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데몬side.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가족들이 모두 잠든지 시간이 좀 지난 뒤에 갑자기 눈을 떴다. 어두컴컴해 잘 보이지 않는 천장과 데미안의 고른 숨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갑자기 나무 삐걱이는 소리가 들렸다.
장신의 실루엣. 그 남자가 달빛이 내려오는 창가에 서 있었다.
"왜 일어나셨어요……?"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창문 너머의 무언가를 계속 보았다. 뭘 보고 있나 의문이 들 때, 갑자기 으득─ 하고 이가는 소리와 함께 창틀이 그의 손에 바스라졌다. 처음 그를 만났을때 느꼈던 날카로운 검과 같은 기세가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빽빽히 일어나고 있었다.
"무슨, 짓을."
"가만히 있어라."
"……?"
"최대한 빨리 끝낼테니까, 가족들을 깨우지 않게 조심하고."
그는 벽에 기대어놓았던 검을 그대로 챙겨들고 창문을 열어재껴 뛰어내렸고, 기세가 사라짐과 동시에 풀린 다리를 겨우 다잡으며 비척비척 창가로 걸어갔다. 대체 그가 무엇을 보았길래? 이어 그것을 망막에 담은 순간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달빛아래에서 차가운 금속광택을 유감없이 뽐내고 있는, 너무도 많은 몬스터의 무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데미안을, 엄마를 깨워야 해. 도망쳐야한다는 본능만이 머릿속에 쟁쟁하게 울릴때 카앙─ 하는 금속음이 귀에 꽂혔다. 부서진 창틀을 잡고 일어나 다시 창밖을 보았을때, 좀 전에 뛰어내렸던 그가 어느새 선두의 몬스터와 싸우고 있는게 보였다.
"도망치세요!!"
아무리 강하다는 모험가라도, 저렇게 많은 몬스터를 상대로는 이길수 없─ 다고 생각했다.
그가 반바퀴 몸을 돌리며 갈긴 돌려차기에 금속질 벌레형 몬스터의 몸이 푹 꺼지며 저 멀리 날아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말이다.
잠깐, 당신 검사라며?
"……!…!"
그가 무어라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정신없이 웅웅거리는 벌레들의 소리에 들을 수 없었다. 그는 여기까지 진동이 울릴 정도로 크게 진각을 밟았고, 우리 집보다 더 높이 뛰어르며 내가 너무도 많은 벌레들때문에 차마 보지못한 붉고 푸른 와이번 중 한 마리의 배에 칼을 꽂고 그대로 쫙 가르며 날개 한 쪽을 잘랐다. 와이번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다 울리기도 전에 그 몸뚱이는 벌레들 사이로 쳐박혔고, 그는 땅에 착지하며 또 다른 벌레 하나를 가속이 붙은 몸으로 내리찍어 죽였다.
이후로는 그저, 보는것만으로도 황홀한 검의 향연이었다.
최초에 들었던 금속음은 벌레의 뿔과 그의 검이 부딪히는 소리였으며, 그것이 검과 벌레의 처음이자 마지막 교전이었다. 왜냐하면 그 일격에 뿔은 가차없이 잘려나갔으니까. 일격에 뿔을 자르고, 이격에 몸을 가른다. 벌레의 가장 큰 무기와 방어구가 장난치는듯한 손놀림에 종잇장처럼 잘려나가는 과정은 점점 빨라져 나중엔 한 번에 두세마리가 썰려나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내가 가장 놀란 것은, 그는 전혀 '스킬'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모험가들이 쓴다는 매우 강력한 기술. 금속을 자르고 호수를 증발시키며, 건물마저 일격에 가를 수 있다는 그것을 그는 단 한 번도 쓰지 않고 있었다. 오직 검술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내가 봐온 그 어떤 모험가보다 강했다. 아니 애초에, 그에게 스킬따위 필요없는것 같다. 지금 그가 검으로 벌레들을 처리하는 속도와 마법사들의 자랑이라는 불꽃 마법을 썼을때의 속도 중 어느쪽이 빠를까 하는 가정에서 어처구니없겠지만 전자가 압도적일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때의 나는 그가 저 몬스터들을 전부 쓸어버릴거라는 강한 확신에 어이없을정도로 마음을 놓아버리고 있었다.
"피해!!"
천둥같은 고함에 반사적으로 창가에서 뒷걸음질 친 순간, 남아있던 푸른 와이번이 박치기로 창문과 그 주변을 박살내며 머리를 들이밀었다. 아차 한 마리 더 있었지!
"우웅…… 혀엉?"
"데미안! 안돼!"
시끄러운 소리에 깨버린 데미안이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방안으로 거의 몸을 반쯤 집어넣은 와이번의 입이 쩍 벌어지며 푸른 기류가 모여들었다. 나는 다급히 데미안 앞으로 달려가 부서진 나무 파편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이윽고 냉기어린 기류가 발사되려는 찰나, 와이번의 목이 구멍밖으로 쑥 빠졌다. 누군가 당긴듯했다.
"작작 좀 해 도마뱀!"
그의 짜증어린 목소리와 함께 와이번의 브레스가 허무하게 하늘로 날아가버렸다. 뻥 뚫린 구멍으로 그가 칼질 한 번에 와이번은 4토막내버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벌레를 화풀이하듯이 - 그럴리 없겠지만 - 걷어차 껍질에 크레이터를 만드는걸 넘어 아예 뚫어버리는 것이 보였다.
어느새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
검호side.
아닌 밤중에 갑자기 눈을 떠버렸다. 요 며칠동안 그놈의 몬스터들때문에 깊게 잠에 들지못해 오늘도 새벽에 깨버린것 같다. 계속 누워있어도 쉽게 잘 수 없을것 같아 그냥 일어났다.
도시에서는 보지못한 큼직하고 밝은 달을 보고 감탄했던것도 첫날뿐이지, 그날밤 저 달빛 하나에만 의지해 도마뱀들과 사투를 벌였던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린다. 죽자살자 도망쳐도 그놈들은 날개가 달려있어서 바로 쫓아왔지 젠장. 그놈들과 싸우면서 얻은 교훈은 일단 날개부터 자르자였다. 도망은 그 다음에.
아무튼 실로 오랜만의 평화로운 밤인데 이대로 날 샐때까지 한가하게 구경이나 해볼까? 마침 풍경이 아주 반짝반짝하니 예술적인……!
아 썅.
"왜 일어나셨어요……?"
치아건강을 걱정해야할정도로 세게 이를 간 나는 무심코 힘을 준 창틀이 부서진것을 보았다. 아 이거 얼마에 물어줘야하지? 같은 고민은 빠르게 넘겼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내 눈이 잘못 봤길 바랬지만 예전과는 달리 이 몸은 안경따위 필요없을정도로 시력이 뛰어난데 내가 잘못 봤을리가 없잖아! 그리고 데몬 넌 왜 일어난거야?! 내가 묻고 싶다!
나는 잠옷을 갈아입을 생각을 바로 포기했다. 현재 이 집에 있는건 나, 데몬, 데미안, 데몬의 어머니인데 이중 둘이 군단장급이지만 그건 먼 미래의 일이고 결과적으로 지금 싸움이라는걸 할만한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존나 엿같네 진짜. 아무리 레벨이 되도 다굴맞으면 죽는다고! 그런데 도망칠 수도 없어! 지금 쟤들은 그냥 순수한 애들이라고! 나는 검을 챙겼다.
"무슨, 짓을."
"가만히 있어라."
"……?"
"최대한 빨리 끝낼테니까, 가족들을 깨우지 않게 조심하고."
사실 그냥 깨워서 도망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밖으로 나왔다가 몬스터한테 당하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다. 날개가 있는건 데몬 하나뿐인데다…… 씨발 결정적으로 와이번까지 있어. 저 빌어먹을 도마뱀.
나는 그대로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엘린 숲에서 이정도 높이는 괜찮다는 것을 일찌감치 확인했다고!
그래도 털망토는 안걸치고 있어서 좀 빨리 달린 것 같다. 나한테 박치기하기 직전의 듀얼비틀의 진동하는 뿔을 잘라내려고 했는데─ 금속음과 함께 잘리다 말았다. 뭐야? 막혔어? 당황한순간 사방에서 시끄러운 진동 소리가 들렸다. 아 이자식 상태이상 걸었지! 뭐 걸었더라? 젠장 듀얼비틀을 마지막으로 잡은게 언젠데……!
순간 다리가 저려 휘청였다. 아 맞다 허약! 점프 불가능! 근데 이것도 현실보정 쳐먹은거냐!! 그나마 덜 저린쪽 다리를 움직여 가장 가까이 있던 듀얼비틀을 힘껏 걷어찼다.
"이자식들아! 하나씩 덤비라고!"
현실적으로 말이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며 나는 검을 휘둘렀다. 생긴것만 번지르르한게 아니라 성능도 최고인 이 검은 어지간한건 다 자를 수 있었고, 좀 전엔 내가 방심했을 뿐이다. 실력이 아니라 아이템에 기대는것 같지만 그거라도 기대게 해줘! 템빨이 뭐 어때서!
상태이상 거는 뿔 자르고, 친절하게 홈까지 파여있는 등딱지도 쫙 갈라가며 열심히 칼질할 무렵 하늘을 낮게 날아다니는 와이번들이 보였다. 오냐 잘만났다 도마뱀 새끼들아. 이제 허약상태 풀렸어! 나는 적절한 타이밍을 잡아 세게 발을 굴러 뛰어오른다음, 뻘건 와이번 자식의 배때기에 칼빵을 놓고 날개를 끊어냈다. 철철 흐르는 피같은건 현실 보정쩔면서 왜 내 감각은 게임 보정이 들어간건지. PTSD방지인거냐. 머리부터 땅에 안 박게 몸 돌려 착지하는데 하필 착지지점에 또 듀얼비틀이 있었다. 아 내 발……! 그러고보니 맨발이었어!
아까같은 실수하지 않도록 손에 힘 꽉 주고 열심히 검을 휘둘렀다. 하필 입고있는 옷도 잠옷이라 방어력이 완전 종잇장이거든. 한 대만 맞아도 위태롭다고. 마음속으로 선빵필승! 못하면 내가 죽는다! 를 외치며 죽어라고 칼질했다.
그리고 와이번을 깜빡했다.
"피해!!"
미친 나 병신인가봐! 듀얼비틀이 너무 많아서 이거 잡는데 정신이 완전히 팔려있었다. 집으로 돌진하는 블루 와이번을 황급히 쫓았지만 이미 그놈은 창문을 개박살내고 목을 들이민 후였다. 길을 막는 듀얼비틀들을 베어내고 놈의 꼬리를 붙잡아당겼다. 애들 건들지마 새꺄!
"작작 좀 해 도마뱀!"
집에서 끄집어내기 무섭게 브레스가 하늘로 발사되었다. 위험천만했다. 보기엔 멋진 X자 베기를 겨우 성공시키며 와이번은 4동강내고 어째서인지 한 마리만 남은 듀얼비틀도 정리했다.
아…… 팔에 쥐났어. 발도 여기저기 까지고 멍들었고. 이 와중에 잠옷은 구김조차 없이 멀쩡했다.
***
데몬side.
몬스터를 처리하고 우리를 위해 싸운 그에게 답례를 하려고 했지만 그는 한사코 거절했다. 본인은 어떻게든 줬으면서. 결국 그가 받은것은 여행길에 먹을 식량 조금이 전부였다.
"저기…… 하나 물어봐도 되나요?"
"뭐지."
"어떻게하면 당신처럼 강해질 수 있어요?"
무력하기만했던 밤이 생각났다. 구경만하다 동생이 위험에 처했을때 아무것도 못하고 그의 도움만 받다 끝났다. 나한테 좀 더 힘이 있었다면, 그 몬스터들에게서 가족들을 지킬 수 있었을텐데.
가방을 정리중이던 그는 잠깐 손을 멈췄을뿐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조금 오기가 났다.
"대답해주세요! 이도류를 쓰면 그렇게 강해지나요?"
"아니."
"그러면 어떻게 해야되요?!"
그는 가방을 메고 일어났다. 몸의 일부나 다름없는 두 개의 검이 태양빛에 광택을 뿌리는게 오늘에서야 제대로 보였다.
"열심히 노력하면."
"그런 대답말고 좀 더 제대로 된 대답을─."
그의 단단한 손이 내 머리를 눌렀다. 희고 상처가 없어서 마냥 고운줄 알았는데, 굳은살이 가득하고 거친 손이었다.
"매일매일 하루도 빠지지않고 노력하면 강해질 수 있을거다."
기왕이면 달리기같은걸 하면 더 좋고. 그 말을 끝으로 그는 가버렸다.
그의 말을 이해한 것은 좀 더 시간이 지나, 정말로 강해지는데 지름길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안 이후였다.
***
…… 미안하다 데몬아. 렙빨에 템빨로 근근히 살아가는 나한테 그런 방법 물어봐야 대답 못하거든? 이도류는 진짜 거지같아서 쓰라고는 못하겠고, 차마 꿈을 부술 순 없어서 예전에 봤던 만화대사 좀 쳤다.
격투만화에서 나온 말이니까 아마 사실이겠…… 지?
========== 작품 후기 ==========
이제 주인공은 본인의 검솜씨를 템빨로 여기는중. 검 한 번 휘둘러 본 적 없는 본인이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기보단 검이 쩔어서 그렇다는 쪽이 더 설득력 있으므로(…).
듀얼비틀은 처음엔 많았는데 나중엔 주인공한테 쫄아서 다수 도망쳤습니다.
@로젤란스 - 영웅으로 가면 어떻게든 균형이 맞춰질까요?
@가면광대 - 사람들은 군단장ver를 좋아하네요.
@vbk - 자 이리로 오세요!
@ReFrants - 메이플 월드의 꿈과 희망도 같이 없어집니다.
@소설조으다5 - 군단장 루트가 너무 압도적이네요.
@ch3ng - …… 이거 슬슬 진짜로 고민해야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