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48.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요
4부 48.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요
“이것 참 오랜만이군, 보름스 백작. 고단한 일을 겪고 있다던데 이리로 올 줄은 몰랐소.”
부르사의 국왕 므라드가 반갑게 루산을 맞아 주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제 소식을 들으신 모양이군요.”
“그야 들을 수밖에. 대전쟁 이후에 그렇게 많은 병력이 움직인 건 처음인데 모를 수가 있겠소? 루한 군이 처음 북상할 때는 우리나라를 치러 오는 줄 알고 깜짝 놀랐지 뭔가?”
므라드는 시종일관 여유가 넘쳤다.
페르보 제국이 식민 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분리 정책을 오랫동안 시행하면서 식민 지배가 끝난 뒤에도 수많은 부족이 대립하고 갈등을 겪어 온 부르사.
왕은 있지만 실질적은 권한은 없으며 족장들이 각자의 부족을 다스려 온 이 혼란한 나라를 하나로 통일시켜 마침내 국왕이 최고 신관이자 최고 권력자로서 절대적인 힘을 갖게 만든 것이 바로 당시 왕의 조카였던 므라드 암쿠 음파시.
부르사의 통일이라는 어려운 일을 해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세상 어느 나라의 왕보다 강력한 권한을 지녔기 때문에 늘 자신감이 넘칠 수밖에 없었다.
루산은 므라드가 통일 전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멕 나이트를 제공했으며 직접 가프 용병단을 이끌고 여러 전투에 참여해 승리를 거둠으로써 이 전쟁을 최종 승리로 이끄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했다.
게다가 피닉스 제철과 고슬라 그룹이 통일 부르사에 많은 투자를 하도록 하여 낙후되어 있던 부르사의 개발을 가능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루산이 없었으면 오늘날의 부르사 왕국은 없었다.
루산이 비록 필센 제국의 최고 권력자 밤베르크 공작에게 공격을 받고 있다 하더라고 므라드에게는 루산을 각별히 대할 이유가 충분히 있었던 것이다.
“그래, 부르사로 왔다면 내게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므라드가 진지하게 물었다.
“멕 나이트를 빌려주시겠습니까?”
“멕 나이트를 빌려 달라?”
“예.”
므라드는 거절하지 않았다.
“얼마나?”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요.”
“음······!”
므라드는 생각에 잠겼다.
부르사 왕국에는 멕 나이트가 외부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았다.
과거에 사용하던 재생 멕 - 전 세대 멕 나이트를 다시 사용한다는 의미로 붙은 이름. 고장 난 기체에서 멀쩡한 부품들을 모아 만들었다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페르보 제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정상적인 경로로 멕 나이트를 입수하지 못한 부르사의 전사들은 페르보 제국이 폐기한 멕 나이트에서 멀쩡한 부품을 뜯어 멕 나이트를 조립해 사용했던 것이다 - 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다.
통일 전쟁 과정에서 많이 부서진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더 이상 재생 멕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오직 재생 멕 나이트만 존재하던 부르사에 멀쩡한 멕 나이트를 처음으로 제공한 사람이 바로 루산이었다.
피닉스 제철이 광산 개발권을 얻는 대가로 므라드는 통일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멕 나이트를 요구했고 루산이 그것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루산의 멕 나이트 제공은 통일 전쟁이 끝난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
광산 개발과 철도 건설을 주로 하는 피닉스 제철, 농지 개발과 공업 단지 건설을 넘어 부르사 종합 개발 계획을 수행하는 고슬라 그룹은 계속해서 사업을 확대해 나가게 되었는데 여러 나라에서 워낙 많은 사업을 동시다발적으로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사업권 획득에 지불할 현금이 없었다.
그래서 현금 대신 루산이 멕 나이트로 대가를 제공하고 피닉스 제철과 고슬라 그룹이 나중에 루산에게 장기 분할 방식으로 상환하기로 한 것이다.
이런 방식이 가능했던 까닭은 당시 대전쟁이 격화되면서 부서진 멕 나이트가 바다 건너 가프 마법 연구소의 수리 공장과 레이크 시티 수리 공장으로 엄청나게 밀려 들어왔기 때문이다.
루산은 그중에서 아우로라 연합이 사용하던 기체들을 빼돌려 당시 파일럿은 많고 멕 나이트 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아라드 변경에 투입함으로써 변경 개발을 활성화시켰다.
그럼에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수리 공장으로 들어오는 멕 나이트도 계속 이어져 아라드 변경의 수요를 충분히 채운 뒤에도 많은 기체들이 쌓여 갔다.
빼돌린 기체를 바다 건너 부르사 왕국까지 수출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변경 8구역에서 필센 제국의 철도를 이용해 항구까지 가서 외국으로 밀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변경 8구역에서 부르사 왕국으로 가는 방법이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부르사 왕국으로 가는 멕 나이트는 변경 8구역 수리 공장을 나온 뒤 아라드 변경까지 이동하여 그곳에서 다시 분해되었다. 분해된 부품들은 아라드 변경에서 아라드 왕국을 관통하는 철도를 이용해 룬드 항으로 가서 배에 싣고 부르사 항에 도착했다.
부르사 항에 새로 건설된 공업 단지는 바로 이렇게 수출한 멕 나이트를 다시 조립하는 공장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루산에게 멕 나이트가 있다고 해도 므라드가 개발권 대금을 멕 나이트로 받지 않겠다고 하면 이 거래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므라드는 이 방식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당시 부르사 왕국은 통일을 이루기는 했지만, 부족들 간의 갈등이 완전히 해소되었다고 볼 수는 없었다.
불안한 통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므라드는 이러한 갈등을 외부로 투사하여 내부 결속과 안정을 도모함과 동시에 국가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할 계획을 세웠다.
부족들 간의 오랜 다툼으로 전투력과 투쟁심이 높은 군대, 루산이 제공하는 멕 나이트가 있으면 충분히 해 볼 만한 싸움이었다.
더욱이 당시 페르보 제국이나 루한 왕국 등 강국들은 필센 제국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고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라 주변 약소국을 돌볼 형편이 아니었다.
므라드의 부르사 군은 마르칸, 카산, 부하라 등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속속 점령해 나갔다.
이 나라들은 대전쟁에서 중립을 선언하거나 아우로라 연합에 있다가 나중에 필센 제국 쪽으로 전향한 나라들이었다.
그 사실을 나중에야 파악한 필센 제국은 깜짝 놀랐지만, 루한 왕국을 점령한 데 이어 시바스 왕국으로 쳐들어가고 페르보에서 아우로라 연합군의 대반격에 고전하느라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리하여 부르사 왕국의 영토는 2차 대전쟁 기간에 무려 세 배나 넓어졌다.
2차 대전쟁이 공식적으로 종료된 이후에도 한동안 루산의 멕 나이트 밀수는 계속되었고, 그에 비례하여 피닉스 제철이 수입하는 철광석과 고슬라 그룹이 개발하는 농촌과 도시의 수가 대폭 늘어나게 되었다.
므라드는 당장 멕 나이트를 얼마나 제공하겠다고 말하지는 않고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내 휘하에 있는 전사들이 아는 얼굴들을 봤다고 하더군.”
과거 통일 전쟁 당시 맞서 싸우다 포로가 된 뒤 루산에게 끌려간 전사들을 봤다는 이야기였다.
그들이 이 땅으로 들어온 것 자체가 므라드에게는 불쾌한 일인 것이다.
“걱정 마십시오, 폐하. 그들은 부득이 함께 온 것이지 금방 저와 함께 떠날 것입니다.”
“그런가?”
“네. 새로운 터전에 뿌리박고 산 지 15년이 지났습니다. 만족스럽다고 하더군요.”
루산의 말에 므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산 밑에 있는 부르사의 전사들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려 한다 해도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부르사의 강함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굳이 들쑤셔 분란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떠나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멕 나이트를 준다 해도 어떻게 가져가려고? 상륙시킬 방법이 있겠소?”
“생각해 둔 것이 있습니다.”
“궁금하군.”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밤베르크 공작과 싸울 작정으로 멕 나이트를 동원한다면 한두 대 가져가서 될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수백 대가 필요할 텐데, 그것을 운반할 때나 상륙시킬 때 들키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루산이 므라드 가까이 몸을 기울이더니 작게 속삭였다.
“아인베크 해운의 벌크선에 싣고 철광석으로 덮어서 이동하면 들키지 않겠지요.”
철광석 수출 물량이 늘어난 만큼 아인베크 해운의 벌크선의 크기도 커지고 수도 늘어났다.
짧은 기간에 많은 멕 나이트를 숨겨 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도착하는 지점도 중요한데, 이 철광석은 곧바로 슈텐달 지방에 있는 피닉스 제철 공장 부두로 직행하게 된다.
슈텐달 지방과 인접해 있는 브레머 항은 통관 절차가 복잡하고 지켜보는 눈이 많지만 슈텐달의 공장 부두는 그곳보다 비밀을 유지하기가 용이하다.
물론 아인베크 남작과 슈텐달 남작의 협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루산은 이들이 협조를 거부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루산 보름스와 고슬라 그룹이 쓰러지게 되면 그다음은 고슬라 그룹과 늘 함께 움직여 온 피닉스 제철과 아인베크 해운의 차례라는 것을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오! 철광석 아래에 숨겨 간다는 말이지? 멕 나이트 장갑판에 흠집이 좀 나겠군.”
므라드의 농담이 그리 웃기지는 않았지만, 루산은 희미하게 웃었다.
므라드가 웃음기를 지우고 말했다.
“400대면 되겠소?”
“일단 그 정도면 되겠군요.”
“그래, 대가는 무엇이오?”
므라드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저와의 우정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말씀입니까?”
이번에는 루산이 농을 살짝 섞었다.
그러자 므라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야 우정의 표시로 이 정도는 언제든 빌려줄 수 있지만, 잔소리 많은 신하들을 설득하려면 명분이 좀 필요하오.”
“이해합니다.”
루산이 진지하게 말했다.
“마나석에서 고급 마나 연료를 추출하는 공장을 부르사에 지어 드리겠습니다.”
다소 뜬금없는 말이었으나 므라드는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루산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것이다.
“알겠소. 오늘 당장 멕 나이트에서 부르사 왕국의 문장을 지우는 작업을 시작할 것이오.”
“감사합니다, 폐하.”
부르사의 왕궁에서 멕 나이트 부대가 주둔해 있는 지역들로 전령들이 빠르게 달려 나갔다.
***
각지에 흩어져 있는 부르사 왕국의 멕 나이트가 부르사 항으로 모이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루산은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갔다.
먼저 클라크가 레오나를 데리고 아인베크 해운의 배를 타고 필센으로 떠났다.
워낙 중요한 일이라 루산의 의지가 확실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클라크만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친딸인 레오나를 동반시킨 것이다.
“슈텐달 남작과 아인베크 남작에게 비밀을 엄수하고 시간을 반드시 지키라고 해.”
“알겠습니다, 백작님!”
클라크가 엄숙히 대답했다.
“아빠!”
괴수 목장 건설을 위해 아우로라 대륙으로 건너올 때까지만 해도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레오나의 눈에 불안과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모든 게 곧 바로잡힐 테니까. 클라크를 잘 도와야 한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음! 몸조심하고.”
“네, 아빠.”
레오나가 루산을 와락 안았다.
루산도 레오나를 꼭 안았다.
잠시 후 클라크와 레오나를 태운 배가 떠났다.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항구에서 눈으로 배웅하던 루산은 몸을 돌려 가프 용병단 지휘관들을 만났다.
슈텐달에 도착한 뒤 어떻게 할지 구체적인 작전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