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호입니DA-150화 (150/208)

<-- 150화 기념 외전 - IF:달밤의 추격전 -->  하얀 마법사side.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검호."

"뭐냐."

나는 입밖으로 나오는 한숨을 애써 삼키며 물었다.

"우리 왜 포위되어 있는거죠?"

"내가 현상수배범이니까."

"……."

뭔가 할 말이 많은데 한 마디도 안나왔다. 아 그래 저 사람 현상수배범이었지. 페어리들 지키다 인간들한테서 거액의 현상금이 걸려 요정 기사라는 비꼼 가득한 별명까지 붙은게 그였다. 정작 그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는데. 병신을 좀 만들긴 했지만.

"무기를 버리고 양 손 들어! 수, 순순히 투항하면 나쁜 꼴은 면할거다!"

이미 충분히 나쁜 상황입니다만. 정작 외치는 대장으로 추측되는 이도 인상을 쓰고 있는 검호와 눈이 마주쳤다가 겁을 먹고 부하들 뒤로 몸을 빼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그는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듯 검병에 손을 올리며 내게 물었다. 잔뜩 내려앉은 목소리가 마치 일대를 포위한 병사들을 썰어버릴 것처럼 살벌했지만, 실상 진짜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굳어버린 걸 알기에 헛웃음만 나왔다.

하필 시내 한복판에서 아리안트 수비대에 포위당하다니. 평소에 현상금 사냥꾼들 처리하듯이 손을 쓰기엔 장소가 안좋다. 그렇다고 저들에게 투항하면 검호는 감옥에 갈테고…… 그라면 투옥된다해도 별 일같은건 안생기겠지만 그렇다고 갇혀도 된다는건 아니다.

"제가 한 번 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몇몇 병사들이 저를 알아보고 '설마?'라던가 '혹시 저 분은?'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제 유명세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럴땐 유용하게 쓸 수 있다.

나는 병사들의 대장에게 다가갔다.

"잠깐 할 말이 있는데, 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가까이 오지 마라!"

"…… 아니, 잠시 무기를 내려라."

뒤로 빠져있던 대장은 긴가민가하는 얼굴로 저를 보았다.

"실례지만 당신이 그 하얀 마법사입니까."

"예. 보시다시피 제가 하얀 마법사라 불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일단 어째서 당신이 그 범죄자와 함께 있는건지 말씀해주십시오. 만약 협박이나 신변의 위협을 받고있는거라면,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 왜 당연히 협박당하고 있을거라 생각하고 있는건가요. 검호가 그렇게 험악한 얼굴도 아닌데. 분위기가 사람 절단낼만큼 위험하긴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으니 걱정마세요. 그리고 제가 그와 함께 있는 이유는 그가 제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예……?"

"그가 현상수배범인건 저도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무언가 악의가 있어서 사람을 해친게 아닙니다. 이에 대해선 나중에 자세히 설명해드릴테니, 지금 그를 잡아가지 말아주십시오."

내 말에 병사들이 술렁거렸다. 뒤에서 검호가 너무 뻔뻔한거 아니냐고 중얼거리는게 들렸지만 무시했다. 당신 좋으라고 하는 일인데 왜 당신이 투덜거려요?

"하, 하지만 그건─"

"혹여나 그가 위험한 일을 할까봐 염려된다면 걱정마십시오. 제가 잘 막을테니까요."

"누가 누굴 막는다는거냐."

이번에도 뒤에서 들려오는 어이없다는 목소리를 귓등으로 넘겼다. 다 되가는데 분위기 초치지 마세요 검호.

"뒷감당 역시 제가 할테니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으음…… 알겠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수비대에 와서 타당한 설명을 해주셔야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병사들이 물러났다. 일단 당장의 급한 불은 껐군. 하지만 병사들이 물러났음에도 주위에 몰려있던 인파는 여전했기에 - 오히려 나의 존재에 사람들이 더 몰려오고 있었다 - 나는 그와 함께 텔레포트로 자리에서 벗어났다.

"후우! 이제 좀 숨이 틔이는군요."

"너 대체 얼마나 네임드인거냐."

"예? 음, 아마 직위만 없다뿐이지 고위 귀족급일겁니다."

엘린 숲에 가기전엔 한 나라의 왕과도 독대한적 있었다. 그래서 병사들의 대장도 제 말에 검호를 잡지 않고 물러난거겠지. 귀족이 그를 보증하는것과 거의 같으니까. 내 말에 검호는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일단 숙소부터 잡고, 그 다음에 수비대에 가서 자세한 설명을 하러갈까 하는데 어떻습니까?"

"그게 좋겠네. 그런데 다시 시내에 갔다간 아까처럼 사람이 몰려들거 같은데."

"꼭 시내 한복판의 여관일 필요는 없죠. 아리안트에 오래 있을것도 아니니 적당히 싼 곳에 잡시다."

"…… 5성급 호텔같은데서만 잘 것 같이 생겼으면서 의외구나 너."

5성급 호텔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뉘앙스로 봐선 고급 숙소를 뜻하는 모양이다.

"잠자리를 따졌으면 애초에 엘린 숲에 오래 머물지도 못했죠. 아무튼 다시 이목이 쏠릴지도 모르니 이번엔 마법을 쓰겠습니다."

"알았다."

가벼운 환영 마법으로 얼굴을 바꾼뒤 우리는 숙소를 찾으러 거리로 갔다. 그러나 마땅한 곳을 찾을 수 없었는데, 급한대로 인적이 드문 곳으로 텔레포트했는데 알고보니 빈민가 쪽이었기 때문이다.

좀 전에 지났던 활기찼던 시내와는 다르게, 모래바람에 다 쓸려갈것 같은 낡아빠진 천막과 금이 쩍쩍 간 건물들에 생쥐처럼 모여사는 사람들의 모습에 가슴 한쪽이 갑갑해졌다.

"아리안트의 빈부격차는 원래 이렇게 심하나?"

"옛날엔 이렇지 않았는데…… 귀족들의 수탈이 더 심해지고 있다는 뜻이겠죠."

애초에 급한대로 쓴 텔레포트라 장거리로 이동하는건 무리였다지만 빈민가와 시내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않았다. 과거보다 더 가까워졌다는 말인데, 즉 빈민가가 더 넓어졌다는 뜻이다.

"아리안트마저 이 지경이라니, 세상이 어디로 치닫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또 궁극의 빛이 어쩌고 하지는 마라."

"안합니다. 저는 이제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바꾸기로 결심했으니까요."

벽을 뛰어넘어 궁극의 빛을 손에 넣고, 완전한 신의 도시를 이 세상에 구현하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단 한 번에 바꿀 수 있을만큼 세계는 만만한게 아니고, 그런 짓을 했다간 얼마나 큰 부작용이 생길이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벽의 뒤에 내가 바라는 것이 있을거라는 확신이 존재하지 않았다.

"다행이네. 궁극의 빛에 대해 말할때의 넌 무슨 약팔이하는 것 같았으니까."

"잠깐만요, 그건 좀 심한데요."

"아니면 사이비 종교 교주같다고 해야하나."

"절 그렇게 보고 있었습니까?!"

"니가 예전에 어땠는지 잘 떠올려봐라."

나는 앓는 소리만 낼뿐 변명하지 못했다.

"심지어 미인계로 에피네아 여왕님까지 꼬셔대는걸 봤을땐 이놈 대체 뭐하는 놈인가하는 생각밖에 안들었다."

"그건 딱히 의도한게 아니었습니다."

"하아?"

"솔직히 제 얼굴에 안넘어오는 여자가 더 드물지 않나요?"

검호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것처럼 멈춰섰다가, 고개를 돌려 토할것같은 표정으로 저를 보았다.

"…… 너 니 입으로 그런 말 하면 찔리지도 않나?"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않습니까."

"한 대 때리고 싶으니까 그런 말 하지마."

"하하, 그건 좀 무섭네요."

검사로서 초일류인 검호의 육체능력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버린지 오래니까. 검이 아닌 주먹이라도 한 방만 맞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즉사감이다. 물론 말은 저렇고 실제로 저를 때릴리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어쨌든 가벼운 농에 무겁게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풀렸다.

잠시 후, 멀리 떨어지지않아 빈민이 아닌 사람들이 오가는게 보였다. 빈민가의 끝에 다다른 것이다.

"그런데 수비대에게 날 뭐라고 설명할 생각이냐."

"일단 사냥꾼들과 싸운건 정당방위가 있었고, 에피네아 여왕과의 거래나 입장관계도 있었으니 그런 것들을 설명할겁니다. 저 사람들마저 페어리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면 좀 곤란하겠지만요."

"나한테 현상금 건 놈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건지……."

"글쎄요. 제가 들은것 중엔 미색있는 요정 기사를 잡아서 손에 넣고 싶다는 것도 있었습니다."

검호는 썩은 사과를 베어문 것 같은 얼굴로 '미친'이라고 중얼거렸다. 현상금을 건 귀족들의 면상을 직접 보게되면 검을 뽑아들지도 모르겠다.

"사람 설득하는거야 제 전문이니 걱정마세요. 당신은 중간에 흥분해서 기물파손으로 사람 협박하지 않도록 주의하시면 됩니다."

"그건 좀 힘들지도 모르겠는데."

"노력해야죠."

어째서 그가 제 힘을 한숨나올만큼 못 조절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이는 몹시 조심해야하는 일이다. 만약 겨우겨우 설득했는데 힘조절 하나 잘못해서 피해가 발생하면 노력이 전부 수포로 돌아가는게 아닌가.

"일단 최대한 인상 펴세요. 그것만으로 반은 갑니─"

"오우, 죄송합니다."

퍽소리가 나며 몸이 뒤로 밀렸다. 말하면서 걷다 어느새 대로변에 들어선걸 모르고, 지나가던 누군가와 부딪힌 것이다. 그가 타박했다.

"앞 좀 똑바로 봐라."

"저답지않게 실수했네요. 아무튼 이제 방을 잡으러……."

여관이 보여 품 안쪽의 지갑에 손을 뻗은 순간 그대로 굳었다.

아. 정말 답지않게 실수했다.

"검호. 아까 부딪힌 사람 어디로 갔는지 기억합니까."

"지금 건물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다."

"당장가서 잡아오세요."

들고있던 지팡이로 한 차례 땅을 찍자 소매치기범이 있을 모퉁이 뒤로 눈부신 섬광이 터지며 비명소리가 울렸다.

"뭘 한거냐?"

"지갑에 걸어둔 방범 마법을 쓴것 뿐입니다."

"…… 소매치기 당했나."

"포박 마법도 같이 걸어놨으니 아마 꽁꽁 묶여있을겁니다."

느닷없이 터진 빛에 무슨 일인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지만 검호가 앞장서니 마법이라도 쓴것마냥 쫙 갈라졌다.

"악! 뭐야 이거! 누가 이거 좀 풀어줘!"

빛의 밧줄에 묶여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남자가 보였다. 어설프게 감은 낡은 터번과 거적에 가까운 옷, 심하게 탄 피부와 기름이 잔뜩 낀 머리까지. 어떻게 봐도 빈민이었다.

"걱정마시죠. 곧 풀어드리겠습니다."

수비대에 끌고간 뒤에 말이지. 내가 남자의 근처에 떨어진 지갑을 줍는동안 검호는 소매치기범을 휙 어깨에 들쳐멨다.

"젠장 니놈 마법사였냐!!"

"이제라도 알았으면 반성하세요."

"운도 지지리 없군."

하고많은 이들중에 저를 타겟으로 잡은걸 보면 확실히 이 남자는 운이 없었다.

"마법사면 애초에 지갑같은거 도둑맞지 말란말이야!"

"훔친 입장에서 할 소리가 아닙니다만."

"근데 딱히 틀린말은 아닌것 같은데. 너 도난방지 마법같은거 못 쓰나?"

"쓸 줄 압니다만, 이런 소액이 든 지갑에 일일이 그런 마법을 쓰는건 좀 귀찮아서 방범 마법으로 끝냈습니다."

"소, 소액이라고? 야 이 안에 든 돈이 얼마였는데……!"

1억 메소 밑은 다 소액 아닌가. 마법 연구라는게 돈이 매우 많이 드는지라 제 금전감각이 일반인과 다르다는건 알지만 이 지갑에 돈은 그렇게 많이 들어있지 않은데.

"훔친 입장이면서 말이 많군요. 아무튼 마침 수비대에 갈 계획이었으니 겸사겸사 넘기겠습니다."

"아아아, 잠깐, 잠깐만요! 저는 이대로 잡히면 곤란하다고요! 저한테는 병든 노모와 제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동생들이─"

"왜 갑자기 존댓말이냐."

"당신 말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별로 상관없습니다만."

소매치기범의 남루한 차림새로 보아 그는 빈민으로 추측되었고, 어쩌면 이번 일은 생계형 범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절도에 대한 대가는 확실하게 받아야한다. 그에게 진짜로 수많은 가족이 딸려있었다한들 그게 범죄를 저질러도 된다는 뜻은 아니니까.

순전히 동정을 사기위했던 것인지 물기 가득했던 노란 눈은 그새 표독스러워졌다.

"…… 샌님같은 얼굴이면서 더럽게 냉정하네."

"공과 사는 확실히 하는것 뿐입니다."

"앞이나 봐라."

잡담을 나누는동안 어느새 수비대에 도착했다. 앞서 걸어두었던 환영 마법을 풀자 경비를 서고 있던 이들이 저를 알아보며 급히 허리를 숙였고, 검호는 그들에게 소매치기범을 넘겼다.

"이놈은 왜……?"

"손버릇이 나쁜 놈이다."

"지금 대장분은 자리에 있으신가요."

"아 예 계십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검호의 말에 눈치를 챘는지 병사들은 소매치기범을 데리고갔으며, 우리는 수비대 건물에 들어섰다. 건물 안에는 수비대 대장과 함께 어디 귀족가의 하인으로 추측되는 이가 있었다.

이제부터 진짜겠군.

***

검호side.

하얀 마법사가 사람 설득하는 것에 - 좀 막말하면 홀리는데 - 일가견있다는건 처음 봤을때부터 알았지만 슬슬 뭔가 굉장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가리 파이팅이라 하기엔 사용하는 단어라던가 어조같은게 전혀 험하지 않고, 오히려 이건…….

'세뇌하는 것 같네.'

분명 쟤가 하고있는 일은 나를 위해 내가 무죄임을 열심히 설득하는거였는데, 얘기가 길어지니 그걸 넘어서 아예 세뇌하는 수준에 이르러버린 것이다. 역시 약장수. 클래스는 어디 안가는구나.

"─하게 되서 현상금을 없애주는대신 그들의 부탁을 하나 들어주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뭘 어떻게 구워삶은거냐 너."

"예? 옆에서 다 보지 않았습니까."

봤는데도 납득이 안되니까 묻잖아. 타이틀 '현자' 착용시 설득력 +5000 뭐 이런것도 아니고, 사람의 언변이 어떻게 저렇게 좋을 수 있냐고. 진짜 사이비 종교 교주같잖아.

"그래서 우리가 들어줘야한다는 부탁이란게 뭐지."

"간단한 경호입니다."

"경호?"

뭘 지키라는건가.

"어떤 보석을 지켜달라더군요."

"보석이 몬스터라도 끌어당기나."

"몬스터는 아니고, 반짝이는걸 매우 좋아하는 까마귀에게 눈도장이 찍혔답니다."

까마귀? 내가 아는 그 까마귀 말하는건가 설마.

"저쪽에서 실력좋다는 용병까지 고용했다니 쉽게 끝날겁니다. 일이 끝날때까지 저희에게 방을 내준다하니 숙소를 미리 잡지않은게 다행이 됬네요."

진짜 조류따위에게서 보석 지켜달라고 우리 둘한테 부탁한거면 그 귀족 대가리는 조류 이하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것 같다. 뇌가 우동사리도 아니고. 하지만 여긴 메이플 세계니 까마귀의 모습을 한 몬스터일지도 모른다.

"저희가 지켜야한다는 보석은 귀족측에서 최근 거상 핫사르에게 구입한 '푸른 눈물'이라는 물건이랍니다. 이름대로 푸른색이 매우 아름다워 벌써 그들 사이에서 이름높다는데, 그때문에 까마귀에게 찍혀 얼마전에 깃털과 예고장을 보냈다네요."

"예고장? 새가 글을 쓸 수 있나?"

"…… 검호. 혹시 제가 말한 까마귀를 진짜 조류 까마귀로 생각하고 있는건 아니죠?"

아니었나. 동물까지는 아니고 엘리트 몬스터같은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에요! 까마귀라는건 괴도 레이븐을 가리키는 거라고요!"

"아?"

그런데 괴도 레이븐이라고? 메이플에서 유명한 괴도라면 팬텀밖에 생각 안나는데. 으음, 그러고보니 팬텀의 칭호중에 '괴도 레이븐의 제자'같은게 있었지. 지금 시대상 팬텀이 아니라 스승인 레이븐이 날아다니는 때인 모양이다.

"비유를 했다지만 진짜 까마귀로 알아듣다니. 검호 당신은 정말…… 푸흡."

"웃지마."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는 놈의 모양새에 절로 인상이 써졌다. 모를수도 있지 왜! 레이븐은 인게임에 나온적도 없는 설정상의 존재였을뿐인데 이름 듣고 바로 떠올리면 그게 이상하잖아!

"레이븐은 제작년부터 이름날리고 있는 괴도입니다. 주로 부패한 귀족들의 보석을 노리는데, 훔치러 가기 전에 까마귀 깃털과 어떤 보석이 타겟인지 적은 예고장을 미리 보내는 독특한 습관이 있습니다."

"괴도 키드도 아니고 뭐야 그거……."

"키드는 또 누굽니까? 처음 듣는 이름인데."

"대충 넘겨. 그래서 레이븐이 어쨌다고?"

"아아, 여태까지 예고장을 받은 귀족은 그를 잡거나 처치하기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지금껏 레이븐에게 보석을 도둑맞지 않은 이는 없답니다. 100% 성공했다는 말이죠."

거참 쓸데없이 뛰어나네. 그 능력을 도둑질말고 다른 곳에 썼으면 더 나았을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부패귀족 엿먹이는 것도 좋지만 다른 괜찮은 용도가 있지 않았을까.

"이번엔 실패할테지만요."

"자신만만하군."

"당신과 제가 나서는데 못 막을리가 없잖아요?"

그랬다. 아무리 100% 성공률을 자랑하는 괴도라한들 이번 상대는 무려 현 시대 최고의 마법사인 하얀 마법사. 상대가 나빠도 한참 나쁘다.

"검호 당신은 힘조절 잘못해서 저택 박살내는 사고같은거 치지마세요."

"아무리 나라도 그런 짓은 안해."

"얼마전에 현상금 사냥꾼들과 싸우다 마을 상점가 한복판에 새로운 도로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 그때 그건 실수였어."

자다가 사냥꾼들에게 습격당하는 바람에 급하게 검을 휘둘렀는데, 무슨 검기가 맵병기처럼 날아가서 식겁했었다. 다행히 밤이라 인적이 없었고, 하얀 마법사가 대신 그 일대를 고침으로 사건을 무마시켰다.

"선불격으로 현상금은 이미 지워졌지만, 저번처럼 막 부수면 원점으로 돌아갈지도 모르니 조심하세요."

"알았으니까 그만해."

니가 내 엄마냐.

우리는 얼마 않있어 경호를 부탁한 귀족의 저택에 도착했다. 오늘 하루종일 여기저기 많이도 돌아다니는구나. 미리 말을 들었는지 경비병은 우리에게 간단한것 몇 가지를 물어본다음 대문을 열어주었고, 저택에 들어선 순간 지나온 모래날리는 거리와는 완전히 다른 별세계가 펼쳐졌다.

담과 함께 정원을 빙 두른 나무, 투명한 물이 솟구치는 분수, 금방이라도 살아날 것 같은 동물과 몬스터의 조각상들이 저택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서 놓여져 있었고, 그 길 끝의 저택은 화려하기 짝에 없는 외관을 자랑했다.

"…… 여기 왕궁 아니지?"

"왕궁은 이거보다 더합니다."

하얀 마법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아리안트가 사막의 왕국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바닥에 깔린 벽돌 사이로 머리를 내민 연한 녹색의 생명력은 앞서 지나온 빈민들의 그것보다 생기가 넘쳐,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하얀 마법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귀족들이 부를 과시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아리안트의 귀족들은 이렇게 물과 나무로 부를 과시합니다."

"무슨 의미야."

"'나는 이렇게 물을 펑펑 쓸 수 있을만큼 돈이 많다'는거죠. 사막에서 물이 얼마나 귀한지는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미친놈들."

순간 레이븐을 막지말고 그냥 놓칠까 생각했다. 이런 막장 새끼들을 엿먹여주는 좋은 놈이잖아.

이 땅의 식물들은 물이 아니라 피를 마시며 자라고 있었다. 사람의 피를.

"이것도 모자라서 메이플 월드 여기저기서 보석들을 긁어모으고 있으니, 정말 어떻게 될까 걱정스럽군요."

"왜 니가 세계를 바꾸겠다고 했는지 알겠다."

"하지만 그런 극약처방은 지금의 세계가 감당하지 못해요. 그걸 알았기에 포기했습니다."

나는 그의 결말을 알았기에 그를 막았다.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걸 보면, 그라는 사람이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갔는지 한 편으로 이해가 되서 속이 쓰렸다.

"우리 꼭 레이븐을 막아야 하나."

"저도 이 꼴을 보니 망설여지긴 합니다만, 이번만은 어쩔 수 없습니다. 대신 다음부터는 무조건 놓쳐줍시다."

"알았다."

저택으로 가는동안 하얀 마법사는 괴도 레이븐이 도둑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꽤나 인기있다고 말했다. 인기있을만 하네. 나라도 응원하겠다. 그래도 지금 우리는 레이븐을 막아야하는 입장이니 어떻게 보석을 지킬까 이래저래 이야기했고, 그러던 중 불쑥 누군가가 다가왔다.

"당신들이 하얀 마법사와 요정 기사인가."

"그렇습니만, 당신은 누굽니까?"

"내 고용주가 너희를 데려오라고 했다."

고용주? 우리한테 부탁을 한 귀족을 말하는건가. 잠깐 그럼 이 사람은…….

"당신이 저희와 함께 일할 용병분이신가요?"

"그렇다. 따라와라."

되게 딱딱하네 저 사람. 손발이 잘 맞을까 몰라.

용병은 의외로 예쁘장한 얼굴이었지만, 그 얼굴에 어울리지않는 - 솔직히 꽤 깨는 - 낮은 목소리를 갖고 있어 갭이 상당한 사람이었다. 주황색에 가까운 밝은 갈색 머리는 막 잘라 정리했는지 길이가 들쭉날쭉했고, 빛이 바랬지만 퍽 튼튼해보이는 가죽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 왠지 낯이 익은데 기분탓인가.

***

용병side.

설마, 이런 곳에서 만날줄이야.

얼마 전 거상 핫사르에게 들은 하얀 마법사란 남자가 아리안트에 와있을줄은 몰랐다. 공교롭게도 그를 찾으러 가기전에 잠시 돈 좀 벌려고 받은 의뢰지에 오다니.

직접 만난 하얀 마법사는 이름대로 온통 새하얀 남자였다. 긴 백발에 때묻지 않은 흰 로브, 아리안트 인들에게서 볼 수 없는 새하얀 피부까지. 들고있는 지팡이마저 무슨 나무인지 보석을 제외하면 하얬다.

'거기다 요정 기사까지 옆에 있다니.'

나는 용병들 사이에서 은연중에 퍼진 요정 기사(Fairy Knigh)에 대한 악명을 떠올렸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엘린 숲 인근에서 요정들을 잡아 한 몫 챙기려는 수많은 사냥꾼과 밀렵꾼, 용병들의 대다수를 단신으로 때려잡아 반병신으로 만들어놓고, 숲 밖에다 쓰레기처럼 내다버리며 숲에 들어오지 마라고 경고함으로 그 일대에서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잡은 남자. 지금은 대결계가 설치되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는데 하얀 마법사와 함께 있었을 줄이야.

거기다 악명과 어울리지 않게 여자같은 얼굴이라니. 심지어 나보다 더했다. 아무튼 이번 의뢰와 함께 핫사르에게 받은 의뢰까지 처리하면 되겠군.

"저희가 머물 방이 여기입니까?"

"예. 부탁하신대로 두 분이 함께 쓰시면 됩니다."

"우리가 지켜야하는 보석이 있는 곳은 어디지."

"짐을 정리하는대로 즉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꽤나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로 보아 두 사람은 근처의 방을 받은 모양이다.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막 방을 나가려는 순간, 이어서 대화가 들려왔다.

"저희말고 고용된 용병분은 어디계십니까."

"저쪽 복도의 왼쪽 2번째 방에 머물고 계십니다."

"그럼 실례지만 지금 용병분을 불러주실 수 있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럴 필요없다."

이미 그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으니까. 놀란 시녀를 뒤로하고 내가 나타난 것에 조금도 놀라지 않는 하얀 마법사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날 부른거지."

"레이븐을 막기위해 이런저런 함정들을 설치할 계획입니다. 어떤 것들이 설치하는지 같이 일할 당신도 알아야 하니까요."

"그런 이유라면 알았다."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빛의 마법사라는 그의 마법을 볼 수 있는건가.

이어서 하녀는 '푸른 눈물'이 있는 방을 안내했다. 사실 내가 그들보다 먼저 왔었기에 이미 와본적 있었지만, 방에 들어서며 눈에 들어온 그것만은 다시보아도 소리없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왜 괴도 레이븐이 이 귀족의 하고많은 보석중에 저것을 훔치겠다 했는지 납득이 갈 정도로.

"저것이 '푸른 눈물'입니다."

"호오……?"

"굉장하네."

방 중앙에 놓여있는 튼튼한 유리케이스, 그 안에는 눈물 모양의 보석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눈물안에 세상 모든 푸른색이 담겨져 있었다.

칠흑에 가까운 남색, 햇빛에 반사되는 수면같은 백색,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옥색과 청량감이 느껴질만큼 시원한 하늘색, 오묘한 바다색까지. 그 외에 표현하기 힘든 온갖 색들이 한데모여 '푸른색'이 되었다.

"저 보석 어디서 산출된거죠?"

"'푸른 눈물'은 심해에서 우연히 발견한 원석을 수년동안 정제하고 세공한 것입니다."

"원석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다른 가문의 사람들도 저것을 구하기위해 사람을 풀었지만, 같은 원석은 결국 나오지 않았습니다."

"보석치고는 품고있는 마력이 굉장히 이질적인데……."

마법사인 그는 보석의 아름다움보다 저것이 품은 마력에 더 관심이 있어보였다.

"모쪼록, '푸른 눈물'을 잘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주인님이 무척 아끼는 물건이니까요."

하녀는 깊히 허리를 숙이며 부탁했다. 아무래도 보석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저 하녀가 제일 먼저 모가지당하는 모양이군. 비유적이든 물리적이든.

"걱정마세요. 반드시 지켜드리겠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함정 설치는 언제할거냐."

"지금 할겁니다. 모두 벽쪽으로 물러나주세요."

하얀 마법사는 방 중앙으로 걸어간 뒤 가볍게 지팡이로 땅을 몇 번 찍었다. 그러자 빛의 선이 마치 뿌리를 뻗듯 바닥에 퍼졌고, 이어서 담쟁이처럼 벽을 타고 천장까지 채웠다. 그 광경에 옆에 있던 하녀는 꽤나 놀란듯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평생 칼만 휘둘러온 나로선 지금 그가 쓰고있는 마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건 그의 실력이 통상의 마법사를 훨씬 능가했다는거다.

그는 이미 궁극의 빛을 손에 넣은걸까.

***

보석이 있는 방에 보안 마법을 거는게 끝난 후, 핫사르의 의뢰를 완료하기위해 하얀 마법사에게 찾아갔으나 두 사람은 고용주 - 이 저택의 주인인 여귀족에게 불려가있었다.

다행히 내가 찾아갔을때 두 사람은 이미 나오고 있어서 바로 말을 걸려고 했는데─ 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 괜찮나 너."

"별로 괜찮지 않습니다. 이번 일만 아니면 다시는 만나고싶지 않은 여자였습니다."

"역시 그런가."

"당신한테 현상금을 건 이유가 '미색있다는 요정 기사를 손에 넣고싶어서'일때부터 알아봤지만 정말이지……!"

두 사람은 어째선지 꽤나 격양되어 있었다.

"그 여자가 검호 당신을 어떤 눈으로 봤는지 압니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뭔가 오싹한 시선이었다."

"오싹할만하죠! 정욕에 불타고 있었다고요!"

쿨럭! 아 잠깐만, 사레가.

"마음같아선 그 자리에서 노화 저주를 쏘고 싶었습니다. 귀족이고 나발이고 진짜, 좋게 끝내려고 웃으면서 넘어가니까 주제모르고 추파던지는 꼴이 아주 그냥……!"

"일단 진정해라."

"당신 일인데 왜 그렇게 무덤덤합니까?!"

"…… 아무리 그래도 여자를 때릴 순 없잖아."

내가 주먹질하면 원터치 양악수술이 된다고. 그렇다고 검을 들기엔 내가 짜증나. 요정 기사의 말에 하얀 마법사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고용주가 요정 기사에게 더러운 손을 뻗쳤다는 소리로군. 그래서 그와 친밀한 사이 - 로 추측되는 - 인 하얀 마법사가 화가 난건가. 의외로 인간미 있는, 아니 그보다 보통 사람들의 흔한 반응이라 되려 놀랍다.

"여자가 아니었으면 때렸을겁니까?"

"중년 남자가 시커먼 흑심 드러내며 추파던지는데 가만히 있었을리 없잖아. 거기다 난 이성애자라고."

"아, 그러고보니 검호 당신 취향이 어떻게 됬죠?"

"당연히 큰 쪽이다."

잠깐만 얘기가 어디로 가고있는거지. 지금 말하는 사람들이 내가 아는 그 둘 맞나.

"그건 너무 단순하잖아요. 큰 것만 따지면 아까 그 여자도 포함되는데."

"얼굴에 가죽 몇 겹을 뒤집어 쓴 것같은 떡화장한 여자따위 논외야. 아무리 내가 연상 취향이라도 그건 아웃이라고."

"나이까지 따졌습니까?"

잠시 나가서 산책 좀 하고올까. 환청이 들리는 것 같은데.

"기왕이면, 인거지. 너무 많은것도 싫지만."

"하긴. 그 여자 검호 당신보다 3배는 나이가 많아보이긴 했죠."

"그러는 넌 연하쪽 취향이었던가?"

"아니요. 전 나이에 대해선 차이가 너무 크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리고 작아야하고?"

"전 글래머보다 슬렌더쪽이 더 좋은거 뿐입니다. 무조건 작은거 밝힌다고 매도하지 말아주세요."

…… 현자도 사람이였군.

"그게 아니더라도 넌 눈이 굉장히 높잖아. 외모는 둘째치고 무슨 지적 수준까지 따지냐."

"같이 대화 몇 시간 할 수 있는 정도를 바라는게 그렇게 과했습니까?"

"현자와 오래 대화할 수 있는 여자가 어디 흔할것 같나."

이, 일단은 본인들이 맞는 것 같은데 말을 걸기 심히 뭐해졌다. 그렇게 그들이 지나가는걸 떨어져서 뻘쭘하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요정 기사가 이쪽을 보았다.

"거기서 뭘 하고 있는거지."

"아, 나는 그러니까,"

"혹시 다 들으셨나요?"

"고의는 아니고 그냥 지나가다─."

하얀 마법사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가 잘게 웃었다. 화내지 않는건가? 그가 느리게 다가왔다.

"이름은 아직 듣지 못했으니 편의상 용병 씨라고 부르겠습니다. 실례지만 용병 씨?"

"무, 뭐냐."

"당신의 기억을 1분정도 지우겠습니다. 걱정마시죠. 부작용같은건 없습니다."

"야 진정해. 지팡이 내려."

"제 실력은 의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레드썬 마법 한 방이면─"

그날 난 소문은 믿을게 못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었다. 문제가 있는 사람은 요정 기사가 아니라 저쪽이었나. 이후 다른 사람에게 절대 발설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어찌어찌 풀려났지만 여러모로 굉장한 경험이었다.

거기다 핫사르의 의뢰는 어느새 반쯤 잊혀져버려 또 다시 찾아가야 했는데, 이번엔 요정 기사만 방에 있고 하얀 마법사는 없었다.

"당신인가. 무슨 일이냐."

"하얀 마법사에게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는데, 그는 어디있지."

"잠시 밖에 나갔다."

"산책하러 간건가?"

"아니. 이 저택의 정원은 보기만해도 불쾌해서 거기서 산책할 생각따위 없을거다."

하기사. 이곳 귀족의 부가 어떤식으로 쌓였는지 생각하면 결코 좋게볼 수 없겠지.

나는 그가 돌아올때까지 여기서 기다릴까 망설이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는 요정 기사를 보다 물었다.

"당신은 하얀 마법사와 친한가?"

"물론. 친구니까."

"친구?"

"엘린 숲에서 같이 지내다가 그렇게 됬다."

그래서 그렇게 스스럼없이 대화했던건가.

"하얀 마법사는 어떤 사람인지 말해줄 수 있나?"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봐도좋을 면을 오늘 하루동안 다 본터라 여러모라 혼란스러운 차다. 그와 친한 요정 기사라면 분명하게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흠…… 그는 굉장히 뛰어난 마법사다. 지식도 풍부하고, 언변도 좋아 사람의 호감을 쉽게 사지. 현자란 칭호에 정말 잘 어울린다고 해야하나."

"그것뿐인가?"

"아니. 공적인 자리에서 대하면 저렇다는거고, 사적으로 보면 뭐……."

요정 기사는 시선을 돌리며 말끝을 흐렸다.

"개판이지."

"뭐?"

"솔직히 말해서 생활력이라던가, 신체능력이라던가, 마법이랑 얼굴을 빼면 남는게 과연 있기는 할까 진심으로 의문이 들만큼 걱정스러운 놈이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아리안트에 오는 길에 사막에서 체력고갈로 퍼져 사실상 나한테 업혀서 여기까지 온건 놀라운것도 아니고, 엘린 숲에선 제 거처를 며칠만에 던전으로 만들어 들어갈때마다 식겁했었다. 돼지우리나 외양간에 비유할 수 없는거였어 그건."

"거, 거기서 그런 일이 있었나."

"연구에만 매진하려고 청소, 빨래를 모두 마법으로 처리하고 식사까지 수액으로 때우려는걸 보다못한 페어리 퀸이 직접 음식을 만들었다고 하면 믿어지나."

연구형 마법사들이 폐인과 가까운 행동양식을 보인다는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좀.

"그때 그놈은 인간이길 포기하기까지 앞으로 한 걸음, 같은 상태였다. 방구석 마법폐인이 따로 없었지."

친구한테까지 폐인이라 불리는건가 그는.

"나와 이런저런 얘기를 한 뒤로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걱정이 되는 놈이다."

"그래서 옆에 있는건가?"

"뭐 그것도 있고, 기왕이면 혼자보다 같이 여행하는게 즐거우니까."

요정 기사는 조용히 눈웃음을 그렸다. 꽤나 곱상한 얼굴이였음에도 딱딱하고 무거운 분위기때문에 살벌했던 인상은, 그것만으로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거기다 가끔씩 쟤가 현자가 맞나 싶을정도로 바보같은 실수를 저지르곤 해서 옆에서 보고 있으면 꽤 재밌거든."

"…… 무슨 뜻인지 알겠다."

확실히 좀 전의 일은 여러모로 굉장했지.

"그런데 그에 대한건 왜 물어본거냐."

"얼마 전에 거상 핫사르에게 하얀 마법사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사람이기도 했고, 아무튼 대답해줘서 고맙다."

"핫사르?"

"요즘 알 수 없는 몬스터들이 운송로에 나타나 상행을 방해하는 일이 잦다고 하더군. 직접 상대해보니 마치 죽은 것이 살아움직이는 듯한 기괴한 놈들이었다."

어째선지 내 말을 듣던 요정 기사의 얼굴이 굳어갔다.

"핫사르는 그 어둠의 몬스터들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는건 그뿐이라고 생각했고, 그를 거액에 고용하고자 나에게 의뢰했다.

"그는 고용되지 않을거다."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의뢰인지라 한 번이라도 좋으니 핫사르에게 찾아가달라고 부탁하려 한다."

요정 기사는 잠시 침묵하다 알았다고 답했다. 이걸로 반은 끝난건가.

"이제와서 묻는거다만, 당신의 이름은 뭐지."

"일단 그놈에게 검호라 불리고 있다."

"검호……?"

비꼬는 식이긴 하지만 기사라 불리는만큼 검을 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검을 들고있지는 않은─?

무의식적으로 그를 위아래로 쭉 흝어보자 그제서야 그가 검을 차고 있는걸 알았다. 양 허리에 차고있는 옷과 같은 붉은 색 쌍검. 손잡이 밑의 가드 부분이 보석까지 박힌 화려한 새 형상의 금장식이어서 도저히 실전용으로 보이지 않는 물건이었다. 좋게봐도 예식용, 심하면 멋모르는 귀족이 벽에 걸어둘법한 감상용같은 형태였다.

그 정도로 눈에 확 띄는 화려한 검임에도 불구하고, 방금 전에 그것의 존재를 알았다.

"쌍검을 쓰는건가?"

"썩 잘은 아니지만."

"'잘'이 아니라고?

무기와 한 몸이 된 것과 같은 수준의 전사에 대해선 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존했던건가. 무언가 더 말하려는 순간 밖에 나갔던 하얀 마법사가 막 방에 돌아왔다.

"용병 씨? 왜 여기 계신건가요?"

"당신에게 용건이 있어서 왔는데, 잠시 들어줄 수 있는가."

순간 하얀 마법사의 시선이 내 뒤에 있던 요정 기사, 검호에게 향했다. 무언가 소리없는 말같은게 오갔는지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얀 마법사는 알겠다고 답했다.

"용건이라면 무엇입니까?"

"내가 지금 하고있는 의뢰가 아닌 거상 핫사르에게 받은 의뢰에 대한거다."

앞서 했던 말을 다시 하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의 말을 다 들은 하얀 마법사는 '어둠의 몬스터를 처리하는건 그가 부탁한게 아니라도 내가 해야하는 것'이라고 말했고, 이번 일이 끝나는대로 핫사르에게 찾아가 보겠다고 한다.

대화가 끝난 뒤, 하얀 마법사와 검호 두 사람 모두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두운 분위기기 되서 용건도 끝났겠다 여기서 나갈까 생각하며 막 일어나려고 했을때, 방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하얀 마법사님과 요정 기사님 방 안에 계십니까?"

"아 예, 방에 있습니다."

"저녁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된건가. 하녀가 음식을 실은 수레를 밀며 방에 들어왔다.

"용병님도 여기 계셨습니까? 그럼 용병님의 음식도 여기로 가져올까요?"

"아니 나는 내 방에서─"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 저희와 같이 식사하시지 않겠습니까 용병 씨?"

잠깐만 어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보니, 부드럽게 웃으면서 권유하고 있지만 뭔가 거절하기 힘든 아우라가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검호side.

저녁 먹다가 체할뻔했네. 그나마 용병이 있어서 좀 풀린게 그 정도였다.

궁극의 빛을 추구할때의 하얀 마법사는 도가 지나친 연구에 매진했었다는걸 머리론 알고는 있지만, 그 여파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들은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멘, 언데드 몬스터.

지금은 그만두었다해도 과거의 잔재는 고스란히 남아있었던 것이다. 어둠의 몬스터를 다 처리하겠다고 한것도, 그것을 청산하기 위해서겠지. 꽤나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식사를 끝낸 후에도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되어 하얀 마법사는 용병과 우리의 시중을 맡은 - 보석방을 안내했던 그 - 하녀까지 불러다 네 명이서 카드 게임을 하자고 제안했다. 정말 그 답지않은 행동이지만 나와 둘이 남겨져 강제 묵언수행을 하는 것보다는 그게 낫다고 생각한거겠지.

"자 이제 패를 오픈합시다!"

…… 그 결과가 어째서 이 모양인지는 모르겠지만.

"스트레이트, 내가 이겼다."

"고작 그걸로 이겼다고 자만하시면 안되죠. 유감이지만 플러시입니다."

"두 분 모두 돈이나 내놓으시길 바랍니다. 풀 하우스니까요."

""어째서?!""

참고로 난 원 페어였다. 내 뽑기 운은 얼마나 바닥인거냐.

분명 레이븐이 오기 전까지 시간이나 보내자고 가볍게 시작한 포커였는데 왜 이렇게 된걸까. 포커라는 게임을 처음해보는 난 그렇다치더라도 저 하녀 너무 잘해! 벌써 5판 연속 승리를 가져가고 있는 하녀를 보며 나는 질린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전 카드 게임이라면 지지않으니까요."

1메소 단위의 베팅이긴 했지만 돈을 딴 사실자체에 기쁜지 하녀는 우후후 웃으며 노란 눈을 빛냈다. 반짝이는 노란색이 마치 그녀의 치마폭에 소복히 쌓여있는 메소의 광택과 같았다.

"후, 후후…… 빨리 카드나 섞읍시다."

"이번엔 지지않겠다."

작작해 이 양반들아! 현자와 베테랑 용병이 하녀에게 못이겨 열을 올리는 모양새는 당연하게도 좋지 않았다.

"이쯤하고 그만하지? 언제 레이븐이 나타날지 모르는─"

"까마귀따위 알 바 아니다!"

"지금 좀도둑이 문제입니까?!"

문제야! 왜 사람이 도박에 중독되는지 확실히 알게되었다. 주객이 완전히 전도됐어 저것들.

"아, 그러고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됬네요."

"뭐가 말입니까?"

"저는 여러분의 시중 말고도 해야하는 일이 있습니다. 게임은 여기까지 해야겠군요."

"한 판만 더 할 수 없나?"

"안됩니다. 늦으면 큰일나니까요."

하녀라는 직업도 고달프구나. 이 시간까지 일해야한다니. 두 남자는 어떻게든 한 판이라도 이기고싶은 기색이였지만 그래도 그녀를 더 붙잡지 않았다.

그녀가 나간이후, 두 사람을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뻐근한 몸을 움직였다.

"이렇게 진 적은 처음이네요."

"나름 이쪽 계통은 잘 한다고 생각했건만."

"둘 다 너무 열중했다는 생각 안드나."

"좀 몰입하긴 했죠. 간만에 만난 굉장한 상대였던지라."

하얀 마법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쭉 기지개를 폈다.

"그런데 오늘 레이븐이 오는게 확실한가."

"예고장에 쓰인 말을 해석하면 오늘이 맞습니다. '가장 어두운 달이 뜨는 밤, 푸른 눈물을 가져가겠다'였는데, 가장 어두운 달은 곧 삭월 - 오늘일 수 밖에 없죠."

그는 옷자락을 가볍게 턴 뒤 벽에 기대어두었던 지팡이를 듬으로 준비를 마쳤고, 용병 역시 대검을 뽑기 쉽도록 고쳐쥐었다.

보석이 있는 방으로 가는동안 하얀 마법사는 작전을 말했다.

"제가 그곳에 설치한 마법중에는 허용된 이가 아닌 사람이 들어갈 경우 구속 마법을 발동시키는 것이 있습니다. 일단 레이븐이 거기 접근하면 걸릴 수 밖에 없다는 말이죠."

"마법으로 변신해서 들어갈수도 있지 않나?"

"그러면 더 쉽게 걸릴겁니다. 그 방에선 변신 마법이 해제되도록 했으니까요."

내가 마법사는 아니지만 저것들을 한꺼번에 거는게 결코 쉬운일이 아니라는건 안다. 하얀 마법사가 빛 마법뿐만이 아니라 다른 계통의 마법까지 수준급이니 저런게 가능한거겠지.

"만약 함정들을 눈치채고 강제로 해제하려하면 경고음이 크게 울리도록 해놨으니 출입을 눈치 못 챌 수는 없─."

때르르르르릉──!!

저편에서 귀청이 떨어질만큼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그 요란한 소리에 우리는 순간 귀를 틀어막았다가 상황을 파악했다.

"…… 벌써 온 모양이군요. 갑시다."

나는 곧바로 하얀 마법사를 든 다음 - 얘 단거리 텔레포트보다 내 달리기가 더 빠르다 - 용병과 함께 복도를 주파했다.

함정들이 작동하고 있는지 섬광과 함께 폭음이 수 차례 울렸고, 막 보석의 방에 도착하자 그새 실내는 살풍경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한 사람이 널브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끄, 으으……."

"당신은?"

심하게 다치진 않았지만 여기저기 검댕이 묻고 옷도 그을린 이는 좀 전에 일이 있다고 나간 그 하녀였다.

"왜 여기 당신이 있는겁니까?"

"레이븐, 이. 보석을, 가져오라고…… 협박을."

그녀의 말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젠장 좋게봤더니 완전 쓰레기잖아.

"절대, 할 수…… 없다고, 거부했는데. 그럼 그…… 잘난 보석을 지키다 가라며, 디스펠을 써버렸…… 어요."

그녀가 함정의 범위에서 유일하게 제외된 푸른 눈물이 있는 곳에 쓰러져있던 이유인 모양이다. 하얀 마법사는 물론 용병도 굵게 인상을 썼다.

"레이븐은 어디갔지."

"사이렌에…… 도망쳤어요."

부서진 창문으로 찬 바람과 함께 희미한 달빛이 내려오고 있었다.

"설마 이름높은 괴도라는 사람이 협박을 할 줄 몰랐습니다. 제 실책입니다."

"아니요…… 어쨌든 보석은 무사, 하니까요."

"어느방향으로 도망쳤는지 보았나."

"폭발때문에 잘……."

하얀 마법사가 마법으로 하녀를 치료하는동안 나는 부서진 창문으로 밖을 보았다. 흔적이라도 남지 않았을까 했는데 깨끗하기 짝에 없었다.

"일단 고용주에게 가서 상황에 대해 얘기해야겠군."

"그게 좋겠군요. 일차적으로 보석은 지켜냈지만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 방비를 더 단단히 해야합니다."

"저택을 돌아봐야하나."

"난 나가서 레이븐의 흔적을 찾아보지."

역할이 갈렸다. 이어서 하녀는 소매로 뺨에 묻은 검댕을 닦아내며 말했다.

"전, 보석을 지키고 있을게요."

"다친 상태로 여기 있는건 안좋습니다. 거기다 당신 혼자로는 위험하고요."

"마법사님 덕에 거의 다 나았어요. 그리고 여러분이 나서주시는데 저라도 이런걸 해야죠."

어지간히 이 귀족가에 몸바치는 하녀인 모양이다. 그 아줌마한테 과분할만큼. 굳게 빛나는 하녀의 눈에 하얀 마법사는 망설이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흩어집시다. 이상한 것이 발견되면 즉시 알리세요."

알겠다는 대답이 동시에 울렸다. 하얀 마법사가 몇 차례 방호 마법을 다시 건 뒤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하녀의 안전이 걱정됬지만 늦으면 레이븐을 놓칠지도 모른다.

"이번 방어마법도 무슨 함정같이 설치한건 아니지?"

"사람 다친걸 봤는데 또 같은걸 쓰겠습니까. 그나저나 멀쩡한 사람을 화풀이로 다치게 하다니, 레이븐이란 작자 의외로 쓰레기였군요."

"이래나저래나 도둑에 불과하니까."

설마 팬텀도 저런식으로 물건 훔치는건 아니겠지. 아 중요한건 이게 아니고 레이븐을 잡느냐지만.

"제 마법을 이런 무식한 방식으로 파훼하다니, 그래도 귀족들것만 터는걸로 보아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걸로 보였었는데요."

"그 마법 대체 어떤식으로 작동하게 했기에 그 하녀에게까지 영향이 미친거냐."

"아까 말하지 않았습니까? 허가된 사람이 아니면 구속 마법 발동, 억지로 부수려고 해도 함정 발동 및 경고음이 울리게 했다고요. 덤으로 변신 해제 마법도."

…… 잠깐 뭔가 이상한데.

하녀는 레이븐이 디스펠을 써서 마법을 해제했기에 폭발이 일어났고, 함정의 영역에서 유일하게 벗어난 보석이 있는 자리로 도망쳐 겨우 무사할 수 있었다고 했다. 여기까진 맞다고 치자.

"그럼 앞서 있었던 허가받지 않은 사람이 들어가면 발동되도록 한 구속 마법과 변신 해제 마법은 왜 조용했던거지?"

"어……?"

수 초간 침묵이 이어졌다.

"─당장 방으로 돌아가세요 검호!!"

대답할 틈도 없이 나는 곧바로 하얀 마법사를 들고 바닥이 푹푹 패이도록 달렸고, 용병은 들고있던 대검을 보석이 있던 방을 향해 힘껏 집어던졌다. 쏘아지다시피 날아간 대검은 닫혀있던 문을 박살내고 건너편 벽까지 무너뜨렸다.

========== 작품 후기 ==========

부서진 창문쪽에 검은 인영이 서있었다.

"뭐야, 벌써 왔어?"

깃털처럼 윤기흐르는 검은 머리카락과 조류의 그것처럼 날카로운 노란 눈, 밤바람에 날개처럼 펄럭이는 새까만 망토를 걸친 이.

"좀 더 늦을 줄 알았는데 재미없네."

가벼운것 같으면서 낮은 남성의 목소리에 눈앞의 이가 누구인지 알았다.

"…… 정말 말도 안되는 변신 마법이군요."

"마법이라니? 그냥 화장일뿐이야. 이번엔 여자로 변장하는거라 꽤 신경쓰긴 했지만."

"하."

헛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숨을 내뱉으며 하얀 마법사는 여자 - 인줄 알았던 남자를 보았다. 좀 전까지 들었던 하녀의 목소리는 남성 특유의 저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망토로 북북 얼굴을 닦아 검댕과 함께 화장을 지우니, 장난스러우면서도 짓궃어보이는 남자가 달빛을 등지며 웃고있었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어디선가 봤던 것 같은데?

"이래서 샌님들은 안된다니까. 뭐만 하면 다 마법인 줄 알아."

"너 설마 아침의 그 소매치기인거냐."

"딩~동~댕~"

"잠깐 뭐라고요?"

반쯤 찍은건데 진짜였냐.

"환영 마법이 걸린걸 보고 마법사라는걸 확신했지. 그래서 뭐 좀 괜찮은거 가지고 있나해서 슬쩍했는데, 설마 그런 지독한 마법이 걸려있을 줄은 몰랐어."

"유치장에서 잘도 빠져나왔군요."

"그런 허술한 창살따위, 이몸에게는 없는거나 마찬가지지."

하얀 마법사의 그것보다 더 화려하면서 짧은 지팡이를 흔들어보인 남자는 금방이라도 뛰어내리려는지 한쪽 다리를 창틀에 올렸다. 동시에 치맛자락이 말려올라가며 하얀 가터벨트를 한 다리가 훤히 보였다.

"어차피 다 눈치챘겠지만 마지막으로 이 몸의 이름을 알려주지. 이 나의 이름은─"

"아리안트 핫게이?"

우당탕탕! 뭔가가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앞뒤 양 사이드에서.

"프, 하하하하! 아, 잠깐, 잠깐만! 아리안트 뭐요?! 검호 당신 진짜, 하하하……!"

옆에선 빵 터져버린 하얀 마법사가 내 등인지 어깨인지를 마구 두들기며 웃기 바빴고.

"……!…!……!"

뒤에선 용병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웃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노력이 무색하게 어깨춤이 아주 환상적이다.

"뭐라는거야 이자식이─!! 아리안트 핫게이는 또 뭐야?!"

그리고 앞에는 한 차례 미끄러지며 입고있던 하녀복의 치마가 깨진 창문에 걸려 쭉 찢어진 레이븐이 밤임에도 불구하고 다 보일만큼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화내고 있었다.

"미, 미안하다. 남자라는게 들켰는데 계속 하녀복을 입고있는게 신경쓰여서."

"옷 챙기려 했는데 니들이랑 포커치다 늦어서 어쩔 수 없이 계속 입고있는거라고!"

괴도라면서 왜 이런쪽에는 현실적인거냐.

"젠장 너 다음에 만나면 가만안둬! 오늘은 급하니까 이만 물러나지. '푸른 눈물'은 이 몸이 가져간다!"

"잠깐 거기서!"

"프흐, 놓치지 않겠습니다 아리안트 핫게이 씨!"

"그딴 이름으로 부르지말라고 허여멀건한 샌님 자식!"

도망치는 레이븐을 쫓아 하얀 마법사는 빛의 사슬을 쏘며 공중으로 떠올랐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보석 도둑맞으면 현상금 지운게 무효가 된단 말이야! 까마귀놈은 못 잡아도 보석은 뱉게 해야해!

(하얗게 불태웠다...)

앞서 30kb정도 쓴게 있었는데 내용이 마음에 안들어 갈아버리고 새로 쓰느라 늦었습니다. 오타라던가 하는건 넘어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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