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호입니DA-21화 (21/208)

<--  -->  검호side.

기둥을 휘감은 얼음들을 지나 살얼음을 밟으며 걸어간 나는 어느 순간 멈췄다. 너무 거대해 구조물같은 얼음 기둥들로 빙 둘러쌓인 공간에 그녀가 있었다.

시간의 여신 - 초월자 륀느.

"오셨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나는 실사판 륀느의 미모에 감탄했다가 깊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내가 뭔 기나 마나같은걸 느낄 수 있는건 아니었지만 그녀가 범상치않은 이라는 것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과연 초월자 퀄리티.

나는 고개를 들며 그녀에게 말했다.

"한 가지 묻고싶은게 있습니다. 제가─."

"저는 대답해줄 수 없습니다."

아직 말하지도 않았는데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아 잠깐만요 여신님?! 일단 들어는 주고 그런 말을 해주세요! 이런걸 미래예지 하지말라구요!

"당신의 일은 제가 쓸 수 있는 힘의 영역에서 벗어나있습니다."

"……."

제발 그런 말 하지 말아주세요. 당신마저 그러면 난 대체 어떻게해야 되냐구요……. 나 여기서 살아야하는거야? 응?

"다만."

여신은 감고있던 눈을 뜨며 말했다.

"이분이 대신 답해드릴겁니다."

륀느가 가리킨 곳에 작고 푸른 돌이 둥둥 떠있었다. 설마 여신마저 노망이 난건가? 하는 불경한 생각이 들었고, 황당해진 나는 도끼눈을 치켜뜨고 그녀를 보려고 했는데 그새 사라져있었다. 언제 가신겁니까 여신님!

그 순간 돌에 쩍 금이 가더니 질량보존의 법칙상 불가능한 양의 물이 돌에서 콸콸 쏟아져나와 허공에 뭉쳐지며 점차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슬라임 모에화같은 물덩어리에 색이 입혀졌고, 점점 형태가 디테일해지더니 완전히 한 명의 사람이 되었다. 이상의 과정은 눈 몇 번 깜빡일 사이에 일어나 감탄이나 경악같은걸 할 시간도 없었다.

"후! 이건 좀 쓸만하네."

양갈래로 묶인 새하얀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 작은 머리에 귀여운 얼굴까지. 어떻게 봐도 미소녀로만 보인다. 그런데 흉부쪽의 저건…….

아 젠장.

'나 변태였나?'

아니 잠깐만 있어봐, 저거 진짜 뭐야?

어떻게든 시선을 돌리려고 해도 소녀가 몸을 움질일때마다 흔들리는 그것을 쫓아버리는 두 눈을 끝끝내 통제하지 못한 나는 - 남자의 본능이라 심히 서글펐다 - 간신히 손으로 눈을 가렸다. 미친 저건 사회적 흉기야! 내 예전 몸보다 작은 키임에도 외국인 여성마냥 빵빵한…… 아 씨발 미치겠네!!

"기대하지 않았는데 좋은걸 들고와줘서 고마워. 덕분에 제대로된 아바타를 강림시킬 수 있었어."

"……뭘?"

"정령의 알, 자연의 정수말이야. 공교롭게도 내 속성이랑 어느정도 일치했거든."

나한테 그런게 있었나? 잘 생각해보니 아까 보았던 돌은 엘린 숲에서 아마란스한테 받았던 그 돌 같았다. 특유의 예쁜 푸른색을 떠올려보니 확실하다. 근데 가방은 그 도마뱀한테 두고 왔는데 왜 저게 여기있는거야?

"언제까지 그러고있을거야? 이건 아바타일뿐이라서 후광같은건 없다고."

눈을 가리고있던 손이 내 의사에서 벗어나 휙 내려졌다.

목욕가운같은 것만 입은 어디 하렘 애니에 나올법한 로리거유 트윈테일 미소녀가 방긋 웃으며 내 앞에 있었다.

"…… 누구야 대체."

"당연한 질문이니 소개해줄게."

소녀는 척하니 허리에 손을 얹고는 흠! 하고 기합이 넣고는 - 이 와중에 그것은 크게 출렁였다 -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세계를 만든 이들 중 한 명이자 시간의 초월자 륀느를 대리인으로 세운 이, 시간의 오버시어야."

거기에 소녀는 덧붙였다.

"널 이 세계에 데려온 이이기도 하고."

그 말에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사고가 정지했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없이 검을 치켜들어 소녀의 머리를 힘껏 내려쳤다.

***

내 일격에 반으로 갈라진 소녀였지만 그 단면은 피와 살대신 물이 출렁일뿐이었다. 그러고보니 아까 이년 물로 만들어졌었지. 세로로 2등분된 몸이 다시 스르륵 붙는 광경은 그로데스크하지는 않았지만 기괴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 무슨 짓이야?"

"내가 묻고싶은 말이다."

생각이고 자시고할 것 없이 둔기로 사용한 검을 감정에 따라 금방이라도 뽑아 휘두르기 직전, 나는 간신히 손잡이를 꽉 잡은채로 참았다.

"날 현실 세계로 돌려보네. 지금 당장."

차가워진건지 뜨거워진건지 모르겠지만 과부하가 걸린 머리는 제대로 돌아가지 못했다. 눈앞의 소녀가 날 이 세계로 떨군 원흉이라는 사실만이 쟁쟁하게 울리며 당장이라도 목을 비틀고 심장을 쪼개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된다. 감정에 따라 행동했다가 영영 돌아가지 못하면?

소녀는 도자기처럼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건 안돼."

인내심이 무참히 찢어발겨지며 내 손은 빠르게 검을 뽑아들었다. 붉은 검이 언뜻 처음보는 빛에 물들어있다고 생각한 순간, 발검의 여파는 내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을 뿌렸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얼음기둥이 수수깡처럼 허무하게 쪼개지고, 신전 바닥과 천장에 깊고 선명한 검흔이 새겨졌다.

"위험했잖아!"

그렇게 말하는 소녀는 멀쩡했다. 몸의 절반에서 솟구친 얼음이 훌륭하게 방패의 역할을 수행한것이다.

"크로스 블레이드. 거기다 광폭까지 됬었네?"

덤덤히 말하며 몸을 원래대로 만든 소녀는 팔짱을 꼈다. 더이상 그녀의 상체 특정부위에 눈이 가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목에 검을 겨누며 말했다.

"설명해."

"넌 니가 쓴 스킬도 몰라? 이거 진짜 문제네."

스킬? 방금 그게? 그것보다 저년은 그걸 어떻게 아는거지?

"니 몸은 내가 줄 수 있던 것들 중에서 육체 능력만은 순위권에 드는거야. 어이없이 죽지말라고 일부러 튼튼한걸 줬다고."

아 그러니까 결론은, 이 쓰레기같은 직업을 준것도 저년이란 뜻이구나.

"고맙다는 인사는 필요없─."

"죽어버려 망할년."

나는 검을 휘두르려고 했다. 어차피 슬라임같은 년이니 죽지 않을거라는 확신아래 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마치 얼어버린 것처럼 혹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작작해. 이 몸이 꽤 괜찮은 아바타라 해도 그런걸 계속 맞으면 금방 부서진다고. 너 니가 얼마나 강한지 전혀 모르고 있는거지?"

강해? 아 그래 전사계열답게 여러모로 튼튼하고 힘이 쎄긴 했지. 근데 스킬이 안써지잖아! 방금 쓴게 내가 여기와서 써본 최초의 스킬이라고! 대체 어디가 강한거야?! 왜 하필 이따위 직업을 줬냐고! 아니아니 그것보다 중요한건─.

왜 하필 나를 여기에 데려온거야.

"…… 하고싶은 말이 많은 모양이네. 하지만 니 말을 일일이 들어줄 시간이 없어."

어이 진짜 시간의 오버시어 맞냐!! 그냥 노출증걸린 망상병 환자 아니냐고!

"내가 너를 부른 이유는 우리에게 걸려있는 봉인을 풀기 위해서야. 정확히는 나와 생명의 오버시어. 빛의 오버시어는 지금 맛이 간 상태거든."

봉인은 또 뭔 소리야? 그런 설정 모른다고! 소녀는 후─ 하고 한숨인지 탄식인지 모를것을 내뱉고는, 손바닥을 쫙 펴 얼음으로 무언가를 만든다음 내 손에 걸어주었다.

"일단 초월자의 힘을 어떻게든 여기에 모아줘. 그것부터 되어야하거든. 시간의 초월자는 제외하고."

첩첩산중이다. 어쩌란 거야? 그리고 그쪽 말만 하지말고 이쪽도 좀 말하게 해줘! 제대로 된 설명을 해달라고! 그러나 여전히 내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니 몸을 너무 험하게 굴리지마. 니것이 아니라서 몸과 영혼의 연결이 불안정하거든? 내 힘으로 이었다고 해도, 침발라서 찍 붙인 수준이라서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오닉스 드래곤과의 계약은 잘했어."

"너……!"

간신히 입이 움직였다. 딱딱하게 굳은 혀가 겨우 굴러가며 단어를 만드려는 순간, 소녀의 몸이 흘러내기 시작했다.

"우리의 봉인을 풀어주면 널 원래 세상에, 여기 오기 직전의 시점으로 돌려보내줄게."

그리고. 소녀의 상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색들이 사라지며 사람의 형상이 무너진다.

"기억해둬. 너는 이 세상을 여전히 게임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우리가 게임의 설정에 불과한 세상이 있다면 반대로 니가 책의 잉크 몇 방울에 불과한 세상 역시 있다고."

이 세상도 현실이야. 그 말을 끝으로 사방에 물보라를 튀기며 소녀는 사라졌다.

멈췄던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아스카side.

마스터가 대신관이라는 이를 따라간지 조금 시간이 지난 후, 얼마않있어서 마스터가 돌아왔다.

[왔어 마스터~? 륀느 여신이 뭐라고 했어?]

마스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으음, 여태 계속 그랬지만 이번엔 뭔가 좀 다르다고 해야할까. 뭐지? 분위기가 많이 어둡다고 해야하나. 저런 마스터는 처음 본다. 많이 아는것도 아니지만서도.

[마스터 이제 어디 갈거야? 리프레?]

"…… 무릉."

[처음 듣는데…… 어느쪽으로 가야돼?]

"일단은 엘나스쪽으로 가. 무릉은 그 옆에 있으니까 그쪽으로 가면 돼."

[알았어!]

나는 마스터에게 실드 마법을 쓴다음 날개를 펼쳤다. 몸에 부딪히는 기류가 아까 왔을때보다 잠잠하다. 빨리 갈 수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하늘을 나는 도중 마스터가 물었다.

"너…… 이름이 뭐였지."

[에엑?! 마스터 너무해, 저번에 말해줬었잖아! 아스카야 아스카!]

"그래 그랬지 참."

[내가 잘못한건 맞지만 그래도 이름정도는 기억해줘 마스터.]

알았어. 우와 마스터가 제대로 대답해줬어. 기분이 엄청 좋아졌다.

[마스터. 나중에 마법서 더 구해줄 수 있어? 그거 다 봐서 이제 다른게 필요하거든. 나 열심히 마법 익혀서 마스터한테 도움이 될거야!]

"그건 고맙네."

[…… 에? 에에에? 잠깐 마스터 방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줘!]

"재방송은 없어."

[마스터어어─!]

엘나스 산맥이 있는 곳으로 가는 내내 나는 마스터와 대화를 했다. 처음으로 진짜 제대로된 대화였다.

========== 작품 후기 ==========

로리고 오버시어고 주인공 입장에선 그저 썅년.

주인공의 세 번째, 네 번째 스킬:크로스 블레이드, 광폭.

뜬금포 터지는 설정에 갑자기 코멘수가 떨어져도 저는 노, 놀라지 않을겁니다…….

@미친숟가락 - 오버시어가 직접 건든거라 오히려 못보는게 당연.

@유풍낙화 - 어느쪽 성별이든 논란이 생길 것 같아서요.

@Blake117 - 독사는 아니길 빌어드릴게요.

@Eluines - 소통의 부재 만만세요.

@허공말뚝 - 아스카의 입장을 간접 체험함.

@바이휴런 - 주인공이 아는건 예전 버전이라서 그래요.

@책벌레씨 - 그랬으면 내용 전개가 많이 바뀌었을겁니다.

@가면광대 - 에이 설마 그럴리가요.

@소설조으다5 - 군단장이 아닌 대신관 아카이럼은 사실 그렇게 강한게 아닙니다. 군단장 아카이럼의 힘은 어느정도 검은마법사한테 받은거니까요.

@칼크래프트 - 반대로 그래서 통수를 거하게 때렸을지도 모르죠.

@darkdestiny - 자세한 것은 군단장 시크릿 북을 참조!

@ReFrante - 오버시어쪽도 상당히 촉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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