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51. 변경이 만만하냐?
4부 51. 변경이 만만하냐?
거대한 나무들이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원시의 숲 안.
우으응-
키히히-
취히익-
엄청난 수의 괴수들이 원시의 나무로 급하게 만든 거대한 울타리에 둘러싸인 채 울부짖고 있었다.
울타리 주위에는 멕 나이트와 멕 워커들이 불안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괴수의 밀도가 너무 높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있는 괴수들은 사실 이 숲에 사는 녀석들이 아니었다.
원시의 숲을 지나 더 서쪽으로 가면 광활한 초원이 나오는데 바로 그곳에 사는 초식 괴수들이었던 것이다.
아라드 변경은 필센 제국 변경 8구역의 괴수 목장을 본받아 수많은 괴수 목장을 만들었는데, 바로 그 초원의 초식 괴수들을 분지에 가둬 키우며 체액과 각종 부산물을 얻고 있었다.
이번 작전을 위해 나무를 베어 임시 울타리를 만들고, 초원 목장에서 괴수들을 이곳까지 몰고 와 가두어 놓았다.
이런 식으로 괴수를 가두어 둔 임시 울타리가 이 숲에 무려 다섯 개나 되었다.
십년 이상 괴수 목장을 운영하면서 울타리를 만들고 괴수를 모는 솜씨가 크게 향상된 파일럿들이라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정작 변경의 파일럿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공들여 가꿔 온 괴수 목장이 텅텅 비게 되는 것이었다.
[언제 다시 채워 넣지?]
이번 작전에 동원된 괴수들은 다시 모으는 것이 불가능했다.
설사 살아남는다 해도 이 무시무시한 숲에 사는 잔인한 육식 괴수들이 결코 가만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인간에게 체액을 제공하고 마지막에는 뼈와 힘줄까지 주고 갈 괴수들이 이 숲에서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언젠가는 다시 채우게 되겠지. 어쩔 수 없잖아.]
[후유, 그렇긴 해.]
재산상의 피해를 생각하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지경이지만, 변경을 염치없는 아라드 왕국 놈들에게 넘겨줄 수는 없었다.
[잡담하지 마!]
상관의 호통에 아라드 변경의 파일럿들은 입을 다물고 조용히 통신기에서 들려올 명령을 기다렸다.
괴수들이 서로 충돌하다 울타리에 부딪치며 울부짖는 소리가 요란했다.
멕 워커들은 크게 요동치는 울타리 바깥에 거대한 나무 말뚝을 박아 울타리가 무너지는 것을 막았다.
멕 나이트들은 거대한 원시의 나무 가지 위에서 울타리 안의 초식 괴수를 탐욕스럽게 노리고 있던 숲의 괴수를 투창을 던져 쫓아버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통신기에서 쩌렁쩌렁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휘부다! 놈들이 목표 지점에 진입했다! 다들 준비하라!]
[알겠습니다!]
울타리를 책임지고 있는 지휘관들이 힘주어 대답하고는 지시를 내렸다.
[작전 명령이 떨어졌다. 준비해!]
멕 나이트와 멕 워커들이 맡은 역할에 따라 울타리 주위에 바짝 붙었다.
잠시 후 오토의 목소리가 다시 통신기를 때렸다.
[지금이다! 괴수를 풀어라!]
[괴수를 풀어라!]
명령이 떨어지자 멕 워커 두 대가 울타리 지지 말뚝이 쉽게 쓰러지도록 끼워 넣은 쐐기를 툭 쳐서 뺐다.
울타리 한쪽 면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울타리 안에 갇혀 있던 초식 괴수들이 둑 터진 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쿵쿵쿵쿵-
쿵쿵쿵쿵-
괴수들이 지축을 흔들며 숲속을 달려갔다.
괴수 대부분이 한바탕 소란을 일으키며 밖으로 나가고 한적해진 울타리 안에 남아 편하게 쉬려던 녀석들도 멕 워커에 의해 쫓겨나 같은 방향으로 달렸다.
그러나 인내심 없는 괴수들이 계속해서 달릴 리가 없었다.
멕 워커와 경량 멕 나이트들이 날카로운 쇠꼬챙이로 괴수들을 찌르며 일정한 방향으로 계속 달리게 했다.
초식 괴수들의 대규모 질주에 숲이 흔들리자 이 숲에서 살던 초식 괴수들이 깜짝 놀라 달아나고, 무시무시한 육식 괴수들이 고개를 치켜들고 추격에 나섰다.
초식 괴수들이 만든 소동이 더욱 커진 것이다.
임시 울타리 다섯 개에서 동시에 시작된 거대한 괴수들의 물결은 숲을 짓밟으며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그곳에서 괴수의 물결을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아라드 왕국군을 유인해 온 변경의 멕 나이트 부대였다.
[온다! 피해!]
아라드 변경의 멕 나이트들은 거대한 원시의 나무 뒤로 멕 나이트를 바짝 붙여 피했다.
두두두두두두!
엄청난 괴수의 물결이 나무 사이사이를 휩쓸며 지나갔다.
바로 뒤에 따라오던 아라드 왕국군은 이러한 괴수의 물결을 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지 알지 못했다.
당황한 지휘관이 소리쳤다.
[한데 뭉쳐 방진을 형성하라!]
2개 전대 규모의 멕 나이트들이 서로 가까이 붙어 방패를 들어 괴수의 물결에 맞섰다.
가장 먼저 달려오던 소형 괴수는 갑자기 앞에 생긴 강철의 벽을 피해 옆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그 뒤 행렬부터는 피할 수가 없어서 충돌하고 말았다.
선두의 소형 괴수, 중형 괴수들은 멕 나이트가 만든 강철의 벽을 어찌하지 못했다.
그러나 괴수가 좁은 지역에 쌓이고 뒤에서 밀고 오는 힘이 더욱 거세지자 방진 가장자리에 버티고 서 있던 멕 나이트가 먼저 쓰러졌다.
가장자리의 멕 나이트가 떨어져 나가자 그다음 멕 나이트가 쓰러지고, 그 옆의 멕 나이트가 차례로 휩쓸렸다.
사실 초식 괴수의 물결에 휩쓸려 넘어진다 해도 파일럿에게 부상을 입힐 수도 없고 멕 나이트가 크게 손상되는 것은 아니었다. 고작해야 장갑판이 찌그러지는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라드 왕국군 파일럿들은 처음 겪어 보는 이 공격에 무척 당황하여 마나 진동 대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멕 나이트들은 미친 듯이 대검을 휘둘렀다.
괴수의 피가 멕 나이트의 몸체를 뒤덮고 살점에 장갑판에 달라붙었다.
마나 진동 대검에 잘린 괴수들이 멕 나이트 주변에 널브러지며 그들이 서 있는 숲속 땅을 점점 채워 나갔다.
정신없이 마나 진동 대검을 휘두른 살육의 시간이 지나고 대부분의 괴수들이 바위에 부딪친 계곡물처럼 단단한 멕 나이트 방진에 충돌한 뒤 빙 돌아 빠져나갔다.
남은 것은 무수히 많은 괴수의 사체들과 괴수의 피를 뒤집어쓴 채 서 있는 멕 나이트들 그리고 그 안에서 지쳐 있는 파일럿들이었다.
[별것도 아닌 것들이 말이야······.]
[손맛은 좋군그래.]
대규모 괴수를 처음 상대하여 놀라고 당황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파일럿들이 너스레를 떨었다.
지휘관은 본대에 거대한 괴수의 무리가 그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추격을 계속해 나가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두 번째 괴수의 파도가 나타났다.
쿠아아-
으르르-
좀 전에 지나간 괴수들의 울음소리와는 차원이 다른, 솜털을 곤두서게 하고 심장을 옥죄게 하는 맹수의 포효!
바로 초식 괴수들을 뒤쫓아 온 이 숲의 포식자들이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엄청난 양의 피가 흘러 그 냄새가 숲속에 널리 퍼져 나갔기 때문에 이 근방의 육식 괴수들이 모조리 모여들고 있었다.
사납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벨로키 무리, 벨로키도 찢어 버릴 만큼 강력한 발톱을 지닌 데이노와 같은 중형 괴수들뿐 아니라 대형 육식 괴수 타르보와 미커, 그리고 거대한 나무의 가지를 타고 날다람쥐처럼 넘어오는 숲속의 제왕 바실리스크까지.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육식 괴수들이 신선한 피 냄새를 솔솔 풍기고 있는 초식 괴수의 사체 더미와 초식 괴수의 피와 살점을 잔뜩 뒤집어쓴 아라드 왕국군 선두 부대 멕 나이트를 둘러싸고 으르렁거렸다.
[뭐, 뭐냐?]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잔인한 이를 드러내며 군침을 흘리고 있는 눈앞의 적들이 말귀를 알아듣고 순순히 보내줄 것 같지가 않았다.
[밀집 대형 형성하고 무기 들어!]
지휘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아라드 왕국군 파일럿들이 입술을 깨물고 방패와 대검을 치켜들었다.
이윽고 싸움이 시작되었다.
대형 괴수를 상대로도 좀처럼 물러서지 않는 키 작은 벨로키들이 날쌘 움직임으로 공격을 해 오고, 데이노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멕 나이트 장갑판에 긴 자국을 남겼다.
중형 육식 괴수들의 목이 쉼 없이 날아갔지만, 물러날 줄 모르는 공격성을 지닌 벨로키들은 계속해서 덤벼들어 멕 나이트의 관절과 발목, 팔을 깨물었다.
심지어 대검을 물고 대롱대롱 매달리다 입이 잘리는 녀석도 있었다.
그 와중에 멕 나이트보다 큰 대형 괴수들이 싸움에 끼어들어 아라드 왕국군 진형을 흐트러뜨렸다.
결정적인 것은 거대한 나뭇가지 위에서 기회를 엿보다 비겁하게 등 뒤쪽 위에서 뛰어내려 덮치는 바실리스크였다.
무게도 엄청난 바실리스크가 멕 나이트 뒷덜미를 노리고 뛰어내리면 제아무리 강철로 만든 멕 나이트라도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바실리스크는 마나 진동 대검으로도 단번에 쓰러뜨리기 어려울 만큼 단단한 피부를 지니고 있었고 입에서는 강철도 녹이는 침을 뿜어냈다.
멕 나이트들이 해치운 초식 괴수의 사체 더미는 숲의 육식 괴수들을 계속해서 유혹하고 있었다.
이미 변경의 멕을 추격하느라 힘을 쓰고 초식 괴수를 쓰러뜨리느라 녹초가 된 아라드 왕국 귀족 출신 파일럿들은 변경의 파일럿이 아니라서 괴수 상대법을 몰랐다.
그들은 죽을힘을 다해 싸웠지만 점점 지쳐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날이 점점 저물어 갔다.
팟!
멕 나이트들이 머리에 붙은 전조등을 켰다.
육식 괴수들이 불빛을 보고 당황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불빛이 불과 달리 뜨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괴수들이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다.
캬하아-!
벨로키들이 쓰러진 멕 나이트의 전조등을 깨물어 뜯어 버렸다.
벨로키들이 철제 다리를 각각 갉아대고 거대한 바실리스크가 멕 나이트를 물어 질질 끌고 나무 위로 기어올랐다.
그렇게 불빛이 하나씩 하나씩 꺼져 갔다.
불빛이 사라진 원시의 숲은 괴수들의 세상이었다.
***
한편 아라드 왕국군 선두 부대를 지난 초식 괴수의 물결은 뒤따라오던 본대와 마주쳤다.
아라드 왕국군 멕 나이트 부대에 의해 많은 괴수가 죽어 나갔지만, 여전히 살아남은 괴수들이 훨씬 많았다.
그러나 선두 부대와 부딪친 뒤로 속도와 밀도가 떨어진 상태였고 변경의 파일럿들이 괴수들을 일정한 방향으로 몰고 가려 해도 숲이 워낙 거대해 사방으로 흩어지는 괴수들이 상당했다.
그럼에도 원시의 숲에서 처음 만나 보는 거대한 괴수 떼는 아라드 왕국군 멕 나이트 부대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당황하지 마라! 뭉쳐서 대응하라!]
본대 역시 한데 뭉쳐 초식 괴수 떼에 맞섰다.
괴수들의 물결이 만들어 낸 엄청난 힘에 밀려 쓰러진 멕 나이트가 속출했지만, 역시 부상을 입은 파일럿이나 크게 손상된 기체는 없었다.
본대 또한 초식 괴수의 피와 살점을 뒤집어쓴 바람에 밤새 육식 괴수들과 악전고투를 치렀다.
그러나 선두 부대가 워낙 많은 육식 괴수를 끌어들인 바람에 본대가 상대한 괴수의 수는 크게 줄어들었고 본대의 멕 나이트 수가 훨씬 많았기에 피해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다만 밤새 싸우고 계속해서 다가오는 육식 괴수를 경계하느라 피로가 쌓였고, 아침이 밝은 뒤 연락이 두절된 선두 부대를 찾아갔을 때 만난 동료들의 처참한 모습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뿐이었다.
“이럴 수가!”
적 멕 나이트와 싸운 것도 아니고 한낱 괴수와 싸웠을 뿐인데 2개 전대 규모의 멕 나이트 부대가 전멸하다니!
다행히 파일럿이 사망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괴수들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쇠뭉치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멕 나이트가 괴수의 공격으로 손상을 입어 모두 부서진 것은 크나큰 충격이었다.
“이 저주받은 숲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소리치는 선두 부대 파일럿의 말이 아니더라도 지휘관은 그렇게 결정했다.
[생존자를 태우고 질서정연하게 돌아간다. 이런 짓을 했으니 개척 도시 하나쯤은 짓밟아도 우리 탓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라드 왕국군 파일럿들은 복수를 다짐하며 개척 도시로 돌아가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오토는 아라드 왕국군이 멀쩡히 돌아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거대한 나무 뒤에 숨어 있던 변경의 경량 멕들이 밤새 쉬지도 못하고 싸우느라 지친 아라드 왕국군을 향해 투창을 날렸다.
괴수 사냥용 철제 투창과 마나 진동 기능이 있는 멕 나이트용 투창을 교묘하게 섞어 아라드 왕국군 파일럿들을 더욱 긴장시켰다.
잡아 죽이고 싶었지만, 숲에서 경량 멕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또 다른 함정에 빠질 것이 걱정되기도 했다.
아라드 왕국군 파일럿들은 이를 악물고 복수의 의지를 다지며 숲을 빠져나갔다.
며칠 동안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숲을 통과해 마침내 확 트인 대지를 만났지만 그들은 기뻐할 수가 없었다.
새로운 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 야, 이 자식들아!
레오파드 라이트닝 한 대가 이제 막 숲을 벗어난 아라드 왕국군 부대를 향해 외부 확성기로 말했다.
- 변경이 만만하냐?
그의 뒤로는 멕 나이트와 멕 워커 수십 대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멕 나이트 전용 마나포로 침입자들을 겨냥한 채로.
레오파드 라이트닝에 타고 있던 바이크가 계속해서 소리쳤다.
- 원망할 것 없다. 너희뿐 아니라 너희를 여기로 보낸 너희 대장도 곧 너희 곁으로 보내 줄 테니까.
아라드 왕국군 지휘관이 다급히 소리쳤다.
- 뭐라고?
그러나 바이크는 굳이 설명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 쏴라!
콰콰콰콰쾅!
콰콰콰콰쾅!
숲에 사는 괴수들이 여태껏 들어본 적 없는 엄청난 굉음에 깜짝 놀라 달아났다.
그래서 녀석들은 강철 거인들이 쓰러지는 광경을 보지 못했다.
콰콰콰콰쾅!
하늘을 쪼갤 듯한 굉음이 한동안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