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호입니DA-9화 (9/208)

<--  -->  주인공side.

하마놈이 날 검호인지 뭔지로 부르기 시작한 이후로 다른 페어리들까지 죄다 날 검호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만두라고 말하기엔 이미 한참 늦어있었고 - 이름을 알려주지 않아 날 뭐라 칭해야할지 모르는 이들이 수두룩한 상황이었다 - 지금은 그냥 포기했다. 검호라는 이름인지 칭호인지 하는게 어감상으로는 내 원래 이름보다 나은것 같기도 하고.

열심히 뛰어다닌덕인지 요 최근들어서 엘린 숲의 사냥꾼들 수가 눈에 띄에 줄기 시작해 지금은 하루에 한 무리 만나기 힘들정도가 되었다. 아주 보람이 넘치는구나. 여왕님의 눈이 상당히 누그졌으니 당분간은 안굴리겠지? 처음엔 내가 자발적으로 하던거였는데 최근엔 막 부려먹더라.

그나마 하얀 마법사가 여왕님에게 말을 해서 빈도가 확 줄었다만. 와아~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줄 안다는 말을 절실히 체감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아씨 그냥 무시 좀 해줘.

숲 한 번 쫙 돌아보고 안전확인한 이후 여왕님의 레이더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얀 마법사 근처로 왔다. 이놈 근처에 있으면 '하얀 마법사를 방해할 수 없어!'란 기가차는 이유로 나한테 뭐 안시키니까. 이거 안 뒤로 저놈 근처를 얼쩡거리길 약 3일. 허접한 은신 솜씨로 들켜버렸다.

"…… 별 일 있어서 온거 아니다."

"들어오시겠습니까? 계속 밖에 계시면 제가 신경쓰이거든요."

니놈도 내가 방해란 거냐. 거절할까 했다만 웃으며 문을 열고 손짓하는 그를 보며 힘이 개깡패라는 진리를 곱씹어야 했다. 하얀 마법사 저놈은 인트 몰빵한만큼 다른건 모르겠고 스킬만은 개쌔더라. 얼마전에 왠 거대 멧돼지가 나타나서 영역을 헤집을때 마법 한 방에 원턴킬 시키는 모습이 와…… 난 그때 땅만 굴러다녔는데.

그래도 그걸 나름 도와준거라고 생각하고 과일주를 답례라고 준 페어리들이 보살이지…… 양이 많아서 하마랑 대충 나눠 먹었다가 둘 다 필름 끊긴건 넘어가자.

곳곳에 널려있던 실험 도구라던지 실험 재료들을 지팡이를 휘둘러 치우고는 자리를 만든 그는 알 수 없는 풀을 끓인 물에 넣어 차로 만들었다. 야 잠깐만 그거 내가 저번에 따온 마법초…….

"겨우 이렇게 당신이랑 얘기할 수 있게 되었네요. 이상하게 영 기회가 없더라구요."

그야 이런 상황이 싫어서 전력으로 피해다녔으니까! 검마보다 하마쪽이 더 믿음이 가긴 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평가라고! 벌써부터 신의 도시니 힘에 의한 통치니 하는 놈을 어떻게 믿어?!

"검호. 당신은 왜 페어리들을 돕나요?"

"그래야 하니까."

안하면 여왕님이 날 내쫓을지 모르잖아. 최근엔 사냥꾼들도 잘 안보여서 내 현상금 상황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지금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다고. 내 레벨이 100정도 되는것 같지만 이 세계는 현실 보정이라는게 있어서 다굴빵맞으면 렙차이 있어도 잡을 수 있거든? 사냥꾼들이 그 예다.

하얀 마법사는 내 대답에 뭔가를 생각하더니 - 생각할 건덕지가 있다는게 놀라웠다 - 다시 물었다.

"당신에게 정의나 신념…… 같은게 있나요? 그러니까 약자를 보호해야한다던가 악을 배제해야 한다는 그런 것 말입니다."

"나한테 그런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겠지. 허참 정의? 신념? 내가 어디 영웅도 아니고. 그런건 나한테 있을수 업스. 하루하루 공부하던 기계한테 뭘 바라는거야?

근데 어째 하얀 마법사의 반응이 이상하다. 좀 충격을 받은듯한 얼굴이라고 해야하나. 어이 차 흐르고 있어! 무릎! 무릎!

"아뜨뜨!"

너 허당캐였냐. 나는 주변에 있던 수건인지 걸레인지 모를것을 집어다 주었다. 그는 쏟은 차와 젖은 옷을 닦아내고는 마법으로 얼음을 만들어 천으로 감싸 차를 쏟은 부위에 문질렀다.

"아아, 죄송합니다. 좀 놀라서요."

그게 그렇게 놀라운 일이냐.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 뭔 귀신보듯이 하는거냐? 불쾌하게.

"검호. 하나만 더 대답해주실 수 있습니까? 저는 궁극의 빛을 손에 넣어 세상을 올바르게, 완전하게 만드려고 합니다. 당신은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니가 그거 하려다가 다 망했잖아. 뭔 궁극의 빛은 궁극의 어둠에서 찾을 수 있다 였나? 솔직히 그 대사 진짜 중2중2했어.

"사람 나름이지."

일단 확실한건 넌 타락한다는거고 난 빠른 시일 내에 도망쳐야 한다는 거야. 난 정치니 뭐니 하는건 잘 모르지만 그 궁극의 빛인지 뭐시기하는건 뭔지 몰라도 일단 확실하게 없잖아? 니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 사실을 알았어도 타락했을까? 훗날 페어리들이 모두 몹이 되는건 좀 안타깝지만 내가 없었어도 결과는 같았을테니.

"…… 그렇, 겠죠."

이상하게 한 박자 늦게 대답이 돌아왔다. 하얀 마법사는 바닥에 조금 찻물이 담긴 찻잔을 한참동안 응시하다가 아, 하고 정신을 차렸다.

"좀 오래 붙잡았네요. 실례했습니다."

"다음부터는 하지 말았으면 한다."

너랑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역이거든. 나는 그대로 나가려고 했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날 잡지만 않았으면 말이지! 와 시발 깜짝이야.

"검호, 이거 들고 가주시겠습니까? 더 이상 제게 필요없는 것이거든요."

그는 투박한 형태의 알 수 없는 원석들이 든 유리병을 내게 주었다. 뭐지 이 택배 배달해주러 왔다가 음식물 쓰레기 처리를 부탁받은 듯한 기분은? 상당히 찝찝했지만 거절할 명분도 없고 배짱도 없어서 들고 나왔다.

어디 버려두라는 뜻이지 이거? 실험 부산물을 숲에 막 버려도 되나 몰라.

***

하얀 마법사side.

최근 집에 설치해둔 탐지 마법에 빈번히 검호가 걸렸다. 마법에 걸리긴 했지만 그가 어디 있는지는 전혀 몰랐는데 오늘에서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저런 수준의 검사는 은신 실력도 최고란 건가.

"무슨 일로 오셨나요?"

궁금했다. 그가 계속 내 근처에 맴도는 이유가. 페어리들에게 듣기를 그는 인간불신자라 하던데 그렇다면 왜 이러는걸까? 그는 나를 보고는 인상을 썼다.

"…… 별 일 있어서 온거 아니다."

그는 거짓말이 상당히 어설펐다. 그렇다면 왜 저의 주위에 계속 오는가. 절로 웃음이 떠올랐다.

"들어오시겠습니까? 계속 밖에 계시면 제가 신경쓰이거든요."

그는 무겁게 걸음을 옮겨 실험실에 발을 디뎠고, 나는 말린 식용 마법초를 꺼내 막 끓인 물에 적당히 부숴넣었다.

그러고보니 이걸 받았던날 붉은 어금니 멧돼지가 나타났었지. 엘린 숲 토종의, 어지간한 몬스터보다 더 거대하고 흉폭한 그것이 갑자기 페어리들의 영역을 습격해 난리가 났었다. 그때 검호가 미처 피하지 못한 페어리들을 구하며 힘을 빼놓아서 겨우 한 번에 처리할 수 있었지.

…… 답례로 받은 술을 먹었다 그날밤 일을 모두 잊어버린건 넘어가자. 어째서 일어났을때 그와 나뒹굴고 있었는지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도 굳이 언급하지 않았고.

"겨우 이렇게 당신이랑 얘기할 수 있게 되었네요. 이상하게 영 기회가 없더라구요."

사냥꾼들의 수가 줄었지만 그만큼 은밀해졌기에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루에 한 둘 발견된다는 그들이 날이 갈수록 수법이 교묘해지는 것도, 그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찾아내 쫓아내는 것도 말이다.

"검호. 당신은 왜 페어리들을 돕나요?"

왜 하필 페어리인가? 님프나 실프, 엘프도 아니고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이라면 하플링이나 마족도 있는데.

"그래야 하니까."

대답은, 꽤 의외였다. 페어리가 인간보다 믿을만하기 때문이라던지, 그들이 불쌍하게도 사냥당하고 팔려나가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예상했는데. 나는 단어를 신중히 선택하며 물었다.

"당신에게 정의나 신념…… 같은게 있나요? 그러니까 약자를 보호해야한다던가 악을 물리쳐야 한다는 그런 것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요정들을 구하는 행위를 납득할 수 있다. 허나 돌아온 대답은 내 예상을 크게 빗나갔다.

"나한테 그런건 없다."

반사적으로 눈이 크게 떠졌다.

누구에게도 부탁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요정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으면서 신념도 정의도 없다고? 다른건 몰라도 약자를 보호하겠다는 목적마저 없다는게 가장 큰 충격이었다. 그럼 그는 왜 사냥꾼들을 내쫓고 있는거지? 마주보고 있던 속을 알 수 없는 붉은 눈이 아래로 향했다. 아래에 뭐가…… 아뜨뜨!

"아아, 죄송합니다. 좀 놀라서요."

그가 건네준 수건으로 젖은 바닥과 옷을 닦으며 지팡이를 휘둘러 얼음을 만들었다. 본의아니게 추태를 보였다. 그런데 저러는게 과연 가능한걸까? 사실 거짓말이 아닐까? 허나 그가 거짓말을 할만한 인물이 아니란 것을 아니, 거짓말이 필요한 인물이 아닌 것을 알고 있다.

"검호. 하나만 더 대답해주실 수 있습니까? 저는 궁극의 빛을 손에 넣어 세상을 올바르게, 완전하게 만드려고 합니다. 당신은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마지막 질문이다. 페어리 퀸 그리고 다른 페어리와는 달리 그만은 내 목적을 들으면 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 이유가 궁금하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보며 답했다.

"사람 나름이지."

처음 그 말을 뇌에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한순간 충격이 강제로 두개골을 열어제끼고 뇌를 강타했다.

궁극의 빛. 내가 벽을 넘어 도달하고싶은 미지의 영역. 혼탁한 이 세상을 신의 도시로 만들어줄 근원적이고 무한한 그 지혜를 얻기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다. 하지만…… 하지만 그 지혜가 아무리 굉장하다 해도, 이 혼탁한 세상을 구제할 수 있다해도, 그것을 사용할 내가 그것을 반드시 옳게, 바르게 사용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을 장담할 수 있는가?

"…… 그렇, 겠죠."

절대 장담할 수 없는 내가 여기 있었다. 그와 뭔가 말을 주고 받았던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윽고 초라하게 고개를 숙인 나를 뒤로하고 나가려는 그를 황급히 붙잡았다.

나는 왜 이런 행동을 했나 스스로 의아해하며 무슨 용건이 또 남았냐는듯 나를 보는 그에게 선반 한 쪽에 놓여있던 병을 집어 그에게 주었다.

"검호, 이거 들고 가주시겠습니까? 더 이상 제게 필요없는 것이거든요."

빛을 쫓는 마법이 걸린 광물들이 든 유리병. 그는 그것을 받고는 망설임없이 몸을 돌리며 나갔고, 직후 나는 의자에 몸을 반쯤 누였다.

"얻는 것도 사용하는 것도 사람……."

나는 연구의 방향을 바꿔야 했다.

***

아마란스side.

갑자기 보이지 않던 검호가 거처로 돌아왔을때 왠 병을 들고있었다.

"그건 뭐에요?"

"하얀 마법사한테 받은거다."

그에게? 그가 준 물건이라면 범상치않은 것이리라. 갑자기 그가 말했다.

"가져도 좋다."

"예, 예? 그래도 되나요?"

"상관없다."

그는 병째로 내게 주려고 했지만 애초에 내 몸보다 더 큰 그것을 내가 받을 수 있을 리 만무, 안에 들어있는 투명한 원석 하나만 꺼냈다.

그런데 이건 대체 뭐지? 풍겨오는 마력의 향기가 굉장히 짙다. 강한 마법이 걸린 물건이 확실하다. 이런걸 그냥 받아도 될까? 하얀 마법사가 마법을 직접 건것이 확실한 이것을 맨손으로 받기엔 좀 그랬다. 나는 그에게 원석을 맡기고는 바로 집으로 가서 물건을 가져왔다.

"이거랑 바꿔요 검호."

내가 가져온 것은 물색으로 빛나는 엄지손톱만한 구슬이었다. 수원에서 우연히 구한 물의 기운이 집약되어 형성된 자연의 정수. 정령의 알이라고도 불리는 그것을 그에게 그냥 주는 것은 실로 아까운 일이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하얀 마법사의 마법이 걸린 돌과의 교환이라면 괜찮은 물건이다.

이때의 나는 이 교환을 동등하다고 여겼지만, 사실 전혀 동등하지 않았다. 이 교환으로 페어리족은 훗날 먼 미래 - 수 백년 후까지 그에게 빚을 지게 되었으니까.

***

여자는 반짝이는걸 참 좋아하는구나. 그래 애나 어른이나 보석 싫어하는 여자는 없지. 그런데 이 구슬은 대체 뭐지? 색깔은 참 예쁜데 쓸때를 모르겠네.

…… 나중에 비상금 조달용으로 쓸까.

========== 작품 후기 ==========

그러지마 임마.

주인공은 정의나 신념은 없지만 윤리와 도덕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빅토리아 아일랜드는 오시리아 대륙에 붙어있었을때 어디쯤에 있었을까요?

@레티오네 - 이벤트성으로 나중에 서브클래스 버전으로 써보죠.

@로젤란스 - 주인공을 위해 변명을 해주자면 검호나오기 전에 던파를 끊고 라테일을 안해봤으며 책을 잘 않읽었습니다.

@아리사토미나토 - 살면서 이런 코멘을 받은건 처음이지만 하나하나 답해드리자면 이 글은 일단 '착각계'고 당연히 주인공의 인식 능력을 비롯한 전반의 환경이 내용 진행을 위해 작위적입니다. 주인공이 호구같다고 했는데 그럼 주인공이 에피네아를 쳐죽이고 하얀 마법사도 끔살시켜야한단 말입니까? 스킬 쓰는법을 모르는거야 생판 써본적이 없고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압니까?

@화뉴 - 어찌됬든 호구란거군요ㅋㅋㅋ

@vbk - 저는 오늘 시험을 불태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