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프리드side.
힘의 보석을 만들기 위해선 그 대륙의 매개물이 필요하다. 재질은 무엇이든 상관없지만, 그 대륙을 상징한다고 봐도 좋을 그런 물건이어야 한다. 언뜻 쉬운 조건같지만 상당히 어려운데, 대체 무엇이 그 대륙을 상징하느냐─ 라는 문제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어느정도 힘을 끌어내기만 하고 매개물은 나중에 찾기로 했는데…… 검호씨가 끌고온 힘을 한 방에 합쳐버릴줄은 몰랐다.
"에피네아라면, 어제 말했던 그 페어리 퀸 말인가요?"
"그래."
검호씨는 심히 우울한 표정으로 보석을 집어들었다. 물결무늬같은게 휘감긴 보석은 예전에 어떤 물건이었는지 알아볼 수 없었다.
"소중한 물건이었나요?"
"그건 아니지만……."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런 말 하면 누구도 안믿을겁니다. 그보다 저 사람이 저런 표정을 지을 줄 알았어?
"그냥 도와준 답례로 선물받은 옷이었다."
무지막지하게 소중한 물건이었잖아!!
"자, 잠깐만 에피네아 그 여자가 당신한테 선물을 줬다고?"
"직접 만들었다 하더군. 그렇게 마음에 드는건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인간혐오로 유명한 페어리 퀸이 직접 옷을 만들어 줬다고? 손수건이나 장갑같은 것도 아니고 옷을? 대체 뭘 해야 그런걸 받을 수 있는거지.
페어리들이 정말로 신뢰하는 이에게 뭔가를 만들어주는 특성이 있다고 들었지만, 소소한 물건도 아니고 수제 옷을 선물해줬다는건 그와 페어리퀸이 범상치않은 관계였다는 뜻이다. 굳이 페어리가 아니라 같은 인간이 그랬어도 그럴진데 하물며 여왕과 인간이라면…… 그러고보니 검호씨 페어리의 영역에 오래 머물렀었다고 했는데 그렇다는 말은……?
여, 연인이었나? 아니 그걸로밖에 생각되지 않잖아!!
"받아라."
"…… 그래도 되나요?"
"너희한테 필요한거 아니었나."
대답도 듣지않고 바로 보석을 내 손에 쥐어준 그는 떨어진 물건을 주워 다시 배낭에 넣고는 휙 맸다.
"이 다음엔 어디로 갈거지?"
"루, 루디브리엄으로─"
"먼저 가겠다."
그러고는 검호씨는 아스카의 등에 올라탔고, 아스카는 바로 날개짓을 해 순식간에 루디브리엄이 있을 방향으로 날아갔다.
어느새 주위가 어두워졌다. 그게 해가 저물어서 그런건지 아니면 한순간에 벌어진 어이없는 사태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 그 옷이 선물받은 거였구나."
"뭔지 알고 있어 아란?"
"무릉에서 수련할 때 몇 번 본적 있거든. 인간이 만든거라 생각되지 않는 그런 옷이었는데, 설마 페어리 퀸이 직접 만들어서 선물한건줄은 몰랐네."
나는 손안의 보석을 보았다. 에레브의 것과는 달리 몹시 화려한 장식이 들어가있는게 조금전까지 옷이었을때 에피네아가 얼마나 정성스레 만든 것인지 여럼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내 실수야…… 다음에도 도와줄까?"
"공과 사는 분명하게 구분하는 사람이니 해주긴 할거다."
루미너스는 뒤에 '아마도'라며 괜히 불안해지는 단어를 붙였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거지 프리드."
"아, 엘린 숲에 쳐져있는 대결계의 흐름을 틀어서 이 보석 역시 결계핵으로 만들거야. 무슨 상황이 생길때 에우렐을 더 견고하게 보호할 수 있게 할건데……."
과연 이걸 써도 될까 모르겠다. 보석의 매개체가 검호씨의 소중한 물건이 되버릴줄 어떻게 알았냐고. 그런데 이건 그도 똑같은 심정일 것이다. 아무렇지 않다는듯이 준게 놀라운거였다.
"메르세데스, 너희 마을에서 마법사들 좀 불러줘."
"알았다. 바로 불러올게."
그새 회복이 끝난건지 그녀는 바람같은 움직임으로 단숨에 에우렐로 뛰어갔다. 엘프라는 종족은 정말 부럽네.
검호씨에게 나중에 루디브리엄에서 만나는대로 사과해야겠다.
***
검호side.
아 내 잠옷. 유일한 여벌옷! 디자인이 좀 마음에 안들긴 했지만 그래도 얼마나 좋았던건데! 빨 필요도 없고, 대충 가방에 넣어놔도 주름하나 지지않던, 그래서 마법 만세를 외치게 하던 그 물건이!
이 세상에 트립된 날부터 생각했던건 '이 옷 진짜 구리다'였다. 줄창 입으며 이리저리 구른덕에 지금은 좀 익숙하지만 어디까지나 익숙해진거지 이게 좋다는 소리가 아니다. 이 옷의 좋은점은 부가기능쪽이지 디자인이 아니라고! 빌어먹을 방우울—! 망할 장식들 확 다 뜯어버리고 싶다고! 뜯어도 다 고쳐져서 문제지.
찢어지고 더러워져도 자체적으로 수복되고 깨끗해지는, 그러니까 수리와 세탁의 필요성이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는게 이 옷의 유일한-그리고 몇 년동안 이거만 입는 이유다. 그렇지 않고서야 뭔 정신으로 몇 년동안 단벌로 지내겠냐고. 여기저기 온갖 지역을 돌아다니는 내 입장에서 이건 굉장한 메리트다. 내가 빨래를 못한다는 이유도 크지만.
돈이 좀 생겼을때 그냥 새 옷 사고 입다가 도저히 못 빨거나 못 입을 수준이 되면 새로 하나 사는 그런 사치는 내 사고방식으로는 무리였다. 결국 별 수 없이 이 옷만 입던 내게 유일한 여벌옷이 그 잠옷이었고. 이유는 이 옷과 동일하게 세탁 필요 없음이었다.
"에피네아라면, 어제 말했던 그 페어리 퀸 말인가요?"
"그래."
그놈의 레이스만 빼면 진짜 좋은 옷이었는데. 꽤 오래 입어서 이젠 별로 안쪽팔리기도 하고. 마침 여기 엘린 숲이겠다 찾아가서 한 벌 더 만들어달라고 해볼까— 하는 생각은 금방 접었다. 염치가 있다면 그런 말 하면 안되잖아.
"소중한 물건이었나요?"
"그건 아니지만…… 그냥 도와준 답례로 선물받은 옷이었다."
진짜 이번 기회에 새 옷을 사야하나. 자체복구기능까진 안바라니까 세탁할 필요없는 그런 옷이라면 어디서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저 프리드라면 만들수도 있을 것 같은데.
"자, 잠깐만 에피네아 그 여자가 당신한테 선물을 줬다고?"
"직접 만들었다 하더군. 그렇게 마음에 드는건 아니었지만."
…… 레이스가 충격과 공포였지. 하도 보다보니 지금은 아무래도 좋은것이지만. 익숙한 옷 대신 보석만 덩그라니 남아버린 모양새가 강화실패를 연상케했다.
아무튼 이미 없어진 옷은 돌아오지 않는다. 봉인석이 되버렸으니 내가 가지지도 못하고. 얘들이 이걸로 검마 봉인 해주겠지. 그 사실을 상기하며 나는 애써 스스로를 위안했다. 그래 새 옷 사자.
"받아라."
"…… 그래도 되나요?"
얘가 뭔 소리를 하는거야.
"너희한테 필요한거 아니었나."
날아가버린 옷이 좀…… 아 솔직히 꽤 많이 아깝긴 했지만 그렇다고 봉인석을 꿀꺽한다는 무지막지한 짓거리를 저지르진 않는다고.
"이 다음엔 어디로 갈거지?"
"루, 루디브리엄으로─"
"먼저 가겠다."
아무 마을이든 가서 새 여벌옷을 사야겠다. 몇 년동안 단벌신사로 지내는걸 오늘에서야 탈출하는거야!
나는 바로 아스카를 타고 루디브리엄을 향해 날아갔다. 가는 길에 아스카와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마스터. 그 옷은…….]
"이참에 새 옷 살거야. 때 잘 안타고 빨기 쉬운걸로."
[그 옷에 미련있는거 아니었어?]
"이미 없어졌는데 어쩌겠어. 쟤들이 좋은데 써줄거야.]
[…… 마스터는 어른이구나.]
"그보다 아스카 너 옷에 자동 청결 마법같은거 쓸 수 있어?"
이 세상에는 왜 세탁기가 없는걸까. 진짜 불편하네. 고로 마법이 짱이다. 이젠 계약셔틀이 되어도 아무 상관없어!
***
???side.
프리드가 많이 상심했다. 검호라는 남자에게 큰 무례를 저질렀기 때문이겠지.
어째서 그 남자에게 도움을 받아야하는지 의아했는데, 우리가 녹초가 될때까지 끌어야할만큼 거대한 힘을 아무렇지않게 당기는걸 보고 그제서야 알았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끌려온 대륙의 힘은 저 검호라는 남자에게 향하는 특성이 있었던 것이다.
수준급의 엘프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엘린 숲의 대결계를 좀 변형시켰고, 보석은 에우렐에 맡겨졌다.
이후 프리드가 염치불구하고 새 옷을 만들어달라 부탁하기 위해 페어리의 영역에 가려고 했지만 그들의 영역엔 어째서인지 접근할 수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깰 수 있었지만 시간없는데 거기에 신경써야할 이유가 없어서 결국 준비를 갖추는대로 루디브리엄으로 가게 되었다. 프리드는 끝까지 미련이 남았는지 페어리들의 영역을 감싸고있는 자욱한 안개에서 쉬이 발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도착한 루디브리엄은…… 여전히 황폐했다. 다채로운 블록들만이 여전할뿐, 확연히 줄어든 사람들과 아직까지 그때의 습격이 떠오를정도로 망가진 도시, 그리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 가라앉은 분위기속에 프리드는 애써 밝게 말했다.
"나는 여기 결계 점검하고 왕한테 갔다올게. 너희들은 잠시 쉬고…… 미안한데 검호씨 좀 찾아줘."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바로 도시를 살피러 갔다. 그 거대한 오닉스 드래곤은 어딜가나 눈에 띄니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성벽을 타고 뛰어다니며 도시를 한 바퀴 빙 돌면서 오닉스 드래곤을 찾았다. 그러다 좀 멀쩡한 어느 가게 앞에 검은 거체가 움직이는게 보였고, 바로 발걸음을 그쪽으로 돌렸다.
'…… 처참하군.'
대체 무슨 공격으로 만들었는지 모를 깊고 깔끔한 검흔과 유사한 틈이 성벽은 물론 도로에서부터 만들어져 있었다. 필히 이곳을 습격했던 군단장의 소행이겠지.
그렇게 참상을 둘러보며 가게앞에 도착했을때, 유리창 너머로 그-검호가 있는게 보였다. 가게에 들어가려 했을때 여기저기에 걸려있는 옷들을 보고 그때서야 알았다. 여기는 옷가게다.
"마음에 드시는게 있나요?"
"비슷한게…… 없군요."
아무렇지않게 줬지만 역시 소중한 옷이었던 모양이다. 한참 둘러보던 그는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그냥 나왔다.
[찾던게 없어 마스터?]
"나중에 다른 곳에 가서 찾아보면 돼."
[정령의 가호같은게 새겨진 잠옷은 다른 곳에서 못 찾을텐데.]
"거기까진 안바래. 대충 비슷하게 생기기만 하면 되니까 상관없어."
거기다 옷 자체도 평범한게 아니었다. 요정이 만들었으니 애초에 평범한것일리 없지만 정령의 가호가 새겨져 있었다니. 빅토리아 반도를 상징하는 매개물로 왜 옷이 되었나 궁금했는데, 저정도로 굉장한 기물일줄은.
"다른 옷가게는 어디에─"
그는 몸을 돌리다 나를 보고 살짝 눈을 크게 떴다. 그리 놀라지않은 기색이다.
"너는……."
"유에다. 프리드가 당신을 찾아와달라고 부탁했다."
"…… 곧 가지."
"우리는 궁전쪽에 있으니 아프리엔을 보고 오면 된다. 그리고…… 프리드를 미워하진 말아다오."
그의 입장에선 어이없을지 모른다. 잘잘못을 따지자면 프리드가 잘못한게 맞으니까. 하지만 나는 프리드가 앞으로 도움을 받아야하는 사람에게 따가운 눈빛을 받길 원하지 않는다.
"알았다."
그는 별 고민조차 없이 아무렇지않게 긍정해주었다. 잠시후 궁전에 온 우리는 프리드가 루디브리엄의 왕에게 보석을 만드는걸 허가받는동안 동료들과 함께 도시재건을 도왔다.
***
와. 쟤 본명이 저거였구나. 듣고 진짜 놀랬다. 저놈이 은월인건 알았지만 현재 이름은 못 들어서 - 이상하게 내가 묻거나 쟤가 대답할때마다 타이밍이 계속 어긋나서 - 뭐라고 불러야할지 몰랐는데.
그나저나 여기 옷들은 하나같이 왜 그모양이지. 여자애들이 인형놀이할때 바비나 미미인형에게나 입힐법한 옷들뿐이잖아! 인간 옷은 없냐! 여왕님 잠옷이 나아보일정도로 레이스랑 프릴이 다닥다닥 붙은거보고 식겁했다. 그러다 '아 여기 장난감이 사는 곳이지'하고 깨달아버렸지. 처음부터 여기서 정상적인 옷을 살 수 없는거였어!
[왜 그래 마스터?]
"…… 여기 터가 안좋은가."
기계로 만든듯 깔끔하게 잘린 도로, 성벽의 절단면과 이 주변 거리를 볼때마다 속이 안좋아진다. 풍수지리설이라는거 의외로 설득력이 있는거였냐.
========== 작품 후기 ==========
유에(yue)는 중국어로 달이라는 뜻입니다. JMS에서 은월의 이름이기도 하죠. GMS의 셰이드랑 유에중에서 뭘로 할까 고민했는데 역시 은월 이름엔 달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야한다는 어떤 분의 코멘이 있었던고로...
참고로 검호가 지나갔던 거리는 사이키커랑 싸웠던 거기. 머리는 기억 못하지만 몸은 트마우마때문에 거부하면서 반응하는겁니다.
@여행자구름 - 오타아닙니다. 검호는 현 시점의 은월 이름은 몰랐지만(이제 알았고) 걔가 잊혀진 영웅 은월이라는건 알았고, 뭐라 지칭할지 몰라서 자기가 아는대로 생각한거니까요.
@니들이야자를알아 - 그냥 검호 스킬자체를 못 베껴요. 그대로 따라하면 반신불수같은거 될 수 있거든요. 스킬이 요구하는 신체능력이 진짜 괴랄해서, 게임식으로 설명하자면 검호가 평소에 제일 많이 쓰는 발도술은 최소 STR 2000쯤 필요함
@Blake117 - 검호는 이번에야말로 단벌신사에서 탈출하려 했으나 실패했음.
@Sisre - 트립퍼는 세계의 규칙에서 애초에 벗어나있습니다.
@Eluines - 그리고 겨우 지은 은월 이름. 프리드는 네이밍 센스 좋을거야...
@예리카 - 고로 팬텀 키울땐 사람많은 서버에서 키워야함.
@칼크래프트 - 검호가 단벌신사인 이유는 매우 현실적입니다. 빨래도 못하고 바느질도 못해서 안빨아도 되는&안 고쳐도 되는 옷만 주구장창입는거.
@레시코 - 근데 사도 세탁을 못하잖아?
@신령각 - 이 봉인석 관련 에피소드를 끝내는대로 1부가 끝날듯.
@Novel알케미스트 - 검마 친구설에 이어 에피네아 연인설이 나옴.
@적현월 - 몇 년동안 딱 2벌로 생활해서 본인도 슬슬 지쳤음.
@소라루 - 정확히는 자신이 사용할 수 있게 고친겁니다. 약화됬다기보단 개량된거... 지만 검호가 직접 날리는 스킬보다는 못할 수 밖에 없죠.
@kiu2424 - 심지어 레전드급 잠옷이었음.
@Pote - 이제 이름이 나왔으니 존재감이 상승! 하려나...?
@Ratios - 크로스 블레이드임. 검호가 그나마 잘 쓰는 스킬.
@허공말뚝 - 평타에 가까운 스킬이죠 엄밀히 따지면.
@뭉글이 - 검호 본인도 그 생각을 함.
@좌절거북이 - 본인은 지독하게 불운하면서 남한테는 행운 쩜.
@Keisha - 그리고 저는 위키를 뒤졌습니다. 아주 틀린건 아니에요! JMS에선 저게 공식 이름이니까!
@Dt월 - 지금까지 계속 입었는데 앞으로도 쭉 입힐거임. 등장인물 옷 서술하는게 얼마나 귀찮은데! 그런걸로 본문을 몇 줄씩이나 낭비할 수 없음.
@Nn레논 - 그리고 에피네아의 옷으로 만들어진 봉인석은 훗날 검마를 봉인하는데 쓰였다고 생각하면...
@sonage - 근데 원본 그대로 썼으면 스킬 한 번 쓸때마다 hp가 퍼센테이지 단위로 깎였을거임. 디버프는 덤.
@책벌레씨 - 매우 적절한 이모티콘이었습니다. 보면서 큭큭 웃었음.
@핑구친구 - ...오잉!? (에피네아의 옷)의 모습이...! 축하합니다! (에피네아의 옷)은 봉인석으로 진화했습니다!
@ReFrante - 아뇨 알리샤 대신 검마와 싸워 영웅들이 봉인할 수 있을만큼 힘을 깎는다는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