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57. 결국 다리를 건넜어
4부 57. 결국 다리를 건넜어
노바에서 어느 정도 조사를 마친 루트 오베론은 아라드 왕국으로 이동했다.
루산이 노바로 진격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클라크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루산의 거사를 성공시키기 위해 안팎으로 철저히 준비하려는 것이었다.
아라드 왕국 수도에 도착한 그가 찾아간 사람은 아라드 왕국의 유일 공작 니트라 공작이었다.
지금의 니트라 공작은, 대전쟁 기간에 아라드 왕국군 사령관으로서 적은 병력으로 아우로라 연합의 대병력을 상대하고 적을 물리친 뒤에는 재상의 자리에 앉아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한 부친의 뜻을 받들어 루산과 고슬라 그룹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아라드의 재건과 발전을 이룩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외국 기업을 배척하고 변경과 국토 개발권을 되찾으려는 코우볼라 왕의 뜻에 어긋나 국정에서 밀려난 상태였다.
그렇다 해도 니트라 공작 가문은 두 번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나라를 재건하는 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에 여전히 군부와 재계에 영향력이 상당했다.
국왕이 독단적으로 비밀리에 처리한 일도 대강의 내용은 파악하고 있을 정도였다.
“폐하의 밀명을 받고 변경으로 들어간 멕 나이트 1개 전단이 소식이 끊겨 군부에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소. 변경에서 병력이 죄다 빠져나간 줄 알았는데 1개 전단 정도는 충분히 궤멸시킬 전력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오.”
니트라 공작은 말하면서 루트의 기색을 살폈다.
아라드 변경에 보름스 백작의 병력이 얼마나 많이 남아 있기에 이런 일이 가능한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변경의 병력 규모나 상황에 대해서는 루트 역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안다 해도 대답해 줄 이유가 없었다.
니트라 공작과는 협조하는 관계였지만, 지금은 그저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음으로써 상대방으로 하여금 변경 병력과 루산에 대한 두려움을 품게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루트가 잠자코 있자 니트라 공작이 화제를 돌렸다.
“보름스 백작은 무사한지 모르겠소. 듣자 하니 밤베르크 공작이 아우로라 대륙에서 보름스 백작을 잡기 위해 대군을 일으켰다던데······.”
루산의 안위는 아라드 왕국과 니트라 공작 가문의 운명과도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루트가 자세를 가다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백작께서는 밤베르크 가문의 포위망을 무사히 벗어나셨을 뿐 아니라 병력을 이끌고 조만간 노바로 진군하실 예정입니다.”
니트라 공작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그게 정말이오?”
“그렇습니다. 제국의 평온을 위해 그동안 계속 참고 계셨지만 부당한 핍박이 계속되자 더는 참지 않기로 하신 겁니다.”
“음!”
“공작 각하를 찾아온 이유는 이번 일을 주도한 자가 누구인지 분명히 파악하기 위해서입니다. 전란의 소용돌이는 무고한 사람들마저 집어삼킬 수 있기 때문에 책임 소재를 최대한 정확히 가리려는 것이죠. 그리고 아라드 왕국이 불행한 사태에 휘말리지 않도록 미리 대비할 시간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니트라 공작은 루트의 말을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보름스 백작이 노바로 진군한다는 이야기가 워낙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세계를 지배하는 필센 제국에 내전이 일어난다는 뜻이 아닌가!
루산의 성공 가능성, 이번 내전이 아라드 왕국과 국제 정세에 미칠 여파에 대한 생각으로 니트라 공작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어지러워졌다.
루트가 말했다.
“혹시 코우볼라 왕이 아라드 변경에 군대를 보내기 전에 노바에서 누군가가 방문하지 않았습니까?”
“음?”
“외세를 배격하려 하고 변경을 탐내는 코우볼라 왕의 성향이야 물론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군대까지 동원해 아라드 변경을 장악하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 시도와 시점이 공교로워서 말이지요.”
니트라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을 더듬어 나갔다.
“노바에서 폐하를 찾아온 사람이라······. 아! 있긴 있었소.”
“누굽니까?”
“궁정 비서 지겐 경이 찾아왔다가 돌아간 일이 있었소. 그 무렵 보름스 백작이 변경에서 나와 폐하를 뵙고 동쪽으로 떠났기 때문에 확실히 기억하고 있소.”
“지겐이······! 그렇군요.”
루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궁정 비서 지겐.
루산의 상관이었던 변경 8구역의 파일럿 트리어 지겐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트리어는 율리안이 황제가 되자마자 처음부터 불러올린 인물은 아니었다.
대전쟁, 황제의 사망, 오베론 공작의 반란 등 비정상적인 사태들이 중첩되면서 변경 통치자 출신으로 기이하게 황위에 오른 율리안은 한동안 정통성 시비에 휘말려 권위가 서지 않았다.
노바의 귀족, 관리들로부터 배척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은 등용을 기피했다.
그에 더해 율리안의 통치를 부정하며 반란까지 일어나자 황제는 잘 아는, 믿을 만한 사람을 가까이 두기를 희망하여 변경 8구역의 인물 중 똑똑하고 능력 있는 트리어를 불러올린 것이다.
루산 역시 반대하지 않았다.
당시 루산은 율리안의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어서 율리안을 자주 볼 틈이 없었기에 트리어가 곁에서 황제 율리안의 외로움과 불안감을 가라앉히고 마음을 위로해 준다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트리어가 이번 루산 축출 작전에서 여러 차례 등장하더니 아라드 왕국에까지 와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밤베르크 공작의 사주를 받은 것인지, 아니면 밤베르크 공작과 손을 잡은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황제의 명령에 따른 것인지 아직은 확실하지 않지만, 황제를 지근거리에서 섬겨야 하는 그가 일과가 끝난 뒤 노바에서 사람들을 만나 일을 꾸미는 데 그치지 않고 머나먼 아라드 왕국까지 와서 코우볼라 왕을 만났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는 일이었다.
루트는 서둘러 노바로 돌아가기로 했다.
더 확인해 볼 것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각하.”
“말씀하시오.”
“잘 아시겠지만, 보름스 백작께서는 싸움에 나서서 진 적이 없습니다.”
니트라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산 보름스의 전쟁 능력은 필센 제국보다 아라드 왕국에서 더 잘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백작께서 노바로 진군한다는 소식에 코우볼라 왕이 혹여나 허튼 선택을 하지 않도록 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라드 왕국의 안녕을 위해서라는 말을 붙이지는 않았지만, 루트의 말은 위협이면서 당부였다.
“무슨 말인지 잘 알았소.”
니트라 공작은 화를 내지 않고 진지하게 루트의 말을 받아들였다.
두 번의 전쟁에서 아라드 왕국을 구해 준 루산 보름스, 많은 병력이 아우로라 대륙으로 떠났음에도 아라드 왕국군 멕 나이트 부대 1개 전단을 궤멸시킨 아라드 변경의 전력이라면 왕국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알았소.”
루트 오베론은 아라드 왕국을 떠나 필센 제국으로 향했다.
곧 있으면 루산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
철광석을 가득 실은 아인베크 해운의 거대한 벌크선이 거친 봄 바다를 괴물처럼 가르며 들어왔다.
슈텐달 지방의 해안가에 자리 잡은 피닉스 제철의 원료 하역 부두에는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슈텐달 남작이 특별히 내린 지시 때문이었다.
“이번 달은 평소보다 훨씬 많은 철광석이 들어오기 때문에 제때 하역 물량을 처리하지 못하면 수송선들이 바다에서 오랫동안 대기하게 된다. 그게 다 비용이니 대기 시간이 길어지지 않도록 신속히 처리해야 한다. 물론 안전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유의해야겠지. 직원들 기강이 풀어지지 않게 출퇴근 관리에 특별히 신경을 쓰고, 퇴근 후 브레머로 놀러 가서 흥청망청하지 않도록 이번 하역 기간에 브레머로 가는 다리를 경비부에서 통제하라. 특히 하역 부서 직원들은 이 기간에 전원 회사 기숙사에 머물러야 한다. 일이 모두 끝나면 특별 수당을 지급할 테니 직원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잘 설명하라.”
일이 아무리 많아도 이렇게까지 출퇴근을 엄격히 통제하는 것이 처음이어서 직원들은 의아해했지만, 다름 아닌 피닉스 제철의 사장이 직접 내린 지시라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얼마나 많은 철광석이 들어오기에 이런 지시까지 내리나 궁금해할 뿐 철광석을 실은 배에 다른 물건이 실려 오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침내 거대한 철광석 수송선이 피닉스 제철의 하역 부두로 서서히 들어왔다.
모든 직원들이 하역 작업에 신경을 쓰느라 루산이 몇몇 부하들과 함께 먼저 내려 슈텐달 남작, 아인베크 남작 그리고 레오나와 만나 뜨겁게 인사를 나누고 차를 타고 이동한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하역 부서 직원들은 맡은 임무에 따라 멕 워커에 타거나 크레인을 조종하거나 컨베이어 설치를 위해 장비를 이동시키면서 바쁘게 움직였다.
설치가 끝나고 멕 워커들이 배 위로 올라갔다.
크레인이 철광석을 담을 거대한 철제 통을 배 위로 들어 올렸다.
- 시작해!
멕 워커들이 삽처럼 생긴 커다란 연장으로 철광석을 퍼 담아 거대한 철제 통을 채우자 크레인이 그것을 옮겨 컨베이어 투입구로 쏟아부었다.
컨베이어 벨트가 쉼 없이 돌아가 하역 부두를 가로질러 철광석을 야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벌크선에 실린 철광석 표면을 어느 정도 걷어내자 평소와 달리 이상한 포장이 나타났다.
- 이게 뭐야?
그때 벌크선 갑판장과 하역 부서 간부가 다가와 작업을 중지시키고 직원들을 불러 모아 지시했다.
“포장 밑에 있는 물건들이 다치지 않게 조심스럽게 걷어!”
“대체 뭔데 그럽니까?”
“정부의 요청으로 멕 나이트를 비밀리에 수송하는 중이다.”
“······!”
“놀랄 것 없어. 우리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야. 서두르라고.”
그제야 직원들은 슈텐달 남작이 특별 지시를 내린 이유를 깨달았다.
하역 작업이 모두 끝날 때까지 출퇴근을 통제하고 집에 못 가게 막은 까닭을 드디어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간부의 말대로 위에서 시킨 대로 하면 그만이었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긴장하던 것보다 좀 더 긴장이 되기는 했지만 하역을 맡은 멕 워커 파일럿들은 조심스럽게 포장을 걷었다.
멕 나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배에서 작업을 지켜보고 있던 가프 용병단 파일럿들이 다가와 누워 있던 멕 나이트에 탑승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철광석 아래에 묻힌 채 바다를 건넌 멕 나이트들이 일어서서 배에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역 직원들이 깜짝 놀랐지만, 간부들이 나서서 같은 말로 설득했다.
“정부의 요청으로 비밀리에 멕 나이트를 운송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던 일만 하면 된다.”
“······?”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움직여! 일 다 끝나고 보너스나 받으라고.”
하역 부서 직원들이 다시 일개미처럼 움직이고, 배에서 내린 멕 나이트들은 안내에 따라 거대한 창고로 이동했다.
마침내 하역이 끝나자 기다리고 있던 다음 철광석 수송선이 곧바로 부두로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철광석에 파묻힌 멕 나이트 하역 작업이 시작되었다.
배에서 내린 멕 나이트들은 똑같이 거대한 창고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어느 배에서는 멕 나이트가 아닌 거미 모양의 거대한 기계가 내려 이것을 처음 보는 하역 직원들이 깜짝 놀랐다.
어쨌든 하역 작업이 모두 끝날 때까지 부두는 직원들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고 브레머 항으로 가는 다리도 경비부 직원들에 의해 차단되었다.
여러 날에 걸쳐 이루어진 멕 나이트 비밀 하역이 모두 끝나고, 깜깜한 새벽에 피닉스 제철 창고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멕 나이트 400여 대가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냈다.
멕 나이트 부대는 길게 줄을 지어 드넓은 피닉스 제철 공장을 지나 브레머 항으로 가는 다리를 건넜다.
그곳에서 고속도로를 따라 이동하는 것이 노바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고, 브레머에 주둔한 지방군 병력을 제압해야 후방의 위협을 미리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동쪽 바다에서 태양이 솟아올라 다리를 건너는 멕 나이트들의 금속 표면이 반짝반짝 빛났다.
이른 새벽부터 다리 남쪽으로 나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슈텐달 남작과 아인베크 남작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번 거사는 그들 자신과 가문뿐 아니라 필센 제국의 운명도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행렬의 맨 뒤를 따라가던 마지막 멕 나이트가 다리를 완전히 건너고, 바다를 건너온 루산의 멕 나이트 부대가 브레머 시가지로 진입했다.
슈텐달 남작이 참았던 숨을 한숨처럼 내쉬며 말했다.
“결국 다리를 건넜어.”
아인베크 남작이 대꾸했다.
“그렇군요.”
“갑시다. 우리도 할 일이 많으니.”
“그러지요.”
두 사람을 각각 태운 자동차 두 대가 멕 나이트 부대가 건너간 다리를 건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