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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대륙 회의가 윙마스터의 에우렐 습격으로 흐지부지하게 끝난지 몇 주 뒤, 다시 에레브에서 두 번째 대륙회의가 열렸다.
본래라면 회의가 열리기까지 준비가 많이 필요해 최소한 1달은 지난 뒤에 열렸을 것이다. 하지만 에델슈타인에서 급히 온 레지스탕스 대표들과 깨어난 군단장들 휘하의 군단들에서 포착되는 심상치않은 기류, 조사 결과 대부분 사라진 봉인석 그리고 차원의 벽 사건 등을 이유로 좀 더 일찍 열리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인하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얼마나 갈려나갔을지는 당사자들 말고는 모를 것이다.
"어쩐지 저번보다 더 바글바글하다는 느낌이네요."
"그야 그때 못 왔던 사람들이 대거 왔으니까."
웅성거리는 사람들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아란은 손부채질을 하다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어 어깨에 메고있던 폴암에 걸었고, 그와 함께 드러난 탄탄한 근육질의 상반신에 에반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 그냥 입고계시면 안될까요?"
"여긴 너무 덥다고─ 아니면 꼬맹이 니가 시원해지는 마법이라도 써줄래?"
"해드릴테니까 제발 옷 좀 입으세요!"
비명을 지르듯이 꽥 외친 에반은 아란의 코트에 냉온 마법을 걸었다.
"오 나이스! 이제야 시원하네."
[마스터가 이런 쪽의 면역력이 약하니까 이해해줘.]
"이해하고말고. 이 누님이 좀 멋져야지?"
"그런 뜻 아니거든요 누나……."
미르와 아란에게 휘둘리고 있는 에반을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보던 메르세데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안닮았어."
"당연한 것을."
"다른 사람인건 알지만 꽤 닮아서 그런지 자주 겹쳐보여."
프리드랑. 주어가 생략되었지만 루미너스는 바로 알아들었다.
"좀 전에 나한테 '감자 좀 드실래요?'라고 묻더라고. 거절했지만."
"듣자하니 헤네시스 주변의 농장에서 자랐다 하더군."
"그런것치고는 굉장한 실력이라고 생각하는데, 넌 어때 루미너스?"
"인정하기 싫지만 동감이다."
에반 스스로는 별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소년은 이미 제 나이대의 마법사들을 훨씬 뛰어넘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 오닉스 드래곤과 계약한 시점부터 범상치않음이 증명됬지만, 마법이란걸 배운지 3년도 되지않아 저 정도로 성장한 잠재력은 영웅인 그들조차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몇 년만 더 지나면, 아니 계기만 생긴다면 순식간에 내가 있는 곳까지 치고 올라올지도 모르지."
"평가가 굉장히 후하네? 저번엔 완전히 무시하더니."
"잠재력만 인정하는거다. 경험이나 지식, 상황에 따른 판단력은 한참 멀었어. 프리드는 고사하고 그 좀도둑보다 못해."
"팬텀은 스틸 스킬이 사기잖아. 아, 말이 나온김에 묻는건데 팬텀 지금 어디있는지 알아?"
"내가 그걸 알리 없지않나. 그리고 좀도둑의 행방따위 궁금하지도 않아."
루미너스의 딱딱한 대꾸에 메르세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나 지금이나 극악한 사이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 볼때 짐작이 안가는건 아니다."
"예상가는데가 있어?"
"그 좀도둑이 대륙 회의라는 자리를 연속으로 빠진다는 것부터 보통 일이 아니니까."
검은 마법사를 봉인시킨 그 날로부터 무려 8백년이 지난 현재의 메이플 월드에 눈뜬 영웅중에서, 이 시대의 정보를 모으는데 가장 주력했을 이가 팬텀일 것이다. 적어도 싫어하는만큼 그를 잘 알고 있는 루미너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생각되는건 두 가지다. 하나는 그 좀도둑이 제 성정 못 이기고 크고 화려한 등장을 준비하고 있는 것."
"그, 그럴싸한데."
듣고보니 팬텀이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은밀성이 생명인 괴도이면서 제복에 장신구까지 주렁주렁 달고있다는 것부터 그의 성격을 알 수 있지 않은가.
"다른 하나는…… 우리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무슨 일에 휘말린 것."
"뭐어? 팬텀이?"
"어느쪽이든 가능성은 있다."
압도적으로 전자일 것 같지만 세상 일은 모르므로 후자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보다 나는 좀도둑따위보다 검호 그가 왜 오지않는지가 더 궁금하군."
"에반 말로는 포탈을 타고 어딘가로 갔다고 하지 않았어?"
"신대륙이나 다른 차원이 아닌바에야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건 분명 문제가 생긴거다. 그라면 이번에야말로 올거라고 생각했건만."
"루미너스 넌 깨어난 이후로 그를 만난적 없어?"
"없는건 아니다만……."
사실 그가 봉인에서 깨어난 이후 처음으로 만난 동료가 검호였지만, 재회의 순간 스스로가 저질렀던 총천연색 흑역사가 덩달아 떠올라버려 루미너스의 안색은 순식간에 푸르죽죽해졌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얼굴로 말하면 설득력이 전혀 없다고."
"나중에 그를 만났을때 내가 해결해야하는 일이다. 그러니 신경쓰지 마라."
섭섭할정도로 딱 자른 대답이었지만 그가 본래 저런 성격임을 알기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말했다.
"아, 키네시스 형!"
"에반? 오랜만이야."
"오랜만이다냥!"
한편, 에반은 막 도착한 빅토리아 아일랜드 전직관과 그 수행원들을 만나고 있었다.
"응? 쟤 하인즈의 수행원들과 아는 사이였나보네."
"…… 저 망할 올백머리."
"아는 사이야?"
루미너스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붉은 왼쪽 눈이 타오르듯이 일렁였다.
"일전에 뜬금없이 별 시덥지않은 이유로 날 습격한 자식이다."
"하, 하아?"
"차원의 벽 사건의 범인과 내가 닮았다는데, 이쪽으로 넘어오면서 백내장이라도 생긴 모양이지. 아니면 머리를 다쳤거나."
그때의 일이 어지간히 짜증났는지 루미너스는 답지않게 꽤 빡친 얼굴이었다. 메르세데스는 그 이유를 습격도 습격이지만 키네시스라 불린 소년이 부분적이나마 팬텀을 닮았서가 아닐까 슬쩍 추측했다.
한편, 에델슈타인 대표로 온 레지스탕스들은 회의장을 채운 각양각색의 사람들에 상당히 당황하고 있었다.
"이거…… 여제에게 들은 것보다 더한데요."
"메, 메이플 월드의 각 지역 대표들이 모인거니까 이이, 이 정도 인파는 당연하잖아?"
"목소리 떨리고 있어 벨."
헨리테의 지적에 벨은 아니라고 외쳤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주변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금방 묻혀버렸다.
"이래서야, 우리 목적을 이루는건 고사하고 의견 내놓기도 힘들 것 같군."
"하지만 여기가 아니면 안된다. 대륙의 사람들에게 블랙윙의 악행을 대대적으로 알리고, 외부의 지원을 받지않는한 놈들을 완전히 몰아내는건 무리니까."
"정말 분하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으니."
"지그문트. 구체적인 계획이 있나?"
곰인형 탈을 쓴 남자, 체키의 질문에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지그문트가 입을 열었다.
"이 대륙 회의가 열린 목적이 뭔지 모두들 알고 있겠지?"
"당연히 알지. 여제랑 그 망할 안경 쓴 능구렁이 자식이 사전에 말해줬었잖아."
"여러 이유들이 있지만 가장 큰 이유가…… 군단장이라는 이들의 귀환때문이라고 했었지 아마?"
"그리고 군단장 중 한 명이 블랙윙 놈들의 수장, 윙마스터라고 빌어먹을 안경잡이 놈이 말했지."
지그문트는 블랙윙을 입에 담는 것마저 불쾌한지 한 차례 이를 간 다음, 주위의 레지스탕스들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이어 말했다.
"이전의 대륙 회의가 중단된 이유가 바로 그 윙마스터의 엘프 마을 습격때문이었다더군. 저쪽이 싫든 좋든 블랙윙과 윙마스터에 대해 더 잘 알기위해선 우리에게 물어볼 수 밖에 없어."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그놈들에게 시달린 우리에게 말이지?"
"애초에 에델슈타인이 이 지경이 된 이유가 망할 에레브 놈들때문인데 이젠 정보까지 갖다바쳐야하다니……."
벨은 회의장 한쪽에 아직까지 비어있는 자리를 노려보았다. 이 회의의 주최자이자 에레브의 대표들의 자리였다.
블랙윙이 에델슈타인을 점령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무렵, 탈환의 기회가 아직 있었던 그 시기에 레지스탕스는 어렵게 에레브에 손을 벌려 지원을 요청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지원하겠다고 말해놓고 오지않았고, 레지스탕스는 허무하게 블랙윙에게 제압당한 뒤 에델슈타인을 완전히 빼앗겼다.
"너희 생각대로 여기서 우리가 해야하는, 할 수 있는 일은 알고 있는 블랙윙에 대한 정보들을 토해내는 것 밖에 없어. 그러니─"
복면아래의 지그문트의 눈이 냉철하게 빛났다.
"그걸 철저히 이용하는게 마땅하겠지."
잠시 후, 회의장 입구쪽에 서 있던 기사가 우렁차게 외쳤다.
"여제님께서 들어오십니다!!"
마침내 메이플 월드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지역 대표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한대 모인 회의장은, 각자의 이상과 현실이 부딪히는 자리가 되었다.
***
키네시스side.
내가 대륙 회의라는 듣기만해도 굉장한 자리에 하인즈 님과 동행하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차원의 벽 사건의 기폭제이자 겸 증인으로 꼭 필요하다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난 고등학생이었는데 지구로 치면 국제회의 같은 자리에 한 나라의 대표도 아니고 무려 세계 대표로 가게 되다니, 굉장해졌네 나.
"한눈팔지 마라냥!"
"알았어 알았어."
메이플 월드의 여제가 기거하는 하늘섬 에레브. 처음에 섬이 떠다닌다는 말을 들었을땐 아무리 판타지 세계라도 믿을 수 없었는데, 실제로 보니 만유인력의 법칙은 어디로 갔냐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뉴턴이 봤으면 화장실에 틀어박혀 실신할때까지 울만큼 충격적인 광경이었어.
네로가 한눈팔지 말라고 했지만, 솔직히 무리였다. 각 지역의 대표들이 모인 회의장엔 엘리니아에서 본 요정들 외에 다른 수많은 종족들이 잔뜩 있어서 엄청 신기했으니까. 그들에겐 실례지만 정말 뚫어져라 보았다.
"아, 키네시스 형!"
"에반?"
퍽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역시나 그 소년이 있었다.
"오랜만이야."
"오랜만이다냥!"
[너희 둘이 어떻게 여기 왔어?]
"난 스승님의 수제자니 당연히 수행원으로 왔다냥! 그리고 키네시스는 차원의 벽 사건의 증인이다냥."
"증인이 형 한 명뿐이에요?"
"사실 그때 나랑 같이 있었던 사람이 한 명 더 있긴 한데, 정신이 너무 불안정해서 못 왔어."
최근엔 좀 나아졌지만 그래도 사이는 여전히 정신이 위태로웠기에, 이런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 왔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데려오지 않았다. 하인즈 할아버지도 그러는게 낫다고 했고.
"그런데 옆에 여성분은……?"
"아참, 이쪽은 아란 누나에요."
"안녕! 꼬맹이가 말했듯이 내 이름은 아란이고, 만나서 반가워!"
갈색 피부에 긴 은발머리를 올려묶은 상당한 장신의 여성이 시원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여자인데도 나보다 좀 더 큰 키에 두툼한 털코트를 입었음에도 두드러지는 근육질의 상반신, 한쪽 어깨에 메고 있는 도끼창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키네시스입니다 멋진 여성분."
"머, 멋진?"
"…… 그런 말 대놓고 하면 오글거리지 않아요 형?"
"응? 진짜로 멋져보여서 한 말인데?"
강하고 아름다운 여전사형은 원래 세계에서 사실상 보기힘든 유형이라 진짜 멋지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어째선지 아란 씨의 소개때부터 굳어버린 네로를 제외하고 에반이랑 아란 씨가 여러모로 말로 표현하기 힘든 표정을 짓고 있었다.
"팬텀 닮았구나 너."
"저만 그런 생각한거 아니었네요."
[같은 과야. 분명 같은 과라고.]
팬텀은 또 누구야? 아란 씨는 어쨌든 잘부탁한다고 말하고는 슬슬 아가씨가 찾는다며 인파속으로 가버렸다.
"정신차려 네로. 아란 씨 가셨어."
"냐아앙…… 내가 영웅 아란을 보게되다니, 이게 대체 뭔일이다냥."
"영웅?"
"아란 누나는 영웅이라 불리시는 분들 중 한 명이거든요."
역시 범상치않은 사람이었구나. 하긴, 이 자리에 모인 사람중에 평범한 사람은 한 명도 없겠지만. 거기다 영웅이라니.
"그녀 외의 영웅은 누구누구 있어?"
"으음─ 팬텀 씨랑 루미너스 씨, 메르세데스 님 그리고 스승님이요."
[프리드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오래전에 죽었어.]
옆에서 네로가 '에반 너 영웅의 제자였냥?!'같은 말을 하며 놀랐지만, 그보다 에반이 말한 이름중 하나가 걸렸다.
"…… 루미너스?"
"네. 빛의 수호자라고 불리시는 마법사세요."
[왜 그래? 그 남자 알아?]
알다마다. 일전에 내가 그 허연 남자로 착각하고 공격했던게 루미너스라는 사람인데. 생긴게 너무 비슷했던데다 공격할때 한쪽뿐이긴 하지만 그때 그놈처럼 눈도 새빨갛게 빛나서 진짜 그놈인줄 알았다.
나중에 네로가 날 구속 마법으로 제압하고, 어떤 금발 소녀가 다급하게 뛰어와 그를 말린 뒤 사정을 설명한 뒤에야 겨우 오해가 풀렸다만 그는 굉장히 빡친 얼굴로 꺼지라고 말했다.
"그 사람 마법사 맞지?"
"네. 굉장히 뛰어난 마법사세요."
무슨 마법사가 지팡이질을 그렇게 잘해. 빛의 마법은 염동력으로 어찌어찌 막을 수 있었지만 나무 줄기마저 쪼개던 지팡이질은 진짜 한 대 맞고 뼈가 부서졌었다고. 그때 이 세계의 마법사들은 매일 아침마다 라디오 틀어놓고 봉술 수련이라도 하는건가 얼빠진 의심까지 했었다.
"그러고보니 형 지금 마법사 협회에 머물고 있죠? 혹시 루미너스 씨를 만나셨나요?"
[그 사람 엘리니아 부근에 살고있다던데.]
"만나긴 했지……."
상당히 안좋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에반에게 대답해주려는 순간, 회의장 입구쪽에 있던 한 기사가 외쳤다.
"여제님께서 들어오십니다!!"
벌써 시간이 된 모양이다. 딱딱 절도있는 발소리들이 입구 저편에서 들려오는가 싶더니 회의장내의 기사들은 인파를 갈라 길을 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길에 들어서며 모습을 보인 여제와 그녀의 직속 기사단 단장이라는 사람들은─
"시, 시그너스?!"
"쉬잇! 조용히 해요 형!"
"잠깐만 어째서 쟤가……."
길게 내려기른 옅은 금발과 순한 푸른 눈, 선한 인상. 하늘하늘한 옷이 낯설었지만 분명 인근 신수국제고등학교의 회장인 시그너스가 맞았다. 심지어 기사단장들마저 좀 더 나이가 들어보인다는걸 제외하면 죄다 거기서 봤던 학생들이다!
이거 대체 무슨 상황이지? 우연히 닮은 사람? 생각치도 못한 상황에 어정쩡하게 주변 사람들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모두들, 이 자리에 모여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내가 아는 시그너스와 똑같이 생긴 여제는 자리에 있던 모두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지금 이곳엔 앞서 마련했던 회의에 오셨던 분도 있을거고, 이번에 처음 오신 분도 있으실겁니다. 여러분이 어느쪽에 속하시든 회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한 가지만 명심해주시길 바랍니다."
여제는 작게 숨을 들이쉰다음 말을 이었다.
"이 자리는, 이 회의는 현재 메이플 월드를 위협하고 있는 세력, 사건사고들의 대처 방안을 논의하고 또 그것들에 대항하기 위해선 화합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마련한 자리입니다. 여러분이 무슨 이유로, 어떤 사정이 있어서 오셨든 그 사실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그 말에 깨달았다. 저 소녀는 내가 아는 시그너스랑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소녀는 누가 뭐라해도 명백하게, 메이플 월드의 황제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모두 자리에 앉아주십시오."
2차 대륙 회의가 시작되었다.
***
side out.
니할 사막, 아리안트.
군단장 힐라의 준동으로 하루가 멀다하고 언데드의 습격을 받고 있는 사막의 나라는 시그너스 여제가 보내준 기사단과 모험가, 병사들의 노력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해골들이!"
"매일매일 질리지도 않네 진짜!"
"슈가! 마법 준비는?"
"끝났어요! 둘 다 이쪽으로 오세요!"
론도, 올리비아의 보호를 받으며 한참 주문을 외우던 슈가는 마침내 스태프를 휘두르며 마법을 시전했다.
"제네시─스!!"
마법의 시전어가 외쳐진지 한 박자 뒤, 장엄한 황금빛의 기둥이 스켈레톤들이 득시글거리는 사막에 일제히 내리꽂혔다.
그 성스러운 일격에 한참 그들을 애먹였던 스켈레톤들은 흔적도 남기지않고 증발했고, 그제서야 그들은 모래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진짜 지긋지긋하네 저것들."
"별로 강하지도 않는게 순 물량빨로 밀고들어와서 사람 짜증나게 하고 있어! 여기서 화살통만 몇 개째 날리는거야?!"
"아직까진 보급엔 문제가 없다지만 이 기세로 계속 이어지면 곤란한데."
올리비아와 론도, 슈가는 포션을 물대신 들이키며 숨을 골랐다. 그들은 아리안트 주민들에게 고용되어 있었기에 물자같은건 거의 무료 혹은 싼값에 구할 수 있었지만, 그것들이 아예 떨어지면 가격이 얼마든 구할 수 없었다. 화살같은 소모품류는 특히.
"그런데 테스 오빠는 언제 와?"
"대륙 회의, 그것도 2번째로 열린거니까 못해도 며칠 뒤에 올걸."
"하아? 무슨 회의를 며칠씩이나 해?"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생각 좀 해보라고. 세계를 위협하는 군단장과 검은 마법사, 몬스터, 사건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하는게 하룻만에 끝나는 쪽이 이상하잖아."
"윽……."
현재 그들 일행을 이끌던 테스는 대륙 회의에 참가한 상태였다. 모험가 대표 겸 과거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런데 테스 오빠 나이가 대체 몇이야? 검은 마법사라는 놈 봉인한게 수 백년? 못해도 그쯤 전이라고 하던데."
"듣자하니 형도 카이린 전직관님처럼 쿼터 엘프라더라고. 진짜 그만큼 살았을걸."
"그럼 다음부터는 테스 오빠가 아니라 테스 할아버지라고 불러야하나?"
"그랬다간 테스 씨 울어 올리비아……."
"틀린 말은 아니잖아? 진짜 조상님뻘 나이인데. 거기다 가끔씩 늙은이의 힘이다~ 같은 말도 했고."
그들은 테스의 나이가 엄청나게 많다는걸 알게 되었다. 이상하게 풍부한 연륜과 무슨 일이든 능숙하게 대처하든 모습에 범상치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수 백살 먹은 쿼터 엘프일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도 지금 세계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군단장들과 별 차이 없을 정도로.
"아무튼 이제 슬슬 아리안트로 돌아가자. 땡볕아래에 있으니까 쉬는게 쉬는 것 같지도 않네."
"찬성~ 더 있다간 내 피부가 다 타버린다고."
"벌써 탈만큼 탔는데 뭔 소리를 하는거야 올리비아."
"뭐얏!!"
"둘 다 진정해애……."
여김없이 투닥거리는 둘을 말리던 슈가도 내려쬐는 태양빛에 지쳤는지 헥헥거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두 사람은 다 마신 포션병을 챙긴다음 가방을 뒤적이며 마을귀환서를 찾았다. 그들이 있는 곳은 아리안트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이기만 태양빛이 너무 강렬한데다 계속된 전투로 그들은 지쳐있었다.
몬스터들과 싸우느라 애써 정리해둔 가방 안은 상당히 엉망진창이 되버려 그들이 귀환서를 끄집어낸건 몇 분 뒤, 꾸깃꾸깃하게 쳐박혀 있는 것을 겨우 발견한 뒤였다.
"아리안트에 돌아가는대로 우리가 맡고 있는 퇴치 구역 마가티아쪽으로 바꿔달라고 해볼까."
"거기는 모험가 없이도 방어 가능한 곳이잖아. 꿈 깨."
"빨리 돌아가기나 해요. 햇빛 싫어요."
제네시스를 쓴 후유증인지 포션을 마셨어도 잔뜩 지친 얼굴의 슈가를 본 론도는 곧바로 마을 귀환서를 찢으려고 했다. 더위때문에 멍한 얼굴로 모래언덕 너머를 보고있던 올리비아가 한 말만 아니었으면.
"아……? 저거 뭐야?"
"뭔데?"
"저기 저쪽에서 일어나고 있는거."
론도는 더위에 반쯤 풀린 눈으로 올리비아가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 끝을 보았다. 그리 멀지않은 모래구릉 너머로 눈아픈 황금색으로 빛나는 사막의 지평선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또 신기루겠지."
"아니야! 그거하고 다르다고. 잘 좀 봐."
"난 너처럼 궁수가 아니야 올리비아."
"그 눌러쓴 모자 좀 벗고 보라고!"
"잠깐, 뭐하는 짓이야!"
그녀는 론도의 모자를 확 벗겨 빼앗아갔다.
"내 모자 내놔!"
"나중에 줄테니까 다시 한 번 잘 봐봐. 나 혼자 잘못보고 있는지 확인해봐야 한다고."
"아 진짜……."
"특별히 버프도 써줄테니까 빨리."
올리비아의 손가락이 론도의 관자놀이를 쿡 찌르자 그의 양 눈에 녹색 선이 번졌다. 궁수들이 곧잘 사용하는 시력을 향상시키는 버프였다.
그는 인상을 쓰며 좀 전에 올리비아가 가리켰던 모래구릉 너머를 지긋히 응시했다.
"별다를 것도 없는데 뭐 그렇게 호들갑─"
짜증스럽게 이어지던 론도의 말이 끊겼다.
햇볕에 일렁이던 지평선은 일렁이는게 아니었다. 모래구름, 다수의 무언가들이 한꺼번에 이동하며 일어난 모래구름에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어, 어이 잠깐만, 저거 뭐야?"
"몬스터…… 인 것 같아."
한껏 마력을 끌어올려 시력을 향상시킨 올리비아는 드물게 굳은 표정으로 활을 잡으며 화살통을 확인했다. 척 봐도 남은 화실이 그리 많지 않았다.
"빨리 아리안트로 돌아가서 알려야해."
"결계에 기댈 생각이야?"
"당연하잖아. 지금 여기서 우리끼리 할 수 있는건 없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나선것도 있지만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아리안트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던건 태양빛을 이용한 결계덕이다. 언데드에겐 완벽히 천적이나 다름없는 그 물건이 아리안트를 지키고 있었기에 몬스터들에게서 무사할 수 있었다.
"이번엔 결계가 소용없을거야…… 잘 좀 보라고! 저 몬스터들, 언데드가 아니야!"
"하아?"
"대부분이 짐승형이야."
그녀의 말대로였다. 몰려오는 몬스터들의 대부분은 짐승형, 태양의 결계에 큰 영향을 받지않는 놈들이었다.
"설마 지금까지 언데드들만 줄창 보내온 이유가 방심시키려고 그런거였나."
"모르지. 어쨌든 이번에 저놈들이 그대로 오면 피해가 클거야."
"하 젠장. 겨우 끝났다 싶었는데."
"나, 나도 같이─"
힘겹게 일어나는 슈가에게 가방을 던져주며 론도가 말했다.
"아니 슈가. 넌 아리안트로 가. 가서 사람들에게 짐승형 몬스터들이 접근해오고 있다고 알려줘. 그러면 최소한 피해는 줄일 수 있을거야."
"하지만 너희들이!"
"여차하면 바로 몸 뺄테니까 걱정말라고. 무모하게 저것들을 쓸어버리겠다고 달려들 생각 없어."
"적당히 발목 잡다가 안된다싶으면 도망칠거야."
그들의 말에 슈가는 불안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보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 조심해."
"당연하지."
"빨리 아리안트로 돌아가 슈가."
"응."
그녀는 마을귀환서를 찢었고, 빛에 휘감기며 사라졌다.
올리비아는 시위에 화살을 메겼고, 론도는 표창을 휙휙 던졌다 받으며 손을 풀었다.
"자 그럼─"
"다시 일해야하는 시간이네."
"저것들 두 당 몇 메소 받을 수 있을까?"
"이 상황에서 도적 티 내는거야?"
"공과 사를 떠나 돈계산은 철저하게 해야한다고 다크로드한테 배워서 말이지."
시위에 메겨진 화살에 푸른 마력이 새끼줄처럼 꼬였고, 이내 선두의 몬스터 바로 앞을 향해 핑! 얕은 파공음을 내며 쏘아졌다.
그리고 화살의 발사와 거의 동시에 모래바람 기둥이 거칠게 솟구치며 싸움의 시작을 알렸다.
***
카이저side.
"어머나, 귀여운 애들이네."
녹아내리는듯한 목소리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투구를 쓰지 않았다면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그녀에게 들켰겠지.
"이 시대의 놈들은 다 보잘것 없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한가닥 하는 애들이 있었나보네."
"지금 그들을 건드리실 생각입니까."
"그럴리가. 목적은 잊지 않았어."
여인, 힐라는 길게 굽어치는 금발이 섞인 연갈색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너희들도 제 할 일 잘하라고. 실패하면 가만두지 않을거야."
"…… 물론입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망발을 지껄인 놈이 지금 내 눈앞에 있다면 그놈 혀를 뽑아버릴테다. 무죄가 아니라 무기징역이겠지. 살다살다 수 백살 먹은 마녀가 청순가련형 미녀로 변신하는 꼴을 보게되다니. 어떤 의미로는 엔젤릭 버스터보다 더하다.
어쩌다 내가 부하들이랑 여기에 파견되었는지. 마음같아선 이 자리에서 저 마녀를 죽이고 싶었으나, 실상 불가능했다.
"저 결계 꽤 귀찮네. 아리안트 놈들 언제 저런걸 설치한건지."
야간근무까지 뛰어가며 우리쪽 마법사들이 설치했다곤 죽었다 깨어나도 말 못한다.
군단장 중에서 가장 약하다는 붉은 마녀 - 힐라는 확실히 다른 군단장들에 비해선 약했다. 한때 노바족의 배신자로 제른 다르모어의 편에 붙었던 매그너스도 이 세계에서 군단장이 되었었다 했으니, 그를 평균으로 잡는다면 힐라는 약한 축에 드는게 맞았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군단장들 사이에서 약하다는 뜻이다. 그녀의 마력은 어렴풋이 보아도 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마력을 모두 합한 것처럼 많았고, 이를 이용해 부리는 언데드 군단과 각종 흑마법은 재해라고 부름에 모자람이 없었다.
"자, 슬슬 나설때야."
"알겠습니다."
몬스터들에게 용맹하게 돌진하는 기사단과 바득바득 성벽을 사수하려는 병사들,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모험가들, 개중 신성 마법을 난사하고 있는 한 여마법사가 두드러져 보이는 가운데 우리는 그 아수라장에 뛰어들었다.
마치 신을 받드는 무녀 혹은 신녀처럼 고귀하기 이를데 없는 여인과 그녀를 호위하는 기사와 마법사들이 만들어진 전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뭔 사건들이 시간 간격없이 연달아 터지니 머리가 아프네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러고보니 벌써 150화가 가까워졌네요. 기념 외전으로 뭘 쓸까 고민중입니다. ng외전은 좀 더 챕터가 쌓인 뒤에 쓸 계획이고, 일전에 썼던 ts외전을 이을까 아니면 새로운 ts외전을 쓸까. 검호와 하마가 친구가 됬다면? 이나 검호가 다른 직업이었다면? 같은 외전을 쓸까. 아니면 Q&A를 간만에? 검호입니다의 비하인드 스토리나 자잘한 설정들을 풀어놓는 것도 좋을 것 같고... 어쩌지.
@이슬고둥 - 그 만우절 외전에서 진짜와 거짓이 뭐뭐가 있을지는 비밀입니다.
@좀비라스 - 말하고 나갔습니다. 다만 최근에 돌아가질 안하서 엄청 걱정한거.
@Eluines - 검호는 조만간 또 멘탈이 갈려나갈겁니다.
@Sisre - 결과는 키네시스 패. 전투경험차가 압도적이었습니다.
@책벌레씨 - 가끔은 일상으로 스무스~
@카한Kahan - 곧 몰아칠테니 잠시 숨 좀 골라야죠.
@레시코 - 루미너스가 싸운 사람은 키네시스. 이유는 하마로 착각해서. 글고 세피는 하마를 지나가듯이 만났었지만 별다른 인연을 맺지 않았습니다.
@Legendssj2 - 참고로 다음 타자 동네북은 팬텀과 데몬.
@건전한독자 - 딱 중학생 평균에서 조금 작습니다.
@라그실 - 저도 일러스트 다시 확인해봤는데 회색이더군요. 그래서 수정했습니다.
@마서 - 싫은 이야기들만 모았으니까요... 는 구라고 소제목은 대체로 별 생각없이 짓습니다.
@Yoontlemin - 전 남녀평등 주의자입니다. 남캐든 여캐든 필요하면 죽입니다.
@마도사지망생 - 그래도 희망은 있어요. 제가 해피엔딩을 좋아한다는거죠!
@리세니안 - 미래의 영웅즈 리더인데!
@소라루 - 가끔은 이런것도 좋잖아요?
@익재공 - 진짜 유전자의 문제였던건가(두둥)
@케르닉 - 사이가 저기가면 진짜 문제가 생길거라서 아예 안감.
@여행자구름 - 의도한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됬습니다.
@ReFrante - 이 글에서, 이 시기에 보기드문 평화로운 화였음.
@노란우산s - 진짜 개판은 연합 창설 이후!
@x흑란x - 나중에 팬텀은 루미한테 극딜당할듯.
@대어의예감 - 그보단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는이상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맞음.
@갓타치 - 따지고보면 클론이니까요!
@리아카에린 - 데미안이 신수를 죽인건 그때 연합이 루타비스에서 구출한 알리샤가 신수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루타비스 사건이 먼저라는 뜻.
@칼크래프트 - 유전자의 힘으로 외모와 재능을 얻었지만 은원관계도 물려받음.
@Blake117 - 적절한 표현입니다.
@Jaiha - 늦게 대답해서 죄송합니다! 제발 올려주세요!
@Ascaron - 승자는 루미! 영웅 짬밥이 더 깁니다.
@류동지 - 구체적으로 안정해놨지만 군단장 하나 규모쯤? 될겁니다 아마.
@적현월 - 그리고 육탄전으로 꺾어버림.
@melsi - 음, 무엇이 알 수 없다는거죠?
@SourcesMoon - 절 백합로리콘으로 만들지 말아주세요.
@Ratios - 그보단 옴 파탈쪽이 아닐까요.
@socns - 아 그게, 질문하신 화수 찾으려고 잠깐 비워놨다가 그대로 올려버렸...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