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54. 그게 남아 있었군
4부 54. 그게 남아 있었군
클라크는 내무대신 그리마로부터 특수 죄수 격리 수용소 실태 점검 명령장을 받고 변경으로 출발했다.
노바 역은 원래 사람이 많지만 유난히 더 북적였다.
“변경 7구역으로 관광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클라크의 옆에 있던 신사가 말했다.
그는 슈텐달 남작의 아들 레온으로 클라크를 도우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동행하게 되었다.
피닉스 제철은 변경 8구역에도 공장이 있어서 레온은 그곳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세계 최대 철강 회사 회장의 아들이라 8구역을 장악하고 있는 수도 군단 지휘관이라 해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벌써 그 계절이 되었군요.”
클라크가 말했다.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변경 7구역 웨이브 시즌이라는 것을.
약 15년 전, 변경 7구역에 초대형 웨이브가 밀려와 7구역 전역이 초토화되었을 때 루산이 7구역을 구원하고 새로운 형태의 변경 구역 건설을 제안한 적이 있었다.
<몰려온 대규모의 괴수 떼를 모조리 때려잡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만 사냥하고 돌려보낸다.
인간이 사는 구역은 높고 튼튼한 성벽을 쌓아 보호하고 7구역의 모든 도시는 고가 도로로 연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관광객들이 높은 성벽과 고가 도로 위에서 대지를 활보하는 괴수들을 구경한다.>
웨이브가 매년 찾아오도록 하여 괴수 부산물 가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 새로운 관광 수입을 창출하려는 것이었다.
필요한 자금은 변경 8구역과 루산이 대고 고슬라 그룹이 건설 프로젝트를 맡은 7구역 재건 사업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두려움에 벌벌 떨던 변경의 괴수를 인간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구경한다는 것.
두 차례의 대전쟁에서 승리하여 자신감이 충만하고 경제력이 높아진 필센 제국 사람들에게 이만한 볼거리가 없었다.
7구역 재건 프로젝트는 워낙 규모가 커서 여전히 건설이 진행 중에 있었으나 매년 들어오는 막대한 관광 수입으로 그 비용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고, 고슬라 그룹의 농업 회사는 괴수 떼가 해마다 뒤집어 놓은 농경지와 방목장을 정리하는 일을 해서 다른 지역에 설립한 농업 회사보다 훨씬 높은 수입을 7구역에서 올리고 있었다.
자금을 투자한 8구역과 루산 또한 7구역의 괴수 관광 성공으로 상당한 수입을 거두었다.
클라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밤베르크 공작이 루산을 공격한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변경 7구역의 막대한 관광 수입 중 상당 부분이 루산에게 흘러들어 가는 것을 시기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밤베르크 공작이 루한 땅에 괴수 목장을 건설하려는 것도 7구역 괴수 관광 수입에 대한 질투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7구역의 괴수 목장 성공을 보고 다른 변경 구역에서도 따라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7구역은 대규모 웨이브에 인간의 삶터가 완전히 부서졌기 때문에 그동안 개척한 지역을 재건해야 했던 것이고, 거기에 드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8구역과 고슬라 그룹이 장기적 이익의 관점에서 감당한 것인데 다른 변경 구역은 멀쩡한 집과 마을, 도시를 허물 수가 없었고 재건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변경에서 발생하는 모든 괴수 웨이브가 7구역처럼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었다.
비용적인 문제와 자연적인 문제로 인해 대규모 괴수 관광이 가능한 변경 구역은 필센 제국 8개 변경 구역 가운데 7구역뿐이었다.
8구역을 본떠 관광객이 원시의 땅으로 직접 들어가 괴수와 대자연을 직접 체험하는 투어 프로그램을 시도하려는 곳이 있었으나 그러한 여행 상품은 매우 고가여서 대중적이지 않았고 대상이 되는 고객군들을 고슬라 그룹의 자작나무숲 장원 별장만큼 잘 관리하는 곳이 없어서 결국 성공한 곳이 없었다.
이 기간에는 괴수 관광 여행을 위해 7구역으로 떠나는 열차를 증편했고 클라크는 공무 수행 명령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열차를 타는 데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클라크 일행과 변경 관광객들을 태운 열차가 노바 역을 힘차게 출발했다.
침대칸에 자리를 잡은 클라크가 맞은편에 앉은 레온에게 말했다.
“변경 관광객들이 이렇게나 많은 걸 보니 확실히 이번 사태가 아직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군요.”
아우로라 대륙에서 본국으로 돌아온 뒤 슈텐달 남작과 스텐커 탐정 사무소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미 들은 이야기였으나 열차 역에서 변경으로 떠나는 많은 관광객들을 눈으로 직접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밤베르크 공작이 루산을 제거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는 사실은 필센 본토의 일반 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맞습니다. 밤베르크 공작은 이 나라가 혼란에 빠지는 걸 원치 않을 테니까요. 그래서 백작님을 변경에서 끌어내 아우로라 대륙으로 넘어가도록 계획을 꾸민 것이겠죠. 계획이 성공한 뒤에 간단히 발표하고 넘어가는 게 최선이었을 겁니다.”
바다 건너 아우로라 대륙에서 벌어진 일이라 소식이 늦어진 것일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조용히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다.
본토에서 대놓고 군대를 동원해 루산을 공격할 경우, 단지 국민들이 두려움에 빠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변경의 마나 연료 공급에 지장이 생길 우려가 있었다.
그렇게 되면 교통이 마비되고 공장 가동이 중단되고 물가가 치솟게 된다.
이런 사태가 상당 기간 지속된다면 밤베르크 공작이 그 책임을 뒤집어쓰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루산이 변경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막고 버티며 괴수 부산물을 장악하고 세상을 휘두르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밖으로 끌어내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게다가 본토에서 루산 제거 시도가 알려진다면 루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세력을 자극할 우려가 있었다.
식품과 차부터 농업, 설비,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필센 사람들의 일상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고슬라 그룹, 필센을 넘어 세계 최대의 철강 회사로 우뚝 선 피닉스 제철, 이 두 회사와 거의 한 몸으로 움직이는 아인베크 해운.
이 세 개의 기업이 루산의 편을 들기만 해도 곤란한데 이 회사들과 얽혀 있는 회사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특히 바덴이 자작나무숲 장원 별장 시절부터 관리해 오고 우호 관계를 유지해 온 회사의 대표들이 필센의 재계를 주름잡고 있었다.
바덴을 괜히 재계의 여왕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최대한 은밀하고 신속하게 루산을 제거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결국 실패를 했죠. 바다 건너에서 벌어진 일이기도 하고 소식이 확산되는 것을 정부에서 최대한 막아 왔겠지만, 워낙 크게 군사 작전을 벌였기 때문에 머지않아 본토에도 짜르르 퍼질 겁니다.”
클라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쨌든 저들이 최대한 은밀히 진행하려 한 덕분에 우리가 쉽게 움직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그런 면도 있지요.”
루산에게 반란 혐의를 씌워 공표하고 계엄을 선포했다면 루산과 관계된 사람들이 쉽게 움직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역마다 군인과 경찰이 나서서 검문하고 주요 인사들을 감시했을 것이다.
일 처리를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은밀히 하는 것에는 장단점이 있었다.
이번 일이 밤베르크 공작 측과 보름스 백작 측, 어느 쪽에 더 유리하게 작용할지 클라크는 확실히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변경으로 들어가 원하는 일을 하는 데는 유리하게 작용할 것 같았다.
클라크는 레온과 그의 측근 비서들과 변경의 상황,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3일 동안 열차는 역에서 잠깐씩 정차할 때를 제외하면 남서쪽으로 쉬지 않고 달려 마침내 코부스 지방을 지나 변경 구역으로 접어들었다.
굽이굽이 도는 험준한 협곡을 옆에 끼고 달리느라 열차의 속도가 현저히 떨어졌다.
협곡에는 먼 북쪽 산악 지방에서 눈 녹은 물이 흘러온 탓에 많은 물이 거칠게 흐르고 있었다.
이것이 봄 홍수를 일으키고 7구역 웨이브를 일으키는 것이다.
열차는 협곡 지대를 지나 변경 7구역의 중심 도시 오스나에 도착했다.
승객들 대부분이 그곳에서 내렸다.
지루한 열차 여행에 대한 피로와 괴수 관광 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뒤섞여 있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열차는 8구역으로 진입했다.
8구역은 7구역과 달리 검문이 엄격하게 이루어졌다.
사업가들과 특별히 허가를 받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출입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수도에서 내무대신으로부터 명령장을 받고 온 내무부 관리와 피닉스 제철 회장의 아들에게까지 철저한 검문을 진행하지는 않았다.
클라크는 라돔 역에서 진행된 검문을 간단히 통과하고 종착역인 레이크 시티 역으로 가서 임시로 8구역 본부장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수도 군단 지휘관과 다과를 나누며 짧은 우호의 시간까지 가진 뒤 기꺼이 협조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수용소까지의 거리가 멀다고 들었습니다. 위험하다 하니 우리 파일럿들을 붙여 드리겠습니다.”
“노바에서 이런 오지까지 와서 근무하는 것도 힘들 텐데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원시의 땅은 변경 파일럿들이 잘 알 테니 그들을 붙여 주십시오. 그동안 그렇게 해 왔다고 하더군요.”
“정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특수 죄수 격리 수용소는 워낙 원시의 땅 깊숙이 들어가야 해서 준비가 필요했기에 곧바로 떠날 수 없었다.
수용소까지 가는 길을 아는 파일럿을 물색하고 연료와 음식을 마련해야 했던 것이다.
클라크는 기다리는 무료함을 채운다는 핑계로 레온이 사업상 종종 만나는 가프 마법 연구소의 대표 마법사 칼리슈를 방문하기로 했다.
8구역을 장악한 수도 군단 지휘관도 필센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마법 연구소의 대표 마법사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기에 이동과 서신에 대해서만 제약을 가할 뿐이어서 만남은 생각보다 훨씬 쉽게 이루어졌다.
“아니, 이게 누구요!”
“진정하십시오, 마법사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하십시오.”
“아! 알았소!”
클라크의 말에 칼리슈가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수도 군단 측에서 밀착 감시를 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눈과 귀과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언행에 각별히 주의를 해야 했다.
“그래, 어찌 된 일이오?”
“저는 공무를 수행하는 내무부 관리 자격으로 왔습니다. 특수 죄수 격리 수용소 감사 명목으로요.”
“음?”
“실은 백작님이 지시하신 일을 하기 위해 왔습니다.”
칼리슈가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말해 보시오.”
“네. 백작님께서 병력을 이끌고 노바로 들어오실 겁니다.”
“······!”
칼리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슈텐달 지방에 상륙하실 겁니다. 그러니 창고에 있는 무기를 브레머에 있는 가프 연구소의 정비 공장으로 보내달라고 하십니다.”
슈텐달 지방과 브레머 항은 인접해 있었다.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무기들은 4전단장이 가지고 떠났다오.”
“네?”
“수도 군단이 8구역을 장악하던 날, 소식을 듣자마자 찾아와 무기를 들고 반달 호수 지역 밖으로 가 버렸소.”
“아!”
그것이 잘한 일인지 거사에 지장을 초래하는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무기는 가능하겠습니까?”
“레오파드는 어렵소. 멕 나이트의 생산과 출하는 원래부터 정부의 엄격한 허가를 받아 진행되는데 지금은 더욱 철저하게 확인하고 있어 다른 곳으로 돌릴 수가 없어요.”
“그렇··· 군요.”
클라크의 목소리에 낭패감이 묻어 나왔다.
변경으로 온 목적 두 가지 가운데 하나가 벌써 어그러졌기 때문이다.
그때 칼리슈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아! 그게 남아 있었군!”
“무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오 우르사! 그건 생산 라인 창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연구동에 있어서 정부나 수도 군단에 알려지지 않았소.”
“다행이군요! 그렇지 않아도 백작님께서 타시던 003이 없어서 불편해 하시는 것 같던데 말입니다.”
“003이 없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이오? 부서지기라도 했단 말이오?”
“말하자면 깁니다.”
클라크는 자세한 이야기를 뒤로 미루고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들은 칼리슈가 클라크와 레온을 번갈아 보고 물었다.
“피닉스 제철도 동참하기로 한 것이오?”
레온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아인베크 해운도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칼리슈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침묵에 잠겼다.
클라크는 칼리슈가 충분히 고민할 시간을 주었다.
‘마법 연구소는 권력 다툼에 개입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법사들이 오랜 세월 직접 겪으며 깨달은 교훈이었고, 그 덕에 왕조의 부침과 상관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오랜 교훈이자 상식, 방침을 깨라는 것이다.
그러나 루산은 그 어려운 요구를 할 자격이 있었다.
변경의 이름 없는 마법 연구소를 필센 제국 두 번째 연구소로 끌어올린 사람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한참 후 칼리슈가 입을 열었다.
“백작님은 우리 가프 마법 연구소의 명예 마법사이십니다. 부당한 공격을 받고 계시는데 모른 체할 수는 없지요. 교수께서는 할 수 있는 일을 하시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소.”
“감사합니다!”
칼리슈의 큰 결심에 클라크는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했다.
며칠 후 클라크는 특수 죄수 격리 수용소까지 가는 길을 잘 아는 변경 8구역 파일럿과 함께 떠났다.
멕 나이트 어깨 위에 앉은 채로.
한편 클라크와 헤어진 칼리슈는 레온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 뒤 믿을 만한 마법사들에게 새삼 침묵 서약을 시키고 네오 우르사 분해 작업을 지시했다.
작은 부품으로 분해된 네오 우르사는 멕 나이트, 멕 워커 부품과 함께 열차에 실려 동쪽으로 계속 달렸다.
나흘 동안 필센 제국을 횡단한 마나 열차는 노바를 거치지 않고 가프 마법 연구소의 수리 공장이 있는 브레머 항에 도착했다.
가프 마법 연구소 브레머 수리 공장의 한 창고 안에서 네오 우르사 조립이 진행된 것을 아는 사람은 오로지 가프 마법 연구소의 마법사들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