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49. 님인지 놈인지 알 수 없지
4부 49. 님인지 놈인지 알 수 없지
날씨가 많이 풀렸다지만 노바에 부는 바람은 차가웠다.
황궁을 지키는 근위대 병사들은 여전히 두툼한 동복을 입고 있었고, 퇴근하는 황궁 관리들도 두꺼운 외투에 목도리로 얼굴과 목을 싸매고는 종종걸음으로 퇴근길을 서둘렀다.
간간이 고급 승용차들이 밖으로 나왔다.
황궁의 고위 관리들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였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황궁과 그 주변에 마나 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오베론 공작의 반란 사건을 진압하면서 무너진 황궁을 재건할 때 방어뿐 아니라 미관에 무척 공을 들였기 때문에 마나 등이 밝혀진 황궁과 그 주변 광장의 야경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이 이곳에 내려와 아우로라 대륙까지 아우른 필센 제국을 축복해 주는 것만 같았다.
퇴근 시간이 지나고 황궁 주위를 지나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을 때 조용히 황궁을 빠져나온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아름다운 별의 광장을 통과해 지나갔다.
그때 황궁 광장 바깥의 한 골목에 주차되어 있던 자동차가 시동을 켰다.
후웅-
그 자동차는 전조등을 밝히고 황궁에서 나온 고급 승용차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차 안에는 중절모를 쓰고 있는 장년 남자와 날카로운 눈빛의 노인이 타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장년의 남자가 말했다.
“법원 사거리 방향으로 갑니다.”
“트리어의 집은 북쪽이잖아.”
“그렇습니다. 고위 귀족들의 저택이 있는 곳이죠.”
“변경의 촌놈이 출세했어.”
“그러니까요.”
결코 호의적인 목소리는 아니었다.
이들은 스텐커 탐정 사무실 출신들로, 스텐커의 조수로 일하던 펠릭스와 남방군 출신으로 반란에 가담했다가 붙잡혀 고문을 당해 다리를 절게 되어 변경으로 합류하지 못하고 노바에서 스텐커를 돕게 된 보르비스였다.
스텐커 탐정 사무실은 루산이 율리안을 황제로 앉히고 그의 치세를 안정시키기 위해 애를 쓰던 시절에 음지에서 많은 일을 해 왔다.
율리안에 반기를 들던 세력, 불만을 가진 인사들을 파악하고 감시하는 일뿐만 아니라 등용할 인사들을 검증하는 일까지 했다.
물론 그 많은 일을 단독으로 할 수는 없었다.
스텐커의 후배 그리마가 노바 경찰청장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경찰이 보유한 많은 정보와 인력을 적절히 활용하여 반대 세력을 찍어내고 새 시대에 적합한 능력 있는 인사들을 발굴하여 정부를 구성한 덕에 노바는, 율리안이 황제로 등극하고 얼마 동안은 거센 반발과 혼란을 겪었으나, 이내 큰 소란 없이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오베론 공작에게 복수하기 위해 은밀히 많은 일을 수행했던 경험으로 정권 안정에 기여했던 것이다.
사실 그들이 이런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었던 데에는 노바 경찰청장 그리마 외에도 또 한 사람의 역할이 매우 컸다.
바로 루트 오베론이었다.
루산이 루트 오베론을 합류시킬 때는 남방군 출신 기사들이 크게 반발하여 조직이 와해될 뻔하기도 했으나 루산은 뜻을 꺾지 않았다.
“오베론 공작 가문은 이미 망했고 프리드리히 황제는 죽었소. 내 복수는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대들은 부족하오?”
“······.”
“그대들 가운데 필센의 고위 귀족, 고위 관리, 노바의 생리에 대해 루트 오베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있으면 말해 보시오. 루트를 살린 까닭은 그를 풀어 주려는 게 아니라 그의 능력을 이용하기 위함이오.”
남방군 출신 기사들이 복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루산 덕분이었다.
남은 가족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도 루산이었다.
그리고 정계와 관계에 대한 이해도가 루트보다 높고 일을 꾸미고 처리하는 능력이 루트보다 탁월한 사람은 없었다.
결국 남방군 출신 기사들은 루트 오베론을 이용한다는 루산의 뜻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루트가 딴마음을 품는다면 곧바로 죽일 것이오!”
루트와 남방군 출신 기사들이 화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 견제하고 때로는 협력하며 긴장을 유지한 채 루산의 일을 수행했다.
루산이 밤베르크 공작의 공격에 굴복하여 노바를 떠나 변경으로 돌아간 뒤에도 스텐커 탐정 사무소 출신들은 밤베르크 공작 일파의 동향을 감시하는 일을 계속해 왔다.
그 덕에 루산은 머나먼 변경 땅에 칩거하고 있으면서도 숙청당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으며 그가 구축해 놓은 통치 체제도 큰 변동 없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활동이 크게 줄어든 것은 루트 오베론이 루산에 대한 밤베르크 공작의 공격이 완전히 중단되었다고 판단하고 오카수스 대륙 반대편으로 가는 항로를 찾는다고 떠난 이후였다.
그들의 원수인 루트가 떠나자 조직 내의 긴장감이 사라지면서 자연히 활동 폭이 줄어든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해 오던 일을 완전히 중단한 것은 아니어서 수도 군단 병력이 서쪽으로 대거 이동한 것을 포착하고 변고가 발생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펠릭스와 보르비스는 병들고 나이든 몸으로 노후를 준비하던 남방군 출신의 절름발이 칼잡이들과 새로운 삶의 길을 모색해 나가던 스텐커 탐정 사무실 출신 정보원들을 다시 소집하여 오베론 공작 가문을 무너뜨리기 위해 미행과 감시를 시작한 이래로 근 20년 가까이 해 오던 일을 다시 해 나갔다.
험한 바다에서 새로운 길을 찾는다고 떠났다가 하도 소식이 없어 죽은 줄 알았던 루트 오베론도 갑자기 돌아와 합류했다.
루산의 행방에 대한 소식은 아직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그가 돌아와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이번 사건의 배후와 관련자들을 상세히 파악해야 했다.
음지에서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쫓던 고급 승용차는 법원 근처 대로변에 멈추었다.
이윽고 트리어가 차에서 내렸다.
그는 고급 식당들이 많이 들어서 있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법관이나 변호사, 신분이 높은 의뢰인들이 자주 이용하는 곳이었다.
미행하던 차도 길가에 멈추었다.
보르비스가 말했다.
“내가 따라가 보지.”
“예. 기다리겠습니다.”
“음.”
보르비스는 지팡이를 들고 차에서 내려 트리어 뒤를 따라갔다.
다리를 살짝 절었지만 신사복에 중절모를 쓴 꼬장꼬장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이 거리를 걷는 것은 그리 눈에 띄는 일은 아니었다.
나이 많은 법관이나 변호사를 만나러 가는 귀족처럼 보였다.
트리어가 들어간 고급 식당 안에는 저녁 시간이 지났음에도 술과 함께 늦은 만찬을 즐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보르비스도 그곳에 기다리는 일행이 있는 척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종업원이 다가와 정중하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일행을 찾는데······.”
“혹시 기다리시는 분의 성함이 어떻게 되실까요?”
“도미니크 남작이오.”
그는 대충 둘러대며 눈으로는 트리어의 뒤를 따라갔다.
트리어는 한 남자가 등을 보인 채 앉아 있는 왼쪽 창가 테이블로 다가갔다.
남자가 일어나 트리어와 인사를 하고 다시 앉았고, 트리어도 그 앞에 앉았다.
그때 종업원이 예약자 명단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죄송하지만 도미니크 남작이란 분은 확인이 안 되는군요.”
“그러면 내가 잠시 찾아봐도 되겠소?”
“그러시지요.”
보르비스는 지팡이를 짚으며 트리어가 지나간 길을 따라 식당 안으로 들어가 멈추지 않고 왼쪽 창가 통로 끝까지 걸어갔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트리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저 사람은······!’
보르비스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저 사람이 왜 트리어를 만난단 말인가?’
경각심이 확 들었다.
보르비스는 다시 걸어 나왔다.
그 테이블 주위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앉아 있었기 때문에 가까이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었다.
보르비스가 그 테이블 가까이 다가가자 트리어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람이 고개를 들어 보르비스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쳤지만 보르비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음지에서 활동해 왔기 때문에 그는 상대를 알아도 상대는 그를 몰랐다.
상대가 다시 고개를 돌려 트리어를 바라보고 이야기를 했다.
“···그 부분만 확실히 약속해 주신다면 최대한 협조하겠······.”
보르비스가 들은 것은 거기까지였다.
그는 더 미련을 갖지 않고 식당 밖으로 나왔다.
욕심을 부리는 것이야말로 미행과 감시, 정보 수집에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식당가를 걸어 기다리고 있던 차에 올라탔다.
“어떻게 됐습니까?”
펠릭스가 물었다.
“한 사람을 만나더군.”
“누구를요?”
“포렌시스.”
의외의 이름이 등장하자 펠릭스도 깜짝 놀랐다.
“예? 하급심판장 포렌시스 판사 말씀입니까?”
“음!”
보르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분이 왜 그 배신자 놈을 만난단 말입니까?”
배신자란 트리어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트리어가 밤베르크 공작과 자주 접촉했을 뿐 아니라 그가 변경 8구역에 다녀온 뒤에 협곡 다리 건설 공사가 진행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 군단 병력이 8구역으로 들어간 것까지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들 아나?”
“······.”
“느낌이 좋지 않아.”
“···그렇군요.”
포렌시스는 바덴의 2년 선배로 루산이 오베론 가문에 복수하기 위해 움직일 때 법률적 부분을 담당한 변호사였다.
말하자면 오베론 공작 가문에 대한 복수와 관련된 루산의 행적을 매우 소상히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던 것이다.
율리안이 황위에 오른 뒤 루산은 포렌시스의 바람대로 그를 법원의 고위직에 앉혀 주려 했으나 법원은 매우 경직되고 보수적인 조직이라 사회 개혁 이후에도 평민 출신이 높은 자리에 앉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
율리안의 통치가 안정되기도 전에 무리한 인사로 법관들의 반발을 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해 법원 개혁 조치 법안을 발표하면서 하급심판원에 평민 출신 변호사인 그를 부원장으로 임명하는 것으로 보답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배신자 놈이 포렌시스 님을 안다는 것부터가 불길하네요.”
“포렌시스 님인지 포렌시스 놈인지 알 수 없지.”
“네?”
“불길하다며? 이런 그림이 그려지는군.”
“어떤······?”
“병력을 동원해서 백작님을 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야. 명분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평생 공들여 발전시킨 변경 8구역을 빼앗고 거대한 고슬라 그룹을 꿀꺽하는 일인데 마음에 안 들어서 쳤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지요.”
“제국의 멀쩡한 공작 가문을 부정한 방법으로 무너뜨린 자를 벌한다는 명목은 어떤가? 포렌시스라면 관련 자료를 꽤 구체적으로 제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
펠릭스는 번개에 맞은 것처럼 깜짝 놀라며 눈을 치켜떴다.
오랫동안 음지에서 일해 온 그로서는 보르비스의 말이 꽤 그럴싸하게 들렸던 것이다.
보르비스가 말했다.
“뭐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포렌시스에게도 사람을 붙일 필요가 있겠어.”
“그래야겠군요.”
그들은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머릿속에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참 후 트리어가 식당에서 나와 차에 올라타고 떠났다.
펠릭스가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라붙었다.
이런 일들이 노바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노바의 평범한 시민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추운 날씨에 옷깃을 세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