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66. 폐하께서는 잘 계시는가?
4부 66. 폐하께서는 잘 계시는가?
브레이브 랜드는 바덴이 보름스 장원 한쪽에 새롭게 시도해 본 사업 모델이었다.
자작나무숲 장원 별장의 대성공으로 귀족들을 대상으로 한 휴양 사업의 가능성을 확인한 그녀는 귀족 자제들을 대상으로 한 휴양 및 교육 사업으로 브레이브 랜드를 만든 것이다.
전쟁의 열기가 점점 뜨거워지면서 사회 전체에 애국심이 강조되고 가프 마법 연구소에 훈련용 멕 나이트 레오파드 트레이너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해 도입한 것이 가장 큰 성공 요인이었다.
소년들은 누구나 거대한 멕 나이트를 타고 적국의 멕 나이트를 물리쳐 영웅이 되는 꿈을 꾸었기에 브레이브 랜드에 들어가고 싶다고 부모에게 졸랐고, 귀족가의 부모들은 방학을 맞아 기숙학교에서 돌아온 자식들이 집에서 게으름을 피우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많은 비용을 치르더라도 제대로 된 규율과 지식을 가르쳐 주는 수련원에 기꺼이 아이들을 들여보냈다.
그렇게 귀족 자제들을 위한 기사 교육 수련원 브레이브 랜드는 입소문을 타고 대성공을 거두었다.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갈 정도였다.
프리드리히 황제는 브레이브 랜드를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고자 했다.
여유가 있는 귀족 자제들은 자비로 브레이브 랜드에 다니도록 내버려 두고, 수가 훨씬 많은 평민 소년들은 국가 차원에서 우수한 평민 아이들을 뽑아 황제에게 충성하는 멕 나이트 파일럿으로 육성하는 필센 소년 캠프를 만든 것이다.
황제의 뜻에 부응하기 위해 필센 소년 캠프는 각 지방 멕 나이트 부대 훈련장에 기지를 두고 우수한 평민 학생들을 선발해 혹독히 훈련시켰다.
반면 브레이브 랜드는 군사 훈련에 치중하기보다 체력 단련, 군사 기초 훈련, 역사 교육, 음악과 미술, 놀이와 여가를 균형 있게 실시하고 있었다.
필센 소년 캠프와 브레이브 랜드의 경쟁전이 벌어지자 브레이브 랜드가 연패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비용을 지불하면 선착순으로 누구나 들어올 수 있고 군사 훈련뿐 아니라 교양 교육과 여가 시간도 중시하는 브레이브 랜드와 달리 필센 소년 캠프는 평민 소년들 가운데 자질이 뛰어난 자원을 가려 뽑아 필센군 현역 파일럿들이 집중적으로 군사 훈련을 시켰기 때문에 멕 나이트 트레이너를 타고 대결을 펼치는 경쟁전의 승자는 늘 필센 소년 캠프였던 것이다.
브레이브 랜드 학생들의 자존심이 바닥에 떨어지고, 필센 소년 캠프 프로그램을 설계한 근위대 교육훈련부장 슐라우 남작이 브레이브 랜드의 무용함을 거론하며 필센 소년 캠프로 합병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자 바덴은 루산에게 경쟁전에서 승리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루산은 시에나, 바이크를 데리고 보름스 장원에 있는 첫 번째 브레이브 랜드로 와 수련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던 것이다.
동부 공업 지구 사태가 벌어지기 바로 직전의 일이었다.
그때 만난 브레이브 랜드의 학생들 가운데 가장 실력이 뛰어났던 하인즈 케넨.
사회 개혁 이후 군사 분야에조차 평민들 진출이 활발해지고 경쟁전에서 자꾸 져서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던 소년은 앞날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그런 소년에게 루산은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고 에이스로서의 자부심과 책임감을 심어 주었다.
그리고 평민들이 멕 나이트 파일럿으로도 많이 진출하는 세상이라 군인의 길을 가는 것이 그리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고 가업도 형이 물려받기 때문에 돈을 많이 번다는 용병의 길을 선택하고 싶다는 하인즈에게 루산은, 모두가 돈을 생각하는 세상이라면 희소한 가치인 명예를 추구하는 삶을 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가문이 몰락하여 어릴 때부터 꿈꾸던 기사가 되지 못하고 변경으로 돈벌이를 떠난 것이 늘 마음속에 응어리로 남아 있었기에 진심으로 조언해 준 것이다.
하인즈는 결국 루산의 말에 따라 제국 기사 아카데미에 들어갔고 군인의 길을 걸었다.
2차 대전쟁이 한창이었기에 그가 활약할 전장은 많았다.
제국 기사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하인즈는 원하던 동방군에 배속되어 많은 전공을 세우며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프리드리히 황제의 사망 사건과 노바 황궁 침탈 사건으로 근위대가 와해된 이후 이를 재건할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새로운 근위대 파일럿 목록의 상단에 늘 이름이 올랐다.
당시 루산은 율리안을 황제로 옹립한 뒤 통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기에 근위대 재건 작업에 관심을 기울였다.
하인즈의 이름을 발견한 루산은 그를 당장 불러오려 했으나 아우로라 연합군의 대반격 작전이 시작되면서 동방군의 모든 전선이 치열한 전투에 휩싸여 하인즈는 전쟁이 종식되는 날까지 최전선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것이 오히려 하인즈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루산의 특별한 도움 없이도 노바의 귀족 가문 출신, 제국 기사 아카데미 수석 졸업, 압도적인 전공을 올린 전쟁 영웅으로 20대의 나이에 당당히 근위대의 멕 나이트 부대 전대장으로 임명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루산은 밤베르크 공작의 정치 공세에 변경으로 물러났기 때문에 하인즈와 직접 만날 일은 없었으나 그가 근위대로 온 사실은 알고 있었다.
지금은 30대의 젊은 나이로 근위대의 전단장이 된, 유능한 멕 나이트 파일럿 하인즈 케넨.
재건된 근위대를 대표하는 얼굴로서 정통성이 약한 율리안을 수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충성스러운 기사인 그는, 자신에게 명예로운 길을 가라고 조언했으면서 오히려 멕 나이트 부대를 이끌고 노바를 공격하는 마음의 스승 보름스 백작을 마주하고 말할 수 없는 배신감과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백작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당장 황제 폐하 앞에 출두하여 죄를 빌고 벌을 청하십시오! 이 나라를 혼란에 빠뜨려 황제 폐하를 곤혹스럽게 하지 마십시오! 다름 아닌 당신이 받들어 모신 폐하가 아닙니까?”
하인즈의 호통이 대기를 뒤흔들었다.
루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설득을 할 것인가 논쟁을 할 것인가.
이미 칼을 뽑았고, 흘린 피가 너무 많았다.
칼을 거두면 자신뿐 아니라 가족과 도움을 준 사람들, 동료들과 부하들이 죽는다.
고슬라 그룹, 피닉스 그룹, 아인베크 그룹이 해체되고 그 종사자들이 고초를 겪을 것이고, 부르사 왕국은 멕 나이트를 제공한 사실이 발각되어 멸망할 것이며, 가프 용병단 구성원들과 그 가족 그리고 가프 마법 연구소는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질 것이다.
변경 8구역과 아라드 변경의 주민들, 관리들도 철저히 조사받게 될 것이다.
그 외에도 과거 자신과 조금이라도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왜 굴복해야 하는가?
잘못을 한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말을 굳이, 이 상황에서 할 필요가 없었다.
루산은 헬멧을 벗고 동화기에서 몸을 빼고 나와 조종실 문을 열었다.
치익-
그러고는 네오 우르사 가슴 앞에 붙이고 있는 거대한 손바닥 위로 걸어 나가 큰 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는 잘 계시는가?”
루산의 뜬금없는 질문에 하인즈는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크게 대답했다.
“잘 계셨지요. 당신이 반란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그러자 루산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 알았다.”
“뭘 알았다는 겁니까?”
“혹시나 하던 일이 역시나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게 대체 무슨······?”
그러나 루산은 굳이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고 큰 소리로 외쳤다.
“하인즈 케넨!”
“예!”
“최선을 다하라!”
“······!”
“나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 네가 나를 욕해도 어쩔 수가 없구나! 이것이, 나의 명예와 내 사람들을 지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인즈는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꽉 깨물었다.
“정 그렇게 하겠다면······.”
바람이 짧게 자른 그의 머리를 흔들고 지나갔다.
“내 손으로 끝을 내 주겠소!”
하인즈가 몸을 홱 돌려 조종실 안으로 들어갔다.
루산도 네오 우르사의 조종실로 들어갔다.
조종실 문이 닫히고 두 사람을 능숙한 솜씨로 빠르게 동화기에 몸을 고정시킨 뒤 헬멧을 다시 썼다.
네오 우르사의 정면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근위대의 레오파드 150여 대가 질서정연하게 전투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루산은 네오 우르사의 몸을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동쪽 관문 밖에서 필센군 멕 나이트 수백 대와 싸우느라 장갑판이 찌그러지고 뜯긴 상태에서 관문 위에서 발사한 마나포에 맞아 마나 진동 화살을 여러 발씩 꽂고 있는, 지친 헤비 스틸 50여 대가 어지러이 늘어서 있었다.
물론 그중 가장 몰골이 험상한 것은 네오 우르사였다.
온몸에 가장 많은 마나 진동 화살이 꽂혀 있었던 것이다.
루산이 외쳤다.
- 바이크!
그러자 멕 워커를 타고 있던 바이크가 곧바로 대답했다.
- 네, 대장님!
- 마나포를 다오!
- 예!
바이크의 멕 워커가 뒤뚱뒤뚱 달려와 멕 나이트 전용 마나포와 포탄이 들어 있는 쇠 그물주머니를 네오 우르사에 건넸다.
- 바이크, 클라크의 친구들과 함께 마나포로 엄호해! 오늘 레오파드를 잔뜩 부숴야 할 것 같으니 말이야.
레오파드를 부순다는 것은 레오파드의 시작과 함께해 온 그들에게는 과거를 부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하인즈 케넨은 바이크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싸울 수밖에 없었다.
- 하아······, 어쩔 수 없죠.
동쪽 관문 밖에 있는 가프 용병단 멕 나이트들이 필센군의 매서운 공격을 저지하며 열린 관문으로 충분히 들어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했다.
바이크는 다시 뒤뚱뒤뚱 달려 원시의 땅에서 온 옛 혁명 전사들을 끌어모으고 멀쩡한 멕 워커에 멕 나이트 전용 마나포를 들려 가프 용병단 뒤쪽 좌우에 포진시켰다.
마나 진동 화살을 온몸에 꽂고 있는 네오 우르사와 헤비 스틸들은 이미 앞으로 달리고 있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근위대의 레오파드를 향해.
근위대도 전투 진형을 갖추었다.
방패 벽을 단단히 세운 것이다.
그들은 수적 우위를 살려 루산과 가프 용병단을 압살하기 위해 전진했다.
뚫려 버린 관문으로 더 많은 반란군 멕 나이트가 들어오기 전에 섬멸해야 했다.
맨 앞에서 달려가던 네오 우르사가 멕 나이트 전용 마나포를 발사했다.
쾅!
***
황궁.
필센 제국의 중심.
오베론 공작의 반란 사건 때 대파되고 새로이 지은 황궁은 대전쟁이 종식되고도 5년이 지난 뒤에야 완공되었다.
아우로라 연합을 완전히 무찔러 오카수스 대륙에 이어 아우로라 대륙까지 지배하게 된 대제국의 황궁답게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그중에서도 황제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사자의 정원이었다.
필센 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사자 모양의 황금상이 우뚝 솟아 있어 붙은 명칭이지만, 이곳은 양대륙에서 온 꽃과 나무들이 뛰어난 정원사들의 솜씨로 가꾸어져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곳 한쪽 구석에는 변경 8구역에서 자라는 꽃들도 있었다.
황제 율리안은 크고 화려하지만 너무 커서 촌스럽게 보이는 변경 8구역의 꽃 앞에 서 있었다.
“폐하.”
그의 뒤에 서 있던 밤베르크 공작이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꽃을 바라보는지 아니면 꽃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밤베르크 공작이 다시 한번 불렀다.
“폐하.”
그제야 율리안이 몸을 돌렸다.
초췌해진 얼굴, 힘없는 표정이었지만 병이 든 것 같지는 않았다.
밤베르크 공작이 말했다.
“만에 하나 출격한 근위대도 패한다면······.”
율리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 모습에 밤베르크 공작은 잠시 주저했지만,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럴 경우를 미리 대비해 엘버 강에 배를 대기시켜 두는 건 어떻습니까?”
정작 본인은 참모장인 라인홀트 백작의 건의를 묵살했으면서 막상 황궁으로 들어와 말이 없는 황제를 보니 새삼 그 내용이 떠올랐던 것이다.
율리안의 무거운 입이 마침내 열렸다.
“대필센 제국의 황제가 아우로라 연합의 대군이 침공해 어쩔 수 없이 피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변경의 기사가 이끄는 용병단의 반란을 진압하지 못해 달아나야 한다는 말입니까?”
밤베르크 공작은 율리안이 자신과 같은 대답을 한 것이 만족스러웠으나 그래서 갑자기 불안감이 불쑥 치솟았다.
“전장의 상황은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근위대가 패한다면 배를 타고 아우로라 대륙으로 잠시 피하시어 대군을 이끌고 돌아와 진압하시지요. 그것이 확실한 방법입니다.”
율리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항상 듣던 말이 있지요. 변경 출신이라고······.”
정통성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로 인해 깔보고 무시하는 자들이 많았다.
수도 군단 사령관은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백성들은 그럴 줄 알았다고 손가락질을 하겠지요.”
밤베르크 공작은 차마 더는 말할 수가 없었다.
율리안이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그럴 일이 없도록 만드세요. 애초에 자신이 있다고 해서 시작한 일이 아닙니까? 자신이 없어지셨습니까?”
“아, 아닙니다, 폐하!”
늙은 밤베르크 공작이 신병처럼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율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몸을 돌려 변경 8구역의 커다란 꽃을 바라보았다.
밤베르크 공작은 벌이 꿀을 탐하듯 촌스러운 거대한 꽃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황제의 등을 잠시 훑다 몸을 돌려 나왔다.
전투 상황을 확인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