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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FC 변경 군단의 기사-434화 (434/450)

4부 53.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4부 53.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겨울이 지나 옷차림이 얇아진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지만 여전히 쌀쌀한 바람이 부는 노바의 거리에 어둠이 물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도시는 깜깜한 암흑으로 곧장 빠져들지 않았다. 세계의 수도답게 마나 등불이 휘황찬란하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퇴근 시간이 지났음에도 사무실 곳곳에 불이 밝게 켜져 있는 정부 청사에서 고급 승용차 한 대가 빠져나왔다.

그 차는 황궁 쪽으로 향하다 자연스럽게 방향을 북쪽으로 틀었다.

그대로 조금 가니 널찍한 길을 따라 크고 고풍스러운 저택들이 이어져 있었다.

노바의 황궁 북쪽은 먼 옛날부터 지방에 사는 영주들의 수도 저택이 몰려 있는 곳이었다.

사회 개혁이 이루어져 봉건 시대가 사실상 끝이 났지만, 이곳은 여전히 작위 귀족들만 모여 지냈기 때문에 돈이 아무리 많은 사업가라 해도 쉽게 발을 붙일 수가 없었다.

고급 승용차 뒷좌석에 앉아 있던 노인이 창밖의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내무대신 그리마였다.

불이 밝혀진 저택들의 웅장한 자태와 이 구역의 역사를 증명하듯 높고 굵게 자란 가로수들의 엄숙한 도열에 새삼 가슴이 뿌듯했다.

‘내가 황궁 북쪽 구역 저택의 주인이 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이곳에 있는 저택에 입주한 직후부터 한동안 계속 느끼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차차 무뎌졌던 그 감정이 오랜만에 다시금 떠올랐다.

‘나보다 마누라가 더 어쩔 줄을 몰라 했지.’

남편의 안전에 대한 걱정과 박봉에 늘 시달리며 아이들을 키워 온 평민 출신 말단 경찰관의 아내는 남편이 노바 경찰청의 수사 과장에 이어 노바 경찰청장이 된 뒤에도 좀처럼 귀부인으로서의 품위를 갖추지 못했다.

그렇게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남편이 내무대신이 되어 이 구역의 저택으로 이사하게 되었을 때에는 눈을 땡그랗게 뜬 채 떡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노바 경찰청장이 된 뒤에 옮긴 집도 크고 대단하기는 했지만, 지난 시대의 영주들이 살던 귀족적인 저택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시녀가 주인이 없는 틈에 몰래 주인 행세를 하는 것처럼 아내는 한동안 두려움과 긴장감에 휩싸여 편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웃에 사는 귀부인들을 만날 때면, 남편이 훨씬 사회적 지위가 높음에도, 절로 숙여지려는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런 유서 깊은 귀족 가문들과 이웃이 되다니!

남편에 대한 존경심과 자긍심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다.

“후유······.”

그리마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발단은 오늘 낮에 스텐커의 이름으로 온 편지 한 통이었다.

죽은 스텐커가 보낸 편지는 아니었다.

루산 보름스 백작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스텐커가 사망한 뒤에도 이런 식으로 일을 해 왔기 때문에 편지 자체가 놀랍지는 않았다.

문제는 시기였다.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스텐커의 편지가 하필 밤베르크 공작이 루산 보름스 백작을 말살하기 위해 강력한 군사 행동을 시작한 뒤에 재개된 것이다.

편지에 적힌 글은 무척 짧았다.

<참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봤다면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겠지만, 그리마는 보자마자 소름이 돋았다.

루산 보름스가 밤베르크 공작이 보낸 군대의 포위에서 벗어나 반격에 나서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협조하라는 것이다.

그리마가 노바 경찰청장에 이어 내무대신이라는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은 전적으로 루산의 덕이었다.

오래전 새파란 신입 경찰 시절에 스텐커와 잠시 같이 근무했고 그때 스텐커가 그의 목숨을 구해 준 것이 인연이 되어 루산의 부탁을 들어 주게 되었다. 그런데 그 부탁이라는 것이 경찰로서 엄청난 공을 쌓는 일이었다.

그 덕분에 오베론 공작의 반란 사건과 황제 사망의 혼란기에 내무부와 경찰청 고위 관리들의 목이 줄줄이 떨어져 나간 공백을 틈타 말단 평민 출신 경찰관이 노바의 경찰청장이 될 수 있었고 그로부터 몇 년 후에 내무대신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리마를 이 자리까지 끌어올린 사람이 루산이라는 사실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루산과 그리마는 겉으로 볼 때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능력과 실적이 뛰어나기 때문에 귀족 출신 고위 관리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발탁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 덕분에 그리마는 루산이 변경으로 밀려나고 밤베르크 공작이 노바 정계를 휘어잡은 뒤에도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능력과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뛰어난 평민 출신 내무대신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루산이 이대로 제거되고 보름스 가문과 고슬라 그룹이 세상에서 지워져도 그는 여전히 높은 자리를 지킨 채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편지에 적힌 내용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평범한 경찰관 가족을 황궁 북쪽에 있는 이 웅장한 저택에서 살 수 있게 만들어 준 루산의 은혜도 은혜이지만, 그보다 스텐커 탐정 사무소 사람들의 치밀하고 신속한 일 처리 방식을 그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루트 오베론이 합류하면서 그들의 일처리는 더욱 은밀하고 과감하게 변했다.

루산 보름스가 정통성이 약한 율리안의 황권을 굳건하게 만드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반대파가 합법적 또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공격과 지탄을 받고 사그라져 갔는지를 그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노바와 필센을 줄곧 지켜온 내무대신 그라마가 보기에 밤베르크 공작의 힘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그래서 이 편지는 그리마에서 어려운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선택지를 잘못 고르면 나락으로 떨어진다.

황궁 북쪽의 귀족 저택 구역에 살고 있는 평민 출신 관리는 재상 벤야민과 내무대신 그리마, 두 사람뿐이었다.

그런데 벤야민은 평민이라고는 하지만 유명한 상인 가문 출신으로 노바 대학을 나온 부유한 엘리트였던 반면 그리마는 그야말로 밑바닥 말단 경찰 출신이었다.

지금과 과거의 격차가 얼마나 큰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각하, 거의 다 왔습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수행비서가 집에 가까이 왔음을 알렸다.

하염없이 창밖을 보고 있던 그리마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집으로 들어가지 말고 계속 가게.”

“네? 알겠습니다, 각하.”

그리마가 탄 차가 그의 저택을 지나쳐 계속 북쪽으로 달렸다.

***

그리마가 들어선 곳은 노바 동쪽의 한 술집이었다.

동부 공업 지구 사태 이후 공장들을 노바 동쪽에 인접한 보헨 지역으로 이주시키고 주택 지구로 개발하는 대규모 공사가 벌어졌다.

그때 공사 인부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술을 파는 식당으로 출발했다가 공사가 끝난 뒤에는 입주한 주민들이 퇴근길에 들르는 술집으로 변모한 곳이었다.

스텐커와 그리마는 예전부터 이곳을 접선 지역으로 삼아 왔고 그것은 스텐커가 사망한 뒤에도 죽 이어져 왔다.

그리마는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빈 테이블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가 앉아 식사와 맥주를 주문했다.

음식은 얼마 기다리지 않았는데도 금방 나왔다.

그가 식사를 시작하자 30대로 보이는 남자가 그의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빈자리가 없어서 그러는데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그리마는 빠르게 그 남자를 훑어본 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러시오.”

그러고는 다시 식사에 몰두했다.

젊은 남자는 처음부터 그리마와 일행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앉아 종업원에게 식사를 주문하고는 말했다.

“저는 클라크라고 합니다. 변경에서부터 그분을 모셔 왔지요.”

클라크는 일부로 목소리를 낮추려고 애쓰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군중의 소음으로 인해 그의 말이 주변으로 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곳에서는 아무도 옆자리 사람들의 대화에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직 맞은편에 앉아 있던 그리마만이 클라크의 말에 반응했다.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군요. 혹시 아카데미 교수가 아니시오?”

“맞습니다.”

바로 인정하는 클라크를 보고 그리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은 어디에 계시오?”

클라크가 표정을 굳히며 대답했다.

“지금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그렇소?”

“상황이 상황인지라······.”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뜻.

그리마는 잠시 눈살을 찌푸렸으나 클라크의 말을 이해했다.

“이번에 만나자고 한 용건은 무엇이오?”

클라크가 새삼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만약 그분께서 노바로 진격해 오신다면 안에서 호응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놀란 그리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게··· 무슨 말이오? 설마!”

“잠깐만이라도 노바 관문을 열어 주신다면 큰 피해 없이 사태를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

프리드리히 황제 시절 벌어졌던 구 귀족파의 반란 사건 - 실제로는 프리드리히 황제와 오베론 공작이 조장한 반란 사건 - 과 오베론 공작의 반란으로 황궁이 점령당한 사건으로 인해 노바 방어 태세는 더욱 삼엄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노바의 관문을 뚫기는 쉽지 않았는데 이제는 전보다 훨씬 어렵게 된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일이 있어서도 안 되지만, 가능하지도 않소! 그분이 수도 군단과 근위대가 증강된 것을 모르지는 않으실 텐데?”

그리마의 목소리가 떨렸다.

“경찰 기동 타격대의 멕 나이트를 동원해 사전에 약속한 대로 어느 관문이든 아주 잠깐만 마비시켜 주면 됩니다. 계속 장악하고 있을 필요도 없어요.”

“어렵소. 왜냐하면 나는 노바의 경찰청장이 아니기 때문에 경찰 병력을 직접 지휘할 권한이 없는 데다 현재 노바 경찰청장과 기동 타격대장은 저쪽 사람들이오. 내가 그런 지시를 내린다 해도 따를 가능성이 전혀 없어요!”

현재 노바 경찰청장과 경찰 기동 타격대장은 과거 네세베르 공략군 출신으로 밤베르크 공작의 사람이었다.

내무대신으로서 경찰 업무에 대한 일상적인 지휘·명령 권한은 있지만 경찰 전투 병력을 지휘하여 수도 군단이 지키고 있는 관문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습니까?”

“그렇소!”

그리마의 부정적인 대답에도 클라크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슈텐달 남작과 아인베크 남작, 스텐커 탐정 사무소 사람들과 대화를 충분히 나누었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가능하겠습니까?”

“어떤 거 말이오?”

“변경 특수 죄수 격리 수용소로 갈 수 있는 증명서를 발급해 주시기 바랍니다.”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그리마는 얼른 클라크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변경 특수 죄수 격리 수용소?”

“네. 감사 명목이든 면회 명목이든 상관없습니다. 현황 조사가 되어도 괜찮고요. 제가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유를 정부에서 정식으로 증명해 달라는 말씀입니다.”

적극적으로 거사에 가담하지는 못한다 해도 그동안 보름스 백작님께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않느냐?

자신을 뜨겁게 바라보는 클라크의 눈빛을 그리마는 이렇게 이해했다.

“음······!”

그리마는 이 상황이 다소 억울했다.

자신은 결코 비겁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 상황은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었다.

밤베르크 공작과 보름스 백작의 싸움에 휘말려 원치 않는 선택을 강요받는 것이 어찌 자신의 잘못이란 말인가!

어쨌거나 그는 은혜를 쉽게 저버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루산 보름스의 은혜도 은혜이지만 그보다 자신을 밀치고 칼에 대신 찔렸던 선배 경찰 스텐커의 은혜를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젠장!”

그리마의 입에서 오랜만에 투박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네?”

“아니오. 그렇게 합시다!”

“네?”

“이 나라의 혼란을 최소화시키길 바라오.”

“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내일 이곳에서 다시 봅시다.”

그 말을 남기고 그리마는 일어났다.

먹다 남은 식사를 다시 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는 밖에서 기다리던 자동차를 타고 황궁 북쪽에 있는 자신의 호화로운 저택으로 향했다.

스텐커의 웃는 얼굴이 차장 밖으로 떠올랐다.

‘웃지 말아요! 선배 때문에 짜증나니까.’

내전의 소용돌이가 곧 닥친다는 것을 알게 된 날 밤에 그리마는 그 망할 선배가 유난히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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