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싫은 이야기 --> 키네시스side.
정신이 들자마자 전신에서 격통이 쏟아졌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고, 간신히 뻑뻑한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낯선 나무천장이 보였다.
"여긴……?"
"이제 일어나셨습니까."
내 것같지 않은 쉰 목소리에 당황하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뉘앙스의 말에 고개를 돌려보니, 막 문을 열며 방으로 들어온 한 여자가 보였다.
"그냥 확인하려고 온건데 마침 깨어났군요."
"당신은 누구지?"
청회색 머리카락을 칼같이 단정하게 정리한 여성이었다. 눈이 높은편인 내가 보기에도 상당한 미인이었으나, 얇은 살얼음이 내려앉은 것처럼 차가운 표정에 페리도트같은 황록색의 온기없는 눈이 마치 냉혈동물을 떠올리게 했다.
"제 이름은 이데아, 당신들을 구한 노바의 대표입니다."
"우릴, 구했다고?"
"정확히는 제 부하들이 심한 중상을 입은 당신과 소녀를 발견하고 치료했습니다."
소녀. 사이를 말하는걸거다. 거기다 심한 중상을 입었다니. 그래서 이렇게 아픈건가.
"급한 불은 포션으로 껐지만 장기가 상한 상태에서 자가 치유력이 떨어지면 곤란하므로 치료 마법은 쓰지 않았습니다. 그 부분은 이해해주시죠."
"포션? 마법?"
뭔가 그냥 넘길 수 없는 단어들이 나왔는데. 이데아라 소개했던 여자는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옷차림을 보고 짐작했지만 역시 당신들도 이 세계 사람이 아닌 모양이군요."
"뭐가 어떻게 된건지 설명 좀 해줄 수 있어?"
"물론입니다. 저희도 당신들의 사정을 들어야하는 상황이니까요."
그녀는 내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아 품에서 펜과 수첩을 꺼내들었다.
"일단 저희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드리죠. 사흘 전, 결계의 마법사 엘윈이 소환 마법 실험을 하다 차원의 벽에 구멍을 뚫는 사고를 냈고, 그 직후 뚫린 구멍을 시작으로 차원의 벽이 일부 무너졌습니다."
일단 엘윈이란 사람이 대형 사고를 쳤다고 받아들이면 되려나.
"벽이 무너진 진동은 어느정도 실력있는 마법사 혹은 감이 뛰어난 전사들이 눈치챌만큼 컸고, 이를 조사하기위해 마법사 협회와 저희 노바가 손을 잡았습니다."
"그 엘윈이란 사람때문에 벽이 무너진게 아니야?"
"차원의 벽이라는게 구멍 하나 뚫렸다고 무너질만큼 부실할리 없잖습니까."
화남 할머니가 예전에 자신이 어떻게 다른 세계 - 차원을 넘어왔는지 말해줬었기에 그녀의 말을 어찌어찌 알아들을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자세한 설명을 좀 해줬으면 하는데. 일단 난 마법사가 아니라고.
"아직까지도 조사가 진행중이지만 적어도 현재까지 알아낸 바로는 이쪽에서 벽에 구멍을 뚫은지 얼마 되지않아 저쪽, 당신이 살던 세상에서 구멍 주변으로 강력한 힘이 가해져 벽에 금이 가게 했고, 이내 무너뜨렸다는 가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무언가 윤곽이 그려졌다. 저거 설마─.
"요컨데 벽이 무너지도록 무언가를 기폭제로 터뜨렸다는 말입니다."
아.
맙소사.
"다만 이해가 안되는 것은 당신이 사는 세상엔 그런 일을 할만한 힘이 없다는 겁니다. 아직도 조사중이지만 일단 마법도 정령도 없어보이는 그 세계에서 차원의 벽에 영향을 가게 할 수 있는 수단이 있기는 한지……."
"…… 나야."
"예?"
"그 기폭제가, 나였어."
하얀 남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신이 바로 제가 찾던 기폭제입니다.'
하필 표현까지 똑같다니. 그 뒤에 터진 일을 보면 이보다 더 적절한 비유가 있겠냐싶다만 이용당한 입장에선 이보다 기분이 더러울 수 없었다.
"그놈의 손에 닿았을때 어째선지 내 힘이 폭주했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힘? 당신은 마법사가 아니잖습니까."
"하지만 이런건 할 수 있어."
평소라면 손짓을 했겠지만 애초에 염동력이라는건 생각의 힘, 사실 손짓조차 필요없었다.
의자에 앉아있던 그녀는 두둥실 떠오른 스스로의 몸에 당황했는지 처음으로 눈을 크게 뜨며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염동력? 당신도 초능력자였습니까?"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어."
"확실히 이 힘이라면 차원의 벽에 간섭이 가능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단 한 명이……."
"그만큼 내가 굉장하다는 뜻이겠지."
나는 그녀를 다시 바닥에 내려두었다. 사람 한 명 잠깐 띄웠을뿐인데 몸상태가 안좋아서인지 벌써 힘들어.
"흐음, 알겠습니다. 설마 기폭제가 단 한 명의 사람일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원인을 알아냈으니 보고해야겠군요."
"잠깐만. 뭐 좀 물어봐도 될까."
"말하십시오."
"여기는 어디지? 그리고 사이랑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된거야?"
일단 저 여성은 다친 후유증때문에 잘 안보이는 한쪽 눈으로만 봐도 동양인은 확실히 아닌걸로 보이고, 꽤 깔끔했지만 이 방은 병실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결정적으로 그녀가 말한 마법과 포션이라는 단어로 볼때 이곳은─
"아, 그러고보니 진작에 알려드려야 했는데 좀 늦었군요. 이곳은 메이플 월드, 빅토리아 아일랜드의 엘리니아에 위치하고있는 마법사 협회입니다."
설마했는데 역시나.
"요컨데 당신이 살던 곳과는 아예 다른 세계란 말이죠."
"아, 알아들었어."
"의외로 놀라지 않는군요."
"다른 차원의 존재에 대해선 일단 들어는 봤으니까."
화남 할머니뿐만 아니라 제이도 세계가 축소되고 있다느니, 어딘가로 빨려들어가고 있다며 열심히 설명했었고.
"누구에게 그런걸 들었냐고 묻고싶지만 잠시 미루도록 하죠. 조금 전에 당신이 말했던 사이라는 사람이 얼굴에 긴 흉터가 있고, 회색 눈에 긴 백금발의 소녀입니까?"
"정확하네."
"깨어나자마자 당신과 같은 염동력을 휘두르며 마구 발작을 일으켜서 침대에 묶어 강제로 재웠습니다. 과격했지만 이해해주세요."
"…… 알았어."
이해하고말고. 내가 걔 정신나간걸 말릴때 딱 비슷한걸 했었으니까.
심지어 그때 난 염동력을 써서 제압하려다 되려 사이의 몇 배는 더 강한 염동력 맞고 죽을뻔하고, 초능력이 안되니 힘을 쓰려 했는데 어째선지 여중생이면서 콘크리트도 박살내는 완력에 골로 갈뻔했으며, 하다하다 안되서 제이가 개조한 전기충격기를 어떻게든 들이밀어 겨우 기절시켰었다.
"그리고 그 소녀 이외의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당신이 살던 세계의 사람들이 수 천명 정도 차원의 벽이 무너지며 발생한 거대 싱크홀에 휩쓸려 이쪽 세계 여기저기로 강제 이동당해 협회의 사람들이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니며 구조중입니다."
"뭐……?"
싱크홀? 강제 이동당해? 이 세계로 온게 나와 사이뿐만이 아니었던 거야?
"이건 직접 보는쪽이 이해가 빠르겠군요."
그녀는 펜으로 허공에 빛나는 문자를 쭉 썼고, 문자는 살아있는 것처럼 흩어지며 어딘가의 풍경으로 변했다.
풍경을 본 순간 어린아이가 손가락으로 꾹 눌려 움푹 꺼진 스티로폼이 생각났다. 그이상의 적절한 비유거리가 생각나지 않을만큼 저것은 비현실적이었던 것이다. 도심 한복판에 터무니없이 거대한 구멍이 뚫려버리다니. 구멍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나 있는 몇몇 건물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와 흩날리는 불씨가 머릿속을 새하얗게 태웠다.
"차원의 벽을 무너뜨린 기폭제 - 그러니까, 당신의 힘이 폭주한 장소가 지하였습니까?"
"…… 아."
"그래서 저런 식으로 여파가 퍼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싱크홀에 빨려들어간 것은 소멸되는게 아니라 소실되는 것으로, 정확히는 이쪽으로 강제 이동되는 것으로 밝혀졌으니 진정하세요."
그녀의 차가운 손이 내 머리를 눌렀다. 순간적으로 가열된 뇌가 식었고, 나는 겨우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내 힘때문에 저런 일이 생겼다니. 젠장 그 망할 허여멀건한 자식이. 돌아가는대로 어떻게든 찾아내서 가만 안둘거야!
"만약 저기로 당장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다면 포기하십시오."
"어째서?!"
그녀는 풍경의 환상을 지우며 말했다.
"당신이 해야할 일은 그 힘을 제어하는 법을 익히는겁니다. 스스로의 힘조차 다룰 줄 몰라서야 저곳으로 돌아간다 한들 저 싱크홀을 확장시키는 것밖에 더 되겠습니까."
"크……."
"만약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서 돌아가려는거면 그냥 저희나 도와주세요. 가뜩이나 바쁜 시기에 이런 사고가 터져서 인력난이 극심한 상황이니까요."
왠지 저게 날 말리는 진짜 이유 같았다. 그리고 차분히 생각해보니 하얀 남자를 찾는 것보다 여기로 강제이동당한 사람들을 구조하는게 더 급한 일이고.
"알았어. 지금 당장─"
"휴식이나 취하세요 환자분.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면서 무슨 인명구조를 하겠다는겁니까."
아아 맞다. 난 아직 환자였다. 그것도 아직 손가락조차 까딱 못하는 중상의 환자.
"하지만 몸이 이래도 염동력은 쓸 수 있는,"
"소년군."
툭, 여자의 손가락이 내 이마를 눌렀다.
"저는 소년과 같은 초능력자가 아니지만 염동력이라는게 정신에서 비롯된다는건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내 이마를 꾹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정신력이라는건 몸이 멀쩡해야 제대로 발휘되는 것이죠."
"잠깐, 잠깐만 이 손가락 좀."
"사람을 구조하긴 커녕 오히려 구조되어야할 것 같은 상태로 남 구하겠다고 설치지마세요. 민폐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두 다리로 설 수 있을때가 되면 실컷 부려먹어 드릴테니 가만히 있으세요."
이 여자 성격 장난아니다. 얼음장같은 얼굴 아래에 이런 면이 있다니. 분명 그녀 휘하의 부하라는 사람들은 엄청 굴려지고 있겠지.
"지금의 소년군은 절대 안정입니다."
"……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도록 하죠."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서 나가─ 려다 문을 반쯤 열때 어째선지 다시 날 보았다.
"그러고보니 소년분, 이름이 뭡니까?"
여태껏 내 이름을 알려준적이 없다는 사실이 그제서야 떠올랐다.
"키네시스."
"알겠습니다 키네시스군. 곧 사람을 시켜 준비해둔 식사와 읽을거리를 갖다드릴테니 푹 쉬세요."
문장만 놓고보면 친절하기 짝에 없는 말을 저렇게 딱딱하게 말하는것도 힘들 것 같다. 그래도 일단 나와 사이, 다른 사람들을 구조하고 있다니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떤 사람이 환자식과 책 몇 권을 갖다주었다. 책은 어째선지 문자가 같아서 읽을 수 있었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건.
'죽 색깔이 영…….'
세계가 다른만큼 식재료도 다를거고, 죽이 보라색일 수도 있다지만 비주얼이 영 안좋다. 식욕이 떨어진다고 해야할까. 하지만 어떻게든 빨리 나아야하고 받는 입장에서 불평할순 없으니 그냥 먹어야겠지.
그렇게 죽을 한 수저 떠먹은 순간─ 내 뇌에 싱크홀이 발생했다.
차원이 달라서는 개뿔. 그냥 그 여자가 끔찍하게 요리를 못할 뿐이었어.
***
검호side.
돌겠네 진짜. 뭔 일이 이렇게 많이 터지는거야. 그것도 하필 이때에. 동시다발적으로 몰려오는 사건사고들에 결코 좋은편이 아닌 내 머리에 과부하가 걸렸다. 만화였으면 귀로 스팀이 나왔을거야.
평소라면 이데아가 대부분의 일을 처리했지만 그녀는 지금 프렌즈 월드로 뚫린 차원의 벽 문제로 마법사 협회에 불려가 눈돌아가게 바쁠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녀가 했던 일의 일부+새로 밀려오는 일은 모두 내가 하게 되었다. 책상업무는 내 적성이 아니지만 그녀대신 저것들을 처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게 나였기에 별 수 없었다.
팬텀&스우의 일, 도망친 제논과 레지스탕스 감시, 블랙윙이 에델슈타인에 가하고 있는 제제도 약화시켜야 하는데 이러면서 본래의 목적인 에레브의 봉인석 회수를 잊으면 않된다. 당연히 2차 대륙 회의도 신경써야하고, 힐라에게 노바족 전사 파견도 준비해야하며, 동시에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다른 군단장들의 근황 보고도 꼬박꼬박 봐야하고…… 미친.
'이데아가 초인이었어.'
영웅즈보다, 군단장보다, 이데아같은 책사들이 먼치킨이었다고!! 책상머리 굴리는 사람이라고 무시하지마! 서류만 처리하면서 뭔 불평불만이냐는 배부른 소리하지 말라고!
내가 펜을 움직이는건지 펜이 날 조종하는건지 모르는 지경에 이를 무렵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는 아스카가 내 앞에서 말했다.
"마스터. 좀 쉬고 해."
"안돼. 적어도 이건 오늘 안에 다 해야해."
"내가 대신 할테니까 잠깐이라도 쉬어 마스터."
반쯤 넋나간채로 처리하고 있던 까만건 글씨요 하얀건 종이인 것들을 아스카가 쏙 빼갔다. 나는 간만에 본 깨끗한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정말이지, 왜 답지않은 일을 하는거야?"
이데아가 없으니 나라도 이걸 해야하니까 그렇지. 아무리 책사라도 그녀한테 전부 떠넘길 수 없잖아. 그렇게 대답하려 했지만 며칠째 과열되어 오버플로우된 뇌는 말하는 것조차 포기했다. 몸은 멀쩡한데 정신력만 싸그리 고갈된것 같다고 해야할까.
아스카가 테이블에서 빠르게 서류들을 넘기며 도장을 찍는 사이 나는 겨우겨우 물을 마신다음 물었다.
"스우는?"
"팬텀 몸에서 나가주겠데."
"다행이네."
만약 안나가겠다고 끝까지 뻐겼으면 눈 딱 감고 팬텀에게 갈 피해를 감수해서라도 강제로 끄집어냈을거다.
원래 나한테 영력(靈力)따위 없었지만 몇 번이나 죽고, 죽기 직전까지 구르다보니 후천적으로 생겨났다고 아이가 말해주었다. 이 몸과는 별개로 나한테 생긴 힘이니 지구로 돌아가도 유지될거라나? 하지만 딱히 기쁘진 않았다. 뭔 힘이 생긴 경로가 저따위냐고.
그래도 이거덕에 내가 마법사가 아님에도 스우한테 타격을 줄 수 있었지만. 이거 아니었으면 그놈 앞에서 저번같은 짓 못했을거다.
"그런데 그놈이 내민 조건이 좀 안좋아."
"조건?"
"여기가 아니라 다른 장소, 에레브에서 빙의를 풀겠다더라고."
미친. 무슨 생각할지 뻔히 보이잖아.
"간만에 힐라를 만나고싶다나."
"말이 되는 소리를."
"그래서 안된다고 하니까 팬텀 정신에 칼을 박았어."
아. 역시 몸의 원주인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방법이 있었던거냐.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팬텀.
"꼴에 어둠의 정령이라고 영혼상태면서 정신공격만은 잘 쓰더라고. 노딜레이로 써서 못 막았어."
"팬텀은?"
"침몰됐어. 최소 1주일은 못 나올 것 같아."
"첩첩산중이군."
갑자기 팬텀이 스우의 빙의를 이기고 질문을 했을땐 너무 놀라서 변변한 사정 설명도 못해서 - 그 자리에서 했으면 그건 그거대로 큰일 났겠지만 - 나중에라도 사과하려고 했는데 완전히 글렀다.
"마스터 힘으로 스우만 뽑아낼 수 없어?"
"무리야. 그게 됬으면 옛저녁에 했지."
거기다 보통 유령도 아니고 아스카 말대로 스우는 꼴에 어둠의 정령이기에 어줍지않은 영력으로 건드렸다간 피만 한가득 본다. 나 하나만 다치는거면 시도해봤을지도 모르지만 애꿎은 팬텀 피까지 거하게 볼 가능성이 적잖아 있으니.
내 영력이 유령을 퇴마시킬만큼 굉장한 정도는 절대 아니라서 저번에 스우 영혼에만 상처입히는것도 사실 꽤 힘들었다고.
"그놈 조건을 들어줄거야?"
"들을 가치조차 없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어차피 에레브의 봉인석을 회수하러 가야하고, 힐라의 계획을 훼방놓는데 팬텀이 필요하지만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는 - 매우 높은 확률로 여제 암살이나 그것에 비견되는 무언가 - 스우까지 데려가는건 위험부담이 엄청나다. 하지만 그렇다고 두고가기엔 그 전에 팬텀이 위험해질 것이다.
"겔리메르는 요즘 어떻지?"
"봉인석 연구랑 스우 제네로이드 개조를 병행하고 있어. 그런데 영감 체력이 체력인지라."
유감인지 다행인지 겔리메르는 지능은 과거 프리드나 하얀 마법사가 생각날만큼 천재적이었지만 몸은 머리까진 노인답게 체력이 후달렸다. 남은 기간동안 제네로이드 개조가 끝날거라는 기대는 버려야겠네.
"괜찮을거야 마스터. 나랑 마스터가 옆에 있는한 그놈이 뭘 꾸미든 박살낼 수 있으니까."
안심시키려는 듯 아스카가 한 말에 나는 길게 숨을 내뱉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그래. 스우가 여제 암살 계획을 어떻게 짜든간에 우리도, 에레브의 사람들도 호구가 아닌데 구경만 하고있지 않을거다.
문제는 다른거다.
"아스카. 나 변한걸까."
"응? 갑자기 무슨 말이야 마스터?"
"스우가 며칠전에 했던 말 말이야."
듣자마자 필라멘트 끊어진 전구처럼 뻑 소리나며 뇌가 하얗게 되버렸던 말이 다시 머리속에 둥둥 떠올라왔다.
내가 검은 마법사랑 닮았다니.
"그때의 내 옷차림때문에 한 말일까. 아니면……."
정말 내가 그놈처럼 변해서일까.
다른 사람이었으면 들을 가치조차 없는 말이었을테지만, 이번에 그 말을 한 사람은 스우다. 군단장 윙마스터 스우. 검은 마법사의 최측근 중 하나인만큼 과거 그를 옆에서 직접 보고 따랐던 놈이 나에게서 그와의 공통분모를 찾아냈다는건 그냥 넘기기가 힘들다. 단순히 착각이나 도발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서류에 도장찍는걸 잠시 멈춘 아스카가 작게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것때문에 안 어울리게 철야작업 한거야? 심란해서?"
"아니 그건 이데아가 없으니 나라도 대신 해야했던 일이라 한거고."
"마스터 의외로 그런 부분에서 섬세했구나."
"그게 아니라 좀 찝찝한 것 뿐─"
멍하니 천장만 보고있던 내 눈앞에 아스카가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걱정마. 만약 마스터가 이상하게 변한다고 해도, 난 계속 옆에 있어줄테니까."
"고맙긴한데 내가 말한건 그게 아니라……."
"세상에 변하지않는 사람은 없어 마스터."
아스카의 손이 이마를 덮었다. 뭐하냐 너.
"처음 이 세계에 왔을때의 마스터와 지금의 마스터는 엄청 다를거야. 그렇지?"
"그건 그렇다만."
내가 여기서 몇 년째 구르고 있는데 똑같겠냐. 8백년의 시간을 제외하더라고 여기서 보낸 시간을 지구에서 계속 살았었다면 아무리 못해도 대학 졸업하고 군 제대까지 끝났을텐데…….
"마스터? 갑자기 뭔가 어두운데?"
"아니. 내가 어쩌다 이렇게됐나 해서."
이 일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시오버가 허용범위내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기로 했었는데 그 소원 그 년 면상을 갈기는걸로 할까. 엄청 끌리는데 이거.
"흠흠, 아무튼 마스터. 스우의 말에 크게 신경쓰지마. 솔직히 그 놈 말만큼 믿을 수 없는건 아카이럼 말정도밖에 없잖아."
"그건 그렇지."
"그리고 만약 마스터가 검은 마법사처럼 변한다면, 내가 막아줄게."
이마를 덮고있던 손이 쭉 올라가며 내 앞머리를 치웠다. 웃는 얼굴이 보였다.
"전심전력으로 마스터 얼굴에 주먹을 날려서라도 마스터를 막을테니 걱정하지 마!"
"……."
마법이라던가, 대화라던가 하는건 없고 곧바로 죽빵인거냐. 뭐야 그거. 수정펀치?
"아, 혹시 내가 살살하지않을까~ 하는건 염려하지 않아도 돼. 쌍코피 날 정도로 세게─"
"너한테 전심전력으로 맞는건데 고작 그걸로 끝날리가 없잖아!"
쟤가 마법 전문이라 묻힌감이 있는데 본래 힘도 거체의 드래곤답게 장난아니라고! 인간 사이즈가 됬어도 진심펀치같은걸 맞으면 쌍코피가 아니라 최소 목이 2회전 할거다.
"그럼 하나로 할까?"
"애초에 때리지를 마. 그냥 가정일뿐인데 뭐 그렇게 진지한거야."
"마스터야말로 가정에 불과한것에 왜 그렇게 진지해?"
말문이 턱 막혔다.
"마스터가 걱정하는게 뭔지 알겠어. 왜 불안해하는지도 알 것 같고."
아스카는 양 팔로 내 머리를 끌어안으며 말을 이었다.
"확실히 자기도 모르는사이에 어느순간 적처럼 변해있다는건 굉장히 싫은 일일거야."
싫다뿐일까. 그것만큼 최악은 드물거다.
"하지만 마스터는 혼자가 아니잖아."
황금색 눈이 나비처럼 곱게 접혔다.
"나도, 유에도, 세피로트도, 이데아를 포함한 노바족도, 그 아이…… 는 좀 애매하지만 아무튼. 모두 마스터가 그런 지경까지 가는걸 방치하고 있지 않을거야."
그런가.
"그러니까 안심해도 돼."
"…… 응."
조금, 아니 꽤 많이 편해진 기분이 들었다.
아스카는 남은 서류를 처리하기위해 내 책상 위에 있던 종이들을 정리했고, 그러다 뭐가 쓰여있는지 어떤 종이 하나를 뚫어져라 보다 나한테 내밀었다.
"이거 좀 봐봐 마스터."
"뭔데?"
"이데아가 막 올린 보고서인데, 이거 빨리 결정해야할 것 같아."
아스카가 깨끗해진 책상에 종이를 펼쳤고, 그 위의 글자들이 내 눈에 틀어박혔다.
「빠른 시일내에 차원의 벽 사건의 기폭제인 키네시스, 그와 동일한 힘을 가지고 있는 사이를 포섭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한 명은 미숙하고 다른 한 명은 불안정하지만 두 사람은 우리가 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될겁니다.」
키네시스, 사이. 매우 오랜만에 듣는 이름들에 온갖 감정들이 떠오르며 뒤섞였다. 특히 사이. 그녀는…….
나는 한참 고민하다 둘을 반드시 포섭해라는 글을 써서 그녀에게 보냈다.
========== 작품 후기 ==========
이데아의 요리를 먹고 기절한 키네시스는 다른 마법사가 써준 해독 마법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합니다.
설정편 리코멘은 #
@suho8441 - 사이키커의 결말은 사실 초안보다 비참해진겁니다. 하지만 비참해진쪽이 더 맞다고 생각해서 이쪽을 밀어붙이기로 결정했어요.
@철륜성 - 하마때문에 두 세계가 합쳐지는중이라 이동된겁니다.
@라모니아 - 소장본은 만들줄도 모르므로...
@Jaiha - 맞고 그 자리에서 기절한걸 당시 더스트를 보고 기겁한 학생들의 신고로 살피러 온 수위가 발견해서 병원으로 옮겨졌다는 후문.
@흑접아 - 아스카가 어떻게 될지는 스포일러이므로 노코멘트.
@좀비라스 - 검호는 유령전문이 아닌지라. 루미너스였다면 가능했을지도?
@소라루 - 이번에 올린 설정편을 보고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행자구름 - 같은 질문 통합은 좀 생각해봐야 겠네요.
@비탄의과학자 - 남은건 그녀가 얼마나 구르느냐뿐.
@카한Kahan - 에필로그를 기다리세요.
@책벌레씨 - 하하 그래도 여중생정도밖에 안되니 사지 하나쯤은 붙은채로 갈거에요.
@페르샤노스 - 완결까지 아직 수십 화는 남았습니다...(눈물)
@Ratios - 스우는 뭐, 군단장답게 트롤짓 할만큼 하고 갈겁니다.
@레시코 - 설정편과 이번편으로 설명이 됬길 바랍니다.
@mmo0522 - 편하게 죽을지도 의문.
@ReFrante - 어색해서 하루종일 말 못할듯.
@진달래X - 갈때 길동무라도 있길 바래야함.
@슈엘리안 - 사실 팬텀 멘탈이 그렇게 약한것도 아닌데 상대가 하필 원수인 스우라서.
@라그실 - 아직 검마 부활하지 않았습니다.
@반월유화 - 늦어서 죄송합니다.
@Blake117 - 그리고 저는 또 전투씬을 짜내야하고...
@Sisre - 데몬이랑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케이스.
@이년아 - 그래서 이번에 새로 올릴 킬수는 남자로 할까 합니다.
@키린이 - 트립된다고 다 좋은게 아니라는 산 표본들.
@리아카에린 - 이번 편은 좀 쉬어간다는 느낌입니다. 아프리엔은 뭐, 그래도 편하게 보내드릴게요.
@핑구친구 - 그렇게 스우의 빅엿은 점점 준비가 끝나가고.
@류동지 - 차원의 거울은 언제쯤 만들어지려나~
@Ascaron - 하마덕에 이미 트라우마 작동중.
@Umbra000 - 목 자른 사람과 목 잘린 사람인데?!
@적현월 - 검호는 매우 바쁩니다. 만약 사이키커가 유아퇴행되면 키네시스가 돌봐야할걸요(후새드)
@Yoontlemin - 얀데레인 시점부터 올바름과는 거리가 멀어요.
@마서 - 만나면 둘 다 아무 말 못할겁니다.
@SourcesMoon - 만약 그러면 검호는 진심으로 시오버를 죽이기위해 프라이쉬츠와 손을 잡을지도 모릅니다.
@건전한독자 - 연애감정은 둘 다 없다는게 함정.
@Eluines - 팬텀을 위한거였지만 결과물의 비주얼이 최악이었음.
@Dulcet - 사이키커의 정신은 처음 실수로 사람들을 죽였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부서져있었습니다.
@육합 - 질문들에 답해드리자면,
1. 뭐, 합치면 트립퍼 최강은 검호로 바뀌겠죠. 검호가 하이랜더보다 꿀리는 이유가 해결되니까요.
2.매우 껄끄럽고 어색한 여자입니다.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죽였고, 죽임당했으며 그러면서 사람을 구하는 입장, 죽이는 입장이었죠. 그 와중에 서로에게 평화로운 기억을 주었으니.
3. 이건 설정편을 참조해주세요.
4. 그래도 그녀의 죽음에 울거나 측은하게 여길 사람이 있긴 할겁니다.
5. 이 글의 히로인은 파픈뿐입니다. 그거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6. 스포일러이므로 노코멘트. 하나 알려드리자면 영혼의 이어짐은 거리와는 상관없습니다. 생사만 상관있을뿐.
@노란우산s - 아뇨 진동이 크게 퍼진 헤네시스, 엘리니아 일대를 조사하다 둘을 찾았다는 뜻입니다. 팬텀한테 다 못 말한건 그가 나온것 자체를 전혀 예상못했는데 갑자기 튀어나와서 '?!?!?!'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대어의예감 - 이번에 검호는 그래도 반성중인 사이키커말고 다른 사람을 카와이하게 썰어줄겁니다.
@허공말뚝 - 다행이네요. 초반에 리타이어한 애라 잊어버린 분들이 많을거라 생각했는데.
@Legendssj2 - 그것말고 다른 이유가 있지만...
@리세니안 - 아직 죽지않은 세피로트의 죽음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군요.
@칼크래프트 - 저 말 들었을때 순간적으로 검호는 스우를 조질뻔했습니다.
@에누마엘리시 - 사이키커입니다.
@익재공 - 굉장한 짓이요.
@서희대감 - 흠, 많이 어렵네요.
@x흑란x - 익숙치도 않은 영력과 시간의 힘(상처악화) 쓰느라 진땀뺐다고 합니다.
#suho8441 - 요즘 계속 우울하게 진행되서 그리 재미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감사합니다.
#코토리짜응 - 모든 트립퍼는 리스폰뒤에도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떠올리는데엔 시간이 걸림.
#좀비라스 - 더 정확히는 전투 인형.
#Sisre - 이렇게 욕을 쳐먹는데 사망 예정이 없다는거.
#박가현 - 이론상 가능은 하지만 잔인해요... 가뜩이나 고생고생하다 죽은 애인데 몇 번이나 자살하는건 아니잖아요?
#Eluines - Q&A를 해야하나.
#빛나는행운 - 트립퍼는 불로인데요?
#노란우산s - 외전과 회상을 기다리세요.
#Jaiha - 정확히 말하자면 세포단위의 부품으로 이루어진 인형에 가깝습니다.
#kain brunster - 암울해진건 사이키커 참수부터 이미 조짐이 있었습니다.
#육합 - 몸을 이루는 재료가 시간의 힘인겁니다.
#레시코 -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돌아오게 되있습니다. 다만 그때까지 걸리는 딜레이는 생전, 리스폰 전에 입은 부상(손상)이 어느정도인가에 따라 다릅니다. 그리고 리스폰 장소가 랜덤이긴하지만 시오버의 봉인 해제 수단이 있는 곳 중 하나인 식입니다.(아니면 시오버 본인이 망하므로) 예를 들어 검호와 사이키커는 메이플 월드로 갈 수 있는 기폭제인 키네시스 주변에서 리스폰되었죠.
#ReFrante - 대신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랑패키지 - 본편말고 회상과 외전으로 만족해주세요.
#대어의예감 - ng외전은 1편정도밖에 안남아서리.
#Ratios - 매우 적절한 비유입니다. 첨언하자면, 시오버는 분명 메이플 세계관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창조물이니까요. 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제대로 공감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며(오버시어 종특) 트립퍼들에겐 그 사랑마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