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호입니DA-90화 (90/208)

<-- 역사왜곡이 여러모로 굉장하다 -->  검호side.

경첩에 기름칠안한지 한 50년쯤 된듯한 문처럼 뻑뻑한 눈꺼풀이 겨우 들어올려졌다. 질척한 흙천장이 보였다.

"여긴……."

「이제야 정신을 차린거냐? 당초 예상보다는 빠르지만 상태에 비해서는 늦어.」

웅웅 울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려고 했는데 온몸이 전기에 감전된것처럼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프다기보다는 말을 듣지 않는, 척추를 다쳐 특정 부위가 마비된 장애인처럼.

「무리하게 움직이려 하지마라. 지금 니놈 몸뚱아리는 세포단위로 분해했다가 다시 짜맞춘거나 다름없거든.」

"그건, 무슨 말─ 윽!"

「거기다 너는 몸을 않움직인지 몇 백년이나 되서, 사후경직이 왔어도 한참 전에 왔을거다.」

않움직인지 몇 백년? 사후경직? 대체 무슨 말을 하는건지 곧바로 알아듣지 못해 뿌옇게 안개가 낀 머리속을 한참 헤집었다. 가장 최근의, 기억의 끝자락을 간신이 움켜쥐어 당겨내보니─

가끔씩 정신을 잃기 전에 보이던 붉은 시야와는 다른, 피색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신물이 올라왔다.

「떠올리지 마라. 고통스러운건 굳이 상기할 필요 없으니까.」

"난…… 어떻게 살아있는 거야."

「니놈을 살려내는데 내가 얼마나 생고생했는지 모를거다. 그나마 구조를 모두 외우고 있으니까 시도나마 할 수 있었지, 아니었으면 그마저도 못했을거고 넌 뒈─졌─어.」

기분나쁘게 늘어지는 목소리에 끙끙거리며 고개를 돌리기 위해 애썼다. 살려준건 절하고싶을만큼 고마운데 그 고마운 감정이 초고속으로 증발해버릴만큼 아이의 목소리는 재수없었다. 담에 걸린 것처럼 잘 움직여지지 않는 목을 끼릭끼릭 겨우 돌려 아이를 본 나는 메두사와 눈을 마주친 사람처럼 굳어야 했다.

내가 기억하는 그 아이는 무엇보다 아름다운 푸른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성별불명의 어린애의 모습 혹은 온갖가지 해양생물을 합친듯한 생김새의 거대한 생물체, 둘 중 하나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건 어느쪽도 아니었다.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드래곤의 모습에 식물을 섞은듯한 기괴한 생김새. 뿌리와 가지, 잎사귀로 뒤덮인 가운데 드문드문 열매와 꽃이 보였다.

"뭐야 그거?"

「니놈 고칠 힘이 모자라서 모습을 바꾼거다. 여긴 지하니까 물고기보단 식물이 더 나을것 같아서.」

"아니, 그게 아니라 어째서."

니가 아스카를 닮았냐고.

나무 껍질과 잎에 뒤덮였지만 그 윤곽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몇 년이나 옆에서 봤는데 못 알아보면 그냥 사시인거지! 뿔의 갯수과 휘어진 정도도 외우고 있는데!

「…… 내 힘으로는 널 고치는게 힘들어서 그 도마뱀놈 몸을 빌렸다. 일종의 빙의 상태인거지.」

"돌려줘."

「좀 힘든데. 몇 백년동안 이 상태였다고.」

"당장 돌려달라고!"

말뽄새 보소. 아이는 혀를 찼다.

은월이 봉인의 제물이 되는걸 코앞에서 보고, 루미너스를 구하려다 대차게 말아먹었는데 이젠 눈뜨니까 아스카까지 몸을 뺏겨? 운명의 여신이란게 있다면 보자마자 멱살잡아 패대기쳐 버릴거다. 나는 저릿저릿한 몸을 일으켜서 아이를 노려보았다.

「젠장 괜히 고쳐놨어.」

기괴한 나무의 용에게서 푸른 빛이 빠져나왔다. 그와 함께 사방으로 뻗어져있던 가지와 잎들이 급속도로 말라붙어 후두둑 떨어졌고, 공터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아스카는 엄청 작게 쪼그라들었다. 거의 여자애들이 안고다니는 곰인형만큼.

"아스카!"

"챙겼으면 나가. 어차피 넌 할 일도 없으니 앞으로 맘대로 해."

"……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단어 그대로지."

아이의 뾰족한 시선이 꽂혔다.

"그 빛의 초월자가 다 엎어버린 판을 대체 누가 정리했을 것 같아?"

나는 똑똑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멍청하지도 않았다. 눈앞의 아이말고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거기다 나 대신 초월자의 힘을 모으러 갈 사람 역시 한 명 뿐이었다.

"파픈스타는?"

"니가 골로가버린 직후에 그 악사는 그란디스로 갔다. 메이플 월드 기준으로 몇 백년도 전에 말이지. 슬슬 디멘션 게이트가 안정화될거고, 그때쯤에 어떻게 됬는지 알 수 있을거야. 결론은 그쪽 소식이 전해질때까지 니가 할 일은 없다는거고."

지금 내 얼굴이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었다. 눈을 떴는데 수 백년이 지났고, 나는 죽었다 살아났으며, 파픈스타는 나 대신 그란디스로 갔다고 한다. 초월자들을 찾으러.

"그럼 난……."

"알아서 해. 달라진 메이플 월드를 여행하던지, 슬슬 깨어날 영웅놈들 찾으러 가보던지. 또 아니면 시간의 신전에 봉인되있는 빛의 초월자 감상하러 가던가."

마지막건 못 들은걸로 하고 나는 아이를 보았다.

아스카의 몸에 빙의됬다는 말에 순간 눈이 돌아갔었지만 죽어가던 나를 살린건 분명 저 아이였다.

"살려줘서 고마워."

"차~암 일찍 말한다. 얼른 꺼져."

등 뒤에서 드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천장에 퍼진 나무 뿌리가 벌어지며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아, 그 도마뱀이 작아지긴 했지만 그건 약해져서가 아니라 크기를 조절할 수 있어서야. 제 몸이 너무 커서 시간의 신전에 못 들어간게 한이 된것 같더라고. 그래서 능력 좀 줬어."

"…… 정말 고마워."

"착각마라. 니가 좋아서 도운게 아니니까."

대사는 참 좋은데 그걸 말하는 아이는 라노벨이나 애니에서 나온 여느 츤데레처럼 말을 더듬지도,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그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검은 마법사와 군단장은 어떻게 됬지?"

"몰라. 아까도 말했지만 빛의 초월자가 봉인되어있는건 확실해. 근데 언제 나갈거야."

"곧 갈게. 그전에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되나?"

"뭔데."

계단에는 참 친절하게도 적절한 높이의 난간이 있었다. 막 깨어나 몸을 움직이는데 많이 불편한 나를 위한 것처럼.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면 왜 날 살려준거지?"

"…… 니가 내 봉인을 풀어줬잖아."

너무도 상식적인 대답에 순간 멍해졌다가 진짜로 감격했다. 그년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개념이 박혀있다는걸 알아서인지 멍청한 웃음이 흘러내렸다. 아이가 '안가고 뭐해?!'라고 짜랑짜랑 외쳐서야 황급히 움직였다.

나는 아이에게 깊이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한다음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지상으로 나온뒤에야 나는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걸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썩을, 미친, 빌어먹을.

"이 무슨 거지같은?"

나는 달려드는 스포아와 달팽이들을 쳐내며 나무 위에 끙끙 올라왔다. 조금 움직였을뿐인데 몸이 뻐근하고 숨이 차는 현재의 상태에 울상보다는 웃음이 나왔다. 당연히 좋은 의미가 아니다.

이전에도 그렇게 강하다고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몬스터를 상대하는데엔 - 군단장들은 논외로 하자 - 큰 지장이 없었다. 떼로 몰려온다든가 특이한 공격이나 디버프를 걸면 좀 힘들었지만 어쨌든 1:1로 하면 어떻게든 발악하면 승산이 보이긴 했었다. 검은 마법사의 군단은 무리라도 험난한 메이플 월드를 다니는데엔 큰 지장이 없었단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나도 레벨 10이냐아아아아──!!'

왜 메르세데스가 절규했는지 절절히 이해해버렸다.

농담이 아니라 검 휘두르는게 버겁다. 얼굴 쪽으로 달려든 스포아를 쳐내기 위해 검을 뽑으려 했는데 그마저도 늦어 손으로 간신히 막아낼만큼 약해져버렸다.

다행히 그 뒤로 몬스터들은 달려들지 않고 무시하며 가버렸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순 없었다. 메이플 월드를 맘대로 여행해보라고? 여행은 개뿔, 디멘션 게이트 열릴때까지 안죽고 싶으면 미친듯이 레벨 올리라는 말을 완곡하게 한거였어!

아이한테 힘도 좀 복구해달라고 말하기 위해 다시 거기로 가려했는데 내가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계단은 처음부터 없었던것처럼 슥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루타비스 입장 제한 레벨은 125쯤 되는걸로 알고 있다.

'…… 망했네. 다 망했어.'

영웅즈도, 어디의 군단장씨도 아닌데 레벨 초기화 이벤트라니 이건 너무하잖아.

흘러내린 헛웃음이 공기중에 흩어졌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나중에 디멘션 게이트가 열리면 그란디스로 가야할지도 모르는데 - 파픈스타가 성공하지 못했다면 - 레벨 10으로 거기 간다? 미친 짓이다. 헬리시움 평균 몬스터 레벨이 100정도인걸로 기억하는데 발 내딛자마자 비석 세울게 뻔하다.

나는 굵은 가지에서 일어나 줄기를 붙잡아서 간신히 균형을 잡아 섰다. 한 손으로는 아스카를 꼭 잡고, 늘어진 가지들을 디디며 나아갔다. 이쪽으로 가면 엘리니아가 있을거다. 땅으로 내려가고 싶어도 만약 지금 내 레벨이 10이 맞다면 포션 하나 없는 내가 버섯이나 슬라임을 상대하는건 자살 행위였다.

'잡몹 잡고, 퀘스트 하고, 던전 돌고…… 흐, 미치겠네.'

이 세상이 게임이 아니란건 알고는 있지만, 앞으로 해야할 일을 생각하면 그저 '노가다'란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거기다 때마침 내가 가려는 엘리니아엔 저레벨 테마던전까지 있다. 시간대가 맞다면 루미너스를 볼지도 모르겠군 꺄우!

아, 레벨 초기화라는 충격과 공포스러운 이벤트 때문에 뇌가 맛이 가는 모양이다. 머리를 몇 번 두들긴 나는 나뭇가지들을 디디며 엘리니아로 향했다. 몸이 어지간히 둔해진건지 아니면 가지가 약한건지 한 걸음 옮길때마다 가지가 박살나서 엄청 가슴 졸여야 했다. 제발 루팡같은 것만 나오지 마라.

아스카 빨리 일어나줘. 진짜 믿을게 너밖에 없어.

***

루크side.

쿵! 으직! 뭔가가 박살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 퍼뜩 눈을 떠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떤 모험가가 고약하게 스포아랑 달팽이를 상대로 스킬 연습이라도 하는건가.

"…… 하아?"

근무하는 내내 질리도록 본 두 몬스터들이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놈들은 수풀에 숨어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뭘 본거냐 너희들?"

몬스터라 해서 다 사람을 공격하는건 아니다. 약한 몬스터의 경우 사람과 친해져서 공생관계를 형성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스포아같은 버섯종이나 몇몇 달팽이종이 그러했고, 다 떠나서 이 두 종은 상당히 온순한 성격인데 저렇게까지 겁을 먹는 경우는 대체……?

그러다 바닥에 띄엄띄엄 떨어진 굵직한 가지들을 보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매일 여기 서있는게 일이니 어느 가지가 부서져 떨어졌는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아니 것보다 저게 부서지는 거였어?!'

다른 나무도 아니고 세계수의 가지인데? 엘리니아가 있는 방향으로 쭉 떨어진 가지들을 보고 나는 괴이한 표정을 지어야했다. 슬리피우드에서 주니어 발록이라도 탈출한건가. 아니면 신종 몬스터 출현? 거기다 줄기를 잘보니 뭔가가 강하게 움켜쥔 것처럼 나무껍질이 완전히 바스라져있다.

"하인즈님께 알려야하나……."

내가 통신구를 어디다 뒀지.

========== 작품 후기 ==========

루크는 여섯갈래 길의 그 갑옷남입니다.

검호의 힘은 전혀 안줄어들었습니다. 단지 수 백년 내리 자다 일어나서 컨트롤이랑 감각이 바닥을 치는것 뿐이에요. 평타랑 필살기를 구분해서 날릴 수 없는 상태.

왜 메이플엔 이렇게 지역이 많고 직업이 많고 던전도 많을까요…… 갯수 세면서 속 올라올뻔. 이걸 언제 다 써.

@모텃으 - 하지만 결국 못했죠. 가정은 가정이에요.

@라그실 - 표지의 검호가 졸귀라 저는 그저 좋습니다.

@이년아 - 원래는 가장 정상적인 오버시어였다는게 함정.

@Ratios - 레벨대신 경험치를 가져가보았습니다?

@적현월 - 오버시어는 사실 씹사기이지 말입니다...

@레시코 - 초반은 좀 활기차게 쓰기위해 노력할겁니다.

@패러디좋아 -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방이 착각하지 않도록 제대로 말을 해야합니다.

@패러디소설사랑 - 이미 너프 쳐먹을대로 먹었다는게 함정.

@칼크래프트 - 매우매우 적게 남아있는 하마일때의 인격? 이라고 해야할까요.

@소라루 - 일단 대리인이니까요. 검마의 힘 자체가 오버시어 본인의 것이기도 하고.

@vestie - 아뇨 거의 8백년 맞습니다. 더 시드 테섭 스크립트를 보면 알 수 있음.

@Buche - 누가 이분한테 그걸 다 준거야!!

@적월식 - 하마는 히로인이 아닙니다!

@마서 - 모두가 잊을때 나타나서 큰 일을 쳐주는 센스! 사실 일이 이지경이 된것도 발단은 분명...

@arays - 뻔한 일이죠. 그란디스에서 한 명 올겁니다.

@로렐라인 - 프리드는 편하게 늙어죽었습니다.

@루서스 - 점검의 종류는 4개만 있는게 아니란 뜻이었어요.

@Sisre - 저지경이 되기 전에는 제일 정상적이었다는게 함정. 멀쩡한 놈일수록 훼까닥하면 더하죠.

@책벌레씨 - 더 근본적으로 따지면 오버시어를 저지경으로 만든 세계 자체가 문제지만 이건 트립퍼들이 어찌할 수 있는게 아니므로.

@qkzks135 - 나는 단다 리코멘을.

@노란우산s - 뭘 해도 피할 수 없으니 자기 합리화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일을 저지른것에 대한 후회하는 마음이 있다는거죠.

@sonage - 빛의 오버시어 본인입니다. 그리고 일을 복잡하게 꼬아놓은건 시간의 오버시어죠.

@브룬 - 마치 고생해서 문제 맞췄을때의 느낌! 일까요.

@Eluines - 영양제 만들어서 자기한테 놓으며 열심히 실험.

@흑색궁극기 - 오타가 확실해보입니다.

@ReFrante - 보편적인 도덕과 윤리라는건 달리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시하는 것들이란 뜻이고, 이것은 상황이 막장일수록 부각되는 면이 있죠.

@월악산이재환 - 검호에게 애도를?

@넝기 - 몇 백년이에요.

@허공말뚝 - 그러니 우리는 생명의 오버시어를 믿읍시다.

@여기돈까스요 - 세계멸망까지 5초전?

@여행자구름 - 잘 받았습니다! 바로 표지로 쓰고 있어요!

@scr60522 - 사정이 있지만 저지른 짓이 너무 과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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