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호입니DA-97화 (97/208)

<--  -->  검호side.

아마란스. 처음 메이플 월드에 발을 디뎠을때 최초로 만난 이곳의 주민. 지금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기억이 잘 안날정도로 까마득한……건 아니지만 인간의 기억력 한계상 수 년전에 만났던 사람의 얼굴이 어떤지 구체적으로 떠올리는건 좀 무리라서 눈앞의 여자가 그녀인지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아니 다 떠나서.

'뭘 어쨌길래 얼굴이 저렇게 대대적으로 공사된거지.'

단순히 갭이 큰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잖아 이정도면.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에 남은 아마란스의 특징이 '붉은 날개'하나밖에 없었고, 우연히 그게 겹쳐서 말한것뿐인데 진짜라니. 대체 뭐가 어떻게 된거야? 어떻게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냐는 문제는 그녀 역시 페어리라는 요정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대체─

"줄곧, 기다리고 있었어요 검호님."

90년대 판타지 게임에서나 나올법한 대사를 하며 내 손을 꼭 잡은 아마란스는 정말 환하게 웃었다. 눈부셔! 뒤에서 후광이 보여!

"오랫동안…… 정말 오랫동안요."

대체 뭐때문에? 라고 묻고싶었지만, 분명 웃고있음에도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아낼것 같은 그녀를 본 순간 입이 다물어졌다. 여자의 눈물은 무기라던데 확실히 그런것 같다. 그냥 여자도 아니고 아마란스같은 여자가 흘리는 눈물이라면 놀장강을 덕지덕지 쳐바른 무기를 가볍게 씹어먹는 핵폭탄 이상가는 화학병기라는 사실에 이견을 가질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몇 분동안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채로 있었다. 내가 '우는 여자'라는 희대의 상대에게 굳어있는동안 아마란스는 꽃잎같은 옷자락으로 눈가를 닦아낸 다음 다시 고개를 들어 교장 선생님에게 말했다.

"원래는 엘리넬에 볼일이 있었지만, 그건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급박한 일인 모양입니다 페어리퀸?"

"예…… 수 백년동안 해온 일이 방금 끝났거든요."

뭐라 말하는건지 상세한 설명이 필요한데. 말허리가 너무 많이 잘렸잖아!

"검호님. 당신에게 보여드릴 것이 있어요."

"뭘 말이지."

"저희가 지금까지 지켜온 당신의 동료, 대마법사 프리드가 남긴 유산을."

잠깐 누구라고?!

"지금 당장 데려다드릴게요."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나는 그렇게 숫제 납치당하듯이 강제로 텔레포트되었다. 마스터! 라고 외치던 아스카의 모습이 스쳐지나가듯 보였다. 아 젠장.

텔레포트 직후 정체불명의 울렁거림이 몰려와 나는 메스꺼운 표정을 지었다. 이게 대체 뭔 날벼락인지. 아는 사람을 수 백년만에 - 체감상 몇 년이지만 그것도 오랜만이다 - 다시 만났는데 굉장히 반가운 감정이 들려다가 사그라들어버렸다. 안타까워해도 될까.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은 이름모를 야생화가 여기저기 피어있는 너른 들판이었다. 여긴 또 어디야. 이거 진짜 납치 아니야?

"뭐가 어떻게 된건지 설명해 줄 수 있나?"

"네? 아아, 그렇죠. 그걸 먼저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저도 모르게 꽤 다급했던 모양이에요. 죄송해요."

굉장히 낯선 존댓말에 소름이 오소소 일어났다.

"음─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할지 모르겠네요. 무엇을 듣고싶으세요?"

"일단 프리드의 유산이라는 것부터."

"좋아요."

그녀의 손이 하늘하늘 춤추듯이 허공을 휘저었다. 남이 하면 뭔 미친짓이냐 싶은 행동도 저런 미인이 하니까 어떤 의미가 있어보였다. 외모지상주의 한 번 끝내주네.

그리고 실제로 그녀의 행동은 의미가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들판 한가운데에 갑자기 빨간 지붕의 2층집이 나타났으니까. 아 마법이구나.

"검호님의 동료, 드래곤 마스터 프리드는 생전에 저에게 부탁을 했어요."

생전. 본론일게 분명한 부탁이라는 말보다 먼저 잡아낸 그 단어에 나는 이미 프리드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 잠깐만, 뭐야 그거. 사실 수 백년이란 시간이 흐른만큼 보통 사람이라면 이미 죽고 흙이 되어도 이상할게 없지만, 적어도 책을 통해서 알게된 아리에스의 죽음과 아는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들은 프리드의 죽음은 그 느낌이 전혀 달랐다. 며칠 전, 아니 체감상 몇 시간 전에 보았던 사람이 잠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이미 죽었다는데 아무렇지 않을리가 없잖아.

"…… 자신이 살아간 흔적을 동료들에게 보여달라고요."

"살아간, 흔적?"

"검은 마법사의 저주에서 혼자 살아남은 그는 오랫동안 동료들을 찾아 세계를 헤맸어요."

아마란스는 당시 검은 마법사가 봉인되었음에도 엘나스와 니할 사막에 여전히 남아있던 어둠에 물든 몬스터들을, 프리드가 거기에 동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하나때문에 혼자서 반 이상 쓸어버렸다고 말했다. 얼굴근육에 경련이 일어났다.

"그가 빅토리아 아일랜드에 정착한건 좀 시간이 지난 이후였어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서였죠."

"…… 대체 누구랑?"

"리프레에서 온 피난민인 어떤 여성이었는데, 꽤 예뻤어요. 상당히 그와 잘 어울렸고."

결정적으로 같이 있을때 행복해 보였어요.

아, 이거 대체 뭐라고 해야하지. 손이 꽉 쥐어져 부들부들 떨리는데 오그라든다기보단 뭔가 견딜 수 없는 느낌이었다. 가슴 안쪽에서 울컥울컥 뭐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아마란스는 우아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집의 문을 열었다. 낡은 문 특유의 삐걱이는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린 현관을 통해 나는 이끌리듯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8백년이란 시간이 믿기지 않을만큼, 당장이라도 누가 들어와서 살아도 좋을만큼 집안은 멀쩡했다.

"많은 생각이 드실텐데, 일단 말씀드리자면 그는 외롭지 않게 살았어요."

"다행…… 이네."

"자식이 5명이나 됬거든요."

"잠깐, 뭐─?!"

"딸이 둘이고 아들이 셋에, 그중 두 아들이 쌍둥이였던걸로 기억해요. 허구헌날 집안이 시끄러워서 외로울 틈같은건 느끼지도 못했을걸요?"

너 이자식 프리드 대마법사라며! 아 물론 여기의 마법사가 그 마법사가 아니라는건 알지만 그래도 여러모로 충격적이다. 분명 나보다 어렸던 놈이 애 다섯딸린 유부남으로 진화했다는 말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알 수 없게 되버렸다.

프리드자식, 마법도 그렇고 능력하나는 좋았구나. 마구잡이로 결론을 내린 나는 허허로운 웃음만 흘렸다.

충격적인 사실들에 맛이 간 머리를 어떻게든 돌려놓기 위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 나는 이어서 집안을 둘러보았다. 눈을 돌리자마자 크고작은 액자들에 빼곡한 벽이 제일 먼저 보였다.

"행복해 보이죠?"

"…… 그러네."

제일 먼저 본 사진에는 안고있던 아들내미한테 턱을 차이는 프리드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당황하며 달려나온듯한 그의 아내로 추정되는 여인 역시. 뭐야 이놈, 미인하고 결혼했잖아. 부럽게.

생각해보니까 프리드 그놈 나이가 원래 세계로 치면 겨우 대학생정도밖에 안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대학교에서 청춘을 불태울 나이에 대마법사가 되고, 검은 마법사랑 싸우고, 동료들을 전부 잃고, 메이플 월드를 떠돌아다니다, 간신히 결혼에 골인? 엄청 파란만장한 인생이네. 체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싹 날아갈만큼.

그런 생각을 하는 내 팔자도 그리 좋은것 같지 않지만 아무튼. 나는 중년과 노년의 프리드 일가를 찬찬히 흝어보며 눈에 새긴 다음, 다른 방안으로 들어가보았다. 보는것만으로 질려버릴만큼 빼곡하게 책들이 꽂힌 책장이 사방에 층층히 쌓여있었다.

"여기 책들의 일부는 그가 직접 썼어요."

그보다 이 서재 하나가 바깥에서 본 이 집 크기보다 더 넓어보이는데 기분탓이냐. 아니면 또 마법?

"만약 검호님이 원하신다면 여기의 책 몇 권 정도는 가져가셔도 좋아요."

"그래도 되나?"

이 집을 오늘날까지 관리해온건 아마란스일게 분명할텐데? 그녀는 잘게 웃으며 말했다.

"저희가 여태까지 이 집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었던 이유는, 프리드로부터 먼 훗날 깨어날 동료들에게 자신이 살아간 흔적을 보여주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방금 그 부탁이 이루어졌죠. 검호님이 옴으로서."

내가, 동료였던건가.

영웅즈와 함께 군단장들과 싸운 적은 많았지만 동료라는 느낌은 거의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동료라 한다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건 파픈스타다. 같은 지구에서 온, 똑같이 오버시어때문에 비참하게 이곳으로 끌려와 다시 돌아간다는 동일한 목적하에 움직였던 유일한 사람.

…… 그렇다고 영웅즈가 나한테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냐고 하면 긍정은 또 못하지만. 나는 작게 삐걱이는 마루바닥을 조심스레 밟으며 서재를 한바퀴 빙 돌았다. 책꽂이에는 뭔 내용인지 추측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제목의 책만 가득해서 내가 아니라 아스카가 왔다면 엄청 좋아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가 서재 가운데 책상에 올려진 한 권의 책이 보였다.

"그건 일기장이에요."

프리드의, 라는 주어는 빠져있었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표지가 꽤 너덜너덜하고, 종이도 누렇게 떴지만 흘러가버린 시간을 생각하면 몹시 양호한 상태였다. 어차피 여기있는 무슨 책이든 내가 볼 수 있는건 없다. 남의 일기장을 멋대로 보는건 사생활 침해지만 애초에 보라고 여기 둔거겠지.

그나저나 여기 책 많으니까 그중에 마법서도 있지 않을까? 아스카한테 몇 개 줘야할 것 같은데.

"혹시 마법서같은게 어디있는지 알고 있나?"

"물론이에요! 금방 갔다드릴게요."

장미색 날개가 활짝 펼쳐지며 서재 여기저기를 누볐다. 프리드와는 다른 의미로 쟤도 굉장해졌구나. 그러고보니 여기 오기 전에 이바나 교장선생님이 페어리퀸이라고 불렀는데 설마……? 과거의 에피네아처럼 인간만한 크기가 된 그녀를 다시보니 확실한것 같다. 오만하게 나를 낮잡아봐도 할말 없는데 존댓말 꼬박꼬박 써서 소름돋았던거구나.

그녀가 마법서를 찾는 사이 나는 일기장을 펼쳤다.

***

아마란스side.

처음으로 만난 영웅즈가 검호님인것은 뭔가 인연이란게 있다는 속설을 믿어볼만큼 신기한 일이었다. 운명의 신이란 존재가 있다면 진심으로 머리숙여 감사하고 싶을만큼.

그때의 자신과 그 사이에 있었던 교환은 정말 사소한 일이었다. 당장 검호님 본인에게 묻는다면 그런 일이 있었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려도 이상하지않은 별 것 아닌 일. 하지만 그것은 페어리라는 종족의 운명을 갈랐고, 한 사람도 예외없이 몬스터로 전락할뻔한 우리를 일부나마 구원해준 빛이 되었다.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깊이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검은 마법사와 싸우다 저주에 걸려 봉인되었고, 재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 백년동안 계속. 그나마 페어리의 영역에서 나간이후 그가 어디를 가고 무엇을 했는지 프리드에게 주워들은게 전부였다.

시녀들이 보면 질겁하려나. 볼을 타고 눈물이 떨어지는데 입가에는 웃음이 걸렸다. 몇 분동안 그러고 있던 나는 일단 엘리넬의 교장 이바나에게 본래 약속을 미루게됬다고 말한 다음에야 용건을 꺼낼 수 있었다.

"검호님. 당신에게 보여드릴 것이 있어요."

"뭘 말이지."

변함없이 무표정을 포커페이스로 삼고있는 그라도 놀랄 것이 분명했다. 희미한 기대감을 안고 나는 이어 말했다.

"저희가 지금까지 지켜온 당신의 동료, 대마법사 프리드가 남긴 유산을."

지금 당장 데려다드릴게요. 기대했던데로 그의 눈이 살짝 커지는걸 보고 - 과거의 경험상 희박하다싶은 그의 감정변화 정도를 생각할때 굉장히 놀랐다는 표시 - 기분좋게 웃으며 곧바로 엘리니아와 헤네시스 사이에 있는 들판으로 이동했다.

어째선지 상당히 굳은 얼굴로 그가 말했다.

"뭐가 어떻게 된건지 설명해 줄 수 있나?"

화, 화가 나셨어? 어째서? 빠르게 머리를 굴려 원인을 찾아내며 나는 반사적으로 꾹 다물리려는 입을 움직였다.

"네? 아아, 그렇죠. 그걸 먼저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저도 모르게 꽤 다급했던 모양이에요. 죄송해요."

흔하디 흔한 페어리A였을때 눈대중으로 어림짐작했던 그의 힘이 지금은 너무도 확실하게 보였다. 뭔 수를 써도 따라잡을 수 없어. 프리드가 입이 마르고 닳도록 그의 검이 굉장했다고 말하던 이유가 있었구나. 나는 검은 마법사에게 직접적으로 타격을 준 유일한 사람이 그였다는 사실을 빠르게 상기시켰다.

더 볼것도 없이 경비를 목적으로 주위에 깔아둔 정령들이 도망치고 있었다. 그럴만도 하지. 소매아래로 돋아난 닭살을 진정시키는데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음……."

무슨 말부터 해야하지. 내가 어떻게 페어리퀸이 되었는지? 왜 거기 갔는지? 프리드의 삶은 어디서부터 얘기해야하고?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할지 모르겠네요. 무엇을 듣고싶으세요?"

복잡하게 갈 것 없이 바로 그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일단 프리드의 유산이라는 것부터."

"좋아요."

나는 그때의 약속을 떠올렸다. 우리가 그의 삶의 흔적이 가장 선명히 새겨진 집을 보존해주는 대신 그는 우리에게 마음놓고 살 수 있는 숲의 일정 영역을 확보하는데 도움을 줘야한다. 그리고 거래는 매우 공평하게 이루어졌다.

동료의 이야기에 그가 당황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싶었지만, 나는 집을 감추고있던 결계를 푸느라 그를 볼 수 없었다. 아쉬워라.

수 백년간 관리를 위해 보고 또 보아온 집인데 이번에는 느낌이 달랐다. 나는 문을 열었다. 오직 한 명의 마법사를 위한 연구실 아닌, 여러 사람 - 가족이 살아가는데 적합한 형태의 흔한 가정집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많은 생각이 드실텐데, 일단 말씀드리자면 그는 외롭지않게 살았어요."

"다행…… 이네."

말허리가 길게 늘어졌다. 긴 소파들과 각이 둥근 탁자, 저쪽의 주방에는 넓은 식탁과 여러 의자들이 소리없이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노라 말하고 있었다.

"자식이 5명이나 됬거든요."

"잠깐, 뭐─?!"

아, 웃으면 안돼 웃으면. 화내실지도 몰라.

"딸이 둘이고 아들이 셋에, 그중 두 아들이 쌍둥이였던걸로 기억해요. 허구헌날 집안이 시끄러워서 외로울 틈같은건 느끼지도 못했을걸요?"

특히 쌍둥이 아들들이. 곧잘 루미너스와 팬텀에 비유했을만큼 사이가 안좋아서 아버지인데도 이리저리 치여다녔었다.

집안을 배회하던 그분의 시선이 벽 한쪽에 못박히더니 흐느낌에 가까운 웃음이 새어나와 공기중에 흩어졌다. 그분은 눈물을 참으려는듯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있었다. 아아, 저거.

"행복해 보이죠?"

"…… 그러네."

어느 사진을 봐도 가족들이랑 같이 있으니까. 혼자인 사진은 단 하나도 없었다. 먼 미래에 동료들이 여기 올거라는 생각때문에 그는 특히 사진을 중요시 했었다.

조용히 벽에 걸린 액자들을 보던 검호님이 느리게 다른곳으로 발길을 옮기는걸 뒤따랐다. 이 방향은─ 그 서재.

"여기 책들의 일부는 그가 직접 썼어요."

한 7분의 1정도.

"만약 검호님이 원하신다면 여기의 책 몇 권 정도는 가져가셔도 좋아요."

"그래도 되나?"

그야 이 집의 주인은 아주 오래전에 죽었고,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직계후손조차 남아있지 않은 상태니까. 자신이 차지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먼저 영웅들이 권리를 주장한다면 기꺼이 넘겨줄 생각도 있다. 사실 요즘 어린 동족들이 이 집을 보존하려는 제 행동을 '여왕님의 이상한 취미'정도로 보고있으니.

라는 말을 대놓고 할 수 없었기에 다른 설득력 넘치는 말을 한 나는 검호님이 보고있는 책상 위의 책이 무엇인지 말해주었다.

"그건 일기장이에요."

본인도 읽고 흑역사라고 말한 그거. 마법을 걸어 보이는것보다 더 많은 페이지를 만들어서 젊었을때부터 늙을때까지 줄창 쓴거다. 그래서 나이든 이후 가끔씩 처음부터 읽어보더니 얼굴 붉히면서 던지더라.

검호님은 저걸 보시고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궁금했지만, 나온 말은 영 딴판이었다.

"혹시 마법서같은게 어디있는지 알고 있나?"

…… 일기장 보는 모습을 나한테 보이고 싶지 않아서 저런 질문을 하시는건가? 그럴지도 모른다. 동료의 지극히 사적인 면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게 당연하니까.

하늘이 무너진것처럼 울지도, 자기 팔이 떨어져나간것처럼 고통스러워 하지도 않았지만 검호님이 프리드를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는 충분히 알았다. 그런데요 검호님, 저 이미 그 일기장 두자리 수로 정주행 했어요.

"아, 물론이에요! 금방 갔다드릴게요."

나는 날개를 펼쳐 최대한 천천히 책을 찾았다.

***

검호side.

걱정했던 내가 바보였잖아 젠장. 프리드 이자식 엄청 잘 살았어! 어느 순간부터 일기장이 육아일기가 되어버렸다고! 3살짜리 딸내미 옆에 옆집 아들내미가 붙어있다고 메테오 준비하지 말란 말이야! 기가차는 심정과는 별개로 페이지를 넘길수록 머릿속이 싸해지며 동시에 안심이 되는 판이한 기분이 들었다.

일기장에서 어느순간부터 영웅즈를 언급하는 횟수가 점점 뜸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반에는 결계가 쳐진 에우렐을 보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느니, 리엔 섬에 갔다가 전부 멸종한줄 알았던 오닉스 드래곤과 그 계약자 소녀를 만났다느니, 그곳에서 3개나 되는 알을 찾았다는 이야기들이 - 검호씨는 나까지 속였다고 쓰여있었는데, 미안 그거 잊어버린거다 - 가득한데, '결혼했다'는 말이 나온 기점부터 영웅즈의 언급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 대신 빈 자리에는 그의 일과나 소소한 사건들이 언급되었다. 의자를 만들기 위해 못을 박다가 손가락을 찧었다는걸 시작으로 일기장에는 아내와 관련된 일들로 가득해지기 시작했다. 손이 아니라 마법으로 만들라고 타박을 들어서야 자신이 마법사라는걸 떠올렸다는 대목에서 멍청한 놈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이어지는 가족, 가족, 가족의 이야기.

니할 사막과 리프레의 경계에서 얼어붙은 팬텀을 발견해 미네르바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오르비스에 옮겼다는 언급을 끝으로 영웅즈는 정말 어쩌다가 한두번 나왔다. 유에는…… 아, 안구에 습기차니까 생각하지 말자. 이놈은 이름자체가 안나오고 있어.

- 아직 검호씨랑 루미너스를 찾지 못했다. 메이플 월드는 거의 다 돌아본것 같은데 어디있는거지?

난 루타비스에 있었고 그놈은 검마랑 같이 봉인됬으니 못찾는게 당연하잖아.

- 아빠인 내가 계속 집을 비우는건 애들 정서에 안좋다고 그녀가 말했다. 이제 포기해야하는 걸까.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페이지를 넘기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다음부터의 이야기는 '드래곤 마스터 프리드'가 아닌, '빨간 지붕집 프리드'의 이야기였으니까. 나는 일기장을 덮었다.

"여기, 검호님이 부탁하신 마법서에요."

그리고 실로 적절한 타이밍에 아마란스가 마법서들을 가져왔다. 뭐 이렇게 오래걸렸나 싶었지만 여기 책 양이 양인만큼 시간이 걸리는게 당연하겠지.

중간고사 답안지보다 더 더러워진 심경속에서 나는 마법서와 일기장을 들고 집에서 나왔다. 아마란스의 손짓에 집은 신기루처럼 자취를 감췄다.

"하고싶은 말이 정말로 많지만, 더이상 시간이 나지 않네요. 죄송해요."

"사과할 필요 없다."

"언젠가 시간이 되신다면 엘리니아에 있는 저희의 영역에 찾아오세요. 검호님이라면 언제나 반길 수 있으니까요."

그 말을 하며 아마란스는 차고있던 꽃팔찌를 벗어서 나한테 주었다. 꽃송이들의 색이 참 고운…… 잠깐만 이거 분홍색이잖아. 선물받은 입장에서 색타령하면 진상이나 다름없겠지만 나 남자인데.

"만나서 정말 기뻤어요 검호님. 나중에 다시봐요."

그렇게 아마란스는 짙은 꽃향기를 남기며 사라졌다.

…… 나 어떻게 엘리넬로 돌아가지.

========== 작품 후기 ==========

원래 엘리넬 퀘가 끝나면 엘리넬 팔찌를 받지만 검호는 아마란스의 팔찌를 받았습니다. 상태내성, 속성저항 75%. 은연중에 자연물의 보호나 정령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음.

프리드는 30대 중반까지 동료들을 찾았지만 둘째가 생긴 후 그만두었습니다. 좀 안타깝지만 언제까지 과거에 얽매여 있을 수 없잖아요. 젊었을때 무리를 많이해서 대마법사임에도 일찍 죽음.

인물 외모묘사에 별로 공을 안들이는 이 글에서 아마란스 외모묘사가 긴 이유는 그만큼 미모가 쩔어서입니다.

@루엔시르온 - 네. 그것도 아직 공식적으로 몬스터 취급받는 페어리라서...

@비탄의과학자 - 아니요. 파픈과는 다른 유형의 히로인이죠. 비중이 좀 적지만.

@패러디좋아 - 사실 아마란스는 재회를 전제로 만들어졌습니다.

@대어의예감 - 연합 결성쯤에 재회하게 할까했지만 프리드의 일기를 입수해야해서 시기를 앞당김.

@니트니트니트킹 - 저건 그냥 범죄자죠.

@ㅇㅇ군 - 아마란스 대신 다른 동료가 들어올겁니다.

@노란우산s - 하지만 새 옷에 자가복구기능이 있을리가 없으니 찢어지면 또...

@소라루 - 페어리 영역에서 여러모로 도움을 줬었죠.

@Blake117 - 프롤로그 제외하고 1화부터 나왔는데!

@Hound dog - 여왕님이 검호를 보는 시선은 영웅&위인을 보는 사람과 거의 똑같음.

@Eluines - 아마란스도 엄청 출세한거죠.

@ReFrante - 파픈이 함께 싸우는 동료라면, 아마란스는 하는 일을 받쳐주는 조력자라 할 수 있습니다. 두 여자의 분야가 달라요.

@적현월 - 반드시 마주칠겁니다.

@한국사고급 - 부탁한다면 일상복, 전투복, 예복 등 세트로 줄 의향이 넘침.

@여행자구름 - 챙긴 옷이 겹겹히 입는 방식이라 겉옷 빼면 대충 입을만하다고 함.

@좀비라스 - 그리고 유에는 일기장에서조차 언급이 안됬음.

@Ratios - 프리드와 아마란스의 관계는 처음엔 소소한 거래~ 에서 검은 마법사와 영웅들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는 적당히 친한 친구로 발전했습니다.

@여우별65 - 여자애들의 덕심이 불타오르기 시작함.

@허공말뚝 - 이 글에 루트따위 있을 수 없어요.

@심온 - 그건 좀 후반에.

@적월식 - 사랑이라기 보단 뭐랄까, 감사와 존경이죠.

@르틴 - 본문에 나와있듯이 피난민A. 길고 풍성한 금발에 녹색눈을 가졌으며, 리프레에서 꽃집을 했던 여성이라는 뒷설정이 있습니다.

@qkzks135 - 검호는 프리드의 일기를 입수했다!

@탈톤 - 아스카가 배고팠다고 합니다.

@karuma - 재출연이 암시되어 있었죠.

@Pote - 딱히 복선이랄것 까지야. 이름이 구체적으로 언급된 조연은 어느정도 비중이 있는게 당연하잖아요.

@곰휴지 - 오버시어가 손써줄지도 몰라요.

@sadgfdfh - 헤네시스와 엘리니아 사이에요.

@SourcesMoon - 벌써 거기 가기에는 이릅니다. 테마던전 돌 곳이 몇인데.

@릿다르크 - 착각계의 스타트를 끊어준 아이죠.

@세이가 - 아마란스가 여왕이 되는건 NG모음집에 복선으로 나와 있었습니다?(농담)

@AquaRuby - 캐릭터 자체가 재회를 전제로 만들어졌었어요.

@핑구친구 - 은월이 저기 가면 주저앉아서 오열하겠지.

@루서스 - 페어리의 영역에 있는 내내 여러모로 서포트 해줬던 아이.

@결정의루이스 - 아니요. 아리에스와 프리드의 관계는 사제관계에 더 가까웠습니다.

@Legendssj2 - 그리고 다운된 스펙도 조금씩 올려야죠.

@라이어트래빗 - 아마란스:몇 화만에 출연한건지 모르겠어요.

@건전한독자 - 그래도 하나하나 읽는 재미가 아주 좋습니다! 글쓴이는 코멘을 먹고 산다고요!

@Sisre - 프리드는 가족을 만듬으로 행복을 얻었고, 과거에서 겨우 눈을 뗐습니다.

@화뉴 - 캐릭터는 아기자기한데 스토리는 어마무시하죠.

@칼크래프트 - 이 떡밥 하나 푸는데 몇십 화가 걸린건지.

@melsi - 2부에서 나름 활약해야해서 까먹을 수가 없죠!

@책벌레씨 - 진정하세요!!

@눈물젖은초코바 - 어지간하면 안까먹으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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