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호입니DA-100화 (100/208)

<-- 100화 기념 외전 - 여자였어도 유감스럽다 -->  검호side.

눈을 뜨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버렸다. 이 식상한 클리셰가 한바탕 비틀려서 작용하면 어떤 꼴이 되는지 나는 생생히 겪고 있었다.

"좋아해야하냐 말아야하냐?"

나는 웃는지 우는지 모르는 표정으로 냇물에 비쳐진 나를 보았다.

전형적인 일본 애니의 캐릭터처럼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 동양풍인건 확실한데 정확히 어느 나라의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옷, 기괴한 머리장식과 옷에 치렁하게 늘어진 방울들이 잘게 울었다. 이거 뜯어버릴까.

아, 솔직히 뭔 옷을 입고있는지 눈색이나 머리색이 어떤지 그런건 상관없어. 불만있면 렌즈끼고 염색을 하거나, 새 옷을 사면 되니까. 중요한건 이 몸 자체다.

"남자였으면 내 취향이었을텐데……."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여자였다.

눈대중으로 봐도 180 가까이 될법한 키, 곰도 때려 잡을듯한 근육질에, 여자 여럿 울려도 이상하지 않아보이는 미남은 참으로 안타깝게도 여자였다.

그리고 그 미남은 - 차마 미녀라 칭하기 뭐했다 - 나였다.

'성전환은 아닌데 성전환같네.'

상하반신의 특정한 부분을 보지 않아도 느낌상 성별을 알 수 있었지만, 내 기분은 실시간으로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진짜 이게 어딜봐서 여자냐? XX염색체의 흔적이 개미 눈물만큼도 안보이잖아! 그렇게 발에 쥐가 날때까지 쭈그려앉아 이걸 어째야하나 고민해본 결과는, 내가 손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니 그냥 생긴대로 살자~ 였다.

그나마 긍정적인 부분을 찾는다면 어쨌든 얼굴때문에 남한테 얕보일 일도 없을 것 같고, 거기다 비리비리한 말라깽이보다 훨씬 튼튼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 건드리면 부러질것 같은 젓가락 팔다리따위 꺼져! 양판소랑 라노벨에서나 내장형 근육이 나오지 현실에 그딴게 있을까보냐! 생판 모르는 곳에 떨어졌는데 기왕이면 강한쪽이 좋지! 주먹을 꽉 쥐자 아름드리나무를 맨손으로 확찢해버리고도 남을만큼 부푼 근육 위로 힘줄이 선명하게 올라왔다.

마침 키도 파격적으로 커져서 그런지 윗쪽 공기가 참 상쾌하다는 것도 알았다. 이래서 남자들이 키가 크면 좋다고 하는구나. 직후 좀 걸어가자마자 마주친 요정 사냥꾼들이 날 보자마자 도련님이라고 불렸지만 절대 우울하지 않아…… 훌쩍.

"어떻게 하실래요?"

"…… 일단 데려가야지."

신님, 제 목소리 업데이트 좀 해주세요. 보통 이럴때 목소리만은 중성적이어야 하는데 왜 그런거 없이 저음이죠.

나는 지팡이에 매달리다시피 주저앉은 새하얀 남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잘생긴건 인정하는데 너무 잘생겨서 되려 아무 느낌이 안드는 남자는 그 이름도 유명한 하얀 마법사였다.

저놈을 봤을때부터 에피네아에게 데려다줘도 좋을까 진지하게 고민했는데, 그 고민이 무안할정도로 놈은 허약했다. 페어리인 아마란스보다 약한 것 같아. 마법사답게 체력이 적다는 설정이 이딴식으로 구현되다니. 아 그런데 그렇게치면 난 전사라서 이런 몸이 된건가? 직업 변경권 없나요? 장기팔아서라도 캐쉬 마련해올테니까 제발.

"실례하지."

"예, 예? 우왓!"

나는 퍼져있는 하마놈을 번쩍 들어올렸다. 폼이 어째 공주님안기가 됬지만 아무렴 어떠냐. 그보다 이놈 남잔데 가벼워? 심지어 원래의 내 몸보다 더 가벼운것 같다. 부러운 자식. 반사적으로 찌푸려지려는 미간을 펴며 놈의 지팡이를 아마란스에게 주고, 그대로 페어리들의 영역으로 달렸다.

중간에 방향을 잘못잡아서 멈추지 못하고 절벽에서 뛰어내려 수십미터가량 떨어졌지만 흙먼지 조금 일으키고 사뿐히 착지했다. 통증은 당연하게도 느껴지지 않았다. 금강불괴네 이거? 대신 하마놈은 기절해버린 것 같지만. 이놈 새가슴이었나.

그렇게 에피네아한테 데려다주니 에피네아 그 여자는 하마놈에게 한 방에 뻑가버리고 내가 전용 셔틀이 되버렸다. 에라이, 그냥 절벽 아래에 두고올걸!

'뭐가 어떻게 된건지도 알아봐야 하는데…….'

그놈의 현상수배. 처음 요정 사냥꾼들을 쓰러뜨리고 삥뜯으면서 걸린 그게 발목을 잡는다. 아무리 튼튼해도 칼빵맞으면 피나는건 똑같아서 함부로 페어리들 영역 밖으로 나갈 수가 없잖아.

나는 투덜거리며 이 몸에서 딱 하나 마음에 드는 긴 머리카락의 물기를 꽉꽉 짜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기름기가 안끼긴 하지만 그렇다고 관리를 안할 수 없지. 망할 학교에선 두발규제때문에 귀밑으로 15cm까지밖에 못 길렀는데, 지금은 허리까지 내려오는게 아주 마음에 든다. 거기다 이 장발이 지금의 근육덩어리 몸에서 유일하게 여자다운 부위때문이기도 하고. 얼굴이 너무 잘생겨서 - 절대 예쁜게 아니다 - 그마저도 스타일로 보인다는건 논외로 치자.

그러다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아마란스인가.

"아직 안자고 있었나?"

페어리들은 대체로 일찍 자던데. 그런 생각을 하며 막 고개를 드니…… 왜 니가 있냐.

"저기, 검호?"

"뭐냐."

"실례지만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이 상황에 질문따위를 날리는 니놈의 마법사적인 두뇌가 놀랍다 진짜로. 원래 어느 장르든 이런 시츄레이션이 벌어진다면 여주인공은 얼굴을 붉히며 비명을 지르는게 정석이다만, 성전환 당했다고 여겨질만큼 체지방 0%를 향해 내달리는 몸을 진성 마법덕후에게 보였다고 수치심이 밀려올리가…….

나는 속으로 딴생각들을 하며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여자…… 셨, 습니까?"

"당연히 그렇다만."

남자로 보고 있었나? 오해해도 이상할건 없다만 그렇게 귀신보듯이 바라보는건 좀 너무하잖아. 여성적 매력이 사실상 없긴 하지만 나 그렇게 못생긴건 아닌데. 아예 주저앉아버린 하마놈을 보니 괜시리 우울해졌다. 키가 5cm만 작았어도 좋았을텐데.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거지."

"아니, 그게, 대체 왜……? 어째서?"

내가 여자라는게 사실이 '왜'나 '어째서'라고 물어볼만큼 있어서는 안되는 뭔가였냐.

"애초에 숨긴적 없다."

"하, 하지만."

"물어본적도 없지 않나. 만약 물어봤으면 충분히 대답해줬을거다."

한손으로 성인남자를 집어들면서 말하는중이라 설득력은 안드로메다 저편으로 날아갔지만. 나는 어째 나보다 더 곱상한 하마놈의 얼굴을 지긋─이 보다 수원에서 내려왔다.

그 뒤로 요정 사냥꾼들이 엘린 숲에 숨어들어오는 수법이 나날히 은밀해지기 시작해 하마에 대한건 별로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지. 바로 다음날 마주쳤으면 무진장 뻘쭘했을거야. 이것도 채 일주일을 못갔지만.

"니가 꼭 따라올 필요있나."

"제가 아니면 그 마법초를 구분할 수 없으니까요. 아무리 페어리들이라 해도 말이죠."

그래 너 잘났다. 몸소 실험에 필요한 재료들을 구하겠다며 따라온 그가 미덥지 않게 보이는건 놈을 처음 만났던날 10분도 안되서 체력이 모조리 방전된걸 보았기 때문이다. 하아, 껄끄러운 짐덩이가 붙었어.

요정 사냥꾼들을 찾기위해 하도 숲을 들쑤시다보니 인근 지리는 모조리 외우고 있는 나와는 달리 여기 와서도 내내 연구실을 만들어 틀어박혀있던 그가 계속 뒤로 처지는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냥 보리자루처럼 어깨에 들쳐멜까 진지하게 고민할무렵, 기이한 것이 시야에 잡혀 걸음을 멈췄다. 저건─

"잠깐 실례하겠다."

후환이 두려웠지만 양해를 구할 시간이 없어서 나는 급한대로 하마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며 동시에 입을 막아 침묵시켰다. 나 역시 몸을 낮추며 앞을 보았다.

비정상적으로 술렁거리는 숲 아니, 나무들. 나무의 형태를 한 몬스터들. 트리로드.

"조용히 있어봐라."

하나, 둘, 셋…… 수를 세는게 무의미하다. 대충 흝어봐도 수십, 어쩌면 세자리 수까지 될지도 모른다. 어째서 놈들이 저렇게 많이 한꺼번에 움직이는거지?

그러다 어떤 사실이 떠올랐다. 일전에 아마란스가 원래 트리로드는 대체로 멋모르고 숲에 들어온 인간을 먹는다고 말했다는게. 그런데 그 인간을 대부분 내가 쫓아내 버렸다. 그래서 양분을 못 얻은 놈들이 단체로…… 심지어 이쪽 방향은 페어리들의 영역이다.

"한시라도 빨리 페어리들의 영역에 돌아가라. 몬스터들의 수가 너무 많아…… 듣고 있나?"

나는 검을 뽑으며 아래쪽을 보았다.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이 크고 - 여자인데 하마보다 컸다 - 무거운 몸에 뭉개지다시피 깔려 숨도 못 쉬고 있는 놈이 간혈적으로 떨고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황급히 내려왔다.

"미안하다."

"콜록! 콜록!"

기침하지 말라고 말하려했는데 알아서 소리를 줄이며 그는 트리로드들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 그것들을 보았다.

"저건……."

"트리로드들이다. 많이 굶주린 모양이야. 이대로 가면 페어리들을 거름삼아버릴지도 모르지."

솔직히 마음에 안드는 여왕이지만 그렇다고 몬스터들에게 당하면 굉장히 찜찜할것 같은데다, 이렇게 방조해서 죽게만들 수 없으니까.

"빨리 가라. 텔레포트할 마력은 충분하나?"

"예, 물론."

"그럼 됬다.

나는 저것들을 상대로 시간을 끌어야한다. 솔직히 몬스터 대여섯이나 요정 사냥꾼 10명까지는 어찌어찌 쓰러뜨릴 수 있는데 이렇게 많은 트리로드들을 상대하는건 좀 버거울지도 모른다. 내가 대신 알리러 가자니, 아무리 빨리 달려도 텔레포트보다는 못하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검호씨."

"…… 뭐지?"

"저번엔 죄송했습니다."

응? 뭐가? 것보다 빨리 가라고 했잖아. 시간 없다고.

"뭘 말이지."

"남자로 오해하고, 훔쳐봐서 죄송합니다."

아 그거…… 좀 당황하긴했지만 이런 여러모로 터무니없이 굉장한 몸을 봤을때 남자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잘 알게되버린 그 일. 그때 생긴 스크래치가 아려왔다.

"아아, 그거말인가."

"사과하려고 했지만 쉽게 되지 않더군요. 지금이 아니면 더이상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미래의 검마는 의외로 윤리관이 착실했다. 감격해도 될까.

"별로,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착각할만 했으니까."

"예?"

사실 내가 봐도 남자같은 몸인데 뭐. 도저히 여자로 안보여서 성전환당한 것 같다고 생각중이니 말 다했지.

"그보다 빨리 가봐라. 더이상 시간을 끌면 안될 것 같거든."

자연파괴를 하면 에피네아가 뭐라하면서 쫓아버릴지도 모르지만 일단 지금은 움직여야한다. 나는 하마의 등을 떠민다음 놈들의 무리에 뛰어들었다.

***

하얀 마법사side.

연구를 하다가 결국 졸음에 못이긴 나는 밤늦게 잠에서 깨버렸다. 다시 자기도 뭐해서 세수나 하려고 수원에 올라가는 도중, 물소리가 들려서 다른 사람이 와있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 이 시간쯤에 검호 그가 대체로 검을 수련한다는걸 떠올리고 대수롭지않게 넘겼다.

넘기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가 수련하면서 물소리따위 낼 리 없다는걸 알면서도 왜 그러려니하고 여겼는지.

"아직 안자고 있었나?"

푹 젖은 머리카락을 꽉꽉 쥐어짜내던 검호가 막 고개를 들며 나를 보았다. 막 씻고나왔는지 온몸에서 물이 후두둑 떨어져내렸다.

일찍히 예상했지만 굉장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정도로 그의 몸은 근육뿐이었다. 이두박근이나 삼두박근, 물이 흘러내리는 쩍 갈리진 등까지. 마법사인 나는 물론이요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전사를 모조리 내리깔아버리는 저 몸은 분명 고된 수련의 결과겠지. 그런데 어째 대흉근이 좀 큰……?

'…… 에.'

순간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뇌가 완전히 정지했다.

아니 잠깐만 저거─

"저기, 검호?"

"뭐냐."

"실례지만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나는 격렬하게 현실부정을 하면서 난쟁이들이 단체로 탭댄스를 추는듯한 두통을 일으키는 뇌를 진정시키며 간신히 물었다.

"여자…… 셨, 습니까?"

"당연히 그렇다만."

뭐가 당연하다는 겁니까아─!!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치다 꼴사납게 물을 밟고 미끄러져 크게 엉덩방아를 찢으며 주저앉아버렸다. 하지만 통증따위 느껴지지 않았다. 여태껏 하늘에 뜨던 태양이 사실 달이었다는걸 알아도 이것보다는 덜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나는 눈앞의 광경에 정말로 멍청하게, 누가 입 안에 주먹을 넣어도 모를만큼 입을 쩍 벌린채 굳어버렸다. 그, 아니 그녀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옷을 입은 다음 내 앞에 와서 손을 뻗어줄때까지 계속.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거지."

"아니, 그게, 대체 왜……? 어째서?"

여자인걸 숨기고 있었습니까? 정말 어떻게 봐도 미남인 - 그러나 알고 보니 남자에 비해 좀 선이 가느다란데다 목젖도 없고 어깨도 좀 좁은것 같은 - 그녀가 다소 인상을 쓰며 내 팔을 확 끌어당겨 일으켰다.

"애초에 숨긴적 없다."

"하, 하지만."

"물어본적도 없지 않나."

그 말이 차갑게 가슴에 박혔다. 정신없이 뛰던 심장을 후벼팔정도로 날카롭게 갈린 비수같은 그녀의 시선이 나를 흘깃 내려다보았다.

"만약 물어봤으면 충분히 대답해줬을거다."

그때서야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지만, 그녀는 이미 수원에서 내려간 이후였다.

검호와 서먹해진것도 그때부터였다. 처음부터 남이었으니 가깝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페어리의 영역에 있는 유일한 인간이라서 조금은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전부 내 착각이 아니었나 생각할만큼 그녀의 반응은 냉담했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그녀가 상처받았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봐도 남자다운 그녀의 외모는 사실 콤플렉스였을지도 모른다. 전사로서의 자부심과는 별개로 말이다. 어떻게든 찾아가서 사과하려고 해도, 그녀는 요정 사냥꾼들의 처리를 빌미로 자리를 피했다. 신경이 그쪽으로 쏠리니 자연히 실험에도 진전이 없었다. 자기합리화를 하기엔 빼도박도 못하게 잘못을 내가 했다.

그리고 사과의 기회는, 뜻밖의 때에 왔다.

"니가 꼭 따라올 필요있나."

"제가 아니면 그 마법초를 구분할 수 없으니까요. 아무리 페어리들이라 해도 말이죠."

가느다랗게 뜬 눈안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보는건 힘들었지만 그래도 겨우 웃어보였다. 콧웃음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표홀하게 움직이는 그녀를 텔레포트를 연달아 써서 간신히 따라가며 마법초들을 채취했다. 내 로브와 마찬가지로 쓸데없이 늘어질텐데 나뭇가지에 걸리지않고 흔들리는 털망토를 쫓아 숲을 들쑤시기를 한참, 갑자기 그녀의 걸음이 뚝 멈춰 넓은 등에 머리를 박아버렸다.

"윽!"

"잠깐 실례하겠다."

느닷없이 그녀가 제 다리를 걸고 넘어뜨렸다. 예고없는 그 행동에 이어 그녀는 단단한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은채로 올라타 엎드리며 짓눌렀다.

'……?!?!'

아니 대체 무슨 짓을.

"조용히 있어봐라."

그녀는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다 어느 한 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지만 점차 몸을 낮추며 다가오는 흉부지방에 머리속이 새하얘졌다. 그녀의 손이 입과 더불어 코까지 막아버려 숨이 빠르게 막혀왔다.

직접 귀를 대고 있어 심장이 뛰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뭘 하는지 그녀가 작게 움직이더니 곧 상체를 일으켰다.

"한시라도 빨리 페어리들의 영역에 돌아가라. 몬스터들의 수가 너무 많아…… 듣고 있나?"

그보다 좀 내려가주시면 안될까요. 일전에 보았던 근육은 그 밀도도 장난이 아닌지 그녀는 굉장히 무거웠다. 여자보고 무겁다고 말하는게 실례인건 알지만 100kg은 족히 되는 것 같다.

"미안하다."

그제서야 입을 막고있던 손이 떨어졌다. 말라가던 폐에 급히 산소를 쑤셔넣느라 심한 기침이 나왔지만 황급히 손으로 막아내며 소리를 줄인 나는 그녀가 보고있던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엔 나무가- 숲이 들썩이고 있었다.

"저건……."

"트리로드들이다. 많이 굶주린 모양이야."

이대로 가면 페어리들을 거름삼아버릴지도 모르지. 그 말에 겨우겨우 뇌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빨리 가라. 텔레포트할 마력은 충분하나?"

"예, 물론."

나는 대답하면서 최대한 세게 손부채질을 하며 새빨개진 얼굴의 열을 내렸다. 어째선지 마력이 차오르는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난 저것들을 상대로 시간을 끌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검호씨."

"…… 뭐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어느새 뽑은 검과 다른쪽 검을 막 뽑아 쥐며 달려가려는 그녀의 털망토자락을 붙잡았다.

"저번엔 죄송했습니다."

"뭘 말이지."

다소 짜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애써 웃었다.

"남자로 오해하고, 훔쳐봐서 죄송합니다."

"─아아. 그거말인가."

"사과하려고 했지만 쉽게 되지 않더군요. 지금이 아니면 더이상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는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붉은 눈이 나비처럼 곱게 접혔다.

"별로,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착각할만 했으니까."

"예?"

"사실 내가 봐도 남자같은 몸이니까 뭐. 그보다 빨리 가봐라."

더이상 시간을 끌면 안될 것 같거든. 나를 퍽 밀어낸 그녀는 트리로드 무리를 향해 달려갔다.

이상하게 얼얼한 등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애써 내린 열이 다시 올라왔다. 좀 전의 그녀가 지은 미소가 의외로…….

'예뻐보였던 것 같은데.'

그렇게 딴생각하며 텔레포트 하다가 결국 좌표가 꼬여버려 도착하는데 되려 시간이 더 걸려버렸다.

***

검호side.

썩을. 기껏 보낸 하마놈이 지지리도 늦게 왔다. 용해액 비슷한 독에 한쪽 소매가 다 날아가서야 오는건 대체 어떤 시간 감각을 가져야 가능한 일이냐.

그래도 놈이 막판에 와서 엄청한 빛줄기를 날려 싹 쓸어버리는걸 보고 메이플 세계관에선 법사가 씹사기라는걸 체감했다. 난 그렇게 고생했는데!

"괜찮으세요 검호?"

"붕대나 잘 감아라."

아마란스와 그녀의 친구들이 달라붙어 내 팔 주위를 빙빙 돌며 붕대를 감았다. 용해액에 살이 녹지는 않았지만 맞은쪽 팔에 다소 마비가 와 당분간은 약 바르고 붕대신세. 그사이에 쫓겨나지 않을까 진지하게 걱정해야한다. 아이고 내 팔자야.

"무슨 문제있습니까?"

아주 많아. 여기서 쫓겨나면 현상수배범으로 온갖 사람들이 날 잡으러 올거라고. 그 원흉이 오는 꼴을 농담으로라도 곱게 볼 수 없었다. 거기다 저놈은 원흉임과 동시에 생명의 은인이다.

"신경 꺼라."

"치료 마법을 써 드릴 수 있는데, 어떠십니까?"

저놈이 뭔 오지랖이지. 말도 안했는데 멋대로 와서 엉성하게 감긴 붕대를 막 풀어헤쳤다. 용해액이 스며들어 여기저기에 누렇고 둥근 반점들이 생긴 가운데 찧은 약초들을 잔뜩 바른 팔이 보였다.

"…… 검사 생명이 끝난거 아닙니까?"

"그정도로 약하지 않아."

너 전에 페어리 의사가 와서 확인해갔거든? 수 백년 살면서 본 몸들중에서 가장 말도안될정도로 튼튼하다며, 약 잘 바르고 좀 쉬면 바로 나을거라더라.

그렇게 괜찮다는데도 쓸데없이 진지한 얼굴로 마법을 쓰는 모양새가 꽤 우스웠다. 뭐, 내 입장에선 공짜로 치료해주겠다는게 사양할 이유따위 없으니까. 다만─

퍽!!

"아 미안."

"괜찮, 괜찮습니다! 문제없습니다!"

"…… 코피나고 있는데."

치료 마법이 간지러워서 반사적으로 팔 휘둘렀다가 하마 얼굴을 후려쳐버렸다. 좀 보겠다는데도 극구 사양하며 가려고해서 붙잡으려 했는데, 황급히 텔레포트써서 도망쳐버렸다. 왜 저러지.

그리고 다음날부터 이상하게 놈이 집요할정도로 몸은 괜찮냐니 뭐니 묻는걸 시작으로 계속 가까이 와서 뭔가 대화를 시도한다. 내가 어제 후려진 부위가 얼굴이 아닌 전두엽 부근이었던가 진지하게 의문이 들 정도로.

'설마……?'

나는 문득 떠오른 대부분의 인소나 로판에서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의 이유를 조심스레 가정해보았지만 전신에 쫙 소름이 돋아나 바로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리가.'

도끼병 환자도 아니고 그 무슨 말도 안되는.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정말 만에 하나, 억에 하나 그렇다고 해도 기쁘기보단 공포스러울 것이다. 지금 난 흔하디 흔한 '앵두같은 입술'에 '이슬처럼 영롱한 눈', '투명한 피부'와 '비단같은 머리카락'을 가진 '몸매쩌는' 여주가 아니라고. 되려 그런 여주의 남주 역할을 해야할것처럼 생겼는데 세상 어느 괴악한 취향을 가진 남자가 반하겠어? 하하하! 생각해보니까 웃기네. 거의 개그잖아 그거.

그보다 요즘 에피네아의 시선이 따가운데 이놈 진짜 어떻게 떨어뜨리지.

아, 아니지. 그냥 내가 엘린 숲을 나가면 되려나? 일단 나한테 현상금을 건 아리안트 왕국이 있는 니할 사막쪽만 확실하게 피해가면 어떻게든 될지도 모르잖아.

그래. 그렇게 하자.

========== 작품 후기 ==========

유감스럽지만 검호는 여자가 된다고 여성스러워지지 않습니다. 남검호 키에서 5센치 정도 작아지고(179) 성별만 변하는걸로 끝. 체중도 좀 가벼워지지만 근육량과 골밀도때문에 레알 100킬로 가까이 됨. 결정적으로 제가 근육을 좋아해요. 전사는 무조건 근육!!

영웅즈와 그외에도 출연시킬까 했지만 이 이상의 내용은 제 머리에서 아웃당한고로 패스. 만약 썼다면 여검호를 두고 에반과 은월, 데슬이 신경전을 벌이는 가운데 인간화한 아스카가 무릎베개하며 셋을 도발하는 광경이 펼쳐졌을 겁니다. 검마는 시간의 신전에서 메테오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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