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호입니DA-134화 (134/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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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비스 탑의 참사를 본 에반은 곧장 리엔 섬으로 돌아가지 않고 오르비스에 남아 님프들과 함께 부상자 구출을 도왔다. 리린에게는 일이 생겨 늦는다고 말했다가 빨리 돌아오라는 독촉을 받았음에도 소년은 고집을 부려 기어코 남았고, 데몬은 그런 에반을 보다 니할로 가는걸 잠시 미루고 소년을 돕는데 나섰다.

지극히 착하고 좋은 의도였지만 그런 보고를 받은 리린의 반응이 시원치않은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아란, 오르비스로 가주세요."

"오? 안그래도 가게 해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는데. 나이스 타이밍이네 아가씨!"

"…… 에반이 블랙윙에서 입수했다는 자료를 받는건 물론, 오르비스 탑의 사고에 대해서도 자세히 조사해주세요. 비행선 표는 여기 있으니─"

"표 없어도 돼."

"예?"

아란은 벗어두었던 코트를 걸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맞다 아가씨, 다른 사람이랑 동행해서 가도 되지?"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만…… 그것보다 표가 없으면 비행선을 못 타잖아요 아란."

"비행선 안탈거야. 오랜만에 메르네 마을에 갈거거든. 거기에 포탈이 있는데 그거 쓰면 한 번에 오르비스에 갈 수 있을거야."

리린은 그녀가 말한 '메르'가 엘프들의 왕 메르세데스임을 곧바로 알아들었다. 같은 영웅이자 동료인건 알지만 한 종족의 왕을 아무렇지않게 애칭으로 부르는 모습을 볼때마다 다소 당황스러웠다.

빠르게 준비를 끝낸 아란은 리엔에 설치된 빅토리아 아일랜드 행 포탈을 써서 단번에 엘리니아로 갔고, 익숙하면서도 낯선 길을 따라 에우렐을 찾았다.

그녀는 과거 프리드가 만든 결계에 감싸여진 엘프들의 마을이 수 백년 동안 정말 변한게 없어 당황했다가, 대부분의 엘프들이 자신들이 그러했듯 얼음 속에 갖혀 있는 모습을 보고 침묵했다.

"하…… 검은 마법사 이 망할 자식."

헬레나나 메르가 멀쩡히 활동하고 있어서 그래도 좀 안심하고 있었는데 저주가 아직도 이렇게 남아있다니. 이럴줄 알았으면 좀 더 빨리 찾아오는거였는데.

그래도 몇몇은 얼음에서 깨어났는지 다홍색 머리의 엘프 소녀가 그녀를 보고는 크게 외쳤다.

"메르세데스니임─! 아란님이 오셨어요오!!"

"뭐?!"

엄청 당황한듯한 목소리에 그녀는 작게 실소를 지었다. 마침 있었던 모양이네.

"정말 오랜만이에요 아란님! 저 기억하세요?"

"물론이야. 이름이 다니카였지?"

"맞아요! 절 기억해주시다니, 정말 영광이에요."

"영광까지야……."

아란은 총총 땋은 다홍색 머리를 흔들며 배시시 웃는 다니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나이는 저쪽이 훨씬 더 많다지만 어째 정신연령은 보이는대로 소녀였다. 깨어나있는 다른 엘프 둘도 그런 그녀들을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거나 훈훈한 미소를 지을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메르세데스가 황급히 준비를 끝마치고 나온건 그때쯤이었다.

"아란!!"

"오랜만이야 메─ 으왓!"

반짝이는 금발을 휘날리며 빠르게 뛰어나온 메르세데스는 그 기세로 아란을 와락 껴안았다. 다행히 아란이 두어 발 뒷걸음질치다 균형을 잡아 만나자마자 땅을 구르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늦은거야?!"

"미안미안, 그동안 좀 바빴거든. 너도 힘을 되찾는다고 메이플 월드 여기저기를 다녀서 찾으러가기 힘들었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주에서 깨어난지 2년 무렵이 되었음에도 두 사람이 직접적으로 만난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란은 리엔에서 깨어나 현재의 메이플 월드가 어떤지 손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만 메르세데스는 직접 몸으로 구르며 현 시대를 알아가야 했으며, 아란이 블랙윙을 추적하기 위해 에반과 함께 메이플 월드 이곳저곳을 돌아다닐때 메르세데스는 엘프들에게 걸린 저주를 풀기위해 힘을 길러가고 있었다.

이래저래 엇갈리고 시간도 안나다보니 지금까지 영웅들끼리 다같이 모인적도 당연히 없었다.

"나 말고 다른 애들은 만나봤어 메르?"

"팬텀은 어디있는지도 모르겠고, 대신 루미너스는 만나봤어. 이 근처에 살고 있거든."

"진짜?"

"어떤 여자애랑 같이 살고 있더라고."

그 말에 아란의 도끼눈을 뜨며 반쯤 썩은 표정을 지었다.

"…… 니가 생각하는 그런거 절대 아니야. 솔직히 루미너스가 그런 짓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잖아."

"아, 그렇긴 하지."

"그리고 검호는 소식조차 모르겠고. 아란 넌 뭐 알아?"

"아니 전혀. 예전에 리에나 해협의 일때문에 잠깐 만나긴 했지만 그 뒤는 모르겠어."

"깨어나긴 했나보네."

동료들에 대한 근황을 시작으로 둘은 그동안 꾹꾹 눌러담았던 말들을 한참 주고받았다.

겨우 검은 마법사의 저주에서 깨어났더니 세상은 무려 수 백년이 지나있었고, 힘은 거의 다 증발해버린 상태로 낯선 세상에 뚝 떨어져버린 그들이다. 전사처럼 호탕하게 웃어도, 왕답게 의연하게 있어도 정말 아무렇지 않았을리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그런 아픔을 공유할 수 있는건 마찬가지의 상황인 동료들 뿐이었다.

그 동료마저도 한 명은 이미 죽었고.

"역시 프리드는 죽었구나."

메르세데스는 잔뜩 가라앉은 눈으로 땅을 보았다.

"예상은 했지만 직접 들으니까 좀…… 그렇네."

"알고 있었어?"

"만약 그가 살아있었으면 제일 먼저 우리를 모았을테니까."

그랬다. 영웅즈의 리더였던 그가 살아있었다면 그들의 재회는 훨씬 더 빨랐을 것이다. 프리드는 영웅들의 구심점이었고, 애초에 그가 있어서 그들이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침체되어버린 분위기를 몰아내려는 듯, 아란은 활기차게 말했다.

"아 맞다 메르! 이번에 나랑 같이 오르비스에 같이 갈래?"

"오르비스? 거긴 왜?"

"거기서 만날 사람이 있거든. 에반이라고, 너도 보면 깜짝 놀랄거야."

"어떤 사람인데 그래?"

"직접 보면 알거야. 여기 포탈 써도 되지?"

"당연히 되는데……."

그 대답에 아란은 더 볼 것도 없이 그녀를 잡아끌며 마을 한 구석에 있는 연둣빛 문양이 춤추는 포탈이 있는 곳으로 갔다.

원래는 빅토리아 아일랜드 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던 포탈이었으나, 최근 필리우스가 마법으로 오시리아 대륙까지도 이동할 수 있도록 개조했기에 둘은 한 번에 오르비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에반을 찾는건 쉬운 일이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뛰어난 마법으로 부상자들을 구해내고 치료하는데 앞장서는 오닉스 드래곤 마스터의 이름은 오르비스 주민들의 입에서 한참 오르내르고 있었으니까.

문제라 한다면.

"군단장……!"

"어? 아란 누나!"

"에반. 잠시 뒤로 빠지세요."

"왜 저 자식이 여기 있는거야!"

전혀 반갑지 않은 사람까지 만나버렸다는 것이다.

서로 보자마자 거하게 살풀이를 벌이기 시작한 세 사람이 통성명을 하는 것은 수 시간이 지난 뒤, 그들을 말리려다 이리저리 치인 끝에 빡친 에반이 번개를 쳐날린 후였다.

그리고 저를 보자마자 프리드로 착각하는 메르세데스의 반응에 진지하게 개명을 해야하나 망설이는건 덤이었다.

***

검호side.

Q1 직장내 상사가 되먹지도 않는 이유로 무진장 갈궈대는데 어째야 할까요?

A 일단은 참습니다. 그래도 상사잖아요.

Q2 제가 다 소화해낼 수 없는 양의 일이 몰려오는데 어떻게 하죠?

A 야근을 해서라도 묵묵히 처리해야죠. 직장에서 짤리면 곤란한건 당신입니다.

Q3 근무하는 곳에서 출몰하는 유령이 동료놈을 덮쳤습니다.

A 너무 피곤해서 헛 것이 보이는겁니다. 일단 가볍게 레드불 한 캔─

'─이 될리가 있냐!!'

나는 딱지만하게 구긴 차트판을 땅에 패대기쳤다. 메이플 월드에 레드불은 없단 말이야!

'아 중요한건 이게 아니지.'

에너지 드링크의 유무따위 알게 뭐야…… 라고 넘기기엔 그것마저 간절할만큼 일이 많은데다 배배 꼬였다. 이데아한테 그런 종류의 포션 좀 만들어달라고 해볼까.

내가 어쩌다가 지구에 돌아간 뒤에, 취직하고 나서야 겪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직장생활을 지금 하고 있는거냐고. 가기 전에 미리 적응하라고 체험판 시켜주는거냐? 망할, 이딴 베타 테스트 필요 없어!!

'이 와중에 군단장들은 준비운동 중이고…….'

니할 사막은 곳곳에서 언데드들이 대량 출몰중, 엘나스에서는 수 백년 동안 사자왕의 성을 감추던 눈보라가 그침과 동시에 몬스터들이 이전보다 흉폭해져 마을까지 내려가 습격하고 있다는 급보가 올라오고 있고, 시간의 신전은 너무 멀어서 소식은 안들리지만 아카이럼이 공작중일테니 좋은 상태는 아니겠지.

더 큰 문제는 아직 본방은 시작도 안했다는거다. 검은 마법사 봉인 이전, 메이플 월드 곳곳에서 양민학살을 일삼던 군단장들이 깨어났음에도 전면에 나서긴커녕 모습조차 안 드러내고 있으니까.

진짜 거하게 사건 터지기 전에 하루 빨리 연합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하지만 지구에서도 그랬듯 그런 종류의 조직은 큰 일 생겨서 제 손 데이지 않고서야 미리 만들어지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 때문에 나는 이데아와 의논한 끝에 좀 위험한 수를 쓰기로 했다.

"질문하겠습니다. 무슨 이유로 이곳에 온겁니까."

나는 기계적인 목소리로 질문하는 소년을 보았다.

"오늘은 당신과의 전투 테스트 예정이 없습니다."

"싸우러 온 게 아니다."

전투 테스트 할때 말고는 않와서 그런지 날 보자마자 제논이 묻는게 저거였다.

"테스트가 아니라면 어째서 이곳에 온겁니까."

"너랑 대화를 하려고 왔다만."

"그렇다면 돌아가주십시오. 잠시 후 저는 몇몇 기능 업그레이드와 수리 예정이 있습니다."

점검이라니. 하기사, 제논은 겉보기엔 그냥 곱상하게 생긴 소년이지만 속은 제네로이드답게 기계였으니까. 전투 테스트 도와줄때마다 조금씩 단면을 보긴 했다만 직접 이런 말을 들으니 어딘가 찝찝했다.

스우놈이 제네로이드가 되는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 아니 되도록 빨리 개조가 되었으면 좋겠지만 - 눈앞의 제논은 역시…… 얜 대체 무슨 죄로 이 모양 이 꼴이 됐다냐.

"몸은 괜찮나."

"현재 저는 이전에 한 당신과의 전투에서 입은 대미지로 상당수의 기능이 크게 저하되었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서플라이 시스템 34% 손상, 파워소스 60% 소실, 부스터 분사구 5개 완전 고장, 홀로그램 영사기 40% 손상 그리고……."

"그만, 그만."

아니 발길질 몇 대 맞았다고 뭐 얼마나 부서진거냐 넌. 일부러 여태껏 검도 안쓰고 살살 때렸음에도 매번 부서지는걸 보고 속이 쓰렸는데 직접 이렇게 하나하나 들으니 가슴에 푹푹 박혔다.

"이 외에 체내 파이프라인을 포함한 내장 기관이 5분의 1가량 손상되어 대대적인 부품 교체가 있을 예정입니다."

그래, 내가 죄인이다! 처음부터 무리해서라도 팔로 제압했어야 했는데! 괜히 그랬다가 가뜩이나 상태 안좋은 팔이 또 나가서 아스카한테 한 소리 들을까봐 배운지 얼마 안되는 다리 위주 격투기나 좀 다듬으려고 애를 발로 쓰러뜨리는게 아니었어.

레지스탕스들은 뭐하고 있는거야? 빨리 쳐들어와서 얘 안데려가고. 지금 눈앞에서 납치해가도 모르는척 넘어가줄 수 있어!

"미안하다."

"무엇이 말입니까."

"다음부터는 안 아프게 제압해주마."

"……."

어째 제논 표정이 이상해졌다. 응? 뭐가 문제야? 설마 아픈게 좋은걸리는 없고. 거기다 어째선지 근처에서 기계를 만지던 루티가 미끄러져 땅에 머리를 박았다. 쟤는 또 왜 저래.

"그런데 베릴은 어디갔지."

"베릴은 겔리메르 님의 연구를 보조하러 갔어요."

머리를 털며 일어난 루티가 말했다. 봉인석 연구를 벌써 시작했나?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았는데 빠르네 그 영감.

"제논. 준비 끝났으니까 이제 들어가."

"알았어."

그새 루티가 기계 조작을 끝냈는지 제논은 커다란 유리관 안으로 들어갔다. 삑삑 스위치가 눌려지며 케이블과 전선이 제논의 몸에 꽂혔고, 이어서 이름조차 모를 의료기기같은걸 끌어내려져 제논의 몸에 다가가…… 어, 음, 아니 잠깐, 잠깐만! 저거 뭐야!!

예고도 없이 리얼 인체해부도랑 안드로이드 설계도를 짬뽕한듯한 제논의 내부 구조를 실시간으로 감상하게 되버린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소드댄서님?"

"나랑 싸운 뒤에 제논은 항상 저렇게 됐나."

"아니요."

루티의 대답에 아주 약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가 이어지는 말에 그 생각이 바로 박살났다.

"예전엔 저거보다 더 심했어요. 그때 제논은 지금보다 약했고, 당신은 지금처럼 봐주지 않고 인정사정없이 공격했었잖아요."

가끔 이 몸의 괴력이 진짜 싫어. 전투 테스트를 핑계로 대지 않으면 여기 올 건덕지가 없어 겔리메르의 제안을 승낙했었는데 이래서야.

제논이 수많은 기계들에 둘러쌓여 수리를 받기위해 완전히 가사상태가 된 걸 확인했지만 혹시 몰라 목소리를 줄여 말을 걸었다.

"루티."

"예?"

"넌 겔리메르와 제논, 누구의 편이지."

"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죠……?"

"대답해봐라."

루티는 내 질문에 당황하며 귀를 바짝 세운채 큰 눈을 깜빡거렸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루티의 눈을 마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전…… 제논의 편이에요."

"그래."

정말 다행이네.

"애초에 저는 제논을 보조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지금은 저 아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에 약속을 했었어요."

잃어버린 기억을 모두 되찾아 주겠다고, 이곳에서 나가게 해주겠다고요. 묻지도 않았건만 루티는 거기까지 술술 말해주었다.

"이제 절 어쩌실거죠?"

"뭘 말이지."

"겔리메르님께 저의 오작동을 알려 폐기처분하실 건가요?"

무슨 그런 오싹한 말을. 루티는 나름 사납게 치켜뜬 눈으로 날 노려보았지만 생긴게 원체 귀엽다보니 무섭지 않았다. 나는 대답대신 루티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

"그럼 너는 계속 저놈 편을 들어줘라."

"대체 무슨 말은─"

"나중에 외부인들이 이곳 연구소를 습격할거다. 그들과 함께 나가라."

나는 기계장치들과 이어진 제논을 조심스레 흘깃 보았다.

"왜 제게 그런 말을 해주는거죠? 무슨 꿍꿍이인겁니까 당신은?"

"별거 없다."

지금 내 위치상, 그리고 앞으로 해야할 일들을 생각하면 더이상 제논을 봐주기 힘드니까.

"그냥 저놈이 불쌍해서 말이지."

겔리메르에게 납치당해 기억 삭제당하고, 싸우는데 최적화된 몸으로 강제로 개조되어 전투병기가 되어버린 소년. 정신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꼭…….

"제논을 동정하는건가요? 당신이?"

"그래."

작게 욕을 씹었다. 생각의 끝에서 내려진 결론에 내 얼굴은 어느새 와그작 구겨져 있었다.

"우리같아서 말이야."

이 얼마나 불쌍하냐고.

***

이데아side.

봉인석의 과반수를 회수함에 따라 군단장들이 일어나게 될 것은 일찌감치 예상했다. 다행히 조금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자금을 충분히 모으는데 성공해 오시리아 대륙의 주요 마을마다 비밀리에 결계를 설치할 수 있었고, 당분간은 그것이 시간을 벌어줄 것이다.

군단장들을 실제로 보진 못했지만 검호와 은월의 말에 따르면 하나하나 영웅급의 강적…… 거기다 군단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군단까지 부리니 당연히 우리로는 전부 상대하기 힘들다. 시도했다간 최소한 종족의 반이상이 갈려나갈 그런 일에 뛰어들 생각도 없고.

결론은, 하루빨리 이 세계의 사람들이 연합을 만들어 군단장들에게 대항하도록 촉진시켜야 한다는거다.

"일은 잘 되어갑니까."

"이데아님?!"

"오늘도 야근이라니, 하루라도 좀 쉬는게 어때요."

포션 연구쪽으로 배치된 뒤로 월화수목금금금만 하고 있는 블랙윙 아지트의 어떤 여성에 대해서는 나름 유명했다.

시야가 가릴정도로 부스스하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채 걷어내지 않고 벌떡 일어나 내게 꾸벅꾸벅 인사를 하는 그녀에게 그만하라고 손짓한 나는 근처의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어떻게 제가 쉴 수 있어요? 모두들 노력하고 있는데."

"아무도 당신처럼 무리하게 일하진 않습니다. 야근수당은 받고 있습니까?"

"네."

"그건 다행이네요."

그가 적어도 겉으론 아무렇지 않게 저 여자를 대한 모양이다. 다른 사람들도 눈치껏 장단맞춰준 것 같고.

"테이아."

"네?"

"여태껏 고생했으니 이제 당신을 다른 곳으로 보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 잠깐만요 이데아님! 갑자기 그게 무슨……?!"

"고생 그만하고 돌아가서 쉬라는 뜻이에요."

그녀를 통해서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고, 오르비스에서 그들이 거하게 부딪혔다는 소식도 들었으니.

"슬슬 당신의 계약자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십시오."

나는 그녀의 멍하게 떠진 적금색 눈을 감상했다. 같은 종, 같은 색의 눈인데 아스카 씨하고는 참 다르군.

"어떻게 알았는지는 묻지 마시죠. 제가 이곳에 함께 온 동족들의 얼굴과 이름조차 못 외울만큼 멍청하다고 생각하셨다면 당장 그 생각 휴지통에 버려 삭제하는게 좋을겁니다."

"…… 후."

한숨같은 웃음을 흘리며 그녀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긴다음 똑바로 고개를 들어 날 보았다.

"왜 알면서 진작에 쳐내지 않은거죠?"

"당신을 쓰면 저 하늘의 높은 곳에 있는 인간에게 '조용히' 정보를 전달할 수 있으니까요."

"절 역이용했단 말이네요."

웃고있지만 그녀를 중심으로 마력이 휘몰아치며 근처에 있던 종이들이 제자리에서 벗어나 돌풍에 흩날렸다. 겉으로는 우리와 비슷했지만 역시 드래곤은 드래곤, 기초능력부터 격이 다르군.

하지만 여기 오는데 아무 대비를 안했을리가.

"얌전히 물러나시면 추적은 없을겁니다."

"그러니 조용히 나가주시죠."

은신 마법이 걷히며 그녀를 향해 슈터와 대검이 겨누어졌다.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인 그녀가 물었다.

"저 하나때문에 종족 최강의 전사들을 끌고오다니. 인력 부족하다 하지 않았나요?"

"그 몇 없는 인력을 당신 하나때문에 잃을 순 없잖습니까."

"…… 당신 정말 싫은 성격이네요."

"그런 말 많이 들었습니다."

손안에 모은 뇌격이 새하얗게 방전했다. 나는 여차하면 위 아래로 3층정도 무너뜨릴 준비를 하며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그녀와의 대치는 다음 순간 복도 저편에서 들려오는 무겁고 뚜렷한 발소리에 허망하게 부서졌다.

"뭐하고 있는거지 이데아."

"테이아에게 퇴직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타이밍 한 번 예술이군.

그는 조용히 눈을 굴려 테이아를 바라보았다. 몰아치던 마력의 회오리는 가라앉은지 오래, 광기어린 미소를 짓고 있던 그녀는 노골적으로 낭패라는 표정이었다.

"돌아갈 수 있을때 돌아가라. 나중에 가고싶어도 못 가게 되기 전에."

그래도 세상에 몇 없는 오닉스 드래곤이라 그런지 굉장히 자비로운 말이었다. 경련이 일어나는 얼굴을 애써 움직여 말하는 그녀가 좀 안쓰럽게 보이기도 했다.

"안가겠다 하면 뭐, 절 죽이기라도 하실겁니까."

"그럴리가."

그는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솔직히 니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데, 왜 죽이겠나."

감탄은 감탄인데 정말 태연하게 그녀를 깔아뭉게는 감탄이었다. 거기다 그는 제 말이 허언이 아닌걸 증명하듯 정말로 신기한 것을 본다는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그는 처음 그녀의 정체를 알아냈을때 상당히 놀랐었지.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으니, 가서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대비해봐라."

그래야 겨우 상대할 수 있을테니까. 그는 말을 끝맺으며 격려하듯이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줬다. 이 어이없는 행동에 굳어있던 그녀는 기가찬다는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좋습니다! 당신 말대로 '열심히' 대비하도록 하죠."

그렇게 그녀는 빛무리의 돌풍에 휩싸여 사라졌다.

나는 손에 모아두었던 마법을 없애고 대신 사방에 널브러진 종이들을 모아 정리했다. 이제 블랙윙 간부들을 동원해 빅토리아 아일랜드에 적당히 분탕질을 치면 저쪽에서 알아서 자리를 마련할 것이다.

"적절한 타이밍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만, 도발이 좀 과했습니다."

"딱히 도발하진 않았다만."

이 상사는 아무렇지않게 숨쉬듯이 적들의 심기를 긁어버리는건가. 정말 의도하지 않은건지 겸양을 떠는건지.

이후 나는 빅토리아 아일랜드 주요 마을들 습격에 보낼 간부들과 하수인들을 편성해 그들을 보냈고, 며칠 뒤 우리가 겪은 것에 비하면 미약하지만 오랫동안 평화로웠을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천재지변이나 다름없을 전화(戰火)가 치솟았다.

어디까지나 경고를 위한 습격이었으니 사망자는 없었지만 부상자는 넘쳐났고, 마을들의 일부가 불에 탔으니 적어도 겉으로는 큰 피해를 입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들에 대한 치료, 복구는 포션 납품을 하며 얻은 마법사 협회와 마가티아쪽 연줄을 당기면 빠르게 해결 가능하겠지만.

그리고…….

"거긴 어떻습니까."

[당신 예상대로야. 진짜 상태 안좋아.]

"군단장 아카이럼이 활동중입니까?"

[아니. 아직까진 만나지 못했어. 하지만 오는 내내 신전의 길 여기저기가 뒤틀린걸로 봐서 깨어난게 확실해.]

통신기 너머의 세피로트가 조금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어떤가요."

[이제 확인하려고 했는데…… 좀 이상한게 보이거든? 내 눈이 잘못된 것 같지는 않고.]

"이상한 것이요?"

[응. 그가 봉인되어 있는 곳이 진짜 현재의 문 너머 맞지?]

"맞습니다."

세피로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거지?

[…… 왜 현재의 문이 한 짝밖에 없는거냐.]

"예?"

저건 또 무슨 소리지.

========== 작품 후기 ==========

문짝 수리를 8백년동안 안했다는 뜻이지.

검호는 테이아가 오닉스 드래곤인걸 알고 있었습니다. 옆의 아스카부터 오닉스 드래곤인데... 다만 그녀가 자신이 로아에게 받았던 그 알에서 태어난 아이임을 알고 진짜로 신기해 했었습니다.

아무 상관없지만 이번에 받은 시오버 팬아트가 굉장히 예뻐서 놀랐습니다. 뜰에 있으니 궁금하신 분은 한 번 보세요!

@칼른 - 뭐, 팬텀도 빈집털이 해서 얻은거잖아요.

@Eluines - 그리고 이데아는 작정하고 팬텀의 보물창고를 터는 전문 팀을 만들기 시작하는데...!

@Dulcet - 하핫! 언제나 훔치는 입장일줄 알았느냐!

@Yoontlemin - 몸:스우, 마음:아리아, 재산:이데아. 팬텀 것이 없군요?

@Sisre - 관리를 부실하게 한 팬텀 탓(꺄륵)

@대어의예감 - 그리고 블랙헤븐 추락 이후 고철 팔기를...

@허공말뚝 - 이후에 스우가 칠 사고를 생각하면 미리 묵념.

@좀비라스 - 은월은 나중에 진짜 팬텀을 도울겁니다. 그게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마서 - 작품설정에 올렸습니다.

@여행자구름 - 한 번 더 그러면 검호 정말 못 견뎌요.

@라그실 - 그리고 겔리메르까지.

@진달래X - 그보단 아리아가 아닐까요(웃음)

@카한Kahan - 이번 한 번이 끝이 아닐지도.

@ReFrnate - 여기서 금고는 그래도 좀 숨겨져 있었는데 상대가 마법사라 망함.

@땅콩양갱 - 이데아:자금이 부족했는데 잘 됬습니다.

@육합 - 고양이가 훔쳐갔어요!

@Legendssj22 - 보물의 소유권은 과연 누구에게!(두둥)

@레시코 - 스우가 여태껏 만난 여자들이 누구누구 있는지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Jaiha - 은월 멱살 잡아봤자 땡전 한 푼 안나옵니다. 프리드의 일기장은 나오겠네요.

@핑구친구 - 어쨌든 좋은데 쓰였음.

@건전한독자 - 다음편을 쓰지 못해 그냥 습작했습니다.

@Ratios - 밸런스 문제죠.

@칼크래프트 - 시대가 변했으니 이제 괴도가 아니라 아이돌로 뛰는쪽이 더 잘 나갈지도...

@리아카에린 - 현재 팬텀은 4차이니 스킬북 문제는 상관없지만 역시 재산이 털린쪽이 더 대미지가 클듯.

@갓타치 - 검호:노력은 하겠지만 미사일에는 눈이 없어.

@kain brunsterd - 대신 아스카가 있잖아요.

@좌절거북이 - 루미와 함께 영고라인.

@Buche - 이쪽에선 시그너스쪽에서 배상해줄겁니다.

@밤일 - 수많은 창고 중에 하나이니 괜찮을 지도.

@류동지 - 검호:(솔깃!)

@책벌레씨 - 하지만 긴 시간동안 다른 사람들이 턴 것도 없지않아 있을걸 생각하면.

@비탄의과학자 - 탑에 쏘는건데 굳이 페이크 탄을 발사할 필요가 없잖아요?

@노란우산s - 히오메는 일부 요소만 나올겁니다. 블랙헤븐 뒤가 끝.

@Blake117 - 항상 털기만 하다 어째 최근들어 털리는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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