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46. 다행히 새가슴은 아니로군
4부 46. 다행히 새가슴은 아니로군
베키오는 니코폴에 도착한 뒤로도 좀처럼 생기를 되찾지 못했다.
멕 나이트는 한 대도 남아 있지 않았고, 마나석으로 고급 마나 연료를 추출하는 타라스 마법 연구소의 공장도 버리고 떠나왔다.
10년 준비가 물거품이 된 것이다.
아직 젊으니 새로 시작해도 된다고 마음을 다잡아 보려 해도 마나 연료 추출 공장은 언제 다시 기틀을 다져 연료를 생산해 낼 것이며, 설사 연료를 생산한다 해도 멕 나이트는 어디서 구할 것인가!
“후유-!”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무기력하고 우울하게 지내고 있을 때 클라크가 찾아왔다.
그래도 벨고트에서 니코폴까지 아우로라 부흥군과 타라스 마법 연구소를 무사히 이전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은인이라 소홀히 대할 수가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공자님, 안색이 좋지 않으시군요. 무슨 고민이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그저 생각할 게 많아서요.”
베키오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어쩐 일이십니까?”
“제가 공자님의 고민을 조금 덜어드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왔습니다.”
“네? 그게 무슨······?”
“멕 나이트가 필요하시지 않습니까? 제가 구해 드리면 어떨까 해서요.”
“······!”
베키오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클라크를 쳐다보았다.
클라크가 필센 제국이 위세를 떨치는 세상에서 아우로라 부흥군과 타라스 마법 연구소를 벨고트에서 니코폴까지 이주시키고 아무나 구할 수 없는 마나석을 공급할 만큼 대단한 능력을 지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사업가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멕 나이트를 구할 수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아우로라 부흥군에 필요한 멕 나이트는 고작 한두 대가 아니라는 것을 클라크가 모를 리 없었다.
“정녕 그것이 가능합니까?”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베키오는 멕 나이트를 구할 수만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기꺼이 헤쳐 나갈 수 있었다.
“말씀해 주십시오!”
“혹시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필센 제국의 보름스 백작이 자신의 병력과 함께 북쪽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걸 아십니까?”
베키오도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공들여 준비해 온 아우로라 부흥군을 격파한 것이 다름 아닌 루산의 군대였다.
말하자면 원수나 다름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 그가 아우로라 부흥 세력과 손을 잡았다는 혐의로 필센 제국군에 쫓기고 있다고 하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네. 소문은 들었습니다. 루한에서 온 병력과 페르보에 주둔해 있던 병력이 모두 보름스 백작을 추격하고 있다고······.”
베키오로서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것인지······?”
“사실 보름스 백작이 부탁을 해 왔습니다. 구해 달라고 하더군요.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게 도와 달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네? 보름스 백작과 아는 사이였습니까?”
“사업을 크게 하다 보면 여러 사람과 사귀게 되지요. 공자님을 만난 것처럼 말입니다.”
클라크는 적당히 둘러댔다.
“아!”
베키오는 클라크가 보여준 능력 정도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보름스 백작의 부탁을 들으니 공자님 생각이 나더군요.”
“그게 무슨 말씀이죠?”
“보름스 백작이 군대를 이끌고 도망친다면 절대 필센군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200대가 넘는 멕 나이트가 눈에 띄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요. 결국 버려야 한다는 이야기죠. 그런데 그냥 버린다고 해결이 되겠습니까? 그보다 누군가가 그 멕 나이트를 타고 필센군을 유인하면 훨씬 수월하게 빠져 나갈 수 있겠죠.”
“으음!”
베키오는 클라크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했다.
“지금 나에게 파일럿들을 데리고 보름스 백작의 멕 나이트를 인수하라는 겁니까? 그 대신 필센군의 추격을 대신 받으면서?”
“바로 그겁니다.”
베키오의 표정이 굳었다.
“보름스 백작은 나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 자인데 내가 왜 그를 구해야 하죠?”
그러자 클라크가 담담히 말했다.
“당시 보름스 백작은 필센 황제의 명을 수행하느라 무단으로 타국을 침공한 필센의 총독을 벌하기 위해 움직인 것이지 의도적으로 공자님을 공격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엄청난 피해를 준 사실이 변하지는 않지요.”
베키오가 지금과 같은 절망과 허무를 느끼게 된 시발점이 바로 보름스 백작에게 아우로라 부흥군이 대파된 일이었다.
“공자님, 멕 나이트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음!”
필요했다.
원수가 사용하던 멕 나이트라 해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보름스 백작의 가프 용병단은 멕 나이트를 한 대도 가지고 돌아갈 수가 없어요. 사용하던 마나포도 그대로 넘기고 가게 될 겁니다.”
그 말에 베키오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벨고트에서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아군 멕 나이트를 박살 낸, 멕 나이트 전용 마나포!
‘그걸 내가 가지게 된다고?’
물론 필센군의 추격을 받는다는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멕 나이트 2백 여 대와 멕 나이트 전용 마나포 수십 문이라면 충분히 해 볼 만한 일이었다.
클라크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사실 공자님이 나서실 수밖에 없는 것이, 이대로 있으면 보름스 백작의 군대가 이곳 니코폴 왕국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필센군 멕 나이트 수천 대도 따라 들어올 가능성이 높지요. 그러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될까요? 마나석 가공 공단은 온전할까요? 공자님의 부하들과 아직 설비를 제대로 설치하지도 못한 마법사들은 어찌 될까요? 다시 기약 없이 떠돌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쪽이 낫겠습니까 아니면 필센군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고 보름스 백작의 멕 나이트를 인수하는 쪽이 낫겠습니까?”
듣고 보니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베키오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 아니라 보름스 백작이 무사히 탈출하는 것이 공자님께 도움이 됩니다.”
“그건 또 무슨 뜻입니까?”
“잘 아시겠지만, 루한 군은 밤베르크 공작의 군대입니다. 밤베르크 공작이 보름스 백작을 잡으려고 이 일을 꾸민 것이라면 탈출에 성공한 보름스 백작이 가만있겠습니까?”
“복수하려 하겠죠.”
“그렇습니다. 그러면 제국은 더욱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아!”
제국이 안정을 찾으면 아우로라 부흥군이 활동할 여지가 없다.
혼란에 빠져야 아우로라 부흥 운동이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클라크의 설명을 들은 베키오는 이 일을 할 수밖에 없다고,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의문이 생겼다.
“그런데 사장님은 이 일을 주선해서 어떤 이익을 보는 겁니까? 보름스 백작은 목숨을 구하고, 나는 멕 나이트를 얻는다지만, 사장님은 딱히 얻을 만한 것이 없어 보이는데요?”
전쟁으로 떼돈을 버는 사업가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업들은 사회가 평화롭고 안정적일 때 발전한다.
클라크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인연을 맺은 데 만족합니다.”
“인연이라······.”
아우로라 부흥 운동에 성공한다면 이를 도운 사업가는 거대한 시장을 선점하는 혜택을 받게 된다.
베키오는 그런 뜻으로 받아들였다.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은 도박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래야 성공했을 때 배당이 더 크지요.”
“그야 그렇지만······.”
“그리고 저는 최선을 다해 그 가능성을 높일 생각입니다.”
“······?”
“이번 일이 성공하면 멕 나이트를 추가로 구해 드리지요.”
“······!”
“성공하면 말입니다.”
클라크가 찾아오기 전까지 깊은 좌절감에 빠져 있던 베키오의 눈에 의지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반드시 이번 일을 성공해서 멕 나이트 200여 대를 입수하고, 추가로 더 많은 멕 나이트를 보유하리라!
그의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베키오가 아우로라 부흥군 파일럿들을 이끌고 남하했다.
***
가프 용병단의 행군은 고달팠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날씨가 더욱 추워졌다.
멕 나이트에 탑승한 파일럿들은 그나마 나았으나 멕 나이트를 버리고 온 파일럿들은 다른 멕 나이트 어깨에 앉아 가야 했는데, 추운 날씨에 온몸이 꽁꽁 얼어붙어 화물차에 끼어 타고 가던 동료와 자주 교대해야 했다.
그런데 눈이 많이 쌓이고 길이 곤죽처럼 변한 곳이 많아 화물차를 끌고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겨우 겨우 끌고 가던 화물차를 한 대씩, 한 대씩 포기하고 지나가야 했다.
그렇게 되자 비좁은 차량 안에서 불편하게나마 온기를 나누던 파일럿들이 다시 칼날 같은 바람이 쌩쌩 부는 멕 나이트 어깨에 앉아서 가야 했다.
다행인 점은 바르나에서 바덴이 보급품을 많이 보내 준 덕분에 마나 연료가 떨어지지 않았고 식량과 의복이 부족하지 않다는 것과 전투 거미들이 멕 나이트 부대를 에워싸고 다가오는 부대를 경계해 준 덕에 아직 전투를 치르거나 포위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국군 총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출동하는 직할령과 식민지 주둔 병력이 점점 많아지면서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
추격 병력이 남쪽에서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사방에서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이오?”
슈야 마우메가 반달 식품에서 생산한 군용 간편 조리식의 뜨끈뜨끈한 국물을 후루룩 마시며 물었다.
간편식 레오파드를 으적으적 씹던 루산이 입안에 남아 있는 음식물을 끝까지 삼킨 뒤 대답했다.
“아우로라 부흥 운동을 하는 녀석들이 와 준다면 멕 나이트를 넘기고 떠날 것이고 오지 않으면 우리 힘으로 필센군을 격파하고 가야겠지요.”
루산의 얼굴에는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 있었고, 그가 말할 때마다 입에서 허연 김이 용의 숨결처럼 뿜어져 나왔다.
“멕 나이트 수천 대를 돌파하고 간다? 허허, 그 대범함을 10년 전에 발휘하지 그랬소?”
10년 전에 밤베르크 공작에게 순순히 양보하고 물러나지 말고 제대로 싸웠더라면 오늘 이런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되지 않았느냐는 타박이었다.
루산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이럴 줄 누가 알았겠소?”
“하긴, 그건 그렇지.”
슈야 마우메도 허허롭게 웃었다.
므라드가 통일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누가 알았으랴?
그에 맞서 싸운 자신이 포로로 잡혀 바다 건너 머나먼 땅 깊숙이 끌려가 듣도 보도 못한 괴수들과 싸우다 용병으로 활동하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자신을 붙잡은 루산을 꺾고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가 므라드에게 복수하겠다고 결심했으나 십수 년이 경과하면서 어느새 새로운 터전에서 전보다 훨씬 부유하게 사는 삶에 익숙해져 괴수 사냥꾼과 용병으로서의 삶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앞날은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이라면 구체적인 사건까지 예측하지는 못하더라도 고래로 권력이라는 것이 남과 나누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경계했어야 했다.
물론 이 또한 겪어 봐야 막연하게 이해하는 것을 넘어 뼈저리게 새기게 될 테니, 루산을 탓할 이유는 되지 않을 것이다.
“돌아가면 밤베르크를 박살 내겠지?”
루산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황제까지도?”
그러나 이번 질문에는 루산의 머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신중하게 대답했다.
“진상을 알아보는 것이 우선이겠지요.”
이번 일이 율리안과 무관할 수도 있다는 실낱같은 기대를 완전히 접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슈야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 역시 겪어 보고 나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인가 보다 생각했다.
이번에는 루산이 질문을 던졌다.
“만약 아라드 변경에 적이 침입했다면 막을 수 있겠습니까?”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만약······.”
슈야가 대답하는 와중에 레보르크가 바닥에 쌓인 눈을 흩날리며 달려왔다.
“대장님, 북쪽을 경계하고 있는 전투 거미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2백 50여 명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답니다.”
루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굴다크 공작의 아들이 다행히 새가슴은 아니로군.”
슈야도 따라서 일어났다.
“아우로라 잔당 세력을 키우면 나중에 곤란하지 않겠소?”
“나중 걱정은 나중에 하죠. 지금은 닥친 일부터 먼저 처리하고.”
“그럽시다.”
가프 용병단이 눈을 뚫고 이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