게 당할 분이 아니니까요.”
그렇게 일행을 다독이며 남쪽에서 올라오는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때 시험단 파일럿 하나가 니코폴 왕국으로 들어와 루산의 편지를 클라크에게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