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58. 우리는 뒤가 없다
4부 58. 우리는 뒤가 없다
거대한 강철 거인들이 도로 위를 걸어오자 일찍 출근하던 자동차와 마차들이 화들짝 놀라며 급정거했다.
“세상에!”
“저게 뭐야!”
다행히 이른 아침이라 뒤따르는 차가 많지 않아 얼른 방향을 돌려 달아났다.
가프 용병단 멕 나이트들은 발아래에 펼쳐진 작은 소란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가지 행진을 계속했다.
쿵쿵쿵쿵!
쿵쿵쿵쿵!
지축을 흔들며 걸어가는 그들의 목표는 브레머 지방군 주둔 기지.
필센 제국 지방군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브레머 지방군을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브레머 지방군의 규모가 큰 이유는, 이 도시가 필센 제국 최대의 항구 도시이고 가장 큰 해군 기지가 있으며 수도인 노바와 가깝기 때문이었다.
과거 아우로라 연합과 적대하던 시절, 아우로라 연합군이 필센 제국을 공격할 때 브레머에 상륙해 노바로 진격할 것을 상정해 바다에서 먼저 아우로라 연합군 함대를 격파하고, 해전에서 패할 경우 대규모 상륙이 가능한 항구를 틀어막아 적의 침공을 저지하거나 진군 속도를 늦춰 수도에서 대비할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 브레머 지방군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필센 제국이 2차 대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숙적인 아우로라 연합을 해체시킨 뒤로 수도 방어의 제일선을 담당하는 브레머 지방군의 존재 의의가 사라지고 새로 획득한 영토의 안정을 위해 많은 병력이 아우로라 대륙으로 이동했지만, 필센 제일의 항구 도시를 지키고 최대 규모의 해군 기지를 보호한다는 브레머 지방군의 임무는 여전히 남아 있어 멕 나이트 부대 1개 전단과 보병 1개 사단 그리고 해안포 부대가 주둔해 있었다.
이른 아침에 멕 나이트들이 도심을 가로질러 오고 있다는 신고를 받은 브레머 지방군 사령부는 긴급히 정찰병을 파견해 사실임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보고를 받은 사령관이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채 달려왔다.
“해안으로 상륙한 것도 아닌데 정체불명의 멕 나이트 수백 대가 출현했다고?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이냐? 전 부대, 전투태세를 갖추고 멕 나이트 파일럿들은 즉시 자신의 기체에 탑승하라!”
“알겠습니다!”
“마나포를 옮겨 와 적이 다가오는 길목에 배치하고 요격한다!”
“네, 사령관님!”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브레머 지방군은 부리나케 움직였다.
멕 나이트 파일럿들은 서둘러 자신의 기체에 탑승했고, 해안에 주로 배치되어 있던 마나포를 옮기기 위해 멕 워커들이 분주히 달려갔다.
그러나 대전쟁이 끝나고 10년이 훌쩍 지난 상황이었다. 여전히 긴장이 감도는 아우로라 대륙의 식민지 주둔군도 아니고 본토의 지방군이 늘 날카로운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을 리 없었다.
집으로 출퇴근하는 멕 나이트 파일럿들은 아직 출근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긴급 출동한 멕 나이트는 30대가 채 되지 않았다.
현역에서 은퇴한 사령관이 사령부 참모들과 함께 멕 나이트에 올라타 겨우 30대를 넘겼다.
브레머 방면군의 임무 특성상 해안 방면 요격을 위해 바닷가에 배치되어 있는 마나포는 이동이 쉽지 않았다. 멕 워커 수십 대가 달라붙어도 원하는 지점으로 옮겨 방렬을 마친 마나포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가프 용병단의 멕 나이트 400여 대가 도심을 가로질러 브레머 지방군 주둔 기지까지 다가왔다.
브레머 지방군의 멕 나이트 30여 대가 마나포 10여 문의 엄호를 받으며 정체 모를 적의 앞을 막아섰다.
- 멈춰라!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공격할 것이다!
사령관의 호통 소리가 외부 확성기로 크게 울려 퍼졌다.
그러나 병력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왜소했기에 그 당당한 목소리가 오히려 애처롭게 들렸다.
잠시 후 루산이 앞으로 나서더니 타고 있던 멕 나이트의 외부 확성기를 통해 말했다.
- 나는 변경 8구역을 다스리는 루산 보름스 백작이다.
- 뭐라고?
예상치 못한 인물의 출현에 브레머 지방군 사령관과 파일럿들은 어리둥절했다.
루산의 말이 계속되었다.
- 나는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명을 수행하기 위해 작년에 아우로라 대륙으로 갔다. 그런데 밤베르크 공작이 루한 주둔군을 총동원해 나를 공격해 왔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찌 필센 제국에서 벌어진다는 말인가! 밤베르크 공작의 전횡을 더는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루산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이런!’
브레머 지방군 사령관은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 역시 바다 건너에서 들려온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아우로라 대륙에서 벌어진 일이고, 밤베르크 공작의 과감한 작전에 의해 이미 끝난 일이고, 상층부의 권력 다툼이라 자신과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루산 보름스 백작이 이렇게 많은 멕 나이트를 동원해 브레머에 나타나 자신의 부대를 공격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브레머 지방군 사령관이 소리쳤다.
- 그래서 어쩌자는 것이오? 멕 나이트 부대를 이끌고 노바로 진격하기라도 하겠다는 것이오?
- 그게 아니라면 여기로 올 이유가 없지.
노바로 진격할 때 뒤를 잡혀 곤경에 처할 일을 미연에 막겠다는 것이다.
그 뜻을 알아들은 사령관이 버럭 화를 냈다.
- 정녕 반란을 일으킬 작정이오?
- 반란은 내가 일으킨 게 아니다. 제국의 군대를 무단으로 동원해 무고한 나를 죽이려 한 것은 밤베르크 공작이지. 나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것뿐.
- 그만두시오! 결국 애꿎은 우리 장병끼리 싸우는 셈이 아니오?
- 그걸 막으려는 것이다.
- 뭐라고?
- 항복하라!
루산의 목소리가 브레머 주둔 기지 앞에 서 있는 멕 나이트들을 뒤흔들었다.
- 항복하라! 죄인을 붙잡아 이번 사태를 정리할 때까지 멕 나이트 시동 열쇠를 제출하고 대기하라. 그러면 무고한 장병들이 다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루산의 이야기를 들은 브레머 지방군의 멕 나이트 파일럿들이 떨리는 마음으로 사령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애초에 브레머 지방군 사령관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제안이 아니었다.
어떤 이유를 내세운다 해도 상부의 명령 없이 군대를 동원해 노바를 치는 것을 용인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사령관이 입술을 깨물고는 마나 통신기로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전투 준비!]
브레머 지방군 파일럿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마나포는 적의 지휘관을 저격하고, 마나포 발사와 동시에 모든 멕 나이트는 보름스 백작을 공격하라!]
보름스 백작의 개인적인 억울함은 그가 들어줄 문제가 아니었기에 이것이 그가 군인으로서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었다.
사령관의 비장한 명령에 브레머 지방군 멕 나이트 뒤쪽 좌우에 자리 잡고 있던 구형 마나포 10여 문이 멕 워커의 조작으로 서서히 포신을 돌렸다.
맨 앞에 나와 있는 헤비 스틸이 목표였다.
[대장님! 마나포가 대장님을 향해 포구를 돌립니다!]
마나 통신기로 전해지는 날카로운 경고음에 루산이 자리를 박차고 앞으로 튀어나가며 소리쳤다.
[쳐라!]
그 순간, 마나포에서 발사된 대형 마나 진동 화살들이 번개처럼 날아와 루산이 서 있던 자리를 통과하고 지나갔다.
슝!
슈슝!
소름끼치는 파공음을 일으키며 날아온 대형 화살들 대부분은 빗나갔으나 몇 발은 루산의 뒤에 서 있던 멕 나이트들에 명중했다.
쩌정!
그러나 방패를 기울여 미리 대비하고 있었기에 몸체가 관통당하는 일은 없었다.
그 옆에 있던 멕 나이트들은 루산의 뒤를 따라 돌진했다.
이번 작전의 목표는 신속하게 브레머 지방군을 제압하는 것!
그것도 최대한 강렬한 인상을 남겨야 했다.
한편 루산은 달리는 와중에 마나 진동 대검을 활성화시키고 곧바로 브레머 지방군 사령관이 타고 있는 멕 나이트를 향해 돌진했다.
브레머 지방군 사령관이 탄 아이언 워리어도 마나 진동 대검을 작동시켰다.
지잉!
오랜만에 멕 나이트에 올라탄 사령관이 적에게 당할 것을 걱정한 파일럿들이 좌우에서 루산을 향해 대검을 찔렀다.
그러나 루산은 헤비 스틸의 자세를 낮추고는 두꺼운 방패를 경사지게 기울여 왼쪽 공격을 흘려 버리고 오른손에 든 대검으로 오른쪽 아이언 워리어의 대검을 맞받아쳤다.
쩡!
강력한 힘에 아이언 워리어의 팔이 뒤로 튕겨졌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열리자 헤비 스틸의 대검이 아이언 워리어 허리 아래쪽을 긋고 지나갔다.
쓰릉!
조종실 아래에 있는 동력 전달부가 파손되며 멕 나이트가 조종사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고 서서히 기울었다.
루산은 이미 벤 적은 신경 쓰지 않고 달리는 힘을 그대로 살려 사령관이 타고 있는 아이언 워리어의 가슴을 왼쪽 방패로 밀쳐 쓰러뜨렸다.
투쾅!
브레머 지방군 사령관의 아이언 워리어가 뒤로 거칠게 넘어갔다.
루산의 헤비 스틸은 쓰러진 아이언 워리어 가슴을 발로 밟고 버둥거리는 기체를 대검으로 내리찍었다.
위에서 내려오는 대검을 본 사령관이 눈을 질끈 감았다.
끼이우!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대검이 기체를 파고들었으나 찔린 것은 조종실이 있는 가슴이 아니라 아이언 워리어의 오른쪽 어깨였다.
대검을 들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때 루산의 방패에 첫 번째 공격이 막힌 아이언 워리어가 루산의 등 뒤 왼쪽에서 재차 공격을 감행했다.
루산은 등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재빨리 대검을 뽑으며 몸을 돌려 그 공격을 튕겨 냈다.
쩡!
반탄력에 몸체가 뒤로 떠밀린 아이언 워리어의 자세가 흐트러지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헤비 스틸의 대검이 헤비 스틸의 목을 날려 버렸다.
순식간에 세 대의 멕 나이트를 쓰러뜨린 것이다.
루산은 다시 사령관의 기체로 다가와 마나 진동 대검을 쓰러진 아이언 워리어 몸 옆에 꽂으며 으르렁거렸다.
- 나는 항복해 달라고 사정을 하는 게 아니야. 무의미한 피를 흘리고 싶지 않은 것뿐이지.
- 으음······!
그 사이 루산을 지나친 가프 용병단 멕 나이트들이 브레머 지방군 멕 나이트 부대를 덮쳤다.
가프 용병단의 멕 수십 대가 브레머 지방군 멕 한 대씩 맡는 셈이라 상대가 되지 않았다.
브레머 지방군의 기체들은 속절없이 두드려 맞고 우그러지고 쓰러졌다.
가프 용병단 일부는 뒤쪽에 전개해 있는 마나포대를 부수러 달려가고 있었다.
- 남은 병력은 어찌할 텐가? 질서 있게 항복해 병력을 구할 텐가 아니면 무질서한 파괴와 살육을 경험해 볼 텐가? 우리는 뒤가 없다.
입가심으로 멕 나이트 30여 대를 부순 가프 용병단은 계획대로 벌써 브레머 지방군 주둔 기지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직 출동하지 않은 멕 나이트 70여 대와 수많은 병사들이 남아 있는 곳으로 피 냄새를 물씬 풍기는 무시무시한 멕 나이트 수백 대가 입맛을 다시며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 내 편에 서서 싸우라는 것도 아니야. 내 싸움이 끝날 때까지 지켜보기만 해.
- ···알았소!
브레머 지방군 사령관은 이번에도 최선의 선택을 했다.
싸워 보지도 않고 항복한 것이 아니다.
제국의 군인으로서 목숨을 걸고 한번 싸워 보았고, 이미 싸움이 안 된다는 것을 방금 전의 교전으로 깨달고 병력 보존을 선택한 것이다.
[사령관이다! 전투 중지! 책임은 내가 진다! 적대 행위를 중단하라!]
브레머 지방군 주둔 기지로 들어간 가프 용병단은 아직 사용하지 않은 멕 나이트의 시동 열쇠를 모두 압수하고 곧바로 서쪽으로 떠났다.
노바를 향해 진군하는 것이다.
교전을 시작할 때의 무시무시한 기세를 생각하면 이 정도로 끝내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왜냐하면 멕 나이트의 시동 열쇠라는 것은, 없으면 당장 기체를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맞지만, 정비부에서 기체를 열어 시동을 걸거나 시동 열쇠를 새로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멕 나이트의 가동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조치는 아닌 것이다.
정비부가 있는 부대이고 공업 단지가 있는 대도시라 길어야 사나흘이면 멕 나이트 가동이 가능할 것이다.
그 사실을 루산 역시 모르지 않았다.
[이대로 떠나도 되겠소?]
이미 계획을 들어 알고 있음에도 슈야 마우메가 찝찝한 듯 물었다.
[여기서 할 일은 끝났으니까.]
루산이 전투를 치른 현장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그곳에서는 누군가가 쓰러져 있는 멕 나이트와 행진하는 가프 용병단의 멕 나이트 부대를 사진기로 계속해서 찍고 있었다.
바로 슈텐달 백작이 동원한 기자들이었다.
정부에서 보도 통제 조치를 실행하기 전에 루산의 입장과 루산이 이끄는 부대의 강력함을 전달해 줄 사람들인 것이다.
“힘을 가진 자가 그저 군대를 이끌고 수도를 치는 것은 반란 행위지요. 반면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정당한 명분을 내세우고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면 그것은 반란이 아닙니다. 새 시대를 여는 영웅의 등장이 되는 것입니다.”
클라크가 한 말이었다.
루산은 그에 따라 계획을 세우고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치를 전투를 모두 이겨야 합니다.]
루산의 말에 슈야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 참 재미있겠군!]
루산 보름스 백작이 멕 나이트 부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고 있다는 소식은 브레머 주둔군 사령부에 의해 이미 마나 통신기로 노바에 전해진 뒤였다.
가프 용병단은 다시 브레머 시가지를 당당히 행진해 서쪽으로 나아갔다.
브레머는 온통 혼란에 휩싸였고, 신문은 호외를 배포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노바도 곧바로 혼란에 휩싸였다.
자동차가 늘어나고 마나 통신망이 갖춰진 세상에서 혼란의 전염성은 그처럼 빨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