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호입니DA-102화 (102/208)

<--  -->  은월side.

주문서를 통해 미우미우에서 판테온으로 온 나는 그곳이 무척 어수선하다는걸 알았다. 종은 달랐지만 인간과 매우 흡사해보이는 사람들은 웃음기가 거의 없었고, 하는 일에 집중하지 못했으며, 두 눈의 생기가 메마른 것처럼 보이는 그 광경은 장소는 달랐지만 익숙한 것이다.

전화(戰火)가 휩쓸고 간 자리. 이곳에도 전쟁이 있었던건가. 그것도 상당히 최근에.

"어이, 그쪽 형씨는 누구야?"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자세를 잡으려는 순간, 위에서 뭔가가 확 떨어져 내렸다. 순간 시야가 붉은색으로 가득찰정도로 길고 폭이 넓은 머플러를 나부끼며 서글서글한 인상의 청년이 소리없이 걸어왔다.

다갈색 피부에 품이 넉넉한 바지를 입은 백발의 청년은 과거에 비하면 말도 못할만큼 약해졌지만 안목만은 그대로인 내 눈에도 굉장히 강해보이는 몸을 가지고 있었다. 짐승…… 비유하자면 밤을 틈타 사냥을 하는 재규어와 흡사하다.

"노바족으로는 보이지 않고, 아니마족도 아닌 것 같은데? 귀도 둥근 게 귀쟁이일리도 없으니 혹시 디멘션 게이트를 통해 이쪽으로 온 메이플 월드의 인간인가?"

"말하는 그쪽도 인간으로 보인다만."

"그야 난 인간이 맞으니까. 그래서 그쪽 이름과 용건은?"

보통 사람이 보면 호감을 가질법한 미소를 한가득 짓고있었지만 알이 꽤 굵은 구슬들이 꿰어져 만들어진듯한 기이한 장신구를 차고있는 양 손등에 힘줄이 돋아나고 있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의심할법한 행동을 하는 즉시 단어그대로 뼈와 살을 분리해버릴 기세다.

"이름은 은월이고, 이곳에 있다는 디멘션 게이트를 써서 메이플 월드로 돌아가기 위해 왔다."

"은월……? 잠깐, 형씨가 '그' 은월이라고?"

날 알고 있나? 메이플 월드가 아닌 이곳에서 나를 아는 사람이 있는건 이상한데. 하다못해 저 남자가 나와같이 메이플 월드에서 이쪽으로 왔다해도, 동료들과 함께 영웅이라는 낯간지러운 호칭으로 불렸던 '유에'면 모를까 미우미우에서 랑이에게 막 지음받은 은월을 알고있는 건…… 이 남자, 대체 뭐지?

남자는 청록색 눈을 잘게 떨며 나를 보더니 - 마치 동화속 비련의 여주인공을 보는듯해 기분 나빴다 - 언제 그랬냐는듯 손에 힘을 빼고 다시 웃었다.

"아아, 미안해 형씨. 요즘 판테온이 좀 많이 시달려서 그런지 내가 꽤 날카로워졌어. 내 이름은 세…… 롯뜨야. 아까 까칠하게 굴어서 쏘~리. 그래서, 디멘션 게이트를 쓰러 왔다고 했지?"

나는 한꺼번에 말을 따다다 연사해낸 롯뜨라고 소개한 남자에게 겨우 대답했다.

"그래."

"이유는 알겠는데 솔직히 가지 말라고 충고할게."

"어째서지?"

"게이트가 엄청 위험하거든."

말로는 못 믿을테니 보여줄게. 그는 따라오라며 손짓하고는 나를 어느 거대한 건물로 안내했다. 그곳은 드래곤과 그 형상을 본뜬 갑옷을 입은 거대한 석상들이 늘어져 있는, 웅장하기보단 엄숙한 분위기의 장소였다.

"여기는 어디지?"

"노바족의 대신전이고, 형씨가 찾는 디멘션 게이트가 있는 곳이지."

신전? 순간 리프레에 있는 시간의 신전이 떠올랐다. 그것과는 달랐지만 특유의 경건한 분위기는 비슷한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안쪽까지 들어간 끝에 우리는 혼탁한 기류가 소용돌이치는 벽 앞에 도착했다. 그것의 옆에는 이곳의 신관으로 추정되는 옷차림의 나이든 노바족 여성과 청년이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성투사님?"

"이 형씨를 설득해야해서 말이지. 자자 형씨, 여기 이게 디멘션 게이트야."

그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보고 있었다. 빙글빙글 돌고있는 연기 속에 보이는 수많은 풍경들은 익숙한 것들이었으니까. 니할 사막, 엘나스, 리프레…… 다소 달라지긴 했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워~워. 건들이지마 형씨."

"난 저기로 가야한다."

"그러니까 안─돼. 이건 무척 위험한거라고."

"뭐가 위험하다는거지?"

"이걸 쓰면 메이플 월드에 갈 수 있는건 맞아. 하지만 어디로 갈지는 몰라."

"그 무슨……."

남자는 게이트에 다가가는 나를 붙잡으며 어째선지 간절하게 말했다.

"구름 위로 갈지, 심해 깊숙한 곳으로 갈지, 지하 어딘가에 처박힐지 완전히 랜덤이란 말이지. 이 안에 보이는 풍경들이 다양한 건 도착하는 장소가 실시간으로 계속 변하고있기 때문이고, 결론은 완전 복불복이란 말이야."

실로 무지막지한 사실에 나는 침묵했다. 이건 상상이상으로 끔찍하군. 몽이에게 메이플 월드에 갈 수 있는 문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 이런 물건일줄은 전혀 몰랐다. 과연 이 남자가 말릴만 했던 것이다. 예전이면 모를까, 아니 예전이었어도 이걸 썼다가 엉뚱한데 떨어지면 아무 준비가 안되있는 지금이라면 어떤 꼴이 될지 안봐도 선했다.

하지만.

"그래도 가야한다."

"…… 아니, 썼다가 죽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저기에서 여기로 올때는 열에 아홉은 판테온이지만 여기에서 저기로 갈때는 백이면 백 몬스터 한복판이거나 오지거나 둘 중 하나라고. 마을일 가능성자체가 너무 낮아."

"그럼 이거말고 메이플 월드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나?"

"없어."

"그렇다면 역시 이걸 써야겠군."

"어이 형씨, 방금 내가 한 말은 귀가 아니라 콧구멍으로 들은거야?"

보기보다 상당히 말을 막하는군. 무시하고 게이트에 마을로 추측되는 곳의 풍경이 떠오를때 뛰어들려는 순간, 롯뜨가 확 자신을 끌어당겼다.

"그러니까 안된다고 형씨."

"이 손 놔라."

"왜 사지에 제 발로 가는거야? 그리고 심지어 저쪽에서 여기로 오는 것도 엄청 힘들어. 다시는 여기에 못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진짜로 갈거야?"

순간 랑이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자신도 은월의 친구냐고, 소중한 존재인거냐고 묻던 작은 소녀. 다시 만나지 못한다면 그건 좀…… 많이 슬플것이다.

그래도, 그래도.

"나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게, 고통스러워 하고 있을 녀석에게 살아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녀석들이 사랑하는 그곳을 지켜야해."

"……."

롯뜨는 헛웃음인지 탄식인지 모를 것을 내뱉고는 뭔가를 말하려고 입을 우물거리다 끝내 말하지 않았다. 그저 비내린 후의 숲처럼 가라앉은 청록색 눈으로 나를 지긋이 보다가 손을 놓고는 나이든 노바족에게 말했다.

"펜릴 씨. 나 잠깐 메이플 월드에 갔다올게."

"예? 갑자기 무슨─"

"이 약해빠진 형씨가 듣도보도 못한 곳에 떨어져서 객사하면 굉~장히 찜찜할 것 같거든. 자살을 도운 것 같다고 해야할까? 그러니까 이 형씨 좀 지켜준 다음에 다시 올게. 늦지는 않을거야."

"아까 전에 여기로 다시 오는 건 굉장히 힘들다고 하지 않았나?"

거기다 약해빠졌다니. 부정하고 싶었지만 깨어난 이후 제 힘이 형편없이 약해진건 사실이었다. 그걸 이렇게 직설적으로 들으니 굉장히 불쾌했지만.

"그렇긴한데 나는 예외거든. 냐하하!"

"……."

이 남자, 친절한 건지 오지랖이 넓은 건지, 아니면 그냥 극도로 마이페이스인건지 도저히 모르겠다. 확실한건 자신한테 적의는 없다는거다.

"마을 비슷한게 보이면 바로 뛰어들거야. 0.1초라도 늦으면 스카이 다이빙을 하게될지도 모르니 미리 준비해둬."

"무슨 준비말이지?"

"안 아프게 죽게 해달라고 신에게 빌 준비."

나는 다시 침묵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내 팔을 뽑을 기세로 당기며 게이트로 뛰어들었다.

예고라도 하라고!

***

검호side.

케리 아저씨는 참 용케 쓰러지지 않고 그 많은 일거리들을 모조리 접수했다. 아 그분이 직접 처리했다는게 아니고, 우리한테 무릎꿇으며 제발 도와달라며 빌었다는 뜻이다. 부탁하는 사람도 아니고 부탁받는 쪽인 내 얼굴이 낯뜨거워질 정도로 필사적으로 말이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이 만약 해주신다면 골드비치 리조트의 영구 VVIP고객으로 대우할거라나? 그런데 전 이 콩가루 해변에 다시 올 계획이 없습니다만.

여기 개장하자마자 망하는거 아니냐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그렇다고 모른 척 할 수는 없었기에 결국 하겠다고 했다. 일단 제일 먼저 부상자인 유에와 조종사 할아버지를 눕힐 곳이 필요해서 - 그리고 내 옷을 되찾기 위해 - 슬라임들에게 점령당한 객실을 탈환할 필요가 있었고, 첫 번째 퀘스트는 호텔 객실 청소가 되었다.

나는 즉시 롯뜨라고 소개한 남자와 함께 호텔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슬라임들을 처리했고, 그와중에 벽이나 바닥을 부수지 말아달라고 케리 아저씨는 또 애원하셨다.

"형씨는 여기 있을거야?"

"그가 깨어날때까지만."

"헤에~ 그랑 꽤 친했나봐?"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는데. 오히려 유에랑 정말 친했던 사람은 프리드였지. 나와 유에의 관계는 그냥 길가다가 만나면 가볍게 아는 척 하며 인사하는 정도? 최대한 좋게 봐도 서로 만났을 때 조금 반가운 사이가 고작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사람한테서 잊혀졌을 유에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는 모르겠다.

"일단 그에게 해줄 말이 많으니까."

메이플 월드는 8백년이 지났고, 프리드는 죽었고, 영웅즈는 거의 다 봉인된 상태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지금 나 뿐인 걸. 이미 들었다면 별 수 없지만.

롯뜨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보기보다 상냥하네, 형씨는."

"하?"

갑자기 뭔 소리야 이 사람은? 거기다 상냥하다니.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자자! 그럼 난 이제 저 불쌍한 매니저 아저씨의 부탁을 들어주러 가야하니, 형씨는 여기서 동료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아 잠깐, 해변쪽에 나와 계약한 드래곤과 마찬가지로 드래곤과 계약한 마법사 소년이 있는데, 갔다가 만난다면 상황설명을 대신 해줄 수 있나? 가능하다면 그들에게 맡겨둔 내 검을 가져오는 것도."

"그정도야 쉽지."

그러고는 휙 창문을 열어젖혀 그대로 뛰어내렸다. 참고로 여기는 10층이다.

…… 낙하 데미지도 없나. 내가 저거 비슷한 짓 예전에 했다가 발 작살나는 줄 알았는데. 원래 사람은 3m 높이에서 떨어져도 아프다고.

나는 호텔에 대기중이던 치료 마법사가 - 의사대신 있더라 - 손 본 유에가 여전히 일어나지 않음을 확인한 다음 옷을 갈아입었다. 진짜 수영복 입고 싸우는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딱히 이 옷도 기능성은 아니지만 이쪽은 차라리 익숙하기라도 하지.

유에가 깨어나면 무슨 말부터 해줘야 하지? 난 메이플 할 때 은월은 딱히 안 키웠었기 때문에 - 스토리의 안습함은 둘째치고 개연성 없다고 까여서 - 대략적인 것 밖에 모른다. 그나마 아는것도 여기저기에서 주워들은건데 몇 년이 지나면서 많이 까먹었다. 일단 그가 메이플 월드에 왔다는 건 그 미우미우? 에서 여차저차 일 다 끝내고 왔다는 뜻일테니…… 골드비치까지 오는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이미 다 들었을 것이다.

'난 진짜 말 못하는데.'

뭔가를 설명하는 것도, 누군가를 위로하는 것도 쥐약이라고. 거기다 본인이 차원을 건널때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질거라는 사실까지 알리는건…… 사람이 할 짓이 못 돼.

안돌아가는 뇌를 어느때보다 열심히 굴리며 할 말을 쥐어짜내고 있을때, 열린 창문 밖으로 마법과 흙먼지가 마구 일어나는게 막 보였다. 케리 아저씨가 아주 곡소리 내시겠네. 그런데 솔직히 저렇게 많은 놈들을 처리하는데 섬에 피해가 안 생기게 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나도 내려가서 저것들 처리하면서 경험치를 쌓아야 조금이나마 강해질텐데. 그런데 지금 나한테 무기가 없잖아? 맨손으로 가자니 이미 그랬다가 야자수로 모래사장을 쓰는 진귀한 경험을 강제로 했었는데 뭐하러 그 짓을 또. 거기다 체력이 거의 방전되서 움직이기도 힘들고. 결국 여기는 에반과 깨어날 유에의 경험쌓기 장이 되는건가─ 하고 생각할때.

"검호?"

"…… 일어났나."

얘 타이밍 너무 환상적이다. 아무것도 준비 안됬을때 일어났어 젠장.

"어떻게 당신이 윽, 그리고 여기는 어디지?"

"여긴 빅토리아 아일랜드, 골드비치다. 난 여기 바캉스를 즐기러 왔었는데 일이 생겨서 못하게 됬고, 넌 타고있던 비행기가 바다에 추락한 걸 같이 비행기에 타고 있던 롯뜨라는 남자가 구해줬다."

"그놈이 진짜……!"

어째 분위기가 살벌하다. 그 롯뜨하고 뭔 일이 있었던거냐 너.

"혹시 치료가 덜 된 곳이 있나? 그렇다면 호텔내 마법사를 불러줄 수 있는데."

"문제없다. 이정도는 참을만 하니까. 그런데 당신이 여기있다는건 다른 동료들도─"

"그것에 대해선 할 말이 꽤 많은데…… 일단 진정하고 들어줄 수 있나 유에?"

사실, 이미 이렇게 될걸 알고있었으니까 상대적으로 덜한거지 나도 꽤 충격을 받았다. 한 숨 자고 일어나니 8백 년이 흘렀다. 알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고, 세상은 완전히 모르는 형태로 변했는데 어떻게 안 놀라. 그래도 난 아스카가 있고, 아마란스를 만났고, 지금의 메이플 월드가 어떤지 꽤 알고 있어서 나았지.

그러니 일단 처음 할 말은.

"그때로부터 약 8백년이 흘렀다."

"…… 뭐?"

"우리가 검은 마법사를 봉인한지 이 세상은 8백여 년이 흘렀다고 말했다."

"그런, 말도 안되는."

"책으로 확인한거니 확실하다."

사실 아스카에게 들은거지만 아무튼.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검은 마법사의 저주를 받고 얼음에 갇혀 봉인된 상태다."

조금 이상한건 원래는 유에가 여기 올 때 쯤엔 모든 영웅들이 깨어나 활동하고 있는데 내가 확인한바에 따르면 현재 루미너스를 제외한 나머지는 여전히 봉인되어 있다는 거다. 물론 육안으로 확인한 건 메르세데스밖에 없지만, 팬텀이나 아란이 깨어나서 활동에 들어갔으면 조금씩 입소문을 탔을테니.

황망하게 눈을 뜬 채로 나를 올려다보던 유에가 말했다.

"잠, 깐만. 대부분이라는건 아닌 사람도 있다는건가?"

"아아, 프리드만은 봉인되지 않았었으니까. 아프리엔이 대신 저주를 받았다고 한다."

"프리드가……."

나는 이어서 아마도 그가 가장 상처받을 말을 해야했다. 이건 숨길 수 있는게 아니니까.

"다시 말하지만 메이플 월드는 8백여년이 흘렀다. 그리고 그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어."

인간이니까.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 해도 인간인이상 자연적인 노화를 막을 수는 없었을테니. 나는 프리드의 집에서 보았던 수많은 사진들 중 시간이 할퀴고 간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본래의 갈색은 찾아볼 수 없었던 희고 마른 머리카락과 세월의 풍파가 새겨진 주름살들. 그래, 당연한거야. 아무리 안타깝고 슬퍼도 결국 죽는다는건 당연한거야.

멍하게 풀린 보라색 눈이 마구 일그러지더니 그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날 붙잡았다.

"그럴리가 없어!!"

"내가 이미 확인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요정이 그가 죽었다고 말해줬어."

"그가, 프리드가 죽었을리 없다고!"

겨우 차려입은 내 옷이 다 구겨지도록 움켜쥐며 내게 매달린 그를 꼴사납다고 할 수 없었다. 평소였으면 여자도 아니고 뭔 다 큰 남자가 이렇게 붙냐고 속으로 온갖 불평을 했겠지만 역시 그러지 못했고,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대체 이걸 어째야 하나 고민했다.

"당신이 뭔가 잘못 알고있는─"

"그만 좀 부정해라. 그는 죽었어! 내가 직접 그가 살았던 집까지 가서 확인했단 말이야! 수 백 년도 전에, 프리드는 죽었다고!"

말이라는건 정말 굉장한 것 같다. 입 안에 들어있는 살덩어리를 조금 움직이기만 하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사람의 정신에 칼을 푹푹 꽂을 수 있으니. 풀린 눈으로 애원인지 현실부정인지 모를 말들을 계속 하던 그를 한동안 본 나는 이어서 다른 중요한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래도…… 그는 행복하게 살다 갔어."

시간이 되면 엘리니아의 페어리퀸 아마란스를 찾아가봐라. 거기까지 말한 나는 가방안에 들어있는 프리드의 일기장을 떠올렸다. 나중에 그것도 보여줄까. 그런데 그러면 프리드에게마저 잊혀졌다는 걸 알고 더 상처받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지금 동료들을 찾아가지 마라. 가봤자 어차피 못 볼테니까."

괜히 만났다가 누구냐는 말만 듣을테고, 그게 아니더라도 결국 유에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깨닫게 되겠지만, 그래도 나는 결국 그에게 '니가 모두에게서 잊혀졌고, 앞으로도 잊혀질 것'이라고 말하진 못했다.

거짓말이 아니라 있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거지만, 이게 얼마나 불쾌한 건지 안다. 그년이 나와 다른 트립퍼들에게 한 게 그거였지. 그런데 이미 정신적으로 넉다운된 놈에게 솔직히 그런 것까지 말하는 건 너무하잖아.

좀 더 누워있는게 좋을거라고 말하려는 찰나, 갑자기 창문이 깨질듯이 크게 흔들리며 소음이 일어났고,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다가왔다.

[마~스터! 여기 검 가져왔어!]

"저기 스승님, 저희 슬슬 배고픈데요?"

[마법 엄청 써서 배고파아~]

이 유쾌한 분위기 브레이커들 같으니. 왜 꼭 이 타이밍에.

"프리드?!"

아니라고 이 프리드성애자야.

***

은월side.

짠 냄새, 축축한 습기가 스며들었음에도 불쾌하지 않은 바람 그리고 길게 울리는 요란한 경적 소리까지. 이런 것들이 한꺼번에 있는 곳은 하나뿐이다.

"어라라, 예상 밖인데?"

"여기는……."

"물어보면 되지. 거기 수염이 멋진 터프한 바다 사나이씨~! 이 예술적인 경치의 항구 이름이 뭐죠~?"

이 사람 얼굴에 철판 깔았나.

"리스 항구네! 내 수염이 멋지긴 멋지지!"

"감사합니다!"

정정. 철판이 아니라 다이아몬드 판이다.

"들었지? 우리 진짜 운이 좋은 모양이야."

"어쨌든 마을에 왔으니 더이상 당신이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이만 돌아가는게 어떤가."

"그건 사양할게."

"뭐?"

"동료들을 만나러 간다고 했지? 형씨가 한 명이라도 만나는걸 직접 봐야겠어. 이렇게 약해서야, 나 말고 다른 보호자가 꼭 붙어있어야 할 것 같거든."

"누가 보호자라는거냐!"

예의 그 냐하하~ 기이한 웃음을 흘리며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곳으로 저를 끌고가는 놈의 행동에 열이 뻗쳤지만 강철집게보다 더 단단히 팔을 붙잡고 있는 손은 풀어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자자, 아무때나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1등 상품은 무려 골드비치 리조트 초대권! 와서 한 번 도전해 보세요!!"

"눈물점이 굉장히 매력적인 누나~ 저 한 번만 돌려봐도 될까요오?"

"물론입니다!"

소매 아래로 닭살이 쫙 돋았다. 다 큰 남자가 뭐하는거야.

"대체 무슨 짓을 하는거냐 니놈은!"

"진정해봐 형씨. 동료들을 찾는다며? 하지만 그들이 어디있는지는 모르지?"

"그건 그렇지만……."

"그렇다면 일단 무조건 사람이 많은 곳을 가야해. 리조트라면 당연히 사람이 많을거고, 거기 없더라도 소문정도는 주워들을 수 있을거 아니야. 안그래?"

불만스럽지만 일리있는 말이었다. 아니 그런데 무작정 저걸 돌린다고 당첨될리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한 가지 더, 난 뽑기 운이 좋아."

롯뜨는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휙 룰렛을 돌렸다. 빙그르르 돌아간 룰렛의 침이 달달거리며 막대에 연이어 부딪혔고, 이내 천천히 속도가 줄어들며 틱, 틱 한 칸씩 넘어갔다. 그리고 그 끝이 가리키는 것은.

"축하합니다! 골드비치 초대권에 당첨되셨습니다!"

"거보라고."

팬텀이 생각나는데 기분탓인가.

더 짜증나는건 이후 그의 예상이 맞았다는 것이다. 노년의 비행사가 뭘 잘못했는지 비행기는 바다에 처박혔고, 눈을 떴을때 보인 것은 굉장히 고급스러운 벽지가 발라진 천장, 그리고 익숙한 동료였다.

"…… 검호?"

"일어났나."

기억하는 모습과 한치의 다름없는 그가 자신이 누워있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는 광경에 놀라움과 동시에 어이가 없어졌다. 뭐? 롯뜨 그 남자가 날 구해? 대체 내가 어쩌다가 여기에 왔는데 그런……!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놈을 찾아다 멱살을 잡고 싶었지만, 계속 누워있으라고 말한 검호가 건조하게 메마른 얼굴로 평소보다 더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하기 시작했다.

"일단 진정하고 들어줄 수 있나 유에?"

"그때로부터 8백 년이 흘렀다."

"그리고 그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어."

차라리 안 듣는게 나았을 사실들이 그의 입에서 연이어 쏟아졌다. 스스로 말한 것처럼 책을 읽듯이 너무도 평탄한 어조로 말해서 현실감이 바닥으로 추락했지만, 그가 거짓말이라는 것을 할 리가, 할 필요도 없었다.

프리드가, 프리드가 죽었어. 누군가 손으로 가슴을 갈라 심장을 쥐어짜는 것처럼 아파왔고, 폐에 바늘이 들어갔는지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아니야! 그럴리가 없어! 그럴리가 없어야 돼! 저건 거짓말이여야 한다고!

만나러 왔는데…… 살아있다고 말해줘야 한단 말이야. 내가 제물이 된 것을 내내 걱정하면서 죄의식에 빠졌을 그에게 사실 무사했다고 안심시켜줘야 하는데…… 동료들이 모두 봉인되면서 혼자 남은 그가 어떻게 살았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리더지만 가장 어리고, 영웅이라는 이름과 해야하는 일에 엄청난 중압감을 버티며 검은 마법사를 상대하는데 모든 것을 걸었던 프리드가 그런 식으로 혼자가 되다니 그 무슨 끔찍한 결말이냐고.

"그래도…… 그는 행복하게 살다 갔어."

뭐?

"시간이 된다면 엘리니아의 페어리퀸 아마란스를 찾아가봐라. 그리고 되도록이면 지금 동료들을 찾으러 가지 마라. 가봤자 어차피 못 볼 테니까."

그건 이미 가 본 사람의 경험담이었다. 우리중에서 가장 겉돌고 있던 그가 제일 먼저 봉인에서 우리의 생사를 확인했다니.

더이상 할 말이 없는지 그는 침묵을 유지했고, 그때서야 멀리서 리스 항구라는 곳에서 맡았던것과 같은 바다내음이 바람에 실려오는걸 알았다. 그러고보니 아까 그가 바캉스를 왔다고 했는데……?

[마~스터! 여기 검 가져왔어!]

"저기 스승님, 저희 슬슬 배고픈데요?"

[마법 엄청 써서 배고파아~]

이 방의 한쪽 벽은 모조리 유리였는데 그게 모두 새까매질정도로 몰려온 거대한 무언가가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오닉스 드래곤일 것이다. 아니 그보다 스승님이라니? 검게 물결치는 동체 위로 연한 갈색머리와 순한 파란눈이 보였다.

"프리드?!"

"아니다!"

소년이 프리드가 아니라는걸 받아들이는데엔 이후 다소 시간이 필요했다.

========== 작품 후기 ==========

롯뜨와 은월이 함께 온 이유&현재 은월이 아는 정도.

원래 게임에서 디멘션 게이트는 만인이 쓰는 대륙이동 정거장이지만, 여기서는 끝장나는 복불복 게이트입니다.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무방비한 상태로 혼테일이나 핑크빈 앞으로 이동되버림.

이쯤되면 롯뜨의 정체는 알만하죠 뭐.

어떤 독자분이 이 글의 팬픽을 써서 뜰에 올려주셨습니다. 보고 굉장히 기뻤어요... 보고싶으신 분은 가서 보세요~

@stell - 현재 제가 하는 게임은 메이플2밖에 없어서리... 할로윈 외전을 쓸까 했는데 이미 시기가 지나버렸네요 쩝.

@곰휴지 - 검호를 처음으로 만난겁니다. 일단은 행운이죠. 원작에서는 헤네시스에서 헬레나를 만나서 몇 년이 흘렀는지, 영웅즈가 어떻게 됬는지 알지만 여기에서는 좀 다르게 처리했습니다.

@karuma - 일단 무사할텐데 슬라임들은 무사하지 못할겁니다.

@비탄의과학자 - 그건 나중에 알고볼 일이죠.

@대어의예감 - 남자가 얀데레라니, 뭐야 그거 무서워.

@Blake117 - 이미 폐허가 되지 않았나요 하핫.

@노란우산s - 봉인석은... 그거 어떻게 될지가 좀 문제입니다.

@라그실 - 그 사람 맞아요 데헷〈 그리고 롯뜨가 죽인 '사람'도 앞으로의 전개에 약간... 흠흠, 제가 제 글 스포하는 습관은 버려야 하는데 말이죠.

@qkzks135 - 그 형태를 앞으로 좀 많이 바꿀까 합니다. 2부 스토리를 겨우 짰는데 얼마전에 다 갈아엎었거든요.

@Legendssj2 - 검호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고 바로 그란디스로 퇴장할 놈입니다.

@이년아 - 2번째 맞아요.

@좀비라스 - 마법사는 주변환경에 신경쓸 수 없어!

@레시코 - 바로 로트라고 하면 다 알아차릴 것 같아서 말이죠. 조금 변형한거.

@핑구친구 - 그리고 수습은 초보자인 에반과 유에가 할듯?

@넝기 - 뭐야 그 링크스킬... 어디다 쓰라는거지.

@나는 죽지 않았다 - 테마 던전이 실사화되면 충격과 공포죠 뭐.

@루엔시르온 - 아직 다른 영웅들이 자신을 잊었다는걸 모름.

@신의약속 - 죽어나가는건 관리자들.

@류동지 - 개편후 에반과 아란이 어떻게 될지 진짜로 궁금합니다.

@칼른 - 진짜 검호에게 매달리게 될듯. 롯뜨가 차원 넘지말라고 말렸는데.

@Hound Dog - 막 만난 동료에게 들은 소식들이 하나같이 안좋음.

@darkdestiny - 그 동료와의 유대감이 가장 떨어지는건 둘째치고 말이죠.

@칼크래프트 - 지상낙원이 아니라 지상락원인가.

@터우룩 - 사실 전 은월 스토리 별로 안좋아합니다. 진짜 안습함을 둘째치고 개연성이 엄청 떨어지거든요... 그래도 넣어야 했지만. 앞으로 은월이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해서 말이죠.

@여행자구름 - 하고싶은데 거기 스토리는 다시보기가 지원 안됨...

@Ratios - 그리고 2차 개판?

@소라루 - 리조트 매니저는 아무나 하는게 아닙니다. 양판소의 주점 주인처럼요.

@Racine - 그렇다고 오래 붙어있을건 아니지만.

@브룬 - 상대적으로 굉장히 반응이 좋았던만큼 나중에 다른 동료와 만났을때의 충격은...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리화앨리스 - 검호가 사야역? 이라기보단 사야같은 히로인 역이었어요.

@심온 - 이리스 리비에르를 말하는거라면 등장예정 아예 없음입니다.

@적현월 - 그리고 이후 테마던전들의 관리직들에게 미리 애도를.

@ReFrante - 아니요, 정확히는 세피로트입니다. 뒤의 두글자를 살짝 호감있게 바꾼게 그거에요. 그리고 게임에서나 배경이니 상관없지만 현실에서는 야자수 하나하나 조심해야한다는.

@Eluines - 이후 역경을 이겨낸 골드비치는 매우 잘나가게 되었답니다?

@허공말뚝 - 처음부터 아스카는 천재였던만큼 가르치는데에 영 소질이 없는데 에반도 꽤 재능이 있는지라.

@여기돈까스요 - 저기 몰린 이들의 면면만 봐도 어우.

@Sisre - 나중에 영웅이 오간 곳이라고 광고 하면서 잘나갈거에요.

@흑접아 - 사실 퀘스트만 해도 거기가 개판인걸 알 수 있지만.

@책벌레씨 - 케리에게는 진심으로 직장을 관두고 싶은 순간일겁니다.

@잊어버린자 - 2번째 트립퍼에요. 걱정마세요, 분량 안많아요.

@건전한독자 - 메이플스토리로 치면 해적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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