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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FC 변경 군단의 기사-428화 (428/450)

4부 47.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해

4부 47.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해

“저기 옵니다!”

아우로라 부흥군 파일럿 하나가 남쪽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멕 나이트들이 눈 쌓인 언덕 옆으로 줄줄이 걸어오고 있었다.

“제가 나가 볼까요?”

슈토프 백작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보름스 백작이 딴마음을 먹고 베키오와 파일럿들을 공격한다면 멕 나이트가 한 대도 없는 아우로라 부흥군은 끝장이기 때문이었다.

그 역시 멕 나이트를 구할 방법이 이것뿐이라면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지만, 베키오가 잘못될까 염려됐던 것이다.

“아닙니다. 여기까지 온 마당에 뒤에 숨어 있는 것은 의미가 없죠. 나가서 만나 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베키오가 길 한가운데로 걸어 나가자 슈토프 백작과 250여 명의 파일럿들이 그 뒤로 가지런히 정렬했다.

멕 나이트 부대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다는 의지를 보이려는 것이었다.

003을 타고 걸어오던 루산은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허세라 해도 용기 있는 모습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멕 나이트와 멕 워커, 붐붐 화물차로 이루어진 기동 부대가 아우로라 부흥군 앞에 멈추었다.

루산이 조종실 가슴을 열고 나와 003 손바닥 위에 섰다.

베키오와 아우로라 부흥군 파일럿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루산을 쳐다보았다.

루산이 부흥군 파일럿들을 한번 죽 훑은 뒤 베키오에게 눈을 고정시키고 말했다.

“긴 말은 필요하지 않겠지. 우리가 보유한 멕 나이트 229대, 멕 워커 15대, 화물차 7대를 모두 넘겨주겠다. 화물차 운전이 익숙하지 않겠지만, 어렵지 않기 때문에 가르쳐 주면 금방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베키오는 루산의 마지막 말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는 와중에 운전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말인가?’

멕 나이트 뒤쪽에 보이는 화물차는 무척 커서 멕 워커를 눕혀 충분히 실을 것 같았다.

멕 나이트보다 커 보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 정도나 크기 때문에 보급 물자를 많이 싣고 있을 것 같았다.

루산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보급 물자는 충분하다. 마나 연료는 석 달 분, 간편식은 반년은 버틸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니 필센군과 무리해서 싸우기보다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는 것이 좋겠지.”

베키오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쫓기는 주제에 우리를 걱정해 주는 건가?”

루산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연히 걱정이 되지 않겠나? 그 실력으로 도망도 못 치고 금방 잡혀 버리면 우리가 위태로워지니까.”

베키오가 발끈했다.

“뭐라고?”

“차라리 싸워서 돌파할 걸 그랬나, 하고 후회하게 하지 말고 죽어라 달아나라. 실력을 인정하는 것도 실력이니까.”

베키오는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이미 가프 용병단과 맞붙어 처참하게 패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반박하지는 못했다.

실력도 없는 주제에 입만 살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동쪽으로 달아나는 게 좋을 거야.”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북쪽으로 가면 니코폴 왕국까지 필센군이 추격해 와 새로 이전한 본거지가 위태로울 수 있었다.

남쪽은 페르보 중심으로 가는 것이라 달아나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

서쪽은 산맥으로 막혀 있었다. 중간에 길이 있기는 하지만 그 길이 막히면 도주로가 없었다.

동쪽으로 가야 페르보를 벗어나 필센군이 점령하지 않은 나라들로 도망칠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땅에 있는 나라들이 갑자기 들어온 아우로라 부흥군의 멕 나이트 부대를 반겨 주지는 않겠지만, 필센군도 함부로 타국 땅을 밟지는 못할 것이다.

“다행이군.”

루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인수인계를 해 볼까.”

그는 다시 조종실로 들어가 동화기에 몸을 끼우고 003의 몸체를 가프 용병단이 있는 뒤쪽으로 돌린 뒤 외부 확성기를 작동시켰다.

- 시동 열쇠를 넘겨주어라!

루산의 목소리가 우렁우렁 퍼져 나갔다.

- 오랫동안 타던 기체라 아쉽겠지만, 곧 새로운 기체를 줄 테니 미련을 갖지 마라!

이미 이야기가 돼 있었기 때문에 가프 용병단 파일럿들은 곧바로 멕 나이트 가슴 덮개를 열고 조종실에서 나왔다.

그들의 손에는 미리 준비해 둔 배낭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003이 몸을 돌려 이번에는 아우로라 부흥군 파일럿들에게 말했다.

- 어서 가서 멕 나이트를 인수하지 않고 뭘 하고 있나?

베키오가 화들짝 놀라 수신호를 하자 파일럿들이 가프 용병단 멕 나이트를 향해 달렸다.

“이봐! 무릎 관절에서 소리는 좀 나지만, 이래 봬도 대형 괴수 200마리 넘게 잡은 녀석이야. 기운이 좋은 녀석이라고. 아껴 써!”

“아우로라 놈에게 내 멕을 넘기는 날이 올 줄은 몰랐군.”

조종실에서 내려온 가프 용병단 파일럿들은 누군가는 호탕한 척, 누군가는 퉁명스럽게 시동 열쇠를 넘겼다.

멕 나이트를 차지하지 못한 아우로라 부흥군 파일럿들은 멕 워커를 인수했고, 그마저 할당받지 못한 사람은 붐붐 화물차 운전대에 앉아 짧게 운전 교육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루산이 003에서 내려 베키오에게 시동 열쇠를 건네며 말했다.

“레오파드 시제기 중 하나인 003이다.”

“레오파드 시제기?”

베키오는 당연히 레오파드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2차 대전쟁 기간에 필센 제국군이 새로이 선보인 멕 나이트로 많은 전선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기체였다.

다른 말로 하면 아우로라 연합군을 무척이나 괴롭힌 원수 같은 멕 나이트!

이 기체를 자신이 사용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감정이 복잡하게 들끓었다.

“레오파드 슈퍼 스피드의 조상인 셈이야. 헤비 스틸 엔진보다 출력이 높고 속도는 몇 배나 빠르지.”

루산의 말에 베키오는 목을 꺾어 003을 올려다보며 구석구석 훑었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질문을 던졌다.

“근데 이 녹색 도색은 뭐요? 빛이 변하는 것 같은데.”

“도색이 아니야. 세르펜스라는 거대 괴수의 가죽을 씌운 거지. 마나 진동 대검으로도 어지간해서는 베이지 않을 거야.”

“······!”

베키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르펜스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설명만 들어도 대단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 무적은 아니니까 실력에 자신 없으면 공연히 날뛰어 명을 재촉하지는 마라.”

“흥!”

베키오는 콧방귀를 뀌고는 003의 다리에 붙어 있는 발판 사다리를 잡고 조종실로 올라갔다.

루산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가끔 다른 사람들이 탑승하기는 했지만 공장에서 출고된 뒤로 줄곧 사용해 온 003을 남에게 넘기는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자신과 싸웠던 굴다크 공작의 아들이 타게 되리라고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운명이란 어찌 이리도 묘할까?’

감상에 젖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루산은 다른 가프 용병단 파일럿들과 마찬가지로 미리 꾸려둔 배낭을 등에 짊어졌다.

배낭을 짊어진 가프 용병단 파일럿들이 루산의 주위로 속속 모였다.

이제 아쉬움을 떨치고 떠날 차례.

아우로라 부흥군이 멕 나이트를 가지고 필센군을 유인한다 해도 자신들이 안전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러니 서둘러 길을 나서야 했다.

“가자!”

루산이 몸을 돌려 북쪽으로 걸어갔다.

그 뒤를 가프 용병단과 시험단 파일럿들이 뒤따랐다.

거센 바람이 바닥에 쌓인 눈을 휘날려 얼굴을 때렸다.

그런데 그때 동화를 마친 베키오가 003의 외부 확성기로 소리쳤다.

- 보름스 백작!

루산과 가프 용병단 파일럿들이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 내가 너희를 이대로 순순히 보내 줄 것이라 생각했나? 벨고트에서의 원한을 갚지 않으리라 생각했나?

루산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용병들을 헤치고 003 쪽으로 걸어갔다.

003이 발을 들어 밟으면 몸이 터지고 말 텐데도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루산이 외쳤다.

“맞다! 원한을 잊으면 안 되지! 다만, 오늘 이 자리는 아니야. 그 정도 머리도 없는 녀석이라면 무리를 이끌 자격이 없다.”

눈보라가 몰아쳤지만, 루산의 목소리는 베키오의 귀에 똑똑히 박혔다.

루산은 그 말을 남기고 다시 몸을 돌려 걸어갔다.

몸을 꽁꽁 싸맨 가프 용병단 파일럿들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베키오는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설사 공격했더라도 산 너머에서 전투 거미가 마나포를 겨누고 있었기 때문에 당하는 것은 그였을 테지만, 그 사실을 몰랐음에도 지금 이 자리에서 루산을 공격하면 안 된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던 것이다.

[공자님!]

슈토프 백작이 침묵에 빠져 있던 베키오를 깨웠다.

[음!]

베키오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갑시다! 동쪽으로!]

[예!]

조금 전까지 가프 용병단이 사용하던 멕 나이트, 멕 워커 그리고 붐붐 화물차가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습 또한 북쪽에서 불어오는 눈보라로 인해 금세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 필센의 식민지 주둔군 멕 나이트 부대가 이곳에 도착했다.

눈이 많이 내렸지만, 멕 나이트와 멕 워커 그리고 거대한 화물차가 지나간 자국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가프 용병단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동쪽으로 이동! 가프 용병단이 동쪽으로 갔습니다!]

가프 용병단을 추격하는 부대들이 동쪽으로 일제히 방향을 틀었다.

***

니코폴 왕국으로 넘어간 루산은 클라크의 도움을 받아 서쪽으로 이동했다.

클라크에게는 아우로라 부흥군과 타라스 마법 연구소를 이전시킬 때 사용한 멕 워커와 탐탐 화물차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붐붐 화물차를 타고 이동하는 도중에 클라크가 물었다.

“부르사로 가서 므라드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야.”

루산의 답변은 클라크에게 충분하지 않았다.

어떤 도움을 요청할 것인지, 그보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클라크는 그에 대해 따지듯 묻지 않고 질문을 바꾸었다.

“저는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니코폴 왕국에서 할 일은 끝났느냐?”

“오제로 사장의 일 처리가 썩 훌륭합니다. 당분간은 제가 없어도 돌아갈 것입니다. 베키오가 돌아올 때까지 시간이 됩니다.”

루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러면 8구역으로 가서 켐니츠와 바이크에게 병력을 모으고 대기하다 연락을 받자마자 노바로 오라고 해.”

“만약 8구역이 넘어간 상황이라면요?”

클라크도 밤베르크 공작이 이렇게까지 일을 크게 벌였다면 루산의 근거지를 가만 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

루산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때는 칼리슈 님을 만나.”

밤베르크가 군대를 동원했다 해도 가프 마법 연구소까지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멀찍이서 지켜보는 것까지는 어쩌지 못하더라도 대표 마법사인 칼리슈를 구금하거나 밀착해 감시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칼리슈 님께 내 무기를 내달라고 해.”

“그렇게 하면 됩니까?”

“그래.”

“하지만, 무기를 옮기고 사용하려면 멕 나이트나 멕 워커가 필요할 텐데요?”

변경 8구역의 파일럿들이 밤베르크 공작이 보낸 군대에 제압된 상태라면 가프 마법 연구소가 무기를 내준다 해도 운반하거나 사용할 수가 없었다.

루산이 말했다.

“8구역 파일럿들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면······.”

“네.”

“원시의 땅 깊숙이 유배된 죄수들을 움직여 봐.”

“······!”

대전쟁 기간에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가 멕 나이트 부대에 의해 진압될 뻔한 노동자, 대학생들.

루산이 그들을 설득해 목숨을 빼앗는 대신 원시의 땅에 유배시켰던 것이다.

‘사라! 헤르츠!’

격동한 클라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루산은 클라크의 감정 동요를 모르는 척하고 말했다.

“수고에는 반드시 합당한 대가를 치를 것이다. 나를 위해 싸워 준다면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해. 자유든 권리든.”

클라크의 가슴이 두방망이질했다.

한참 후에 그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백작님!”

붐붐 화물차가 눈 쌓인 길을 쉼 없이 달려 부르사 왕국으로 가는 길에 클라크의 마음은 이미 거대한 나무들이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원시의 땅을 질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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