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호입니DA-86화 (86/208)

<--  -->  프리드side.

잠시 꺼져버린 의식에 겨우 빛이 들어왔다.

"크으……!"

[괜찮나 프리드?]

"그렇다고 말하고 싶은데…… 꼴이 말이 아니네."

천장이 무너질때 급히 방어막을 펼쳤지만 워낙 파편이 많고 무거워서 삼십간에 깨져버렸다. 그래도 대부분은 아프리엔이 막아줬지만 그 중 하나가 영 좋지 않은 곳에 떨어졌다. 이래서야 더 싸우는건 물론 지금 당장 걷는것조차 무리겠군. 내가 끙끙거리며 놓쳐버린 지팡이를 줍는 사이, 아프리엔이 내 하반신을 깔아뭉겐 파편을 치워냈다.

두 다리가 살색이 보이지 않을정도로 피범벅에 일부 허연 뼈가 드러나있었다. 그 광경에 뒤늦게 무수히 많은 바늘이 꽂히는듯한 고통이 척추를 타고 뇌를 두들겨 이를 악물어야했다.

[프리드…….]

"괜찮, 아. 그래도, 봉인 준비는 확실하게 끝냈으니까."

나는 용케 부서지지 않은 지팡이를 들어 루미너스에게 몇자락 배운 빛 마법과 회복 마법을 병행에 어찌어찌 상처를 치료했다. 물론 다 치료된건 아니었고, 피부가 채 덮히지 않아 벌건 근육이 다 보이는 형태였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낫다.

물론 다리가 어느정도 나았다는거지 피가 울컥울컥 나오고 있는 파편이 박힌 복부가 괜찮다는건 아니다. 나는 별 수 없이 아껴두었던 포션을 꺼내 파편을 꺼내며 상처부위에 뿌렸다. 이거까지 마법을 써서 치료하면 봉인을 작동시킬 마력이 부족하다.

겨우 지팡이에 몸을 맡겨 힘겹게 일어난 나는 나와는 달리 사지는 멀쩡하지만 이마가 길게 찢어진 메르세데스를 확인했다. 밝은 금발이 붉은색으로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었다. 하필 머리를 다쳐버린건가. 부위가 부위인만큼 함부로 손댈 수 없었다. 특히 이런 상황에서는.

다음 순간 파편너머로 연이은 폭음과 눈부신 빛이 명멸했다. 루미너스가 왔구나! 오면서 군단장들을 몇 명 상대하느라 어느정도 지쳤을지도 모르지만 이쪽도 검호씨가 있는만큼 아주 불리하지도 않다. 여전히 욱씬거리는 다리의 통증을 애써 무시하며 탐지 마법을 써서 유에를 찾으려고 했다. 그럴 필요는 금방 없어졌지만.

"프리드!!"

"무사하네…… 정말 다행이다."

"그보다 넌 괜찮나?"

"방금 치료했어."

파편을 한 손으로 집어던지며 뛰어온 그를 보고 몸이 괜찮냐고 물을 필요가 전혀 없음을 알았다.

"싸움은 어떻게 되고있어?"

"루미너스가 왔다만, 다소 복잡해졌다."

"뭐?"

"지금 신전 한쪽에서 남은 군단장이랑 아란과 그 여자가 싸우고 있다고 한다."

"아란이 왔어?! 거기다 남은 군단장이라면……."

오면서 나와 메르세데스가 싸운 군단장은 힐라, 팬텀쪽은 아마도 윙마스터중 하나, 루미너스는 구와르 혹은 매그너스를 상대했을테니 남은 군단장은 반 레온과 아카이럼 그리고─

"─ 프라이쉬츠."

"반 레온은 그의 드래곤이 쓰러뜨렸다고 했다. 아카이럼은 이유는 모르지만 나타나지 않았고, 매그너스는 구와르를 통수치고 어딘가로 사라졌다고 한다."

새삼스럽지만 군단장이라는 조직 상당히 콩가루구나.

도와주러 가고싶었지만 무리인걸 알기에 나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그 세 명이면 어찌어찌 상대는 가능하리라 믿었다.

"그런데 손에 그건……."

"그가 집어던진걸 주웠다."

유에가 허리에 끼고 있는 무언가는 상당히 익숙한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언뜻 핏물을 쏟고있는 것처럼 보여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마족 특유의 푸르스름한 피부는 원래부터 그랬지만 지금은 더 시체처럼 보이고.

"살아있어?"

"숨은 붙어있다."

그게 유감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나는 복잡한 눈으로 마족 군단장을 볼 수 밖에 없었다. 군단장들중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힘과 광적이라 해도 좋을 충성심을 가진 그가 우리를 도울줄은 몰랐고, 단순히 부하에게 서신을 전달하게 했을뿐 아니라 직접 검은 마법사와 싸웠을줄은 더더욱 몰랐다. 어떤 의미로는 우리보다 더 그자의 강함을 잘 알고 있었을텐데.

한편 파편더미를 벽으로 두고 건너편에서는 칠판을 손톱으로 긁어내리는듯한 소음과 계속되는 빛의 폭발이 이어지고 있었다.

"유에, 너도 가."

"하지만 프리드 넌!"

"괜찮아. 그래도 좀 쉬어서 마력도 어느정도 회복됬고, 난 이제 슬슬 봉인을 작동시켜야 하니까 대신 그를 상대해줘. 지금 걷는게 좀…… 많이 힘들거든."

어찌됬든 내가 직접 봉인을 활성화하는건 글렀다.

시간의 여신 륀느시여, 저에게 가호를.

***

루미너스side.

프리드가 계획한 루트로 신전을 가로지르다 고막이 터질듯한 굉음과 마력이 휘몰아치는걸 느끼고 잠시 망설였다가 그쪽으로 향했다. 현재 신전에 남아있는 군단장들중 누군가와 동료들이 싸우고 있을거라 예상했고, 실제로도 그랬는데─

"아란?!"

"당장 이 자리에서 벗어나!"

마하를 휘두르며 벌집처럼 구멍이 뻥뻥 뚫린 바닥을 뛰어올라 참격을 쏟아붓는 그녀의 모습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대체 언제, 어떻게 그녀가 온거지?

"표적이 제 발로 여기까지 왔군."

"숙여 멍청아!"

찢어지는 외침에 반사적으로 확 몸을 바닥을 향해 날렸다. 황금색 빛줄기가 좀전까지 머리가 있던 지점을 불사르며 날아들어왔고, 형태가 남아있던 기둥들은 순식간에 돌조각으로 화했다.

이어서 강판처럼 바닥에 쫙 갈려서 쓰라린 얼굴을 문지르지도 못하고 그 즉시 옆으로 굴러야했다. 고열의 뭔가가 연이어 쏘아져서 집요하게 나를 쫓았고, 악사 여인은 얼음벽을 일으켜서야 그 폭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현재의 문을 향해 달려! 다른것에 한눈팔지 말고 그것만 해!"

울부짖듯이 외쳐진 말에 겨우 몸을 일으켜 텔레포트를 사용해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란이 뒤를 맡기라는 말을 언뜻 했던 것도 같다.

어떻게 그녀들이 여기에 와서 그 남자와 싸우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계속 들었지만 그것에 신경쓸 여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검은 마법사에게 가야하니까. 본래 내가 가는 루트에서 만날 예정이었던 구와르 혹은 매그너스는 어쩐 영문인지 초반에 둘이서 싸우다 동귀어진하다시피 퇴장했고, 그덕에 나는 다른 동료들과 달리 어떤 군단장도 만나지 않고 계속 갈 수 있었다.

누가 누구랑 싸우고 있는지 그곳에서 벗어난지 꽤 되었음에도 폭음이 계속 울렸다. 아니…… 점점 가까워 지고 있어?!

[이쯤되면 좀 포기하란 말이야!!]

[웃기지 마라!]

천장을 무너뜨리며 나타난 시뻘건 갈기를 가진 사자수인, 반 레온이 상처투성이의 몸을 일으키며 포효했다. 하늘에선 그에 만만치않게 거대한 - 아니 그보다 더 큰 압도적인 거체의 아프리엔과는 다른 오닉스 드래곤이 선회하며 고함쳤다.

[이미 모든게 늦었어! 너도, 니 나라와 백성들도! 당장 진혼해도 모자랄판에 엉뚱한 곳에서 삽질하지 말라고!]

[그럼 나더러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거냐? 그들에게 모든걸 잃어버렸는데, 복수조차 하지 말라고?!]

[그 복수 대상은 옛저녁에 사라졌잖아!! 뭘 더 없애겠다는거야!]

심판의 빛기둥이 연달아 내리꽂혔다. 드래곤은 이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이어서 푸른 전격의 구체를 만들어 사자수인에게 쳐박았다. 그 눈부심에 소매자락으로 눈을 가렸다.

[…… 누가 복수를 말리냐고. 선을 넘어버렸으니까 문제지.]

후우, 지져진 사자수인에게 냉기어린 숨결을 내뱉은 그의 드래곤은 그제서야 나를 보았다.

[아, 너구나?]

"왜 당신이 여기 있는거지?"

[신전 외곽을 돌면서 군단장을 상대하라고해서 말이지. 난 몸이 커서 신전에 안들어가지니까. 현재의 문은 저쪽이니까 데려다줄게.]

날개를 한쪽만 펴서 방향을 가리킨 드래곤은 나를 휙 태우고는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마스터가 사망했음에도 계약자의 강함에 비례한 힘을 상당부분 유지하고 있는 저 드래곤을 끌어들이다니, 대체 언제 그런 일을 한거야 프리드.

"그런데 어떻게 밖에서 안으로 보낼거지?"

[그야 당연히─ ]

쿠웅!! 신전의 한 부분의 천장이 통째로 금이 가며 온갖 마법들이 솟구쳤다. 오닉스 드래곤은 급히 몸을 틀어 높이 날아오름으로 그것을 피해냈다.

[생각할 필요 없어졌네. 저기가 현재의 문이야.]

"저기가……."

흙먼지가 구름처럼 일어나지만 그 너머로 느껴지는 존재에 의해 숨길 수 없는 오한이 들었다. 샤이닝 로드를 꽉 잡은 손이 잘게 떨렸다.

[착지 준비해. 바로 떨어뜨릴테니까.]

"데려다줘서 고맙다."

[별 말을. 열심히 싸우기나 하라고 영웅씨.]

진짜 영웅의 파트너에게 들은 영웅이란 말은 굉장히 낯간지러워서 뭐라고 대답을 못한 나는 심호흡을 하고 뚫린 천장의 구멍으로 뛰어내렸다.

"─ 이제 끝이다! 검은 마법사!"

두 번째 싸움이다. 그리고 이번이 마지막이 되어야 한다. 그때처럼 누군가를 잃어서도 안되고, 실패해서도 안된다.

[어리석은 불나방이 또 한 마리 날아들어왔군.]

사람의 것이라 생각되지 않은 심연에서 기어나오는듯한 목소리. 죽음과 같은 공포를 마주하며 고개를 들고 허리를 펴는건 어느때보다 힘들었다. 먼저 도착한 동료-유에가 떨어진 천장 파편을 치워내며 말을 걸지 않았으면

"이제 오다니 늦었군."

"미안하다. 중간에 아란이랑 그 악사 여자가 군단장 프라이쉬츠랑 싸우는 곳과, 그의 드래곤이 반 레온이 싸우는 곳을 지나오다가 좀 늦었다."

"다른 군단장들은?"

"아카이럼은 모르겠고, 신전 입구쪽에서 구와르와 매그너스를 만났는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매그너스가 반쯤 이성을 상실한채로 구와르를 습격해 그의 정수를 취하고 달아났다."

덕분에 굉장히 고생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부하들의 만행을 들었음에도 검은 마법사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른 동료들은 어디있지."

"처음부터 오지않은 아란을 제외하면 팬텀만 빼고 다 왔다."

"그 좀도둑이……."

잘난척하더니 결국 못 온건가. 어느 군단장한테 발목잡혔을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살아돌아갈 수 있다면 반드시 따져야겠군. 아란도 어찌어찌 와서 싸우고 있건만.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잠시 찾아볼테니 부탁한다."

갑자기 자리에서 몸을 빼며 벽처럼 쌓여있는 파편너머로 달려가는 유에의 모습에 기가차는걸 넘어서 어이없는 감정이 들 때, 그가 달려가는 방향으로 보인 사람을 보고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몸이 굳으며 왜 그가 그런 행동을 했는지 누가 설명해주지 않았음에도 단숨에 알 수 있었다.

터무니없는.

"…… 언제까지 보고 있을거지."

"왜, 당신이?"

"멍청아 앞!"

목이 꺾어다시피 머리가 확 앞으로 쳐박혀졌다. 벌려져있던 거리가 무의미하게 순식간에 그가 달려와 내 뒷통수을 잡아 바닥에 박아버리기 직전에서 멈췄다는걸 한 박자 늦게 알았고, 코앞까지 날아든 사슬을 그가 맨손으로 잡아 연결고리를 박살내는걸 보았다.

[정말로 쓸모없는 놈들을 왜 계속 옆에 두는건지 모르겠군.]

"니놈의 콩가루 군단장들보다는 낫다."

비꼬는 말과는 달리 어조는 높낮이가 거의 없었다. 더없이 익숙한 낮게 깔린 저음과 마법마저 쳐내는 검격은 더 볼 것도 없이 눈앞의 그가 정말로 진짜임을 알게해줬다.

"검호……."

"싸우기나 해라."

분명 확실하게 죽었으면서 어떻게 살아돌아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렇게 적절한 때에 나타났는지 묻고싶었다. 하지만 상대가, 상황이 그럴 수 없게 만들었다.

「두 사람 모두 들어줘. 이제부터 검은 마법사를 봉인시킬거야.」

뇌내로 울리는 프리드의 목소리에 그가 무사하다는 것을 알고 안심했다. 통신 마법이 이어졌다.

「봉인의 방식은 검은 마법사가 륀느님으로부터 빼앗은 시간의 힘을 역이용하는 것으로, 아무리 그라 해도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거야. 다만 봉인을 발동시키려면 검은 마법사로부터 시간의 힘을 이끌어내야해.」

시간의 여신을 직접 대면하고 그 힘을 연구해온 프리드가 만든 마법. 일전에 아프리엔과 함께 연구하는걸 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다.

「좀 전에 검호씨가 검은 마법사의 시선을 끌 때 나는 이 일대에 봉인을 설치했어. 그러니 이제부터 두 사람은 내가 잠시 시간을 멈춰서 검은 마법사가 눈치 못채게 하는동안 봉인들을 활성화시켜줘.」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시간이 얼어붙었다. 넘실거리는 어둠도, 피어오르던 흙먼지도. 모든것이 멈췄다.

"…… 검호. 이 일이 끝나면 내 질문에 대답해줄 수 있나?"

"물론."

"그럼 그때 마저 얘기하도록 하지."

파편더미 너머에서 뛰어온 유에와 나는 프리드가 설치한 봉인들을 활성화시켰다. 검호 그는 봉인의 활성화대신 제 검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정지가 해제되는 즉시 검은 마법사에게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봉인을 모두 작동시켰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검은 마법사에게서 시간의 이끌어내기만 하면 돼. 물론 작은 조건 하나가 있지만.」

조건? 프리드는 그것이 작다고 말했지만 경험상 그리고 직감상 결코 작지않을것 같았다. 아니나다를까.

「봉인을 발동시키기 위해선 한 사람의 모든 시간, 즉 '존재'가 필요해. 제물 혹은 대가라고 해야할까. 아 울상짓지마. 이건 내가 할테니까.」

그게 무슨 헛소리야! 반사적으로 소리를 높였다. 머리속으로 뇌가 울릴 소리가 직격했음에도 프리드는 장난치듯이 말을 대답했다.

「이걸 만든건 나니까 당연히 내가 해야지. 그리고 나도 한 번쯤은 주인공 노릇 해보자. 매번 너희 뒤치닥거리만 하느라 지쳤다고.」

농담도 이정도면 끔찍하게 질이 나쁘다. 더 이상 동료들이 죽는걸 볼 수 없다. 검호 그는 이 자리에 살아돌아왔지만, 그때 그 순간 죽음을 보았을때 더이상 주위의 누군가가 죽는걸 더이상 겪고싶지 않아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프리드는 결심을 되돌릴 생각이 없어보였다,

"내가 하지."

"유에……?"

「너까지 왜그래? 메이플 월드의 운명이 달린 일이야. 감정적으로 대처할 문제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내가 하겠다는거다. 지금 프리드 니 몸상태로 봉인을 감당하는건 무리고, 루미너스 너는 봉인을 발동시키는데 필요한 빛의 힘을 써야하잖아. 검호 당신은 더 말할 필요도 없고."

검은 마법사에게서 시간의 힘을 이끌어낼 수 있을만큼 몰아붙일 수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논외였다.

"하지만 존재를 걸어야 하는 거야! 제물이라고! 죽는다는 말하고 뭐가 달라?!"

"어차피 누군가가 해야할 일이라면 내가 하는 게 맞아. 나한테는 너희들처럼 짊어지고있는 뭔가가 없으니까."

자색 눈이 호선을 그렸다.

"감상적인 대화를 계속하기엔 장소도 별로고, 나중에 저승에서 마저 하지."

"잠깐."

봉인을 향해 걸어가는 유에를 검호가 막아섰다.

"왜 막는거지?"

"하나 묻겠는데, 넌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나."

"물론."

"만약 다시 한 번 똑같은 선택의 기회가 온다해도, 똑같이 할 수 있을 것 같나."

"기꺼이."

"내 생각에 넌 그럴 수 없을거다."

"……."

흘려넘기기엔 담겨있는 뜻이 굉장히 심오했다. 결국 그는 길을 비켜줬지만 내려깐 눈으로 유에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고 있어 뭔가를 알고있는듯했다.

"미안…… 하다."

"천만에."

봉인식에 빨려들어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이를 갈았다. 심장이 단검이 후벼파인 것처럼 아파왔다. 활성화시킨 봉인의 기둥에 푸른 빛가루가 휘날리고, 그때서야 멈춘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아있는 사람은 계속 살기위해 발버둥치라는 신호탄이 터졌다.

***

파픈스타side.

"후우우……."

다리가 후들거린다. 나는 호흡기가 얼어붙을만큼 찬 공기를 폐부 깊숙히 들이마셔서 몽롱해지려는 정신을 애써 깨우며 몇안되게 서있는 기둥을 짚고 일어섰다.

"죽겠네 진짜."

머리부터 발끝까지 멀쩡한 곳이 없다. 트윈테일중 하나가 날아가 산발이 된건 애교수준이다. 총알을 잘못맞아 왼팔은 팔꿈치 아래로 완전히 날아갔고, 다리는 하나씩 각자 꺾이고, 불에 그을린 뒤에 관통되어 피도 흐르지 않는다. 이 와중에 기타는 또 흠하나 없이 멀쩡해 위화감이 장난아니다.

만신창이가 다 됬지만 그럼에도 웃을 수 있는건 이겼기 때문이다.

갑자기 발생한 충격파와 굉음때문에 땅이 흔들린 틈을 타 간신히 얼음으로 프라이쉬츠를 포박한 1초도 채 안되는 찰나, 아란의 폴암을 정통으로 맞은 그는 어깨부터 골반까지 이어지는 짐승의 할큄같은 길고 깊은 상처를 입었다. 거기다 다리에 얼음송곳을 두 개나 박아넣었으니 생존을 기약하긴 힘들 것이다. 설령 살아난다 해도 지금 당장 검은 마법사가 있는 곳에 가지는 못할거고.

[곧 죽을지도 모르는데 태평하군.]

"이정도로는 안죽어."

나는 손가락 3개가 골절된 오른손으로 기타줄을 튕기며 갈라진 성대로 노래했다. 통증이 밀려왔지만 어차피 지금 안아픈 곳이 없다. 하향평준화 끝내주네.

먼저 날아간 왼팔이 돌아왔고,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마신다음 마저 마법을 써 화상을 입고 관절구조상 불가능한 방향으로 꺾인 두 다리와 잿더미가 된 머리카락, 장기가 쏟아지기 직전의 배까지 모두 복원했다.

[…… 사기네.]

"난 힐러라서 내세울게 이거밖에 없거든."

[내 주인보다 힘이 센 마법사가 할 말이 아닌데.]

"스텟상 그럴뿐이지 경험이랑 스킬로 따지면 아란보다 밀리는게 현실이거든. 그래서 그녀의 도움이 절실했고."

실제로 마지막에 그놈에게 치명상을 가한건 그녀였다. 나는 널브러진 아란에게도 회복 마법을 걸어줬다. 이러면 나중에 봉인에서 깨어난 후에 기억을 잃지 않을지도 모르겠네.

[그놈 안쫓을거냐.]

"그럴 시간 없어. 어찌됬든 이쪽은 끝났으니 이제 도우러 가볼 생각……."

두웅──.

심장이 멎어버릴듯한 거대한 울림이 퍼졌다. 그 순간 나는 직감했다. 검은 마법사가 봉인되고 있는 것을.

내가 일으킨 냉기와는 차원이 다른, 영혼마저 얼리는 추위가 몰려들어왔다.

***

검호side.

결국 아는대로 되어버린것에 기뻐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모르겠다. 반 레온과 싸우고 있다는 아스카와 프라이쉬츠와 사생결단을 내고있는 파픈스타에 대한 걱정마저 뒷전이 되버릴만큼 머리속이 복잡해졌다.

유에-은월은 스스로 제물이 되길 선택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의 선택이니 그것을 존중해야했지만, 그러기엔 어째선지 끊임없이 이건 뭔가 아니라는 외침이 멈추지 않는다.

'……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잖아.'

나는 마법사가 아니다. 검사라도 반푼이에 불과하고, 겁쟁이라서 내가 대신 희생하겠다는 말도 못하고 입다물고 있다가 어설픈 동정심에 가로막아서 질문이나 하고 앉아있었다.

프리드는 봉인을 진행시키고, 루미너스는 검은 마법사와 싸우며, 은월은 봉인을 위한 제물이 된다.

더럽게도 깔끔한 역할분배였다. 끼어들 여지따위 눈꼽만큼도 보이지않아서 절로 욕이 나올정도로.

'여기서 죽고싶지 않단 말이야.'

검은 마법사의 힘은 흡수할만큼 흡수했다. 소매 안쪽으로 감춘 팔찌는 흉흉한 적보라색으로 물든지 오래였고, 만약 내가 제물이 됬으면 생존은 어찌어찌 한다쳐도 수 백년 뒤에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건 절대적으로 사양이다.

소중한 사람에게 잊혀진다는게 얼마나 슬픈 일인지 나는 모른다. 다만 비슷한 일을 겪은 첫 번째 트립퍼가 그 일을 벌인 그년에게 쌍욕을 퍼부으며 저주했다 했으니 내 상상을 초월할정도로 고통스러운건 확실하다.

무력감에 늘어지는 몸을 애써 움직이며 삐걱거리는 어깨를 휘둘러 사슬과 어둠의 창을 부쉈다. 공중에선 루미너스가 텔레포트와 마법을 동시에 쓰면서 사슬들을 치워내 검은 마법사에게 접근할 공간을 확보하고 있었다.

"하아아압──!"

셀 수 없이 많이 뭉쳐져 쏘아지는 빛다발과 흑염룡이 미쳐날뛸듯한 검은 불꽃이 부딪혔고 마침내…… 봉인이 가동되었다.

밤하늘의 별자리를 그대로 끌어내린듯한 점과 선으로 이어진 찬란한 빛의 직물속에 갇힌 검은 마법사를 보며 한 차례 숨을 골랐다. 그 아름다운 베일을 찢어내며 흉측한 손을 뻗을때, 무어라 중얼거린 루미너스가 봉인진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 다시 달려드는 뒷모습을 본 내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너같은 어둠한테, 질까보냐! 검은 마법사…… 나와 함께 가자!!"

좀 전에 한 사람이 희생되는걸 봤는데, 또 그 꼴을 보고싶진 않단 말이야!!

몸의 절반이 새카맣게 물들어가는 루미너스를 힘으로 떨어뜨리려고 했지만 빛의 직물에 얽힌 그의 손을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드디어 잡았군.]

시체같은 손에 붙잡힌 것은.

[그대라면 이놈을 외면하지 않을거라 믿었네. 그 애송이가 쓸만한걸 만들었어.]

팔찌를 차고있는쪽 팔의 살갛을 파고들정도로 세게 나를 움켜쥔 그에게서 피비린내가 났다. 암흑만 펼쳐진 로브 안쪽으로 금방이라도 피가 쏟아질것처럼 크게 벌어진 상처가 보였다.

저게, 아직도?

[내가 가진 시간의 힘과 타인의 시간의 힘을 공명, 역이용한다…… 무슨 수를 쓸지 눈에 훤히 보이더군.]

검은 마법사는 하얀 마법사인 시절부터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실력과 지식을 가진 마법사였다.

[그리고 그대의 몸은 시간의 힘으로 이루어져 있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에 존재하는 모든 근육이 뜯겨져나가는 고통이 두개골을 부수며 들이닥쳤다.

========== 작품 후기 ==========

검마 머리 좋습니다. 애초에 칭호자체가 검은 '마법사'잖수. 마법사는 올 INT.

여러분 추석 잘 보내셨죠? 저는 매우 잘 보냈습니다.

@이년아 - 정확하게 예상하셨습니다.

@핑구친구 - 신전은 륀느꺼니까 륀느한테 줘야죠.

@Blake117 - 적절한 비유군요.

@하늘을보는바람 - 그래도 루미너스 할거 다 했어요. 검호는 마법을 못쓰므로.

@루엔시르온 -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이 있지만 '적'인건 확실합니다.

@여기돈까스요 - 반짝이자식.

@대어의예감 - 유에가 사라져서 검호는 다소 쓰린 심정.

@karuma - 블리치 세계관이었으면 설명하기 전에 먼저 달려들어서 쓰러뜨릴듯.

@ReFrante - 그 주인공 보정도 위태롭네요 하하.

@허공말뚝 - 다이아몬드 코팅했나봄.

@여우별65 - 데몬은 여기저기 집어던져짐.

@레시코 - 소재가 부족해지면 출연시킬게요.

@썬키 - 심지어 뒤끝도 안좋음.

@vestie - 아 저 중2너스 검마닮아서 저런거였구나~ 란 심정.

@qkzks135 - 검호 망했어요.

@베이르타 - 착각계가 있으나 없으나 고생하는건 똑같음.

@칼크래프트 - 그래도 법사캐라 검호가 못하는거 다 해줬으니 그걸로 퉁칩시다.

@노란우산s - 쓰다보니 이번 화는 용량이 좀 많아졌네요. 그래봤자 대부분이 루미너스 입장이지만.

@키하라스티카 - 늦어서 죄송합니다!! 다음주가 학교 축제라서리...

@패러디좋아 - 검호 입장에서 루미너스의 등장은 '저놈 분위기 브레이커인가'였습니다.

@적월식 - 검호는 노화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트립퍼들은 불로임.

@넝기 - 일단 메이플 패러디작이 많지 않다는건 둘째치고 말이죠...

@여행자구름 - 하드 스우와 검호가 붙는다면 검호가 이깁니다(단호). 혼자는 물론 아스카가 있으면 더더욱 확실하게요.

@Eluines - 개그캐 보정같은걸 받으면 불사신될듯.

@Ratios - 죄송합니다. 코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소라루 - 빛의 힘빨로 어떻게든 성공. 그보다 힘의 대부분을 아직도 막고있는 검호가 입힌 상처덕이 더 크지만.

@적현월 - 뎀딜은 적었지만 나름 활약했어요.

@Buche - 파픈스타는 생존했지만 구체적인 결과는 다음 화에.

@Sisre - 루미너스 머리 수난사. 이번화에 두 번이나 땅에 쳐박히고 박힐뻔함.

@책벌레씨 - 수백년 뒤로 날아갈 준비 끝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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