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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윙이 가장 심하게 제제하고 있던 시티즌들의 에델슈타인 정거장 이용이 한정적이나마 가능해졌다. 에델슈타인 주민도, 레지스탕스도 이 예고없는 블랙윙의 자비라고 부르기 힘든 일에 기뻐하기보단 혼란스러워했다. 상식적으로 저들이 이런 일을 해줄리가 없는데 갑자기 왜?
사실 속 사정은 이러했다.
도망친 제논을 잡기위해 안드로이드를 풀었으나 아직까지 소득이 없어 안달난 겔리메르는 혹시 제논이 대륙으로 빠져나간게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고, 만약 아직 있다면 에델슈타인에서 유일하게 다른 대륙으로 갈 수 있는 정거장을 쓰려 할테니 한정적으로 정거장을 열어 주변을 기웃거릴 제논을 잡아보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마침 연합이 만들어지기 위해선 레지스탕스들이 대륙회의에 가야하는데 어떻게 보내야하나 골머리를 썩히던 검호는 기회다싶어 그의 부탁을 들어주는척 오르카를 어찌어찌 설득해 한정적으로 정거장을 여는걸 허락받았다.
그렇게 몇몇 레지스탕스들이 눈을 감아준 노바 경비들 덕에 에델슈타인에서 나와 에레브의 여제와 접촉에 성공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아이러니하네. 따지고보면 우리때문에 이렇게 된건데 말이야."
"작업이나 해라."
"알았어 알았어~"
세피로트는 부서진 골렘 파편을 한 손으로 집어다 휙휙 집어던졌다. 은월은 그의 모습에 작게 혀를 차며 지붕이 뚫린 버섯집에 판자를 덧대어 못질을 했다.
두 남자들이 힘을 쓰고 있는 곳은 블랙윙에게 조종당한 인근의 몬스터들이 한바탕 날뛰고 가 이래저래 피해를 입은 헤네시스였다.
"근데 딱히 내가 틀린 말 한건 아니잖아?"
"입조심해라. 다른 사람이 들으면 안되는거 모르나."
"내 말을 숨기고 싶다는건, 너도 우리가 하는 일이 어딘가 잘못됬다는걸 안다는거지?"
"…… 하."
한숨을 내뱉은 은월은 그와 더 말하길 포기하고 못질을 이었다. 세피로트는 아예 고개를 돌린 은월의 뒷통수를 빤히 보다 골렘 파편들을 마저 치우며 중얼거렸다.
"뭐, 내가 이런걸 지적한다는게 우습다는거 잘 알아. 애초에 형씨가 이 방법 생각해냈을때 제일 먼저 지지했던게 나이기도 했고."
"그러면 왜─"
"계속 하다보니까 불편해지더라고."
처음 방법을 들었을땐 다 좋게 풀릴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행동에 옮기자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죽지않게 하기 위해 되려 그들을 다치게 해야한다는 사실이, 최상의 결과를 위해 지저분한 과정을 거쳐하만 하는 것이.
누군가가 생각나는 방식이잖아 이거.
"그게 그렇게 걸리면 그에게 직접 말해봐라."
"흐응?"
"나도 지금의 방법이 어딘가 잘못됬다는건 알고있다. 그래서 꽤 꺼림칙하고."
그 사이 지붕 보수를 끝낸 은월이 땅에 내려와 남은 자재들을 정리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생각없이 이 일을 한게 아니지 않나."
"…… 그렇지."
당연히 검호는 다친 사람들을 방치할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었다. 노바족들이 포션을 제조해 팔아 번 자금과 여기저기에서 삥땅친 블랙윙의 자금을 써서 빅토리아 아일랜드의 마을들을 복구하는데 알게모르게 뒤에서 지원하고 있으니까.
"연합이 만들어질쯤에 그 오버시어가 나서주기로 한걸로 알고있다만, 아닌가?"
"맞아. 그 말을 꺼낸 형씨를 10번정도 밟고난 뒤에 해주겠다고 말했지."
그랬다. 귀찮은 부탁 들어주는걸 오질나게 싫어하는 생명의 오버시어가 무려 직접 힘을 써주기로 약속해준 것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패…… 아니 제어 불가능이니 패라고 부를 수 없고, 아군이라 칭하기도 힘든 이지만 어쨌든 다행스럽게도 적은 아닌 생명의 오버시어를 보험으로 들여놨으니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검은 마법사가 조만간 깨어나는게 확실한가?"
"응. 못해도 연합이 만들어질 쯤에 100% 깨어날거야."
"돌겠군."
은월이 답지않게 험한 말을 내뱉었음에도 세피로트는 쓴웃음만 지어보였다. 제 존재의 시간을 모두 바쳐 겨우 봉인에 성공했는데 얼마않있어 깨어난다니 빡치지 않을리가 있겠냐만. 거기다 8백년동안 봉인이 유지되었다한들 본인이 체감한건 3년도 채 안되니.
"냐하, 큰 일 벌어지기 전에 에레브의 봉인석만 무사히 회수하면 부딪히지 않고 안전하게 끝낼 수 있을테니 너무 걱정말라고."
"내 경험상 그런 말 했다가 진짜로 잘 풀린적은 없다."
"머피의 법칙이야?"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상황이 최상으로 흘러갈거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마라. 오히려 매번 최악을 가정해라."
"예를 들자면?"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공구함을 정리하며 말했다.
"연합이 만들어지기 전에 검은 마법사가 깨어나 어딘가를 공격한다던지, 군단장이 단숨에 에레브를 노린다던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우와…… 현실적이네. 진짜 일어날 것 같아서 오싹해졌어."
"혹은 그 오버시어가 무슨 변덕을 부릴지 모르는─"
"거기 두 분~ 점심 드세요오!"
멀리서 들려오는 소녀의 목소리에 두 남자는 하던 일을 멈췄다. 진지한 이야기는 이야기고, 일단 밥을 먹어야 했다. 그들도 사람이었으니까.
빨간머리의 소녀는 잎사귀색 치맛자락을 팔락이며 도도도 뛰어와 도시락을 그들에게 주었다.
"여기, 받으세요."
"고마워. 잘 먹을게."
"감사히 받겠다."
"감사 인사는 필요 없어요. 두 분이 여태껏 해주신 일에 비하면 이 정도는 별거 아닌걸요."
그녀의 말에 세피로트는 순간 입꼬리를 파들 떨었고, 은월의 미간엔 주름이 잡혔다.
"여기 와서부터 계속 저희 마을을 복구해주셨잖아요."
소녀는 환히 웃어보였지만 그때문에 한쪽 뺨에 자리잡은 붉은 화상자국이 흉하게 꿈틀거렸다. 궁수교육원 근처에 있다 몬스터가 일으킨 화재때문에 다쳤다고 했었나?
"그럼, 점심 맛있게 드세요~"
돌아가는 소녀에게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준 둘은 껄끄러운 표정으로 털썩 앉았다.
"…… 니가 말한 불편함이 뭔지 잘 알았다."
"직접적인건 아니지만 확실하게 관여는 되있으니 엄청 속이 쓰리다구 이거."
대충 먹고 이제 슬슬 여기를 떠야지. 세피로트의 말에 은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그너스 기사단은 오늘안에 도착한다하고, 차원의 벽 사건때문에 메이플 월드 곳곳으로 흩어져 강제 이동당한 프렌즈 월드의 사람들을 수색중인 마법사 협회대신 리엔이 빅토리아 아일랜드의 주요 마을들에 결계를 친다니 더이상 그들이 여기 있을 필요가 없다.
머리가 심란한 탓인지 둘은 기다렸던 점심을 씹는둥마는둥 입에 마구 쑤셔넣으며 배를 채우는대로 루타비스로 귀환하려고 했다. 그들은 노바의 귀중한 전력이었고, 해야할 일이 산더미였으니까.
[마스터, 저기있어!]
"오 진짜네? 드디어 찾았다!"
예상치 못한 불청객만 아니었으면.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았음에도 목소리의 정체를 눈치챈 은월은 얼굴이 희게 질린채 뒤도 돌아보지않고 정령들을 소환해내 세피로트가 정리해놓은 골렘 파편더미의 뒤로 몸을 숨기며 은신했다. 실로 바람같은 그의 행동에 뭔가 당황하던 세피로트는 이후 뛰어온 소년을 보고 납득했다.
"후아아…… 드디어 만났다."
"으, 음, 누굴 찾아?"
"카밀라가 여기에 흰 머리에 갈색 피부를 가진 자원봉사자가 있다는 말을 해서 혹시나 했는데 진짜였네요."
외모까지 특정하는걸 보니 내가 확실하네. 시치미 뗄 수도 없겠다. 세피로트는 당혹감을 감추기위해 애써 웃어보였고, 그런 그에게 에반이 환히 웃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롯뜨 씨."
그때 댔던 가명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던거냐. 순진해보여도 마법사인만큼 기본 머리는 당연히 있을테니 기억력이 좋은 것도 이상하진 않지만.
"저 기억하고 있으세요?"
이때 오르비스 탑에서 있던 일을 들먹이면 자폭하는 꼴이니─ 세피로트는 생각에 잠긴척 뜸을 들이다 말했다.
"혹시 골드비치에서 봤던 그 꼬맹이?"
"꼬맹이 아니거든요!"
"음…… 확실히 그때보다 키가 크긴 했네."
"정말요?!"
역시 꼬맹이 맞네. 키 컸다는 말에 눈 초롱초롱 빛내며 좋아하는걸 보니.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고.
"그래서 무슨 일로 날 찾아온거야?"
[용건을 말해야지 마스터.]
"아 맞다. 롯뜨 씨, 롯뜨 씨가 오르비스 탑 사건때 군단장 프라이쉬츠와 싸운 사람이 맞죠?"
"아닌데."
저걸 긍정하면 바보지. 그러나 어째선지 세피로트의 부정에도 에반은 계속 웃어보였다.
"역시 맞네요. 순간적으로 본거라서 좀 긴가민가 했는데."
"아니 난 아니라고 했는데 뭐가 맞다는거냐 꼬맹아?"
"─오르비스 탑을 습격한게 프라이쉬츠라는 사실은 아직 사람들한테 알려지지 않았어요 롯뜨 씨."
"…… 아."
내가 이런 머리에 피도 안마른 아이의 유도심문에 넘어가다니. 세피로트는 벙찐 얼굴로 굳어버렸고, 골렘 파편 뒤에 숨어있던 은월은 에반의 영민한 머리를 칭찬해야할지, 그의 실수를 욕해야할지 알 수 없어 그저 한 손으로 눈을 덮으며 그들에게 들리지않도록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정말 아니었으면 군단장이나 프라이쉬츠가 누군지 물어보는게 맞죠."
"으, 응, 그렇네……."
[본인도 맞다고 인정하고 있고.]
이거 어떻게 수습할 수 있으려나. 세피로트는 냐하하 영혼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러니 제대로 대답해주세요. 당신이 오르비스 탑 사건때 프라이쉬츠와 싸웠죠?"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부정하면 바보가 되게 생겼군. 그는 작게 고개를 떨구며 대꾸했다.
"그래. 내가 맞아. 그래서 그건 왜 묻는거야?"
"롯뜨 씨에게 꼭 들어야할게 있거든요."
에반은 진지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당신이 군단장 프라이쉬츠와 싸운건 우연이었나요?"
여러 뜻이 담긴 질문에 세피로트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그 진의를 읽어내려고 머리를 굴렸다.
에반이 이런 질문을 하게된건 에레브에서 나인하트와 했던 대화때문이다.
'그가 누구인지 기억나나요?'
'창문 너머로 보긴 봤는데 순간적으로 본거라서 잘…… 하지만 실루엣이 떠오르는 사람이 있긴해요.'
'그게 누구죠?'
'예전에 골드비치에서 만났던 어떤 사람이요.'
당연하지만 나인하트는 군단장에게 당하긴 했어도 어느정도 싸운 사람을 그냥 넘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물며 어떻게 된건지 군단장의 존재를 사전에 알고 있던 이라면 더더욱.
'저기 데몬 씨. 그 사람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요?'
'폭발을 뒤집어쓰는 바람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투성이였잖습니까.'
'특징같은게 하나도 없었습니까?'
데몬은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했던 기억의 끝자락을 더듬었고, 잠시 후 유일하다싶은 그 남자의 특징을 겨우 떠올렸다.
'눈이 청록색이었습니다.'
'청록색?'
'온몸이 피로 새빨갛게 물들었는데, 눈만은 그 색깔이었거든요. 그래서 기억합니다.'
그 특징아닌 특징 하나에 에반은 프라이쉬츠와 싸운 이가 세피로트임을 직감했다. 물론 감을 잡은건 잡은거고, 실제 증거가 없었으므로 직접 발로 뛰며 그를 찾아다녀야 했지만.
그리고 지금.
"…… 아니. 우연이 아니었어."
"역시 그랬네요."
[박쥐는 니가 군단장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 사건을 막으려 했었다던데 그건?]
"그것도 사실이야."
왜 내 푸념들을 다 기억하고 있는건데? 세피로트는 속으로 데몬을 욕하며 자포자기로 긍정했다.
"호기심 해소됬으면 이제 가주라. 나도 갈거니까."
"잠깐만요 롯뜨 씨!"
"또 뭔데?"
그가 답지않게 거친 말을 했음에도 에반은 꿋꿋이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이번에 열릴 대륙 회의에 와주세요."
"기각. 잘 있어라 꼬맹아."
"잠깐, 잠깐만요!!"
매몰차게 몸을 돌리는 세피로트의 머플러를 붙잡은 에반이었지만, 그가 소년의 몸무게따위에 발걸음이 늦춰질리 없었기에 세피로트는 에반을 뒤에 단 채로 척척 걸어갔다.
"나인하트 씨가 당신을 찾으면 꼭 데려오라고 했단 말이에요!"
"응. 그런데 난 가기 싫어."
"지금까지 군단장이랑 직접적으로 싸운건 롯뜨 씨 한 명 뿐이라 경험담이 필요하다고요……!"
"핑계 좋네. 그런데 거기 전직 군단장들이랑 영웅들 많잖아. 그 사람들한테 놈들 전투스타일 물어봐."
[대륙 회의때 누가누가 온지는 또 어떻게 알았어? 당신 거기 없었잖아.]
미르의 말에 세피로트는 침묵했다. 진짜 이놈의 입이 방정이구나. 저를 지긋~이 응시하는 두 시선에 그는 침묵하다 머플라를 크게 털어내 에반을 떼어내고는 곧바로 전력으로 땅을 박찼다.
"도, 도망쳤어?!"
[빨리 쫓아가서 잡자 마스터!]
어느새 마을 끝자락까지 달려가있는 세피로트를 쫓기위해 에반은 텔레포트를 썼고, 미르가 빠르게 날개짓하며 그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세 사람이 자리를 떠나서야 골렘 파편 뒤에 몸을 숨기고있던 은월은 겨우 은신을 풀고 나올 수 있었다.
"…… 하아. 바보도 아니고."
그래도 에반에게 잡힐만큼 만만하진 않으니 알아서 잘 도망치겠지.
은월은 다 먹은 도시락을 카밀라에게 돌려준 뒤에 루타비스로 돌아가 그의 바보행각을 보고했다고 한다.
***
검호side.
…… 사람 목을 쳐날린 놈이랑 또 그때 참수당한 사람은 서로를 어떻게 볼까.
목을 날려버린 쪽은 책에서나 쓰여있던 시산혈해를 직접 본 덕에 정신줄을 놓은 상태였고, 목이 날아간 쪽은 당시 그 시점에선 더 말하는게 입아픈 극악한 학살자였다.
그런데 이후 두 사람은 서로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서로를 남매로 착각해 몇 년동안 잘 지내다 어느 순간 원래 기억을 되찾아버렸고, 학살자는 자신이 죽인 생명들의 무게를 깨달아 회생불능으로 정신이 망가져버렸다.
이런 때엔 어떻게 그 사람을 대해야 할까.
"여기입니다."
"사람들이 오지 않는게 확실한가."
"예. 그녀는 깨어날때마다 발작을 했고, 그때마다 사람들이 다쳐서 어쩔수 없이 하인즈가 직접 접근금지령을 내렸거든요. 그래서 저희가 직접 관리중입니다."
그 뒤에는 마법사 협회 건물의 외곽에 옮겨졌다고 이데아는 말했다.
"키네시스는?"
"힘을 조절하는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그도 여차하면 제압할 수 있도록 구속의 마법사 네로를 붙여놓았고요."
사람이 아니라 폭탄취급이군. 진짜 차원의 벽을 무너뜨리는 폭탄으로 사용된게 함정이지만.
"의외로 이 세계에 잘 적응하더군요."
"여러모로 히어로 체질이었던 놈이니까."
"배가 불렀는지 식사에 대한 불평을 좀 하긴 했지만요."
"식사?"
"환자식을 직접 만들어줬는데 다시는 내오지 말라고 부탁했습니다. 건방지게, 식량의 귀중함을 모르다니."
그 귀한 식량가지고 독요리를 연성해낸 사람이 할 말은 아니잖아. 어쨌든 용케 살아있구나 키네시스.
"아무튼, 이제 문을 열테니 조심하세요. 그녀의 염동력은 굉장히 위험하니까요."
"알았다."
그녀는 굳게 닫힌 문에 겹겹히 쳐진 결계를 해제했다. 문은 얼마나 안쪽에서 두들겨졌는지 위태로운 소리를 내며 열렸고, 방 안에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잔인한 학살자도, 평범한 여중생도 아니게된 소녀가 있었다.
온통 산발인 머리카락에, 짐승에 가까운 울음소리를 내며 방 구석에 웅크린채 간혈적으로 몸을 떨고있는 저건.
"우으으…… 흐끅, 후으으……."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쳐버렸다. 그녀에게서 내가 아는 두 모습의 흔적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낼 수 없는건 물론, 저 모습을 본 순간 그녀를 포섭하기 위해 겨우 쥐어짜냈던 말들이 모두 증발해버렸다.
"잠깐만요, 분명 부하들에게 그녀를 돌보라고 했는데─"
"그 부하들이 저기 저 사람들을 말하는건가."
나는 간신히 손을 들어 방 한쪽을 가리켰다. 그녀의 염동력에 당했는지 철퇴에 마구 맞은것처럼 엉망진창인 두 노바족이 널브러져 있었다.
"크리스티네! 벨더!"
이데아가 두 사람에게 달려갔다. 나는 그들을 부축하지도, 사람들을 부르지도 못하고 바닥에 뿌리박힌듯 서있다 겨우 다리를 움직여 그녀에게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신발 밑창에 철이 덧대어진 양 무겁기 짝에 없다. 그러나 방은 그리 넓지 않았기에 마음을 정리할세도 없이 몇 발 내딛지 않아 금방 그녀의 앞에 다다랐고, 나는 엉킨 털실뭉치같은 그녀의 뒷통수를 한참 내려다보다 모자를 벗고 한쪽 무릎을 꿇어 몸을 낮췄다.
"사이."
백금발 더미가 크게 떨렸다. 자해를 막기 위함인지 벙어리 장갑처럼 붕대에 칭칭 감겨있는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덜덜 떨며 고개를 든 그녀가 날 올려다 보았고…… 흐리멍덩한 회색눈이 왁 크게 떠졌다.
"오, 오빠, 아니 잠, 살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잠깐 사이 진정해!"
"죄송해요잘못했어요전그저몰랐을아니알았어요알았는데알고싶지않았는데알면서해버렸,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이전과 같은 학살자였다면 검을 겨누거나 힘을 쓰는데 주저할 필요 없었을것이다.
잠깐동안 보았던 평범한 여중생이었으면 말거는거라도 쉬웠겠지.
하지만, 일찌감치 제 죄책감의 무게에 짓눌리다 기어코 박살난 사람은 정말 어떻게 해야할까.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양 손으로 목을 조르듯이 감싸며 정신없이 말을 쏟아내는 그녀의 모습에 여기 오기전에 이데아가 했던 말이 귓가에 웅웅 울렸다.
'그녀의 치료는 불가능해요.'
'너희 마법으로도?'
'마법으로 그 정신을 복구하느니 차라리 기억을 다 날려버리고 처음부터 교육시키는게 더 빠를겁니다.'
나는 더 갈 곳도 없는데 계속 구석으로 몸을 우겨넣으며 내게서 도망치려는 그녀를 지친 눈으로 보다 다른 한쪽 무릎도 마저 꿇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히, 히이……!"
"할 말이 있어. 들어줘 사이."
빠악─! 느닷없이 고개가 돌아갔다. 뺨에서 올라오는 얼얼한 통증에 그제서야 내가 염동력에 맞았음을 알았다.
"아, 죄송, 죄송합니다, 무서우, 무서워서,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주륵주륵 울며 쉰 목소리로 사과하는 소녀에게 화조차 들지 않았다.
그녀가 울음을 그치길 기다릴까 했지만, 나와 눈이 마주칠때마다 몸을 떨며 필사적으로 목을 손으로 가리는 행동에 기다림이 의미없다는걸 알았다.
"계속 하실겁니까."
두 노바족을 어느정도 치료했는지 이데아가 그들을 부축하며 물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한 번 보았다가 다시 소녀와 눈을 맞췄다.
"사이. 너와 키네시스가 이곳으로 넘어오면서 차원의 벽이 무너졌어."
"죄송해요, 죄송,"
"니 잘못 아니야."
더듬더듬 사과하던 그녀가 크게 눈을 깜빡였다. 한가득 고여있던 눈물이 젖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키네시스 잘못도 아니고. 이 일을 벌인 놈은 따로 있잖아."
"하…… 하얀, 마법사. 그놈이, 그놈이."
역시 그놈이었나.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어. 차원의 벽이 무너지면서, 프렌즈 월드의 사람들이 메이플 월드로 마구 넘어왔어. 그런데 그 숫자가 너무 많고, 장소도 제멋대로라 마법사 협회 사람들로는 다 찾기 힘들어."
소녀는 불규칙적으로 숨을 몰아쉬며 내 말을 들었다.
"심지어 지금 대륙 상황이 매우 안좋아."
군단장들이 깨어났다고 바로 말하려 했지만, 그 단어는 그녀의 트라우마를 들쑤셔 대화불가능 수준으로 만들 가능성이 적잖아 있다.
"그러니까…… 날 도와줘."
"아, 아?"
나는 끼고있던 장갑의 손가락 끝을 물어당겨 벗고, 그녀처럼 붕대에 칭칭 감긴 손을 내밀었다.
"사람들을 구하는데 니 힘이 필요해. 다른 누구도 아닌 니 힘이."
그러니까 나를 도와줘.
당장이라도 산산히 부서져 가라앉을 것처럼 흔들리던 회색 눈은, 그렇게 간신히 진정되었다.
========== 작품 후기 ==========
검호는 사이키커의 죄를 변호할 생각 없습니다. 애초에 그가 정줄놓고 그녀를 죽이는 지경까지 가게 된 이유가 뭐였는데 그럴리가. 단지 그녀의 목을 끊은게 그 자신임을 알기에 볼때마다 힘든거죠. 무슨 이유를 대든 사이키커의 앞에서 검호는 살인자니까요.
@아이다의불새 - 중상자한테 독극물을 먹였으니...
@Eluines - 검호 흑역사야 뭐, 이미 제 머릿속에 예정되어 있습니다.
@좀비라스 - 스우는 트롤링의 대가를 치를겁니다.
@suho8441 - 아군이 하나 생겼다?
@이년아 - 음, 나름 맞춤법에 신경쓰고 있었는데 꽤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도사지망생 - 머지않아 2번쯤 터질 예정입니다.
@Sisre - 스우는 군단장중에서 유능하며 동시에 똑똑합니다. 당연히 작은 일따위를 꾸밀리가 없죠. 어떻게 할지 상상해보세요!
@적현월 - 아카이럼이나 매그너스도 아니고 팀킬을 할리가.
@심온 - 폐인되어도 이상하지 않을듯.
@키린이 - 그래서 사이한테 함부로 못하고 있죠. 그녀의 앞에서 그는 살인자에 불과하니까요.
@Ascaron - 먹으면 위장에 구멍뚫릴듯.
@리세니안 - 검호는 파픈과 약속을 한 그 순간부터 그녀가 먼저 지구에 갔다고 여기기로 했습니다.
@Yoontlemin - 얀데레 착각계라니! 이거 재밌네요. 님이 써주세요.
@책벌레씨 - 멘붕은 멘붕이고 대가는 치뤄야죠?
@카한Kahan - 이데아뿐만 아니라 메르세데스와 아란까지 독요리 스킬 소유자.
@x흑란x - 머리쓰는 사람을 옆에 두는 이유.
@ㅇㅇ군 - 회상이나 외전에 나올겁니다.
@노란우산s - 하이랜더는 음... 솔직히 출연시키고 싶지 않은데(얘가 끼어들 틈이 없어요) 그래도 마지막쯤에 넣을까 생각중.
@칼크래프트 - 영 안좋은 화학작용이 일어난듯.
@육합 - 얼린 몸은 껍데기, 환생한 몸은 내용물. 증가한게 아니라 나뉘어진거.
@슈엘리안 - 별로 안많음ㅋ
@진달래X - 몇몇 트립퍼는 별로 행복하게 안끝날겁니다.
@소라루 - 실제로 사이키커는 제정신으로 고치는것보다 그냥 다 날려버리고 새로 가르치는게 나을만큼 처참한 정신상태입니다.
@Blake117 - 검호:행정업무를 무시하지마!
@서희대감 - 몇 살만 더 먹으면 서른이라죠...
@갓타치 - 과연 검호는 나이 앞자리 수가 바뀌기 전에 돌아갈 수 있을까요~?
@SourcesMoon - 시오버의 전체 힘 5%가 현재의 힘보다 더 많다는게 함정.
@다크비하인드 - 언젠가 비슷한 일러를 찾아볼게요. 아직까지 받아본적이 없어서리.
@류동지 - 몇몇개 빼고 사실에 근접하네요.
@익재공 - 에레브에서 대활약 예정.
@문다이에 - 실제로 더 패닉에 빠졌음.
@Legendssj2 - 검마 부활하면 제일 먼저 누굴 만나러 갈까요 하하.
@허공말뚝 - 만난지 5분도 안되서 뺨맞음. 일반인이었으면 그거 한 방에 목이 꺾였겠지만.
@레시코 - 트립퍼중 누군가가 죽빵 소원을 빌지도.
@건전한독자 - 아직까지 제정신인게 용한겁니다.
@Jaiha - 트립한 이후로 좋은 일이 정말 없는 상황이죠 검호는. 아래는 답변!
1. 혼란 → 제압 → 대화.
2. 제대로 만난다면 하겠지만 아직 만나지 못한고로.
3. 뭔가 범상치 않음을 다들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음.
@Dulcet - 네. 그것도 조각이 아니라 거의 가루단위로 박살나서 형태를 유지시키는 것만도 버거움.
@ReFrante - 실제로 도망치려 했고, 자기방어로 공격까지 함.
@sadgfdfh - 쿠키가 아니라 수프였지만!
@Ratios - 음? 키네시스 모듈이 아니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