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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호는 한바탕 울고 이제 막 진정한 에반을 쓰다듬었다. 이번 일로 에반에게 고소공포증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정작 구하려고 뛰어내린 그 역시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리고 있었지만.
에반이 서있던 땅이 용해액에 흐물거리더니 푹 꺼지는걸 보고 그는 무작정 뛰어내리긴 했지만, 뒤늦게서야 자신한테 뭘 어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걸 알고 자살행위를 했다는걸 깨닫고 허우적 거렸었다.
그나마 리엔에서 개수받은 검의 마법덕에 에반도 구하고 - 그가 부탁한 기능은 분명 회수 기능이었지만 아무튼 - 간신히 예전 감각을 살려서 발판을 만들었다만…… 발 뼈가 아작났다. 아작날뻔한게 아니라 아작났다. 에반 다리 치료하면서 힐링을 썼지만 아직도 그는 하반신 전체가 욱씬거리고 있었다.
"모두 감사합니다 모험가님들! 이 은혜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뭐, 해야하는 일을 했을 뿐이니까."
"그렇게 감사받을만큼 거창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여신님이 진짜로 깨어나는거지?]
"네!"
검호가 에반을 구하러 간 사이 데몬과 팬텀, 미르는 정원이 망가진걸 보고 분노한 파파픽시를 쓰러뜨렸고, 그놈에게서 생명의 풀 씨앗을 얻는데 성공했다.
이크는 잘게 찢은 생명의 풀 조각을 석상 여기저기에 붙였고, 풀에서 나온 즙이 석상을 타고 흘러내리며 어느정도 스며들자 금빛을 휘감은 한 여자가 걸어나왔다.
"후우…… 오랜만의 공기로군요."
"여신니이이이임─!"
"여전히 울보네요 이크."
긴 꿀색 머리카락을 핀과 끈으로 올려묶은 여인, 미네르바가 이크를 달래며 웃었다. 참 훈훈한 광경인데 옆에서 찬물을 끼얹었다.
[와 진짜 안닮았어.]
아니라고 태클을 걸어야하는 에반마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긴 안닮긴 했지.
"…… 뭐라고요?"
[인간들이 여신님의 모습을 본따 석상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실제로 전혀 안닮았어.]
[미르. 그런 말은 대놓고 하는게 아니야.]
아스카마저 아니라고 안하고 대놓고 하지 말란다. 이 와중에 데몬과 팬텀은 슬쩍 고개를 돌림으로 이 만담에서 일찌감치 발을 빼버렸다. 인상을 쓴 미네르바 여신은 뭐라 말하려다 그들의 면면을 제대로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익숙한 얼굴들이 꽤 많이 보이는군요. 제가 봉인된지 몇 년이 지난거죠 이크?"
"네! 4백년 좀 넘었어요!"
"군단장과 영웅이 함께 있다니, 정말 시간이 많이 지나긴 지난 모양이네요."
"그거 관둔지 오래니 그 직함으로 부르지 말아줬으면 합니다."
"어머, 8백년 전 오르비스를 점령하기 위해 군단을 지휘하던 사람이 누구였던지 그새 잊어버렸나봐요? 직함 버리면서 다른 기억들도 버렸나요"
"……."
지혜의 여신답게 미네르바는 현재 데몬이 위험하지 않다는걸 곧바로 알아차리고, 아픈 부위를 순식간에 후벼팠다.
"8백년 전이라니…… 무슨 말이에요 스승님?"
"자세한건 나중에 말해주마."
사람들 다 있는 곳에서는 말할게 못되니까.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미네르바. 잠깐 물어볼게 있는데─"
"아무튼 드디어 봉인에서 풀려나기도 했고, 수 백년만에 익숙한 얼굴들을 만났으니 가볍게 다과라도 먹으면서 얘기를 해볼까하는데, 어떠세요?"
"시종 이크! 차를 준비해오겠습니다!"
아무도 수락하지 않았음에도 그들은 강제 다과회에 가게 되었다. 그래도 이참에 좀 쉬자는 생각정도를 하며.
그들이 미네르바를 따라 간 곳은 처음 석상의 조각을 얻었던 그 정원이었다. 아직도 트랩들이 남아있었지만 미네르바는 그것들을 무시하며 그새 이크가 정리해둔 유물급 테이블과 의자에 앉았다. 수 백년이 지난 탑안에서 어떻게 찻잎을 가져왔는지 모르겠지만 이크가 차를 가져왔다.
"당신들이 어떻게 지금 시대까지 살아있는지는 뭐, 용의 마법사에게 들은게 있으니 묻지는 않을게요. 전직 군단장이 좀 의외긴 하지만 반쪽이나마 마족이니 수명은 길겠죠."
"우리가 저주에 걸린 이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아는대로 말해줄 수 있어?"
제일 먼저 팬텀이 물었다. 그는 정보를 얻고자 했다.
"별 일 없었어요."
미네르바가 차를 한 모금 마신다음 말을 이었다.
"검은 마법사가 봉인됬지만 사람들을 안심시켜줄 영웅들도 대부분 실종되서 꽤 오랫동안 대혼란이 유지되다가 서서히 안정, 유일하게 남아있던 용의 마법사가 메이플 월드를 떠돌아다니며 검은 마법사의 손에 들어갔던 지역의 몬스터를 대폭 청소해 다시 사람들이 거기에 살아가기 시작하고…… 아, 당신 외에 다른 군단장들은 검은 마법사의 봉인 이후 대부분 잠적했어요."
별 일이 엄청 많은데?! 그 와중에 데몬이 걸리는 부분을 짚어냈다.
"'대부분'이라는 말은 움직인 놈이 있다는 뜻입니까."
"세계가 전체적으로 불안정해지긴 했지만 이상할정도로 분서(焚書) 사건이 많았거든요."
그의 눈이 예리해졌다. 세계적인 규모로 일어난 기록 소실. 우연이라 치부하며 넘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오르비스의 장서관에서도 화재가 일어났었어요. 진압을 겨우 했지만 책의 반이상이 탔었고, 당시 사서는 안에서 불타 죽었습니다."
"단순 사고일 가능성은?"
"제로에요."
그때를 떠올리던 미네르바는 딱! 소리가 나도록 세게 컵을 내려놓았다.
"그 사서, 그때 그 아이는 나올 수 있었는데 나오지 않았거든요."
[그거랑 사고가 아닌게 무슨 상관이야?]
"장서관이 활활 타고 있는데, 자신의 날개랑 몸이 불에 타는 와중에 절 보면서 비웃었습니다."
그 말에 데몬은 뭔가를 떠올렸는지 '설마?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본인이 아니라 마치 뭐에 씌인 것처럼 말이죠."
"씌인 것 같다…… 라."
쿠키를 전투적으로 씹어삼킨 미네르바는 이크가 다시 따른 차를 마셨다.
"어느 군단장이 나선건지는 옆에 있는 옛날 직장 동료분에게 물어보시죠. 또 다른 할 말 있나요? 당신은 있는 것 같은데."
"나중에 단독으로 면담할 수 있겠나."
"…… 그럼 그렇게 하죠. 거기 어린 드래곤 마스터분은?"
"아, 저는─"
[왜 석상이랑 본인이 그렇게 안닮았어?]
얌마 그걸 꼭 물어봐야겠냐!! 에반이 뒤늦게 미르의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미네르바는 찌푸린 얼굴로 반문했다.
"제가 석상하고 안닮았다고요?"
[응!]
고개 끄덕이지마! 그리고 그 얘기 왜 또 꺼내는거야! 미르를 제외한 이들은 일심동체가 되어 외쳤다.
"그 석상은 저랑 꼭 닮았어요. 애초에 절 본따서 만든거니까요."
"전혀 안그래보였습니다만."
"전직 군단장은 입 다물어주실래요?"
죄 지은게 너무 많아 본인도 다 기억못할 전직 군단장은 그대로 입을 꾹 다물었다.
"믿을 수 없다면 직접 보여드리도록 하죠."
"네?"
자리에서 일어난 미네르바는 올림머리를 고정한 핀과 끈을 모조리 풀었다. 생각보다 긴 머리카락이 쏟아져내리며 바람에 흔들리는가 싶더니 검고 흰것이 그녀의 등 뒤에 펼쳐졌다. 차를 마시려던 팬텀이 컵을 확 기울여 찻물을 주르륵 쏟았다.
"…… 이런건 옛날에 못 들어봤는데."
"말할 필요가 굳이 있었던가요?"
"당신도, 반 마족이었습니까."
"예. 당신과는 달리 전 님프 혼혈이지만요."
[범죄감이다 저거…….]
검호는 속으로 언젠가 저거 인게임에서 캐쉬템으로 나온것 같은(혹은 나올지도 모르는) 아이템이라고 생각했다. 루미너스한테 어울릴것 같아.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네르바는 피막의 날개와 깃털 날개를 흔들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달려있어 봤자 짝짝이라서 나는데 꽤 불편하거든요. 그래서 집어넣어뒀을 뿐이에요."
[그럼 여신님은 여신이 아닌거야?]
"그렇죠. 전 그냥 다른 이들보다 좀 더 오래 산 혼혈이에요."
"'좀'은 아닌 것 같은데……."
봉인되었다 해도 미네르바가 여신이라 부르는 것이 수 백년 전 사람인 그들에게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상식이었다. 그런데 고작 혼혈에 불과하다니? 마족이랑 요정족 둘 다 장수하는 종족이라고는 하나 대체 얼마를 살아온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제 어머니와 아버지의 피가 어떻게 섞이고, 어떤 힘이 발현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4자리 수는 당연히 살았다고 해둘게요."
[그쯤되면 진짜 신인데?]
"지혜의 여신이라 불린 것도 그냥 오래 살다보니 이것저것 본 게 많고 아는 것도 많아져서 그런것 뿐이었죠."
그녀는 누구처럼 마족 혼혈임에도 포스를 거의 타고나지 않아서 전투력은 사실상 없다고 웃으며 말했다.
"아, 다른 사람에게 떠들고 다니진 말아주세요."
[만약 말하고 다니면 어떡할거야?]
"정거장이랑 오르비스 탑 출입 금지 때릴거에요."
[…….]
[우리는 해당사항 없네 마스터.]
"면담 거절할거에요."
이 여자 진짜 파파픽시한테 속아서 봉인된거 맞냐? 그들이 기괴한 표정을 지으며 같은 의문을 떠올리는 동안, 미네르바는 한가하게 차를 마셨다.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는 일이다.
"아, 나 여기에 비행선 제작 의뢰 넣고싶은데 최대한 빨리 완공되게 할 수 있어?"
"적절한 요금만 주신다면 기간내에 완공될겁니다. 천하의 괴도 팬텀씨가 돈이 없지는 않겠죠?"
"그건 걱정마. 원래 가지고 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골동품 가치까지 생겼거든."
"훔친 물건을 아주 당연하게 자기꺼라고 말하는군요."
"어차피 원래 가지고있던 귀족들은 옛저녁에 백골이 됬고, 난 적어도 그놈들처럼 내 배불리는데 사용하지 않을거니까."
그들은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크가 나가는 길을 안내하겠다며 나왔고, 눈짓으로 먼저 가라고 말한 검호와 아스카, 미네르바만이 정원에 남았다.
***
검호side.
옛날에 프메인지 포메인지에서는 미네르바가 진짜 여신이라고 되어있었는데 여기서는 그냥 마족 님프 혼혈인거냐…… 아 뭐 놀라긴 했지만 나와는 별로 상관없는 사실이니 제껴두고.
"당신은 무엇을 말하기 위해 절 구한거죠?"
시작부터 본론이다.
"애초에 절 구한 이유도 지금의 용건때문, 아닌가요?"
"…… 그렇습니다."
"몹시 중요한 모양이네요."
다른것도 아니고 봉인석을 달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걸 대놓고 말하기 그렇잖아. 나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 미네르바를 보며 겨우 말했다.
"제게…… 봉인석을 내주실 수 있습니까."
"예?"
의미심장한 웃음을 그리던 보라색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개인적으로 어떤 일때문에 봉인석이 필요해졌습니다."
"어떤 일인지 말해줄 수 있나요?"
"아뇨."
내 생각대로 봉인석이 거기에 쓰인다면 절대로 못 돌려준다. 하지만 봉인석이 아니면 안된다. 미네르바가 '이거 뭐 병신도 아니고'에 가까운 시선을 보냈지만 이것들을 말하진 못했다.
"그러니까, 검호 당신은 개인적인 어떤 일을 하는데 봉인석이 필요해서 저한테 허락을 구하려고 왔다는 말이군요?"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게 어떤 일인지는 말할 수 없고, 돌려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까지 미지수고요?"
"그렇, 습니다."
"왜 굳이 제 허락을 구하는거죠?"
이건 또 무슨 질문이지.
"봉인석이 필요했다면 굳이 저를 구해 허락을 찾을 필요없이 그냥 오르비스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봉인석이 숨겨진 위치를 알아내면 되는거 아닌가요? 거기다 여기에만 봉인석이 있는것도 아니고."
"그건 그렇긴 합니다만─."
그러는건 도둑질이잖아. 살면서 한 번도 뭔가를 훔친적이 없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 못하지만 - 당장 메이플 세계에 떨어진 첫날 사람들 두들겨패고 삥 뜯었었다 - 봉인석같은 엄청난 물건을 훔치고 입 싹 닦는건 무리다. 말을 잇지못하고 침묵하는 나를 보며 미네르바는 다시금 웃었다.
"정말 여전하네요. 검호 당신은."
좋은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는거지?
"─알겠어요. 봉인석을 드릴게요."
"정말입니까?"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연히 거절할거라 생각했는데?
"왜 그러죠? 당신이 바라던거 아닌가요?"
"그렇긴 합니다만,"
"당신이 봉인석을 악용할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그 개인적인 일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당신한테는 무척 중요한 일이겠죠."
여신이라 추앙받을만큼 오랜 시간을 살아온 여자는 팬텀과 같은, 그러나 이성과 장난기가 아닌 지혜로 가득찬 보라색 눈으로 나를 마주보았다.
"그러니까 저는 당신을, 이런 상황에서도 양심을 지키기 위해 제 허락을 구하는 당신의 올곧음을 믿고 봉인석을 드리겠습니다."
…… 어째선지 가슴이 먹먹했다. 누군가에게 신뢰받는다는 느낌은 낯선게 아닌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들으니 한쪽으로 간질간질한걸 넘어서 뭔가가 넘쳐서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신님."
잠시 후 내 손에 구름의 형상을 한 보석이 들어왔다. 그것을 종이로 꽁꽁 싸서 넣은 가방이 무겁게 느껴지는건 보석 하나만의 무게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에델슈타인으로 돌아간 데몬과 크리스탈 가든 제작과 실력 향상에 열을 올리는 팬텀을 뒤로 하고 빅토리아 아일랜드, 여섯갈래의 길로 향했다.
"저도 같이 가면 안돼요 스승님?"
"위험하니까 안됀다."
나는 울먹거리는 에반을 힘없이 밀어냈다.
"이 너머에 가면 다시 돌아오기 힘들어."
"하지만 스승님은!"
[마스터는 반드시 저기에 가야하니까 가는거야.]
말주변 없는 나 대신 아스카가 에반과 미르를 달랬다.
"내가 저쪽에 가 있는동안 여태껏 만난 사람들 중 한 명에게 가서 그 편지를 전해줘라. 아마 널 맡아줄거다."
"그렇지만……."
"금방 돌아올테니까. 저쪽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어쩔 수 없다."
내가 마지막에 실수해서 그란디스에 대신 간 파픈스타가 떠올랐다. 나중에 만났을때 미안해서 어떻게 고개를 들어야 할 지 모르겠어.
"그동안 이거 마저 익히고 있어라. 넌 재능이 있으니까 금방 다 익힐 수 있을거다."
아예 마법 젬병인 나하고는 달리 말이지. 나는 가방에서 프리드의 마법서를 꺼내 에반에게 주었다.
"사람들을 돕는건 좋지만 멋모르고 막 돕지 마라. 나쁜 사람일수도 있으니까. 블랙윙처럼 수상한 조직같은데 들어가지 말고."
"네!"
[미르 너도 강해져서 에반 잘 지켜야돼.]
[당연한 말씀을!]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미르나, 마법서를 꼭 껴안는 에반을 보고 있지만 솔직히 전혀 안심이 안된다. 옆에 둬도 위험한 일이 생기는데 옆에조차 없으면 뭔 일이 생길지 상상이 안간다. 그렇다고 그란디스에 데려가기엔 일전에 세피로트가 말했던 판테온의 상황이 상당히 안좋은데다 돌아올때의 위험성이 너무 크다.
"되도록이면 아란에게 가봐라. 리엔은 마법의 섬이니까 많은걸 배울 수 있을거다."
"우으……."
[영영 이별하는거 아니니까 울지 마. 시간 흐름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테니까.]
"이제 가자 아스카."
더 있으면 발을 떼기 힘들 것 같았다. 왜 작별 인사는 짧게 해라는지 확실하게 체감한 나는 곧장 몸을 돌려 디멘션 게이트 안에 뛰어들었다.
***
[여기가 판테온?]
"성당 비슷하게 생기긴 했네."
제대로 온거 맞나 싶었지만 쫙 도열되어 있는 드래곤의 형상을 본 뜬 듯한 갑옷 석상과 아스카와 비슷하지만 많이 다른 드래곤의 석상까지 봤을때 여기가 판테온의 신전임을 확신했다. 그래도 올때는 랜덤이 아니라 다행이네.
세피로트랑 파픈스타가 어디있는지 알기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려 했는데, 어째선지 신전내에 사람이 없었다. 왜지? 신전이니까 신관이 한둘쯤 있어야 하지 않나? 시간의 신전에선 신관 많았는데.
쿠르르르…….
[밖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마스터.]
"확인하러 가자."
푸스스 떨어지는 흙먼지에 머리를 툭툭 턴 나는 곧장 신전의 밖으로 뛰어나갔다. 걸핏하면 싸운다고 했는데 또 누가 쳐들어온건가? 카이저랑 엔버 스토리 퀘스트에서도 매그너스와 스펙터 군단이 쳐들어왔었으니 상당히 일리가 있었다.
바깥쪽에 가까워질수록 어떤 냄새가 점점 코의 점막을 괴롭혔다. 굉장히 지독하고 역한, 익숙하지만 조금도 익숙해질 수 없는 뭔가가 썩어들어가는 냄새가.
그렇게 나온 판테온의 풍경은─ 지옥이었다.
"이, 무슨……."
사방에 만연한 단말마와 같은 비명과 가장 빠르고 쉽게 모든걸 없애는 시뻘건 불길. 과거 리프레 공습이 생각날만큼 처참한 광경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 공습의 주역이었던 몬스터가 용족이었다면, 저 참사의 주역은 어린애가 점토로 장난삼아 빚은것처럼 생긴 기괴한 생명체들이란 것이다.
그 생명체들의 손짓에 죽어나가는 사람들은 조금도 장난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낫을 든 몬스터가 무기를 휘둘러 어떤 아줌마의 등을 내리찍으려 하는 것이 보였을때, 더 볼것도 없이 검을 뽑아들어 달려가 몬스터를 쪼갰다.
"고, 고맙─."
"말하지 말고 도망이나 쳐!"
어떻게 판테온에 이렇게 많은 몬스터가 들어온거지? 판테온에 대한 정보는 거의 모르지만 적어도 기억하는 인게임내의 판테온은 이렇게 막장은 아니었다. 세피로트가 분명 버틸 수 있다고 했는데!
그래도 결계라는게 제대로 작동하기는 하는지 한 번만 찔러도 스펙터가 픽픽 죽어나갈만큼 약했지만 수가 너무 많았다. 아스카는 다른쪽으로 날아가서 사람들을 구하러 갔는데.
"영혼의 추격자여!"
맑은 목소리와 함게 하늘에서 자주빛 구체가 줄줄이 날아들어와 주변의 몬스터들을 펑펑 박살냈다. 현재의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밝은 분홍색 머리카락의 화사한 톤의 옷을 입은, 그러나 무척이나 심각한 표정의 소녀가 건물 위를 질주하며 몬스터들을 처리했다.
"거기 당신! 당장 대피소로 들어가!"
저 눈에 팍팍 띄는 소녀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기에 소개 요청은 바로 건너뛰었다. 지금 사태의 원인을 물어봤자 시간 낭비이므로 바로 중요한걸 물었다.
"세피로트와 파픈스타는 어디에─"
그때 저 멀리서 해일처럼 거대한 물보라가 일었다.
"아…… 그 여자가."
엔젤릭 버스터의 중얼거림에 저 해일을 일으킨 사람이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니,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저런 무지막지한 규모의 물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한 명 뿐이다.
나는 더 볼 것도 없이 파도가 일어난 방향을 향해 뛰어가며 간간히 보이는 스펙터들을 처리했다. 파도가 일어났던 곳 가까이에 다가가자 검녹색 기류와 물기둥이 부딪히며 잔비를 뿌렸고, 제대로 뛰기 힘들만큼 땅이 들썩이며 저만치에서 대지의 파편이 날아다니는게 간간히 보였다.
그리고 어째선지 썩어가는 냄새가 더 심해졌다.
'아.'
근원지에 도착함과 동시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힐라가 부리던 해골 군단과 같지만 비주얼적으로는 훨씬 더 최악인, 문드러진 살점을 뚝뚝 떨어뜨리며 걸어오는 시체들의 무리가 그곳에 있었다.
"이 망할 것들이이이이──!"
욕을 쏟아내며 팔다리에 휘감긴 검녹색 기류를 휘두르는 세피로트가 그 한복판에서 호랑이처럼 날뛰는 와중에 또다시 물기둥이 크게 일어나서…… 세피로트를 후려쳤다.
'나는 대체.'
돌려차기를 하며 물기둥을 가른 세피로트가 숨을 헐떡이며 짐승처럼 으르렁 거릴때, 시체들의 무리에서 그것이 걸어나왔다.
푸석하게 말라비틀어진 머리카락, 시커멓게 썩어 파리가 꼬이고 허연 구더기가 툭툭 떨어지는 몸, 갈라진 배에서 축 늘어진 내장이 땅에 끌려 제 발에 물컹, 밟혀 떨어져 나갔다.
춥지 않은데 전신에 오한이 들어 이가 딱딱 부딪혔다. 지치지 않았는데 숨을 쉬기 힘들어졌고, 들고 있던 검이 떨어져 허망한 소리를 냈다.
'누굴 보고있는거지.'
눈을 뽑고싶은 충동이 들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감싼 이유는 눈물을 보이기 싫어서일까?
제발 꿈이라고 해줘.
========== 작품 후기 ==========
꿈 아님. 현실임.
어떤 분이 파픈스타 이번 챕터에서 죽을거라는 코멘을 다셨던 것 같은데... 안죽어요. 벌써 죽었음(?!).
슬슬 검호가 자기가 얼마나 강한지 정도는 자각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과정은 굉장히 비참하겠지만요.
@대어의예감 - 다음화부터 검호는 개빡칠듯.
@베이르타 - 오래된 파퀘니까요.
@좀비라스 - 그 트리오 뭔가 굉장해?!
@소라루 - 던진게 아니라 구해야겠다고 생각하자 자동으로 날아간거임.
@패러디좋아 - 저 상황에서까지 무표정이면 안면장애를 의심해야합니다.
@kyh0408 - 설명이 잘된건가요? 일단 이번 파퀘의 경우 안한 분들이 꽤 있어서 설명 위주로 하긴 했는데 이해가 잘 되셨다면 다행입니다!
@Blake117 - 그리고 또 여기에 현실보정이 잔인하게...
@레시코 - 그리고 검호는 그란디스에 갔다가 혐짤을 봅니다.
@ㅎr늘ㅂrㄷr - 검에 걸린건 귀환 마법이 아니라 검호의 의사에 따라 움직이는 일종의 염력 마법입니다.
@신월의사신 - 매일은 솔직히 무리... 방학이 되면 좀 더 자주 올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요!
@여행자구름 - 저거 하나만으로 검호는 엄청난 응용이 가능.
@리아카에린 - 아뇨. 그란디스입니다.
@Sisre - 말 그대로 심장이 떨어지는듯한 느낌.
@루서스 - 잡몹 설정 하나하나 보면 위험한게 의외로 좀 있음.
@카한Kahan - 전 님들 말 보고 나서야 그 생각이 들었는데.
@신월야 - 검호는 아무래도 다리 움직임이 중요해서 발판형 이동기가 좋음.
@허공말뚝 - 아직 어린애니까 당연한거임.
@진홍빛사신 - 그리고 이번편의 현실보정은... 예쁜 좀비따위 없습니다.
@qkzks135 - 그래서 에반을 리엔에 가라고 했죠. 적어도 거기라면 블랙윙에 속을 가능성은 없을테니까요.
@심온 - 이 글은 가끔 현실을 기분나쁘게 반영하기도 합니다.
@ReFrante - 다크 네펜데스라 용해액이 강화됨.
@지나가는니트 - 과연 저거까지 와장창 할 수 있을까요.
@넝기 - 그란디스입니다. 이번 챕터에서 할게 많거든요.
@dragoneel - 현실판 엔버의 소울시커는 하향 패치따위 없음.
@Eluines - 그겁니다! 검호가 한게 딱 그거였어요!
@적현월 - 검호의 전법 자체가 이동기를 활용한 고속 기동전 계열이라.
@책벌레씨 - 아스카가 힐 잔뜩 넣어줬음.
@트왈라 - 아무 생각없이 당겼는데 걍 뜯김.
@노란우산s - 웡키 언급 됬습니다. 딱 한 번. 그리고 저 멤버는 모험가도 아니고, 5종류도 아니라서 넘어갔음.
@Ratios - 그런게 있었나요...? 뭐, 무엇이든 만드는데엔 좀 힘들죠.
@Legendssj22 - 그래서 살짝 바꿨음. 식물이니 흉폭하진 않겠지만 대충 듣기 싫은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